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89화 외전 77화
목덜미가 후끈 달아오르고 땀에 젖은 옷자락이 등허리에 철썩 달라붙는 계절.
골목과 골목을 누비는 바람결마저 후덥지근한 열기를 품고 있는, 옆자리에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밀어오르는 여름은 뜨거운 차와 과자를 파는 다관에는 최악의 비수기였다.
바쁜 일상 속에서 고단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차를 찾던 이들은 따스하고 향기로운 차 내신 우물물에 차게 식힌 참외와 수박 등의 즙 많은 과실에서 마음의 위안을 찾았고, 풍류를 즐기는 유생들은 먹과 차 향기 물씬 풍기는 다관 대신 굽이쳐 흐르는 서늘한 계곡물과 늘어진 버드나무 그늘에서 운치를 즐겼다.
하지만 그 계절적 불황 속에서도 전과 다름없이 문턱이 닳도록 손님이 드나드는 다관이 있었으니, 바로 젊은 거상 표자승이 운영하는 다관 막심이었다.
“다른 다관들은 다들 파리만 날리고 있는데, 막심은 오늘도 문전성시로구나.”
다관 막심의 특실.
소년은 창밖으로 몰려드는 손님들을 내려다보며 히죽거렸다.
햇볕이 가장 맹위를 떨치는 정오였지만 다관 막심의 대문에는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땀방울이 말라붙어 등허리에 허연 소금기가 반짝이고 현기증에 휘청거리면서도 사람들이 줄을 서는 이유.
그것은 바로…….
“스승님께서 전수해 주신 다관 막심의 여름 한정 과자, 여름 청귤 젤리를 맛보기 위함이지요.”
스승님의 하해와 같은 은혜에 이 불민한 제자는 그저…….
퉁방울 같은 눈과 퉁퉁한 주먹코, 턱에 철사 같은 수염이 부숭부숭한 장한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애교 있는 표정을 지으며 표자승이 호들갑을 떨자 소년은 징그럽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적당히 안 하면 늘씬하게 어루만져 주겠다는 엄포와 함께.
소년이 차돌 같은 옹골찬 주먹을 들어 올리자 표자승은 찔끔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하여간, 이 녀석 호들갑은 어째 만나면 만날 때마다 더 극성스러워지는 것 같아.
소년은 짤막한 한숨을 내쉬고는 막심을 방문한 용건을 꺼내놓았다.
“그래서, 맛 단속은 잘하고 있느냐?”
“예,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젤라틴은 송아지의 연골에서 추출하고 있고, 청귤은 속껍질을 제거한 뒤 단물에 삼 일간 절여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기 직전까지 서늘한 우물에 용기째 담가 보관하였다가 주문이 들어오는 즉시 내가고 있고…….”
“그래, 품이 많이 들어 귀찮겠지만, 그렇다 하여 대충대충 하려 하면 음식 장사 못 하는 법이다. 잘 지키고 있구나.”
소년은 그제야 안심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표자승에게 작은 통을 내밀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통은 두꺼운 보자기에 단단히 싸여 있었다.
“스승님, 이것은?”
“한번 열어 보거라. 날이 더워서 가져오는 동안 상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금속 통은 두 개의 걸쇠가 뚜껑을 누르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걸쇠를 푼 표자승은 상했을지도 모른다는 소년의 말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조금 뒤로 뺀 뒤 조심스럽게 통을 열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통이 열리자 그 안에선 무르익은 과실의 상큼한 향기가 솔솔 피어올랐다.
그것이 음식의 부패과정에서 생성되는 불쾌한 부패취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표자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향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스승님, 이 향기는 도대체?”
입안에 절로 침이 고이게 하는 새콤한 향기에 군침을 삼키며 소년을 돌아보았다.
군침을 꼴깍꼴깍 삼키는 표자승을 보며 소년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피자두다. 피자두로 만든 젤리.”
“피자두!”
깊고 우아한 붉은색과 농후하고 짙은 향기를 가진 여름 과실의 여왕, 피자두로 만든 젤리.
기대감으로 한껏 달아오른 표자승을 보며 소년은 헛기침으로 목을 다잡고는 피자두 젤리 만드는 법을 설명했다.
“피자두는 너무 물렁물렁하게 익은 것 말고, 적당히 단단한 것을 고르는 것이 좋다. 너무 무른 것을 고르면 조리는 도중에 흐물흐물하게 녹아버리거든.”
피자두를 골랐으면 우선 껍질을 깎아 먹기 좋은 크기로 썬 다음 피자두 무게의 반쯤 되게 설탕을 뿌려 반나절쯤 재워주고, 이때 계피 같은 향신료나 버찌 술 같은 과실주로 향을 더해도 좋다.
