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91화 외전 79화
밀실정치.
정치인들은 바깥에서는 듣기 좋고 말하기도 좋은 바른말만을 하고, 서로의 이익을 위해 나랏일을 도모하거나 정적을 고꾸라뜨리기 위해 권모술수를 꾸밀 때는 반드시 은밀하고 밀폐되어 있는 밀실에서만 이야기를 나눈다.
사람들은 이러한 정치인들의 속성을 꼬집어 밀실정치라 부른다.
그리고 이 밀실정치의 장소로 가장 자주 애용되는 곳이 바로 요릿집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정치인들이 비밀스럽게 야합하는 장소라 하면 대부분은 옆구리에 기녀를 끼고 거들먹거릴 수 있는 기루나, 향기로운 차 향기가 물씬 배어든 멋스러운 다실을 떠올리겠지만, 애석하게도 기루와 다실은 밀실정치의 장소로 이용되기에는 부적합한 결격사유가 있었다.
“기루는 기녀라는 눈과 귀가 있어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부적절하지. 그래서 이제 막 정치판에 발을 들인 풋내기라면 모를까, 정치판의 해묵은 먼지가 어깨에 쌓인 이들은 진짜 중요한 이야기는 기루에서 풀어놓지 않아.”
“그리고 다실은, 가벼운 담소를 나누기에는 좋지만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좋지 않지요.”
“그래. 차는 긴 이야기를 나눌 핑계로 삼기는 어렵지. 다실에서 차 한 잔 시켜놓고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면 작당 모의를 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기 쉬우니.”
그러니 밀담을 나누기에는 요릿집이 안성맞춤이지.
소년은 정치가로서의 관록이 묻어나는 태감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며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맞장구쳤다.
“그렇지요. 요릿집이 제격이지요. 식사를 핑계로 오랜 시간 밀담을 나누기도 좋고, 식사하는 장소로 독실을 잡으면 기밀성과 은밀성도 보장이 되지요.”
“그리고, 식사에 반주가 빠질 수 있나. 술이 조금 들어가면 날카롭고 음험하던 분위기도 부드러워지는 효과가 있지.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요릿집을 통째로 빌릴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 같은데.
태감의 말에 소년은 오늘 회담을 위해 거금을 들여 대여한 삼 층 규모의 식당을 둘러보고는 껄껄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어쩔 수 없지요. 귀하신 분을 대접하는 자리이니, 그만큼 성의를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점심 한 끼를 먹는데 금 석전을 내야 한다는 정흥관(正興館)을 통째로 빌리는 것은, 좀 과하지 않느냐?”
“허허. 어차피 제 돈 쓰는 것도 아닌데, 아낄 필요 있습니까.”
뻔뻔하기 그지없는 소년의 낯짝을 보며 태감은 실소를 흘렸다.
허허, 이 녀석. 남의 돈이라고 아주 물 쓰듯 쓰는구나.
“제가 이럴 때가 아니면 또 언제 태감님 주머니를 털어보겠습니까.”
“허어, 남의 돈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것을 보니, 역시 넌 탐관오리의 자질이 있어.”
“제가 누굴 보고 배웠겠습니까.”
가볍고 날카로운 한마디로 태감의 폐부를 찌른 후, 소년은 힘껏 기지개를 켜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오의 끝자락에서 우물쭈물하던 태양이 서서히 지평선을 향해 미끄러지고 있었다.
황혼이 드리우기만을 기다리는 하늘은 붉은 옷으로 새 단장을 할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소년은 입가를 매만져 입꼬리에 걸려 있는 웃음기를 거두고는 태감을 바라보았다.
태감은 어느새 품속에서 가면을 꺼내 들고 있었다.
“곧 저녁이군요.”
“그래, 이부상서가 올 시간이구나.”
태감은 꺼내든 가면을 얼굴로 가져가고는 무겁게 숨을 몰아쉬었다.
