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90화 외전 78화
“확실히, 그보다 수완 좋은 길잡이도 없을 테지.”
“책임감 있고, 모랫길에도 익숙하며, 사막의 여러 부족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군요.”
모래땅의 사람들은 거칠고 강인하며 배타적이지만, 한번 우정을 나눈 이에게는 제 뱃속에 든 것도 서슴없이 꺼내줄 정도로 신의가 두텁다 하니, 여행길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소년의 자신만만한 말에 태감은 떨떠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래, 여행의 안전은 물론 편의까지 보장해 줄 수 있는 길잡이는 흔치 않지. 다만…….”
“수완만 좋다면 신분, 성별, 나이는 따지지 않겠다 하신 것은 태감님이십니다.”
변명이 궁해진 태감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거북함을 표정으로 드러내기는 했지만, 그 이상 표자승의 길잡이 자격 여부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뱉은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정치가에게는 기대하기 어려운 덕목을 지키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놀라움을 느꼈다.
세상에, 제 한 말을 지키는 정치가를 보게 될 줄이야.
킬킬거리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쓴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아무튼, 이제 길잡이도 구했으니, 남은 것은 이부상서와의 일을 매듭짓는 것뿐이구나.”
그 준비는, 잘 되고 있느냐.
태감의 질문에 소년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접대 준비 말씀이시라면, 예. 태감님께서 주문하신 대로 황금을 물 쓰듯이 써서 호사스럽게 준비해 두었습니다.”
거참, 뭐가 예쁘다고 대접씩이나……. 멀건 차나 한잔 내놓으면 될 것을.
입술을 댓 발 내밀고는 못마땅하다는 듯 툴툴거리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타이르는 듯한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먼 길 오신 손님에 대한 성의 표시는 해야 할 것 아니냐.”
“찻잔에 독을 타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성의를 다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이부상서와의 오랜 관계를 고려한다면 독이 아니라 칼을 내놓고 싶지만…….
뾰료통한 얼굴로 피비린내 물씬 풍기는 음험한 말을 중얼거리던 소년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싱겁게 태감의 말에 긍정했다.
“물론,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입니다. 예, 접대를 소홀히 할 수는 없지요. 정적이라 하여 대접을 소홀히 하는 것은 곧 스스로가 도량이 좁고 옹졸한 자라는 것을 상대에게 드러내는 일이니.”
“상대보다 하수임을 인정하는 꼴이지.”
“급이 낮은 자의 말을 귀담아듣는 정치가는 없지요.”
어쩔 수 없군요. 내키지는 않지만, 성심성의껏 대접을 하는 수밖에.
소년의 말에 태감은 한껏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군침을 꼴깍 삼키는 태감을 보며 소년이 피식 실소를 흘렸다.
“그래서, 어떤 요리로 상을 차릴 생각이냐?”
“제사보다는 제삿밥에 관심이 더 많으시군요.”
아무래도 귀한 손님 대접하는 요리다 보니 진귀함과 화려함에만 초점을 둬, 맛은 기대에 못 미칠지도 모릅니다만.
소년은 미적지근한 태도로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은 격식에 맞게 화기가 강한 구이나 튀김보다는 찜이나 탕, 조림 유로 상을 준비할까 합니다. 재료 역시 흔한 돼지고기나 양고기, 닭고기 대신…….”
“돼지고기와 양고기는 곰고기와 사슴고기로, 닭고기는 꿩고기로 준비했단 말이구나. 황실의 법도를 따랐군.”
“전 개인적으로 곰고기보다는 돼지고기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만, 높으신 분들 입맛은 좀 다른가 봅니다.”
“나도 곰보다는 돼지가 더 좋고, 사슴보다는 양고기가 더 좋다.”
하여간, 입맛이 저렴하시니 모시기 편해 좋습니다그려.
소년은 작게 키득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냉채로는 사슴의 사태 살을 오향분과 간장으로 삶아 식힌 오향녹육(五香鹿肉)과 메추리알, 꿩의 가슴살, 비둘기와 삭힌 오리알로 만드는 봉황병반(鳳凰拼盤), 술에 찐 전복과 데친 상어의 연골, 소금에 절인 굴과 겨자로 무친 해파리로 만드는 해선냉채(海鲜冷菜)의 삼품을 준비하였고…….”
냉채 요리 삼품을 시작으로 소년의 입에선 온갖 진귀한 요리가 끝도 없이 읊어졌다.
바다 생선의 왕이라 불리는 석반어를 쪄낸 청증석반어(淸蒸石斑魚)를 시작으로 조개 육수에 익혀낸 상어지느러미요리 조암어시(祖庵魚翅), 식방각주를 무릎 꿇리고 상호 오운의 명성을 한껏 드높였던 불도장(佛跳墻), 큰 조기의 뱃속에 맛이 짙고 시원한 육수를 채워 기름에 지져낸 관탕황어(灌湯黃魚), 꿀을 한껏 머금은 곰발바닥을 달착지근한 양념에 조려낸 홍소웅장(紅燒熊掌). 그리고…….
“해삼 요리로는 하자대오삼(蝦子大烏參)을 올릴 생각입니다.”