“다만, 피자두 자체의 향이 좋으니 굳이 넣을 필요는 없다. 끝물이 되어 시들시들하고 향이 약한 피자두를 요리할 때라면 모를까, 이렇게 싱싱한 피자두에 다른 향을 첨가하는 것은 아까운 일이지.”
“그렇지요, 재료가 좋다면 본연의 맛을 살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요. 좋은 가배는 설탕이나 두유 등으로 맛을 더하지 않고 그대로 마셔도 맛이 좋은 것처럼 말입니다.”
자두 중 가장 늦게 익는 피자두.
늦여름의 무더운 햇볕 속에서 한껏 물오른 그 우아한 향기에 무슨 치장이 필요하겠는가.
무르익은 과육은 입안에 넣으면 첫맛은 진저리가 날 만큼 시큼하면서도 끝 맛에 달콤함이 느껴지는 그 신선한 과즙.
입에 물면 입안을 가득 채우는 그 짙은 향기.
표자승은 피자두의 맛을 떠올리며 메말라 있었던 침샘이 활짝 열리는 것을 느꼈다.
상상만으로도 입안을 흥건하게 적시는, 혀를 춤추게 하는 상큼함.
그 향기 짙은 과즙을 담아낸 젤리는 과연 어떤 맛일까.
거세게 숨을 몰아쉬는 표자승을 보며 소년은 교활함이 묻어나는 가느다란 미소를 지었다.
궁금하겠지. 피자두 젤리의 맛이.
물론…….
“천하일품이지. 상상해 보거라. 뭉근한 불에 졸여낸 피자두의 맛을. 단단했던 과육은 부드럽고 쫀득해졌을 것이고, 몸서리칠 만큼 짜릿했던 신맛은 설탕에 절여지며 은은하고 기분 좋은 새큼함으로 누그러지고, 향기는 농축되어 더욱 그윽해지지.”
자, 다시 한번 맡아보겠느냐?
소년의 권유에 표자승은 젤리가 담긴 통에 코를 가까이 대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향기가.
농후한 여름의 향기가 밀려든다.
탐스럽게 핀 붉은 꽃.
여러 장의 꽃잎이 겹쳐진, 한 송이만으로도 방안을 향기로운 꽃내음으로 가득 채워주는, 그런 붉은 꽃을 풍성한 다발로 묶어 품에 안은 듯한 강렬한 향기가 그의 숨결을 타고 폐부에 스며든다.
표자승은 그 순간 자신이 취했음을 깨달았다.
사람을 도취시키는 향기였다.
향기를 맡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좀 더, 몸의 구석구석에 가득 채워 넣고 싶다.
좀 더, 조금만 더.
잠겨 들듯 몽롱하게 변한 표자승의 눈을 들여다보던 소년이 갑작스럽게 말했다.
“어떠냐, 나쁘지 않지?”
향에 한껏 취해 있었던 표자승은 소년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횡설수설하며 대답했다.
“예? 아, 예. 향은 아주 좋습니다만, 아직 맛을 보지 못해 뭐라 말씀드리기가…….”
“그래? 그럼 좀 기다려야겠구나. 아무리 맛이 좋다 해도 젤리는 차게 먹어야 제맛이 나는 음식이니.”
그럼 젤리가 차게 식을 동안……. 잠깐 일 이야기 좀 하자꾸나.
소년은 젤리가 담긴 통을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점원에게 맡기고는 특실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그리고는 피자두의 잔향에 넋이 나간 채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표자승을 향해 속삭였다.
그가 결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표자승, 나랑 거래처 하나 뚫으러 가자.”
* * *
표자승은 농밀한 향기 속에서 눈을 떴다.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피자두보다도 더욱 달고 향기로운 것, 황금의 향기 속에서.
순식간에 탐욕스러운 상인의 얼굴로 돌아온 표자승을 보며 소년은 미소 지었다. 귀밑까지 길게 찢어지는 미소를.
“서방까지 길을 안내할 수완 좋은 길잡이가 필요하다. 표자승.”
“길잡이 말입니까?”
“그래. 서방 무역로에 정통한 인물이 필요해.”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엘 마라 법국.
소년의 말에 표자승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난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법국이라, 거래처로 삼기에는 너무 멀지 않습니까.”
“이제 가까워질 거다.”
두 나라 간의 거리가?
표자승은 순간 뇌리에 떠오른 그 어처구니없는 망상에 실소했다.
그러고는 소년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가까워지는 것은 거리가 아니다. 가까워지는 것은.
“두 나라 간의 관계가, 가까워진단 말씀이시군요. 그렇다면.”
나라 간의 관계가 변하면, 가장 먼저 그 변화를 체감하는 것은 바로 상인들이었다.
전운이 감돌 때면 상인들의 움직임도 위축되고, 관계가 우호적일 때면 상인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진다.