고정할 끈도 띠도 없었지만 가면은 마치 피부에 달라붙기라도 하듯 태감의 얼굴 반쪽을 가렸다.
가면을 쓴 태감은 건조한 어조로 소년에게 말했다.
“그만 가보거라, 이부상서가 오기 전에.”
정치가의 그늘이 드리운 태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소년은 깊게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 * *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 위에선 대나무 꼬치에 꿴 해삼이 검게 그을리고 있었다.
숯불에 익으며 통통하게 부풀어 오른 해삼의 껍질은 딱딱하게 마르며 쩍쩍 갈라져 회색빛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년은 다 구워진 해삼을 미지근한 물에 담그고는 해삼의 연한 속살이 으깨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껍질을 벗겨냈다.
“해삼의 껍질을 벗겨내면 이런 모양이 되는군.”
“보기 좋지는 않지요?”
그래도 맛은 좋습니다.
소년은 껍질을 다 벗겨낸 해삼을 손바닥 위에 올려 단혜림에게 보여주었다.
연한 회색빛 도는 길쭉한 원통형의 무언가.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껍질 깐 해삼의 자태는 빈말로라도 보기 좋다 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단혜림은 흥미롭다는 듯 해삼을 자세히 관찰해 보고는 심지어 입맛을 다시기까지 했다.
“그냥 먹어도 부드럽고 쫀득한 해삼을 숯불에 구워 껍질을 벗기기까지 했으니, 분명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 별미가 될 테지. 완성된 요리가 기대되지만…….”
“허허, 해삼은 넉넉하게 준비해 왔습니다. 드시고 싶으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내 몫도 있는가?”
“그야 물론이지요. 원하신다면 오늘부터 일주일간 세끼 모두 해삼으로 드셔도 될 만큼 있습니다.”
아무리 해삼이 좋아도, 그건 사양하고 싶군.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젓는 단혜림을 뒤로한 채 소년은 본격적으로 해삼 요리에 열중했다.
껍질을 벗긴 해삼은 면보로 물기를 제거한 다음 속에 밀가루를 바르고, 곱게 다져 돼지기름과 생강을 넣어 치댄 찰진 새우살 반죽을 채운 다음 기름에 살짝 튀겨낸다.
그다음으로는 철과에 돼지기름을 넉넉하게 두르고, 간장과 굴 소스, 파와 설탕, 그리고 달착지근한 맛이 도는 찹쌀술을 넣어 양념을 만든다.
뭉근한 불에 끓으며 걸쭉해진 양념에 튀겨둔 해삼을 넣던 소년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단혜림을 바라보았다.
“단 호위님. 혹시.”
“하실 말씀 있으신가.”
“크흠, 예. 그것이.”
“혹시 은퇴 권고라면, 그냥 넣어두시게.”
소년은 마치 명치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허리를 숙이고는 연달아 기침했다.
그리고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단혜림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듯이.
그에 단혜림은 빙긋 웃으며 답을 알려주었다.
“전하께선 마음이 약한 분이시니, 슬슬 말씀하실 때가 되었다 생각했네.”
“단 호위님.”
“하실 말씀이 남은 것은 아네만, 내 답 먼저 들려드리지. 이제 와 발 뺄 생각은 없네.”
내 할 말은 다 끝났으니,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시게.
소년은 손을 멈춘 채 단혜림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들이치는 황혼의 빛이 그녀의 얼굴에 너울처럼 드리우고 있었다.
그 따스한 빛무리 속에서 여인은 작게 미소 짓고 있었다. 소년은 무언가가 왈칵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동정호에서, 먼저 말씀을 드렸어야 했는데, 이놈이 미욱하고 아둔하여, 그만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소년은 아랫입술을 짓씹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춘부장께, 깨끗한 최후를 드리지 못할 것 같습니다.”
