환관의 요리사 292화 외전 80화
소년은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았다.
검기울어 가는 서녘 하늘에는 어스름달이 뿌연 빛무리를 흩뿌리고 있었다.
아직 무르익지 않은 밤. 묽은 어둠에는 얼룩처럼 황혼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소년은 먹물이 번지듯 물들어가는 하늘을 보며 한숨지었다.
오늘 밤은 편히 잠들기는 글렀군. 고민거리가 머리맡에 그득하게 쌓여 있으니.
소년은 음침한 웃음을 흘리고는 고뇌로 긴긴밤을 지새우며 끙끙 앓아야 할 동지들을 돌아보았다.
소년의 시선 끝에는 세상 모든 시름을 짊어진 듯한 근심 어린 얼굴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는 태감과 단혜림이 있었다.
‘더 아는 자는 더 불안한 법이지. 똑똑들 하셔서 피곤하시겠수.’
멍청한 놈은 이래서 편하지. 똑똑한 인간들이 열심히 궁리해서 답을 내놓으면 그걸 받아먹기만 하면 되거든.
소년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고는 화로의 잉걸불에 올려두었던 주전자 뚜껑을 열었다.
주전자는 이미 주둥이에서 허연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이쿠야, 너무 끓었구만.
소년은 주전자를 불에서 내린 다음, 김 식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는 벽돌 모양으로 단단하게 압착 한 보이차를 조금 떼어내 따끈한 차를 우려냈다.
물기 어린 이끼, 낙엽이 퇴적된 젖은 땅의 흙내음을 연상시키는 은은한 향기가 피어오르자 고뇌에 지친 이들의 그늘진 눈이 소년에게로 향했다.
소년은 투박한 잔에 차를 따라 상에 올리며 말했다.
“거참, 이부상서께서 골치 아픈 숙제를 내주셨습니다그려.”
세상에, 후궁을 양분하던 두 권력자가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하는데도 답이 안 나오다니.
후후 불어가며 차를 홀짝거리던 태감은 쓰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주 고약한 숙제지. 대충 구겨서 서랍 속에 박아 둘 수 없다는 점이 특히 고약해.”
“함정이라 생각하고 무시하면 속은 편하겠지만, 분명 훗날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요?”
“그렇다고 덜컥 받아들이기도 겁나지. 이부상서의 충성 맹세라니.”
“얄밉게도, 명분은 또 그럴듯하단 말이지요.”
그간 나라의 녹을 먹는 자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고 방자한 태도로 나라를 어지럽혔으니, 늦게나마 그간 방임해 두었던 의무를 다하고자 한다.
암시장과 결탁한 추잡하고 후안무치한 자들을 시작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들을 척결하는 데 이 한 몸 바치고자 하니, 부디 황제 폐하께 노신의 충정을 전하여 주시오.
참, 말은 번드르르합니다만…….
소년은 이부상서의 제안을 곱씹어보고는 진저리가 난다는 듯 몸을 떨었다.
“거기에, 그 충성의 대가로 요구하는 것이 또 기가 막히지요.”
“정1품의 상서령(尙書令). 육부의 수장인 이부상서가 유일하게 오르지 못한 자리이니, 탐내는 것도 이해 못 할 것은 없지.”
상서령.
그 권한이 실로 막강하여 긴 제국의 역사 속에서도 일반 관리에게 제수된 사례를 찾기 힘든 관직을 입에 담으며, 소년은 투덜거리듯 말했다.
“어디까지나 가정입니다만, 태감님. 만약에, 이부상서께서 그 자리에 앉으신다면.”
“동창 제독이 황제 폐하의 음지의 눈과 귀라면, 상서령은 폐하의 양지의 눈과 귀라 할 수 있는 자리다. 문관들을 통솔하고 관리들의 뜻을 취합하여 폐하께 올리는 자리이니.”
“그렇다면…….”
“글쎄, 아마 지금보다 자주 얼굴을 보며 살아야겠지?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서로 공생관계가 된단 말씀이시군요. 서로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힘을 합쳐야 하는.
소년은 그제야 이부상서의 계획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백성들을 착취하여 제 배를 불리던 부패한 탐관오리들을, 제 수족들을 모조리 끊어서라도 더 큰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으면 남는 장사 아니겠는가.
거기에, 황제 폐하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어 숙청의 위협에서도 벗어날 수 있으니.
소년은 이부상서와 함께 둘러앉아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차를 마시는 날을 상상해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고개를 틀던 소년의 눈에 고심에 빠져 있는 단혜림의 얼굴이 들어왔다.
만약, 그리된다면. 분명 매일이 고단할 것이다.
보다 높은 자리에 앉은 이부상서의 독단 전횡을 견제해야 할 테니, 분명 피 말리는 나날을 보내야 할 테지. 그렇지만.
‘이부상서를 숙청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이 생긴다면.’
단 호위님. 당신의 손에 혈육의 피를 묻히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렇다면 분명…….
* * *
결국, 결정은 황제 폐하께서 하실 일이니. 이곳에서 왈가왈부해 봐야 무의미하고 무익한 일이 아닌가.