그리고 동방의 대국인 제국과 서방의 중심에 위치한 법국이 우호 관계를 구축한다는 것은 단순히 양국 간의 변화를 넘어 동방과 서방이.
“세계가, 변하겠군요.”
“정식으로 수교를 맺는 것은 아니다. 연결이 생기는 것은 법국의 만신전과 제국의 금룡신앙이지. 하지만 종교계에서 연결고리가 생기면…….”
표자승은 참지 못하고 거세게 숨을 토해내었다.
그의 이마에선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여름의 해가 쏟아붓는 무더위가 아닌 기대와 흥분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표자승은 꼭 기수의 호령을 기다리는 군마와도 같았다. 편자를 박아넣은 발굽으로 대지를 박차고 뛰쳐나가기만을 기다리는.
한껏 상기된 채 어깨를 떠는 표자승을 보며 소년은 그의 심장에 박차를 가할 한마디를 내뱉었다.
“새롭게 변화할 세계에, 남들보다 먼저 기회를 선점할 수 있다면.”
“스승님.”
“종교계의 연결은 머지않아 양국 간의 수교로 이어질 것이다. 그럼 관세가 완화될 것이고, 교역로도 안정될 테지. 상인들은 궁둥이에 불붙은 말처럼 흥분해서는 법국으로 향할 거다.”
하지만. 소년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머금고는 표자승을 향해 말했다.
“이미, 법국의 상계에는 네 입김이 닿아 있지 않은 곳이 없을 테지. 그리고.”
“전 제국의 상계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겠지요. 찬드라 왕국에서의 영향력을 기반으로 제국의 상계를 주름잡았던 사대 상단처럼.”
“그것이 너의, 표가상단의 새로운 기반이 되어줄 것이다. 사대 상단을 누를 수 있는.”
순간, 한껏 흥분해 있던 표자승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떠올랐다. 마치 속으로만 숨기고 있던 꿍꿍이를 까발려진 듯한.
전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벌게진 표자승의 얼굴을 보며 소년이 킬킬거렸다.
“네 속내야 뻔하지, 이것아.”
“크흠, 스승님. 그것이…….”
“다관 사업이야 이미 정상에 섰고, 다른 사업도 안정이 되었으니, 이제 꿈을 꿔볼 차례지.”
제국 제일의 상단. 상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꿔볼 만한 꿈 아니겠느냐.
이미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텐데, 거기서 무엇을 더 가져야겠느냐?
네가 창고에 쌓아둔 것만 해도 이미 남들이 가져야 할 것의 수십 배는 쌓아두지 않았느냐?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느냐?
소년은 그리 말하지 않았다.
소년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표자승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 좀 보여달라는, 손끝을 까딱거리는 소년의 손짓에 표자승은 우물쭈물하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손가락 두 번째 마디까지 털이 숭숭 난 손, 남들의 두 배는 될 법한 두툼하고 큼직한 손은 마디가 굵고 굳은살이 단단히 박여 있었다.
일하는 자의 손, 땀 흘리는 자의 손이었다.
“녀석, 아직도 현장을 떠나질 못했구나. 자리에 올랐으면 이제 아랫것들이 올리는 보고나 받으며 편히 있어도 될 터인데.”
“성정이 자리에 가만 앉아 있질 못하는 성격인지라.”
“그래, 그렇지. 그래서 내가 널 고른 거다.”
땀 흘려 일하는 것을 천하다 여기지 않아서. 자리가 변했다 하여 옛날의 어려움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서.
소년은 씨익 웃고는 표자승의 어깨를 힘껏 두드렸다.
“아직 오를 자리가 남아 있는데, 꿈꾸지 않는 것이야말로 멍청한 일이다. 마음껏 꿈꾸고, 마음껏 욕심을 부려라.”
“스승님, 제가 이미 가진 것도 많고, 오른 자리도 높습니다. 여기서 더 많은 것을 바라도 되겠습니까?”
“상인이 욕심을 부리는 것이 뭐가 잘못된 일이냐.”
높은 자리에 오르면 누구나 변하기 마련이다. 턱짓으로 한 번으로 사람을 부릴 수 있는데 어느 누가 땀 흘리고 싶겠느냐?
하지만 넌 그런 옹졸한 녀석이 아니니.
“너라면 분명, 더 높이 올라가도 괜찮을 테지.”
소년은 길게 말한 것이 부끄럽다는 듯 짧게 킬킬거리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입술을 달싹이는 표자승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표자승은 천천히 그 손을 잡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단을 오래 비워놔야 할 터인데, 괜찮겠느냐.”
“제 상단원들은 모두 신의가 두텁고 노련한 친구들입니다. 상단주가 자리를 비워도 눈 하나 까닥하지 않지요.”
“그렇다면.”
표자승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소년에게 큰절을 올렸다.
“부디, 이 못난 것이 스승님을 보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