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88화 특별외전
말린 표고버섯으로 낸 육수에 간장과 설탕, 다진 생강이 차례로 들어간다.
소년은 나무 걸대에 걸어둔 솥을 국자로 뒤적거리며 육수가 부르르 끓어오르기만을 기다렸다.
계절은 여름이었다.
노오란 오이꽃이 떨어진 자리에 새끼손가락만 한 굵기의 오이가 열리는, 무더위가 한껏 무르익은 계절.
야외에서 요리하기에 좋은 계절은 아니었다.
하지만 목덜미를 뜨겁게 달구는 가혹한 햇볕과 때때로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열풍, 주르륵 흘러내려서는 눈을 따갑게 하는 땀방울에 시달리면서도 소년의 입가에는 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저 요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이, 진심으로 요리하는 것을 즐기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아니꼽다는 듯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리도 좋으냐.”
“좋지요.”
태감께 맛 좋은 음식을 대접할 수 있어 참으로 좋습니다. 그리고…….
꾸밈없는 순박한 웃음을 짓던 소년은 끝자락에서 살짝 본심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이럴 때가 아니면 또 언제 풀떼기로만 상을 차려보겠습니까?
낄낄거리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쓰디쓴 숨을 내쉬었다.
“오늘만이다.”
“예, 오늘만이지요. 칠보절식(七步絶食)의 다섯 번째 날만.”
칠보절식의 다섯 번째 날. 그날은 칠성제를 올리기에 앞서 몸을 정갈히 하기 위해 네 다리로 걷는 털 달린 것, 두 다리로 걷는 깃털 달린 것, 헤엄치는 비늘 달린 것을 모두 금하고, 땅에서 나는 것만으로 배를 채우는 날이었다.
즉, 고기 없으면 밥을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는 극렬한 육식주의자인 태감조차 강제로 채식을 해야만 하는 날이었다.
하핫, 건강하고 소화 잘되는 채식 밥상 맛 좀 봐라, 이 육식주의자 놈.
소년은 장마철 습기에 젖은 우거지처럼 우울하기 그지없는 태감을 보며 음습한 쾌감을 느꼈다.
‘그러게, 평소에 채소 좀 드시지 그러셨습니까. 그러면 남몰래 고기반찬 한 가지 끼워 올렸을 것을.’
그럼 태감님은 남들 다 채소만 씹고 있는 칠보절식 날 홀로 고기반찬 먹으니 좋고, 전 태감님 건강 걱정 좀 덜어서 좋고, 서로 좋았을 것 아닙니까.
소년은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린 채 혀를 끌끌 차고는 요리에 열중했다.
걸대에 걸린 솥은 어느새 부르르 끓어오르고 있었다.
국물이 적당히 걸쭉해지면 평평한 쟁반에 두부껍질을 올리고는 국물을 조금씩 뿌려가며 두부껍질에 스며들도록 적셨다.
그다음, 향기 좋은 낙화생 기름을 손끝에 찍어 다시 두부껍질에 펴 발랐다.
껍질에 적신 국물과 기름이 고루 스며들면 그 위로 다시 두부껍질을 겹쳐 펼치고, 국물과 기름을 바른다.
이 과정을 반복해 두부껍질이 도톰하게 쌓이면 마지막으로 껍질의 가운데에 달게 조린 표고버섯을 넣고는 껍질을 접어 길쭉한 막대기 모양으로 만든다.
“이제 이것을 강불에 슬쩍 쪄낸 다음 기름에 바싹하게 튀겨내면 오리고기 못지않은 두부껍질 튀김, 과작비압(鍋炸肥鴨)이 완성되지요.”
“과작비압. 솥에서 바싹하게 튀겨낸 살찐 오리라.”
진짜 오리였다면 더 좋았을 텐데.
생각이 빤히 드러나 보이는 태감의 얼굴을 보며 코웃음 친 후, 소년은 두 번째 요리를 준비했다.
소년이 두 번째로 준비한 요리는.