“하자대오삼이라? 들어본 적 없는 요리인데…….”
하자대오삼은 1883년에 문을 연 전통 상해 요리 전문점, 덕흥관(德興館)에서 개발된 요리로 중국의 수많은 해삼 요리 중에서도 첫손에 꼽힐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하자대오삼은 그 만드는 법이 보통의 해삼 요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보통 해삼 요리는 해삼의 오돌토돌한 돌기를 최대한 살려 요리하지만, 하자대오삼은 해삼의 돌기를 싹 제거하지요.”
해삼이란 본래 돌기가 얼마나 선명한가, 모양이 얼마나 잘 살아 있는지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식재료였다.
그런 만큼 대부분의 요리사는 조리 중 돌기가 뭉개지지 않도록 공을 들여 요리하지만, 덕흥관의 요리사들은 해삼을 숯불에 구워 껍질과 돌기를 제거하고 속살만을 요리한다는 과감한 발상을 떠올렸다.
“해삼을 숯불에 구우면 겉 부분이 마르며 딱딱하게 굳지요. 이것을 물에 담그면 껍질이 흐늘흐늘하게 찢어지며 안쪽의 매끈한 속살이 드러나는데, 이렇게 조리한 해삼은 혀에 닿는 촉감은 부드러우면서도 씹으면 쫀득하지요.”
“껍질을 벗겨 요리한 해삼이라…….”
“그 맛좋은 음식을 다른 이도 아닌 이부상서와 나누셔야 한다니…….”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통통한 해삼. 달큼하면서도 향기로운 양념에 촉촉하게 젖은 해삼을, 분명 윤기가 자르르 흐를 테지.
그 매끄러운 것을 한입에 쏙 넣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입안을 가득 채우는 해삼의 짙은 향기. 말캉하고 쫀득하게 씹히다가 사르르 녹는 그 식감, 그 행복을, 그 만족감을, 그 희열을.
정적과 같은 식탁에 앉아 나눠 먹기에는, 아깝지 않은가.
이부상서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태감은 뱃속에서 장이 꼬이는 듯한 분노를 느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 것이 정치라지만, 과연 이부상서에게 차린 것이 변변치 않다는 겸손한 말을 하며 요리를 권할 수 있을까.
목구멍을 긁어 내리는 듯한 갈증에 태감은 연거푸 미지근한 찻물을 들이켰다.
하지만 찻물로도 해소되지 않는 것, 이부상서를 향한 타는 듯한 증오는 태감의 뇌리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해삼 요리를 이부상서와 나눠야 한다니.”
“그냥 해삼이 아닙니다. 다진 새우살로 속을 채운 해삼 요리지요.”
“크윽, 새우라니! 포동포동한 새우살을 가득 채워 넣은 해삼 요리를.”
“어쩌시겠습니까?”
정히 그러시면, 해삼 요리는 빼고 준비할까요?
소년은 갈등에 젖어 허우적거리는 태감을 보며 더없이 밉살스러운 웃음을 그렸다. 사람의 고뇌와 갈등을 양분으로 삼는 악마와도 같은 비열한 웃음.
입꼬리를 귀밑까지 찢은 소년을 보며 태감은 다부지게 입술을 깨물고는 대답했다.
“하루에 천 리를 뛰는 천리마도 배가 비면 나아가질 못하고, 하늘이 낸 장부도 배가 비면 뜻을 세우지 못하는 법이니.”
“그 말씀은?”
“우선은, 밥부터 먹고 생각해 보겠다.”
뭔가 요깃거리 내어다오.
태감의 뻔뻔한 요구를 들으며 소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 * *
결이 곱고 치밀한 물푸레나무로 만든 널찍한 면판 위로 두 가지 가루가 오른다.
살짝 노르스름한 빛이 도는 밀가루와 창백하리만치 흰 전분 가루.
소년이 두 가지 가루를 면판 위에 수북하게 쌓고 섞을 때마다 마치 첫눈을 밟는 듯 뽀드득 소리가 울렸다.
“이렇게 밀가루와 전분 가루를 섞어 뜨거운 물에 익반죽하면 차지고 쫄깃하면서도 반투명한 반죽이 만들어지지요. 영남(嶺南) 사람들은 여기에 돼지고기, 새우, 당근, 목이버섯, 표고버섯, 죽순 등의 각종 재료를 곱게 다진 소를 싸 분과(粉果)라 하는 교자를 만드는데……. 어이쿠 조심하십시오, 뜨거운 물 들어갑니다.”
소년의 말에 태감은 화들짝 놀라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펄쩍 놀라는 태감을 보며 킬킬 웃은 소년은 가루를 봉긋하게 쌓은 다음 가운데를 파 우묵하게 둑을 만든 곳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그리고는 맨손으로 반죽을 하기 시작했다.
“뜨겁지는 않느냐?”
“그야 뜨겁지요. 손 한번 넣어보시겠습니까?”
소년의 권유에 태감은 반죽을 한번 들여다보고는 질겁을 하며 도리질 쳤다.
반죽에선 뜨거운 김이 펄펄 솟아오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손을 대자마자 손바닥이 벌겋게 익어버리리라.