도저히, 공으로 죄를 덮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저 상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권력을 내려놓는 정도로 끝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떠듬거리며 말하던 소년은 차마 단혜림의 얼굴을 직시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몸서리칠 만큼 끔찍하고 잔인무도한,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딸 앞에서. 아비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말들을 입에 담으면서도, 소년은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이 태감이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에, 태감이 책임을 지기 전에 먼저 선수 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이부상서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 태감을 떠올리며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이미, 넘치도록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부디.”
“여기까지만 하란 말인가.”
“이미 알고 계시고, 또 각오하셨겠지요. 하지만…….”
“순화하려 애쓸 필요 없네. 패륜이지.”
그 차가운 말에 소년은 진저리쳤다.
좁은 어깨를 떠는 소년을 물끄러미 보던 단혜림은 뒷짐을 지고 있었던 팔을 풀어 소년의 어깨에 얹었다.
그러고는 가만히, 떨림이 잦아들도록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동정호에서, 기억하는가?”
“그날 밤,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때 묻지 않았나. 이부상서에 관하여.”
“그랬었지요.”
소년은 그날 밤을 떠올리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녀는 자신의 아버지를 이렇게 평가했다.
폐하의 치세를 방해하는 장애물. 또는 권력욕에 미쳐 나라를 어지럽히고 황실의 권위를 능멸한 적신(賊臣)이며.
“나라를 망하게 할 망국신(亡國臣). 그리 말했었지.”
단혜림은 가늘게 숨을 몰아쉬고는 소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아직도, 내 뜻은 변함이 없네.”
“하지만, 그 짐을 단 호위님께서 지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태감께서 지실 필요도 없지 않은가.”
전하께서 지실 필요도 없지.
하지만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할 일이야.
단혜림은 말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주방 밖에선 작은 발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통통 튀는 듯한, 경쾌한 발소리.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이 오는군.”
아이들에게 그런 얼굴을 보여줄 셈인가.
말없이 단혜림을 바라보던 소년은 찢어진 입가를 소매로 훔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요.”
“오실 거면, 술 한 병 들고 찾아오시게. 방문은 열어둘 테니.”
단혜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방 문이 벌컥 열리며 아이들이 들이닥쳤다.
숨이 막히는지 헉헉거리며 횡설수설하는 아이들을 향해, 소년은 큼직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손님이 오셨느냐?”
* * *
냉채 요리 삼품을 시작으로 하나둘 요리가 나가고, 마지막으로 해삼 요리가 나가고 나자 주방에는 작은 평온이 찾아왔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짜증스럽게 훔치던 소년은 후끈 달아오른 더위를 식히기 위해 개수대에 받아놓은 물에 첨벙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고는 폭발적인 물보라를 튀기며 고개를 쳐들었다.
“후우, 이제 좀 살겠네.”
물을 뚝뚝 흘리는 소년에게 아이들이 수건을 가져왔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수건을 받아든 소년은 물기를 대충 털어내고는 젖은 수건을 목에 걸친 채 아궁이 앞에 섰다.
“어디, 남은 재료가 이것저것 있으니, 대충 볶아서 잡탕밥이나 만들어 먹어야겠군.”
“잡탕밥이요?”
“그래, 이렇게 재료가 찔끔찔끔 남아 있을 때는 잡탕밥이 최고지.”
잡탕밥.
그 이름 탓에 저렴한 빈자의 식사로 오해하기 쉽지만, 중국집의 차림표를 보면 잡탕밥이 의외로 고급 음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들어가는 재료만 해도 오징어와 새우, 전복, 해삼 등의 해물에 표고버섯과 목이버섯, 온갖 채소를 달달 볶아 굴 소스로 간하여 녹말로 걸쭉하게 만들었으니 어찌 값이 저렴할 수 있을까.
거기에 지금 주방에 남은 재료는 이부상서라는 정계의 거물을 대접하기 위해 제국 각지에서 긁어 모아온 사치스러운 식재료들.