“허어, 그건 또 무엇이냐? 색이 희고 가느다란 것이, 꼭 말린 우엉 뿌리 같구나.”
“우엉이라니요, 그런 섭섭한 말씀을. 이것이 이래 보여도 버섯의 왕이라 불리는 백의고(白蚁菇)입니다.”
한국에선 흔히 흰개미 버섯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백의고였다.
소년은 미리 미지근한 물에 불려둔 백의고를 가져와 베 보자기에 넣고 물기를 쭉 짜내며 말했다.
“예로부터 육식을 금하시는 도사님들은 정이 고기가 고플 때 고기 대신 식감 좋고 향이 빼어난 백의고를 볶아먹는 것으로 고기를 먹고픈 욕망을 달랬다 하니…….”
“진짜가 아닌 어중간한 대용품은 되려 진짜를 향한 갈망을 부채질할 뿐이지 않느냐.”
“겉보기에는 말라비틀어진 우엉처럼 보여 별맛이 없어 보이지만, 드셔보시면 의외의 감칠맛에 놀라실 겁니다.”
소년은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 태감을 흘겨보고는 흰개미 버섯 요리를 시작했다.
간과백의고(干锅白蚁菇).
우선은 노란 유채씨기름을 넉넉하게 철과에 둘러 중불에 달구고, 기름에서 연기가 날 때쯤 채 친 생강과 굵직하게 썬 파를 넣어 향을 우려낸다.
비관적인 전망에 젖어 있던 위장을 절로 들뜨게 하는 자극적인 향기.
태감의 목울대가 움찔거리는 것을 본 소년은 피식 실소를 흘리고는 향을 우려낸 대파와 생강을 건져냈다.그다음으로는 은근한 매운맛과 달큼한 향기를 가진 사천의 명물 고추 조천초(朝天椒)와 절구에 빻지 않은 통 산초를 한 움큼씩 철과에 넣고는 불그스름한 색과 코를 찌르는 향과 알싸한 맛이 기름에 배어 나오도록 약한 불에서 튀겨내었다.
달아오른 유채씨기름에 고추와 산초의 풍미가 충분히 우러나올 때쯤, 소년은 미리 물기를 꽉 짜두었던 백의고를 철과에 넣고는 국자로 뭉친 버섯 가닥을 풀어주며 센 불에 볶기 시작했다.
산초 알갱이가 철과 바닥을 구르는 소리, 길고 가느다란 버섯이 기름에 튀겨지는 소리, 기름에 튀겨지며 부풀어 오른 고추가 터지며 김이 빠지는 소리.
온갖 소리와 함께 철과에선 그윽한 향기가 서서히 피어올랐다.
콧속이 아려올 만큼 맵고, 눈이 따가울 만큼 톡 쏘면서도, 혀 밑에 살그머니 군침이 감돌게 하는 그윽한 향기.
긴 시간 고기를 탐닉해 온 태감조차 자신의 코를 의심하게 만드는,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풍성한 향기.
그것은 틀림없이…….
“고기 같지요?”
“그래. 꼭, 기름기 없는 담백한 고기를 볶는 것만 같은 향이…….”
고기를 먹을 수 없다는 절망감과 위장을 찌르는 허기가 빚어낸 한순간의 환상인 걸까.
하지만 헛된 환상이라 치부하기엔 코끝을 간지럽히는 그 향기가 너무나 근사했다.
혼란에 젖은 태감의 눈을 보며 소년은 그 향기로운 육향의 비밀을 조심스럽게 들려주었다.
“많은 미식가가 식용 버섯의 왕으로 흰개미 버섯을 꼽고는 하지요. 향기 좋은 송이, 맛이 짙은 곰보버섯, 즙 많은 능이도 있건만, 왜 하필 볼품없는 흰개미 버섯을 식용 버섯의 왕으로 꼽을까요.”
그것은 바로 다른 버섯들은 가지지 못하는, 육고기를 연상시키는 자극적인 감칠맛이 흰개미 버섯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은 잘 익은 버섯 한 가닥을 건져 태감의 입에 물려주고는 빙긋 웃어 보였다.