“이 일도 오래 하다 보면 단련이 됩니다. 굳은살이 박여서 그런지, 아니면 열기에 손이 익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소년은 손가락 마디에까지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자신의 손을 슬쩍 보고는 피식 웃음 지으며 반죽을 마무리했다.
반죽이 완성되었으니 이제 소를 만들 차례였다.
소년은 창고에서 남은 자투리 재료를 전부가 가져와서는 곱게 다지기 시작했다.
파릇한 색을 더해주는 부추, 주황색이 고운 당근, 익으면 불그스름해지는 새우, 그윽한 갈색의 표고버섯과 가무스름한 목이버섯, 그리고 기름기 없는 돼지고기 한 덩어리.
모든 재료는 철과에 살짝 볶아서 준비한다.
고기를 많이 넣어달라는 태감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소에는 모든 재료가 정확히 같은 비율로 들어갔다.
“분과는 깔끔하고 담백한 맛으로 먹는 요립니다. 영남 사람들은 고기가 많이 들어간 분과는 촌스럽다며 싫어하지요. 그래도 고기가 많이 들어간 분과가 좋으십니까?”
“좋다마다.”
“하여간, 물어본 내가 잘못이지.”
물론 태감의 열렬한 항의에도 고기가 추가되는 일은 없었다.
소년은 한껏 볼을 부풀린 채 고개를 팩 돌린 태감을 무시하며 분과 만드는 일에 열중했다.
소가 준비되었으면 이제 반죽을 작은 막대 모양으로 밀어 작게 떼어낸 다음 얇게 밀어 준비한다.
피는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두 입에 나눠 먹을 수 있을 만한 크기로 밀고, 소가 너무 많이 들어가지 않도록 젓가락으로 조금씩 떠 얹어 반달로 접어 완성한다.
“물결무늬 틀로 가장자리에 무늬를 내준 다음 대나무 찜통에 넣어 센 불에 쪄내기만 하면 됩니다. 반죽은 뜨거운 물로 익힌 익반죽에 속 재료 역시 한번 볶아서 만들기 때문에, 쪄내는데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지요. 그리고 완성된 분과는.”
꼭 비단으로 만든 속치마처럼 우아하고 고운 자태가 눈을 즐겁게 해주지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찜통을 들여다보며 태감은 열렬한 고갯짓으로 소년의 말에 동의했다.
반투명한 피 너머로 언뜻 비쳐 보이는 울긋불긋한 색은 꼭 안개 속에 쌓인 꽃 무리를 연상시켰다.
입안에서는 어떨까. 과연 보기 좋은 만큼 맛도 좋을까. 물안개에 젖은 꽃잎처럼 달고 화사한 맛을 보여줄까.
태감은 기대감을 담아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얇은 피가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분과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입술의 틈 사이로 미끄러지는, 매끈하면서도 쫀득한 감촉과 씹으면 터져 나오는 뜨거운 김. 분과의 촉촉한 피 안쪽에선 찜통에서 부풀어 오른 속 재료의 향기가 담뿍 담겨 있었다.
씹을 때마다 육즙과 함께 입안을 가득 채우는 향기는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감칠맛으로 태감의 허기를 달래주었다.
결코, 기름이 번질거리는 달고 호사스러운 맛은 아니었다. 자칫 밋밋하고 심심하다 느낄 수 있는 담백한 맛.
하지만 그 은근하고 보드라운 감칠맛에서 태감은 마음 한구석에 서서히 차오르는 충족감을 맛보았다.
언제 어디서나, 뒤돌아보면 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고단한 세상살이가 힘에 겨워 주저앉고만 싶을 때, 돌아갈 수 있는 고향 땅과도 같은 맛.
정겹고, 다정하고, 푸근한 분과의 맛은 태감의 속에 싹텄던 탐욕과 분노를 조금씩 덜어주었다.
마치 삿되고 그릇된 욕망을 떨쳐내고 도를 얻은 듯한 태감의 평온한 얼굴을 보며 소년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까요.”
“무엇을 말이냐.”
“해삼 말입니다. 이부상서의 접대에, 해삼 요리를 올릴까요? 아니면…….”
“올리거라.”
좋은 것은 나누면 배가 되는 법이 아니더냐.
그윽한 현기가 느껴지는 태감의 말에 소년은 미심쩍다는 투로 되물었다.
“하지만, 아깝지 않습니까. 좋은 것은 좋은 사람과 나누어야 좋은 법인데, 같은 식탁에 둘러앉기도 싫은 불편한 이와 나눈다 하여 즐거움이 배가 되겠습니까?”
“허어, 어찌 이리도 옹졸할 수가. 내 가진 것이 적지 않고, 네 가진 것이 적지 않거늘, 무엇이 그리도 아쉬우냐. 그런 좁은 마음으로 어찌 천하 만민을 바른길로 이끌고 황제 폐하께 바른 소리를 고할 수 있겠느냐.”
얼씨구, 분과 한입 먹고 아주 득도하셨네그려.
소년은 입꼬리를 비죽 올리며 구시렁대고는 성의 없는 동작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 어진 마음씨가 얼마나 가는지, 한번 두고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