태감은 합리적인 제안으로 단혜림과 아이들을 이부자리로 등 떠밀어 보냈다.
그러고는 한껏 처량한 표정으로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손에는 싸늘하게 식은 잡탕밥을 든 채.
“데워드릴까요? 아니면 새로 만들어 드릴까요.”
“데운 것을 먹는 동안 새로 만들어다오.”
태감의 깊은 지혜에 탄복한 소년은 혀를 내두르며 잡탕밥을 그릇째 찜통에 넣고 데웠다. 그리고는 곧바로 새로운 잡탕밥 제조에 들어갔다.
태감은 고기와 새우를 넉넉하게 넣어달라는 주문을 남긴 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잡탕밥으로 시선을 옮겼다.
식은 것을 한번 데웠음에도 잡탕밥은 변함없는 매력을 과시하며 태감의 식욕을 자극하고 있었다.
걸쭉한 양념, 온갖 맛좋은 건더기들. 그리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밥.
태감은 그 이상 자신의 허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사납게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곧이어, 태감의 선홍빛 뺨이 빵빵하게 부풀어 올랐다.
양 볼을 가득 채우는 충족감. 어금니를 타고 전해지는 관능적인 식감을 느끼며, 태감은 빗장뼈 안쪽 깊숙한 곳에 응어리졌던 근심과 걱정이 어린아이가 쌓은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쫀득쫀득 차진 전복과 매끈한 해삼, 포동포동한 새우, 오돌오돌한 석이버섯과 육고기처럼 잘근잘근 씹히는 능이, 탱글탱글한 상어 지느러미.
혀 위에서 통통 튀며 잇몸을 간지럽히고 어금니를 희롱하는 온갖 식감.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로 포용하는 걸쭉하고 농후한 감칠맛.
극상의 탕을 조린 양념의 감칠맛엔 혀가 저릴 지경이었다.
그 짙은 양념을 흠뻑 빨아들인 쌀밥은.
태감은 그 묵직한 감칠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등허리를 기어오르는 전율을 느꼈다.
아침 점심 저녁, 정기적으로 먹는 세끼의 식사에선 느낄 수 없는. 오직 파르스름한 달빛 아래서만 느낄 수 있는 배덕의 희열.
늦은 밤 맛이 진하고 기름진 음식을 먹는다는 그 부도덕한 행위는 뱃속과 함께 일탈에 굶주려 있던 영혼도 함께 채워주었다.
그 순간, 태감의 식탁 위로 두 번째 잡탕밥이 올라왔다. 그의 주문대로 버섯보다는 해물이, 해물보다는 고기가 듬뿍 들어간 잡탕밥이.
건더기로는 가늘게 채 썬 사슴고기와 꿩고기가 담뿍 들어간 잡탕밥은 전과는 조금 다른 향기로 갈아입고선 태감을 유혹했다.
허겁지겁 두 번째 잡탕밥을 입안에 쓸어 담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요리사로서 만족감을 느꼈다.
저리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있으니, 요리사로서 이보다 큰 보람이 또 어디 있을까.
그리고 소년은 배려심 깊게도, 기름진 야식 후 입을 개운하게 할 만한 후식 또한 준비해 두고 있었다.
성에 찰 때까지 양껏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길 수 있는, 이부상서라는 후식을.
소년은 태감이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더운 숨을 몰아쉬는 것을 보고는 악동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단 호위님도 가셨으니, 이부상서 뒷담화나 한번 까볼까요?”
“이미 실컷 씹고 뜯고 하지 않았느냐? 아직도 더 씹을 것이 남아 있다고?”
“어허, 무슨 섭섭한 말씀을. 씹었다니요. 단 호위님 눈치 보느라 말도 제대로 못 했구만.”
그게 조절한 거였다고?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보는 태감에게 소년은 뻔뻔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만하면 조절한 거지요, 원래 제대로 씹으려면 일단…….”
자신의 화려한 어휘력을 자랑하고 싶어 안달 난 소년을 보며 태감은 떨떠름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굳이 밥 잘 먹고 귀를 더럽힐 필요는 없을 테니.
소년은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태감의 요구에 따라 화려한 미사여구가 덧붙여지지 않은 담백한 말들을 꺼내놓았다.
“그래서, 태감께선 어찌 생각하십니까.”
“이부상서의 제안 말이냐.”
“이부상서가 품고 있을 꿍꿍이는 잠시 차치해 두고, 순수하게 이부상서의 협력을 얻었을 때 저희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어느 정도가 되겠습니까?”
고민하던 태감은 땀에 젖어 목덜미에 달라붙는 머리칼을 쓸어 만지고는 답을 내놓았다.
“우선은, 제국의 중추부터 말단부까지 틀어박혀 있는 탐관오리들을 점진적으로 척결한다는 황제 폐하의 계획을, 족히 십 년은 앞당길 수 있겠구나.”
“십 년입니까?”