“소금을 넣고 볶으면 마치 말린 고기를 씹는 듯한 느낌을 주지요. 제법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자, 그럼 이제 버섯도 다 볶아졌고, 다른 요리도 얼추 완성되었으니.
소년은 멍하니 버섯 가닥을 씹고 있는 태감의 소맷자락을 잡고는 그를 식탁의 상석에 앉혔다.
“이제 식사를 하실 시간이군요.”
* * *
사례 태감의 천막 안.
소박한 나무 탁자 위로 근사한 요리들이 올라왔다.
오리구이 풍의 두부껍질 튀김 과작비압(鍋炸肥鴨), 까치콩을 맵게 볶아낸 간소편두(干煸扁豆), 찹쌀로 빚은 쫀득한 피에 달콤짭짤한 표고버섯 소를 듬뿍 채워 쪄낸 나미소맥(糯米燒麥), 시금치, 연근, 목이버섯, 원추리, 당근 등의 열 가지 길한 의미를 담은 채소를 볶은 장강의 명물 요리 십양채(十樣菜), 건두부를 열여덟 번 포를 떠낸 다음 실처럼 가늘게 채 쳐 생강 간장을 끼얹어 먹는 탕간사(湯干絲), 질 좋은 최상품의 표고버섯으로 끓여낸 탕 요리 향로돈화고(香露燉花菇).
그리고 식용버섯의 제왕이라 불리는 흰개미 버섯으로 만든 간과백의고(干锅白蚁菇)까지.
온갖 귀하고 맛좋은 채식 요리가 상을 그득하게 채웠건만 태감의 입가에선 한숨이 떠나질 않았다.
허어, 장식까지 참 곱게도 했구나. 흰 무를 깎아 만든 목련과 국화에 당근으로 만든 봉황이며, 이것들이 기름진 고기 요리를 장식하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꼬.
무거운 숨을 몰아쉰 후, 태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그래, 먹자꾸나.”
마지 못해, 그래도 살아야 하니 억지로 먹는다는 듯 태감은 힘겹게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래, 우선은 맛이 진해 보이는 과작비압을 먹어볼까.
태감은 식탁 귀퉁이에 놓여 있었던 속이 들지 않은 만두를 집어 반으로 가른 다음 과작비압 두어 개를 집어 속에 끼워 입으로 가져갔다.
입술에 닿는 만두의 따스한 열기, 폭신한 감촉과 함께 귓바퀴에 겨울철 낙엽을 밟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기름에 튀겨낸 두부껍질의 바삭함, 그리고 버섯의 달큼한 즙을 흠뻑 빨아들인 속의 촉촉함.
기름이 잔뜩 오른 오리의 농후하고 짙은 감칠맛이 아닌, 사근사근하고 순하디순한 버섯과 두부의 감칠맛이 기름때 낀 혀 위에 살그머니 내려앉는다.
그저 오리구이의 대용품이라 폄하하기에는…….
과작비압의 깊이 있는 맛에 당황한 듯 끙 소리를 내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입꼬리 한쪽을 씨익 올리고는 이죽거렸다.
“어떻습니까. 그간 채식이라 하여 덮어놓고 거부해 왔던 지난날이 후회되지 않습니까?”
“크흠, 이제 고작 첫 번째 요리를 맛보았을 뿐이다.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르지.”
“예예, 마음껏 드셔보시고 판단하시지요.”
태감은 빈정거리는 소년에게서 고개를 팩 돌리고는 다음 요리를 향해 젓가락을 뻗었다.
기름지고 달착지근한 과작비압으로 입맛을 돋우었으니.
“이번엔 채소 본연의 맛이 잘 살아 있는 십양채를 맛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아작아작 씹히는 연근, 오돌오돌한 목이버섯에 질기지만 씹으면 은근한 향기가 올라오는 원추리, 은은한 단맛이 올라오는 시금치의 소박한 맛을 즐긴 다음, 담백한 맛에 혀가 질릴 때쯤 나미소맥으로 넘어가시지요.
