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87화 외전 76화
“인맥 관리라. 술 마시기에 좋은 핑계구나.”
“어허, 핑계라니요. 오늘 술자리는 어디까지나 금군의 요직을 차지한 무관 나으리들과 친목을 도모하여 훗날 정계에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한…….”
“그래서, 술이 쓰더냐? 인맥 관리를 위해 억지로 마신 술이었다면 혀에서 쓰고 떫었을 터인데.”
“달더군요.”
그랬겠지, 좋은 사람들과 허물없이 웃고 떠들며 마셨으니, 싸구려 분주를 마셔도 달았겠지.
태감은 코웃음을 치고는 짙은 그늘이 드리운 눈두덩이를 손으로 주물렀다.
나날이 이어진 격무와 수면 부족으로 인한 피로에 젖은 그의 얼굴은 우울함과 짜증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 소년은 패전을 거듭한 병사, 혹은 파산을 눈앞에 둔 상인에게서 공통으로 느낄 수 있는 좌절감을 엿보았다.
활로를 찾지 못한 이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다가올 싸움에 맨몸으로 나서야만 하는 이의 막막함.
그 이상 기다릴 수도, 물러설 수도 없이 그저 가진 것만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이의 숨 막히는 불안감.
태감의 숨통을 조르고 있는 것들을 물끄러미 본 소년은 취기에 한껏 달아오른 숨을 길게 내쉬고는 말했다.
“영, 성과가 없으셨나 봅니다.”
“그래, 나름대로 애는 써 보았다만, 성과가 나오질 않는구나.”
태감은 분통을 터뜨리기도 귀찮다는 듯 싱겁게 고개만 한번 까딱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대신해 소년이 열정적으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거참, 밤잠도 줄이고 끼니도 걸러가며 그렇게 애를 쓰셨는데, 그래도 입을 여는 쥐새끼가 한 놈도 없었단 말입니까? 보통 독한 놈들이 아니군요.”
기껏해야 이부상서 끄나풀 노릇이나 하는 놈들이라 슬쩍 어루만져 주면 술술 불 줄 알았는데, 동창의 극진한 대접을 받고도 입을 다물 줄이야.
혀를 내두르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그만한 독심이 있었다면 쥐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몇 푼 던져주는 것에 눈이 멀어 그간 입은 은혜도 모르고 제 주인의 곳간을 들쑤셔놓는 후안무치하고 아둔한 것들이다. 그런 것들이.
태감은 조소를 머금었던 입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그런 것들이 동창의 심문을 버틸 리가 없지 않으냐. 다만.”
“제 손에 쥐여준 동전이 누구 호주머니에서 나왔는지를 아는 놈은 없었나 보군요.”
“혹시나 그럴듯한 증언 한마디 얻을 수 있을까 싶어 열과 성을 다해 어르고 달래 보았다만, 그놈들은 자기가 빼낸 정보가 누구에게 가는지도 모르고 있더구나.”
이부상서가 공을 많이 들인 모양이다. 동창이 꼬투리 잡을 만한 것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더군. 얄미울 정도야.
태감의 말에 소년은 믿기 어렵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세상에 동창이 흠잡지 못하는 이가 있다고? 하룻밤이면 없던 죄도 만들어낸다는 동창이?
소년은 등허리를 기어오르는 소름에 몸을 떨고는 자신의 동요를 들어내지 않도록 한껏 시큰둥하게 꾸며낸 목소리로 투덜거리듯 말했다.
“거참, 귀신같은 양반입니다그려. 그래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완벽할 수는 없을 텐데, 어찌 그리도 철두철미한지.”
“그리도 철두철미하니 지금껏 상서 자리를 유지한 게지. 이런 일에 꼬리를 밟힐 만큼 허술한 이였다면 진작에 자리에서 내려왔을 거다.”
황제 폐하께서 손을 쓰실 필요도 없이, 아마 뒤에서 칼을 맞고 몰락했을 테지.
태감은 쓰게 웃고는 등받이에 몸을 깊게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벌건 얼굴로 술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는 소년에게 손짓했다.
그만 가봐도 좋다는 손짓.
그 성의 없는 축객령에 소년은 히죽 입꼬리를 올리고는 의자를 끌어다 태감의 코앞에 놓았다.
그러고는 삐딱한 자세로 의자에 걸터앉아 태감에게 물었다.
“이제 어찌하실 겁니까.”
태감은 검지로 관자놀이를 누르고는 뻔한 것을 굳이 물어본다는 투로 대답했다.
“이부상서와 회담을 가질 것이다.”
“여분의 칼을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암시장과 결탁하였다는 증거.
그것은 분명 대단히 날카로운 칼이었지만, 이부상서라는 정계의 거물을 쓰러뜨리기에는 부족한 물건이었다.
태감은 소년의 말을 곱씹어 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분의 칼을 준비할 수 있다면 든든할 테지. 하지만…….