“그래. 그리고 본래부터 문관 귀족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자인 만큼 앞으로 폐하께서 뜻을 펼치실 때도 큰 도움이 될 테지.”
확실히, 독이 들었을지 모른다고 하여 그냥 내치기에는 아까운 기회지. 하나…….
이부상서와 연대할 경우의 이득을 열거하며 태감은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태감을 보며 몇 마디 거들던 소년은 길고 가늘게 숨을 내쉬고는 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덜컥 삼키기엔 무섭고 모른 척 무시하기는 아쉬우니, 이득과 손해로 결정할 수 없다면 다른 것을 따져 봐야지요.”
“호오, 손익 외에 다른 판단 기준이 있느냐?”
“있지요. 사실, 손익을 따지기 전에 먼저 따져야 하지만, 세상살이가 고달프다 보니 자주 무시하게 되는 판단 기준이 있지요.”
태감, 이부상서와 손을 잡는 것은. 바른 일입니까. 그른 일입니까.
소년의 말에 배부른 고양이처럼 의자에 늘어져 있던 태감은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 넘친 듯한 신음을 흘리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바른 일만을 하면서는 정치를 할 수 없다. 때론 사리에 맞지 않고 잘못된 일, 그릇된 일이라도 이득이 된다면 해야 하는 것이 정치라고. 그리 말하지 않았느냐?
태감은 혼란에 젖은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째서 소년이 그 말을 꺼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소년이 답을 원했기에 태감은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이부상서와 손을 잡는다면. 그래, 그의 허물을 덮어줘야 할 테지. 그가 쌓아온 업보, 그가 마셔온 핏값. 그것들을 지워줘야만 한다. 그를 숙청할 수 없게 되지. 그의 목을 장대에 걸어, 만백성에게 죄지은 자는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황실의 지엄한 법도를 보여줄 수 없게 돼.”
“벌할 수 없습니까.”
“그래, 벌할 수 없다. 상서령은 죄를 알면서도 품을 수밖에 없는 자리야. 그렇기에 지금껏 공석으로 남겨두었던 게지, 황제 폐하와 가장 가까운 자린 정1품의 자리이니, 만약 그를 벌하게 된다면.”
“암중에 묻혀 있어야 할, 황실의 비밀이 세상에 공개될지도 모르지요. 뒤가 없는 이는 무슨 짓을 벌일지 모르는 법이니.”
하지만, 죄지은 자를 벌하지 않고 품에 안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바르지 못한 일이야. 그릇된 일이다.
태감은 은연중 자신이 이부상서와 손잡는 일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지금껏 읊어왔던 대로, 그것이 그릇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릇된 일이다.”
“예, 그릇된 일이지요.”
“그릇됨을 알았다면 하지 않아야 하지.”
“하지만, 바른 일만을 할 수 없는 것이 정치 아니겠습니까.”
태감께서 그리 말씀하셨지요.
태감은 자신이 했던 말을 입에 담는 소년을 보며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바르지 않은 일이라 해도, 그릇된 일이라 해도. 해야 하는 이유가 있느냐.”
“태감. 아시겠지만 이놈은 평생 칼 한 자루 쥐고 살아온 무식한 놈입니다. 그래서 이놈은 신상필벌의 엄정함도, 치도의 법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 무식한 놈이 나이를 공으로만은 먹지 않아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인륜의 법 하나만큼은 간신히 알겠더군요.
소년은 그 말을 끝으로 배시시 웃음 지었다.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을 들이마신 채 내쉬지는 못하고 소년의 말을 듣던 태감은 소년이 웃음 짓고 나서야 숨을 내쉴 수 있었다.
잠시 후, 태감은 달싹거리던 입술을 힘겹게 비집어 열었다.
“현실적으로, 당장 이부상서를 끌어내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실각시키는 데는 많은 시간과 많은 돈, 그리고. 많은 피가 필요하겠지요.”
“그 시간과 그 돈과 그 피를 아낄 수 있다면. 다른 일로 돌릴 수 있다면. 더 값어치 있는 일에 쓸 수 있다면.”
“그리해야지요.”
그리고, 단 호위를 생각해서라도. 그리하는 것이 옳다.
말을 끝맺은 태감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물론, 결정은 폐하께서 하실 일이지만.”
“하지만 폐하께서 쉬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고 갈등하신다면.”
태감은 힘겹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두 마디 정도, 옳고 그른 것에 관하여 첨언할 수는 있겠지.”
태감은 다시 한번 고개를 까딱하고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깍지를 끼고 손을 쭉 뻗는 그의 어깨너머로는 손톱만 한 조각달이 걸려 있었다.
“결정은 폐하께서 하실 일이니, 우선 실무진이 해야 할 일은 끝났군요. 그럼 이제…….”
“쉴 시간 없다. 다음 일을 준비해야지. 서방으로 갈 일정이 코앞으로 다가왔는데.”
“그래도, 배에 기름칠할 시간 정도는 있지 않겠습니까?”
소년의 앓는 소리에 태감의 얼굴엔 근엄한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기름칠할 시간은 언제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