“그리고 나미소맥의 쫄깃하고 매끄러운 피와 짭짤한 표고버섯의 맛에 혀가 지쳤다면, 그땐 향기로운 생강 간장으로 양념한 탕간사의 산뜻함으로 혀를 달래주시고.”
“그다음에는?”
“그다음에는 칼칼한 양념에 볶아낸 간소편두를 먹어야지요. 저릿저릿한 마라 양념에 마르게 볶아낸 까치콩의 깨끗하고 파릇파릇한 단맛, 콩의 섬세한 고소함을 즐겨보시지요.”
처음의 실망감과 우울함은 어디로 간 것인지, 태감은 소년의 나긋나긋한 인도에 이끌려 정신없이 신선하고 소화 잘되는, 건강한 채식 밥상에 빠져들었다.
부산스럽게 상과 입 사이를 오가는 태감의 젓가락을 물끄러미 보던 소년은 희끄무레한 웃음을 지었다.
마침내, 쐐기를 박을 때가 온 것이다.
소년은 상의 한가운데를 차지고 있었던 오늘의 메인 요리. 흰개미 버섯볶음을 태감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슬고슬한 흰쌀밥을 그득하게 퍼 태감에게 내밀었다.
“이제, 간과백의고(干锅白蚁菇)를 맛보시지요. 밥에 듬뿍 올려서.”
흰개미가 인간에게 선물한 최고의 진미, 흰개미 버섯의 신선하고 감미로운 감칠맛을 맛보시지요.
소년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기름진 버섯볶음과 흰 쌀밥이 눈앞에 있는데.
소년의 얼굴과 버섯볶음을 번갈아 본 후, 태감은 거세게 패악질을 부리는 위장의 요구에 따라 사납게 젓가락을 내리꽂았다.
육고기를 탐할 때와 같이.
향신료의 알싸함을 빨아들인 기름에 바싹하게 튀겨진 흰개미 버섯의 줄기 부분은 말린 고사리를 연상시키는 식감이었고, 연하고 부드러운 갓 부분은 느타리버섯을 닮아 있었다.
꼬들꼬들한 줄기와 야들야들한 갓.
두 가지 식감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버섯은 씹으면 씹을수록 짙은 감칠맛이 입안 전체를 물들였다.
태감은 버섯의 풍미에 젖은 입안에 쌀밥을 한가득 욱여넣었다.
쌀밥은 입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온갖 감미로운 감칠맛을 하나로 묶어주었다.
혀끝을 쏘는 산초의 저릿함, 순한 듯하면서도 씹으면 씹을수록 온몸의 땀구멍을 열리게 하는 고추의 매운맛. 그리고 버섯에서 배어 나온 그윽한 향기.
그 모든 것들이 스며든 진주 알 같은 쌀밥은…….
“달구나. 참으로 달아.”
태감은 단말마를 내지르듯 그 한마디를 토해내고는 허물어지듯 뒤로 손을 짚었다.
후끈 달아오른 이마 위로는 굵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깊은 만족감이 배어 있는 태감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소년은 식사의 마지막으로 두툼한 표고버섯이 담뿍 들어간 맑은 탕을 한 국자 떠 태감에게 건네었다.
“매운 것으로 혀를 달구셨으니, 담백하고 순한 탕으로 식히시지요.”
소량의 소금으로 삼삼하게 간한 탕은 표고버섯의 기분 좋은 흙내음이 우러나 있었다.
이슬을 머금은 이끼의 싱그러운 숲 내음과도 닮은, 부드럽고 고운 향기가 달아오른 목구멍을 쓸어내린다.
들뜨고 헝클어진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차분하고 포근한 마무리.
국물 한 모금을 한참 동안 머금고 있었던 태감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넘기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래, 가끔은. 채식도 괜찮을 것 같구나. 가끔은.”
“가끔이라 하시면?”
“글쎄…….”
앞으로 년에 한 번 정도는, 채식을 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