“더는 준비할 수 있는 칼이 없다. 지금 가진 것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어쩌면, 조금 더 기다리면 뾰족한 수가 나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기다릴 수 없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 더는 그에게 대비할 시간을 줄 수 없다. 우리가 가진 칼이 녹슬기 전에, 그가 약점을 숨기기 전에.
태감은 달싹이던 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고는 눈을 떴다.
“너와 내가 서방으로 가기 전, 그 전에 이부상서의 일을 끝내 놓아야만 한다.”
서방으로 가기 전에.
태감의 말에 소년은 폐부 안쪽이 얼어붙는 듯한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그제야 태감이 그토록 조바심을 낸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제 곧 서방으로 떠나야 했다. 그와 태감 전부, 경사를 떠나는 것이다. 몇 달이 될지, 어쩌면 몇 년이 될지도 모르는 긴 시간을.
소년의 얼굴에 경악의 빛이 떠오른 것을 확인한 태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와 난 긴 시간 경사를 떠나 있어야 한다. 황제 폐하를 보필해야 할 숙친왕과 동창 제독이 모두 폐하의 곁을 떠나는 것이야. 그렇다면 최소한.”
“동창 제독과 숙친왕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부상서가 경거망동하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아야겠군요. 만약 허튼수작을 부리면 비밀을 폭로하겠다는.”
“그리고 그런 협박은 알고 있는 비밀이 많으면 많을수록 효과가 좋지. 그렇기에 가능하면 암시장 말고도 다른 꼬투리를 잡아두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지. 준비가 미흡하다 하여 이부상서가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줄 리도 없으니.
단조롭게 말한 태감은 어깨를 크게 한번 으쓱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뇌리를 짓무르게 하는 술기운과 고뇌의 이중주에 신음하는 소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긴히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만.”
* * *
왕부의 주방.
세상 만물이 묽은 어둠에 잠겨 고요히 잠든 한밤중이었지만 왕부의 주방만큼은 아직 오지 않은 새벽의 한 귀퉁이를 잘라다 놓은 듯이 환했다.
소년은 한 묶음의 장작과 불씨로 잠들어 있던 왕부의 주방에 새벽녘의 활기를 불어넣었다.
풍로가 숨을 불어넣을 때마다 불꽃은 시뻘건 혀를 날름거리며 기세 좋게 타올랐다.
밤의 끝자락을 불사를 듯 거세게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소년이 철과를 휘두른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던 땀방울이 눈썹에 닿기도 전에 증발할 만큼의 열기에 태감은 기가 죽었는지 뒷걸음질 쳤다.
“화려하니 보기는 좋다만, 오밤중에 너무 요란을 떠는 것 아니냐?”
“요새 이렇게 큰불 쓰는 요리를 통 못했더니…….”
소년은 멋쩍게 웃고는 다시 앞머리를 그을릴 기세로 타오르는 불꽃에 시선을 집중했다.
소년이 철과를 돌릴 때마다 온갖 재료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불꽃의 품에 안겨들었다.
아삭아삭한 식감의 양파, 향기로운 부추, 그리고 달착지근한 양배추, 연노란빛이 도는 애호박과 가늘게 채 썬 돼지고기.
돼지고기에서 배어 나온 기름에 야채가 반지르르하게 윤이 돌 때쯤 소년은 고추기름과 간장, 굴소스를 넉넉하게 둘러 재빠르게 볶아내고는 미리 끓여두었던 사골 육수를 부었다.
여기에 통통하고 씹는 맛 좋은 중화면을 삶아 넣고, 마지막으로 얇게 저며낸 다음 살짝 지져 기름을 뺀 차돌박이를 넉넉하게 올려주면 오늘의 야식, 차돌박이 짬뽕이 완성이었다.
태감은 얇은 고기가 듬뿍 올라간 짬뽕의 위엄있는 자태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그릇을 받아들자마자 장황한 육식 예찬론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 지금껏 짬뽕의 건더기로는 해물이 제일이라 생각하였는데, 오늘 그것이 내 단견임을 깨달았다. 역시, 세상 먹거리의 으뜸은 고기임이 분명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이리 가슴이 벅차고,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이리 황홀한데. 아아, 그간 겉치레만 화려한 해물에 눈이 멀어 소박한 자태에 감춰진 진가를 알지 못하였구나.”
“딱히 해물의 자태에 눈이 머셨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말입니다.”
홍합 많이 드리면 늘 까먹기 귀찮다고 투덜대셨던 것 같은데.
소년의 핀잔을 귓등으로 흘리며 태감은 차돌박이의 그 달착지근한 기름기를 한껏 탐닉하였다.
꼬들꼬들한 지방과 쫄깃한 살코기의 감미로운 대비, 씹으면 씹을수록 혀를 흠뻑 적시는 소기름의 짙은 감칠맛. 그리고 그 감칠맛이 녹아든 얼큰한 짬뽕 국물.
뇌척수에 차오르는 그 자극적인 희열에 태감은 전율했다.