분명 그 어떤 중화 요릿집에서도 맛볼 수 없는 최고급 잡탕이 될 것임이 분명했다.
“어디 보자, 재료로는 전복에 새우, 쓰고 남은 사슴고기에 비둘기 알, 해삼은 왕창 있으니까 듬뿍듬뿍 넣어야지. 그리고 능이버섯에 달걀버섯, 석이버섯도 넣고, 육수는 어디. 불도장이 남았으니 불도장 국물을 쓰면 되겠군. 조리고 남은 상어지느러미도 좀 넣어볼까.”
“세상에, 이렇게 호사스러운 잡탕이 어디 있나?”
“허허, 이게 또 주방 부엌데기들의 소소한 즐거움이지요.”
전복과 해삼은 씹기 좋도록 얇게, 능이버섯과 달걀버섯은 결대로 찢고 석이버섯은 굵게 채 친다.
메추리 알보다 더 작고, 노른자 맛은 더 진한 비둘기 알은 반숙이 되도록 살짝 삶아 껍질을 까서 준비하고, 상어지느러미는 볶으면서 풀어질 테니 덩어리째 그대로.
대충 재료 손질을 끝낸 소년은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는 철과를 뜨겁게 달궈 비둘기 알을 제외한 나머지 재료를 한꺼번에 쏟아 넣었다.
“이렇게 한 번에 넣어 익혀도 돼요?”
“그럼, 되고말고. 사슴고기나 상어지느러미를 빼면 오래 익혀야 하는 재료가 없잖니? 전복이나 새우, 해삼은 오래 익히면 질겨지니 센 불에 빠르게 익혀내는 게 중요하고, 버섯도 센 불에 튀기듯 익혀야 맛있는 즙이 빠져나오지 않지. 사슴고기나 상어지느러미는 이미 한번 익힌 거니까…….”
“한꺼번에 넣어도 요리해도 되는 거구나. 비둘기 알만 마지막에 넣으면 되죠?”
“그렇지, 어이구 요 녀석들,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안다니까.”
소년은 양손으로 각기 다른 일을 하는 신기를 발휘하여 오른손으로는 요리를, 왼손으로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 이제 전복이 오그라들기 시작하고 새우가 빨갛게 익으면, 불도장 국물을 자작하게 넣은 다음 센 불에 졸여주다가 간을 맞춰주고, 마지막으로 물전분을 타 걸쭉하게 농도를 맞춰준 다음.”
참기름 한 바퀴를 둘러 향을 내주고, 그대로 밥에 올려 내면 완성이란다.
소년은 넓적한 접시를 꺼내 수북하게 밥을 담고는 그 위에 걸쭉하게 완성된 잡탕을 넉넉하게 올렸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먹음직스러운 잡탕밥 사 인분.
아이들과 단혜림에게 잡탕밥을 들여준 소년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접시를 손에 들려는 순간.
“내건 없느냐?”
불쑥 쳐들어온 태감의 얼굴을 본 순간 소년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아니, 이젠 일꾼들 밥까지 뺏어 먹으려고?
“태감님, 조금 전까지 이부상서와 식사를…….”
“네 말대로더구나, 역시 좋은 것은 나누는 것이 아니었는데.”
“거 보십쇼, 좋은 건 혼자 독차지해야 한다니까.”
소년은 피식 실소를 흘리고는 자신의 접시를 태감에게 내밀었다.
핼쑥한 얼굴로 접시를 받아든 태감은 연거푸 찬물을 두잔 들이켜고는 우악스러운 자세로 숟가락을 치켜들었다.
당장에라도 잡탕밥을 쓸어 담을 듯한 태감을 보며 소년이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밀담 말이냐?”
“그렇게 정성껏 대접했으니, 뭔가 성과가 있으셨겠지요?”
“성과. 그래. 있기는 했지.”
태감은 침울한 표정으로 접시를 내려놓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