그저 고기만을 먹어도 좋으리라. 하지만, 이 고기가 이토록 얇고 넓적한 모양인 이유는 분명.
태감은 자신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젓가락을 움직였다.
수북하게 쌓인 차돌박이 아래에서 노오란 면발을 찾아낸 태감은 그것을 한번 뒤집고는 넓적한 차돌박이 한 첨을 집어 면 위에 올렸다.
그리고는, 차돌박이로 면을 감싸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차돌박이의 거친 결이 혀에 닿는 순간, 태감의 입안은 수십 가닥의 탄력 있는 면발로 가득 들어찼다.
볼이 미어지도록 면발을 욱여넣는, 매끈한 면발이 목구멍 안쪽의 부드러운 점막을 간지럽히는 그 느낌.
태감은 너무 급하게 면발을 삼키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씹으며 살짝 벌린 입술 틈 사이로 국물을 들이마셨다.
맵고, 기름지고, 뜨거운 액체가 면발의 틈새를 비집고 입안에 범람한다.
볼 양쪽에 꽉 들어차 있던 면발이 짬뽕 국물을 윤활유 삼아 목구멍 안쪽으로 사르르 미끄러진다.
묵직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뱃속에 자리 잡는 그 감각, 그와 함께 태감은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내쉬는 숨에선 알싸하고도 톡 쏘는 고추의 매운 냄새가 느껴졌다.
“면도 좋다만, 이 얼큰한 국물에 밥을 만나면 또 어떨지 궁금하구나.”
“허어, 짬뽕밥까지. 아주 알뜰하게 챙겨 드십니다그려.”
아쉽게도 늦은 밤중이었기에 주방에 남아 있던 거라곤 식은 밥 한 덩이뿐이었다.
하지만 뜨거운 국물 한 대접을 가진 이에게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소년은 태감이 고추기름이 둥둥 뜬 짬뽕 국물에 식은 밥을 마는 것을 보고는 자신의 짬뽕 국물을 들이켰다.
태감의 것과는 달리 소년의 짬뽕은 속풀이 해장용이었기 때문에 차돌박이 대신 시원한 감칠맛을 더해주는 조개가 한주먹 들어가 있었다.
후루룩 마시는 소리 두어 번, 그리고 쩝쩝거리는 소리가 서너 번쯤 식탁 위를 오가고 난 후, 한밤중의 식사는 끝이 났다.
소년은 그릇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며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태감에게서 야멸찬 태도로 빈 그릇을 징수해 갔다.
그러고는 공허함에 허우적거리는 태감에게 퉁명스러운 어조로 질문했다.
“그래서, 그 긴히 하실 부탁이란 게 대체 뭡니까?”
“방금 먹은 짬뽕을 한 그릇 더 내주는 것이 부탁이라면?”
“앞으로 영원히 짬뽕만 드시게 될 겁니다.”
오 세상에, 이런 무시무시하고도 감미로운 협박이라니.
태감은 진지한 태도로 소년의 제안을 검토하여 소년을 질리게 하고는 용건을 꺼내놓았다.
“너도 알겠지만, 법국으로 가는 여정은 길고도 험난할 것이다. 우선은 사막을 건너야 하지.”
“사막이라. 편안하고 안락한 여정은 아니겠군요.”
“그래, 고단하고 힘겨운 여정이 되겠지. 낮에는 몰아치는 모래폭풍과 폐부를 쥐어짜는 끔찍한 더위가, 밤에는 뼈마디를 찌르는 가혹한 냉기가 여행자들을 시험하는 땅, 아무리 황실에서 수많은 인력과 자금을 동원한다 해도 안전하리라 장담하기는 어려울 테지. 그러니.”
“사막길을 잘 아는 길잡이가 필요하단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마침 네가 보유한 인맥 중에는 사막 무역로에 정통한 무역상이 있지 않으냐.
능글맞은 웃음을 짓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씁쓸한 숨을 몰아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쩌다 보니 거대 무역상단의 단주 놈을 제자로 두게 되었지요.”
“그야말로 천운이 아니냐. 마침 서방 무역로를 걸어야 하는데, 무역로에 정통한 무역상을 제자로 두고 있다니.”
“예, 표자승에게 수완 좋은 길잡이를 한 명 소개해 달라 부탁해 보지요.”
수완 좋은 길잡이는 상단에서도 귀한 인재일 테니 쉽게 내어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스승 부탁인데 박정하게 굴지는 않겠지요.
힘없이 혀를 차던 소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태감을 바라보았다.
“태감님, 혹시 제한조건은 없습니까? 뭐, 나이가 너무 어리면 안 된다든가, 여성은 안된다든가.”
“무역로에 정통하고 수완만 좋다면 성별 나이 신분 따지지 않으마.”
“성별, 나이, 신분 무제한이라…….”
그렇다면 한 명, 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소년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태감에게 거듭 약조를 받았다.
“태감님, 분명 수완만 좋다면 성별, 나이, 신분은 따지지 않겠다 하신 건 태감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