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86화 외전 75화
“이부상서를.”
본다. 만난다.
만나서, 무엇을 할 것인가.
웃으며 악수를 할 것인가. 덕담을 나눌 것인가.
과거의 은원은 모두 잊고 함께 화합하여, 밝고 건전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 약속할 것인가.
소년은 세게 도리질 치고는 입가를 일그러뜨렸다.
입꼬리를 귀밑까지 길게 찢은, 상호 오운의 흉소.
“예전처럼, 그럴 수는 없겠지요.”
책임질 것이 없었던, 제 목숨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를 수 있었던 후궁의 시절이었다면 분명. 이렇게 말했으리라.
책임은 제 목으로 질 테니, 그냥…….
“네가 이부상서를 암살하겠다. 분명 그리 말했을 테지.”
“그때는 좋았지요. 삶에 미련도 없겠다, 참주패도 있겠다, 잘 드는 비수도 한 자루 있겠다, 세상 거리낄 것이 없었지요.”
“아쉽겠구나. 예전처럼 활개 치고 다닐 수 없으니.”
“아쉽지요. 전에는 좋았는데 말입니다.”
“그리우냐. 그때가.”
소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태감을 보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립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닙니까. 왕이, 제 목을 함부로 굴리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 환관 시절을 그리워한다니요.
소년은 한참 동안 끅끅거리며 웃었다. 그러고는 눈초리에 눈물방울을 매단 채 입을 열었다.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 것은 회한에 잔뜩 찌들어 쉬어버린 목소리였다.
“예, 그립습니다. 그리워서 죽을 것 같습니다.”
분명, 어깨가 무거워져서일 테지요.
소년은 깊게 숨을 몰아쉬고는 아랫입술을 질근질근 씹었다.
잇자국이 남은 소년의 입술을 보며 태감은 쓴웃음을 짓고는 중얼거렸다.
“그래, 네가 책임져야 할 것이, 참 많이도 늘어났지.”
이제는, 전과 같은 방식으로 정치를 할 수 없다.
독오른 칼을 품에 안은 채 후궁 밑바닥을 기던, 자신의 목숨으로 책임지겠다 호언장담하던. 후궁의 상호 오운의 방식을 버려야 할 때다.
이제는.
태감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소년을 보고는 짧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이제는 왕의 정치를 배울 때다.”
목숨을 맡기는 자가 아닌, 목숨을 맡는 자의 정치를.
목숨을 맡는 자의 정치.
소년은 그 말을 입에 담고는 눈을 감았다.
태감님. 당신 또한 이런 기분이셨습니까.
제가 충성을 맹세한 날, 당신에게 목숨을 내맡긴 날. 당신을 위해 죽겠노라, 그리 말한 날. 이런 기분이셨습니까.
소년은 혀끝에 응어리진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지 않았다.
그 대신, 소년은 냉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책임지는 것이 무섭다고 어리광을 부릴 나이는 아니지요.
“요리사에서 정치가로, 나이 육십에 제2의 인생이라. 이것 참, 기막힌 전직입니다.”
“나이 육십, 새로운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기에 적절한 나이지.”
“관짝을 맞추기에 적절한 나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나이에 관련된 자조적인 우스갯소리를 늘어놓던 소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태감에게 물었다.
“태감께서 보시기에, 제 정치력은 어느 정도입니까?”
“네 정치력 말이냐?”
“예. 태감께선 여러 정치가를 봐오셨을 것 아닙니까. 태감께서 보시기에, 그래도 제가 정치가로서 쓸 만한 물건입니까. 아니면.”
밑바닥부터 다시 배워야 할 풋내기입니까.
별 기대 안 한다는 투로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소년은 내심 후한 평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이 그간 쌓아온 연륜이라는 것이 있는데, 설마 풋내기 소리를 들을까. 후궁 밑바닥을 기며 쌓아온 것도 있고 어깨너머로 배운 것도 있으니, 일류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은근한 기대감을 내비치는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며 태감은 빙긋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웃는 얼굴로 소년의 폐부에 칼을 쑤셨다.
“빈말로라도 이류라고는 못하겠다.”
“이류라고는 못하겠다. 그 말씀은 일류라고 대놓고 칭찬하기는 부끄러우니 에둘러 말씀하시는, 그런 건 아니겠지요.”
“솔직히 말하자면 삼류 수준이지. 이제 막 정치에 입문한 풋내기이나, 풋내기 중에서도 특별히 재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 수준.”
넌 딱 그 정도란다.
태감의 신랄한 평가에 소년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는 끓어 넘치는 냄비에 억지로 뚜껑을 눌러 덮어놓은 듯한 표정으로 씹어 뱉듯이 물었다.
“허어, 무척 박한 평가인데, 그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들어봤자 상처만 남을 텐데. 뭐, 그리 원하니 어쩔 수 없지.”
태감은 너무 마음에 두지 말라는 점잖은 당부를 남긴 후, 소년이 이류도 못 되는 삼류인 이유를 조곤조곤 설명했다.
어조가 나긋나긋하고 태도는 상냥했다.
“우선, 네가 그나마 삼류라는 평이나마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목숨을 헌신짝 내버리듯 버리는 그 독특한 의외성 때문이다.”
세상에 제 목숨이 아깝지 않은 이는 없지. 물론 목숨 따윈 언제든 내버릴 수 있다 호언장담하는 이들은 많지만.
“그런 이들 중 진심으로 목전에 들어온 칼 앞에서 의연함을 보이는 걸물은 없었지.”
그렇기에 언제나 공멸을 전제로 한 너의 계략은, 자기 보신을 최우선시하는 정치가들에게는 신선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의표를 찌르는 것이었지. 하지만.
“이제 더는 네 목을 걸 수 없으니. 그 의외성을 제외하고 한 명의 정치가로서 너를 평가하자면…… 계략을 짜낼 줄은 아나 어설프고, 적의를 품을 줄은 아나 지나치게 맹목적이며, 사람을 이용할 줄은 아나 너무 쉽게 정을 줘버리니. 정치가로서 대성할 재목은 아니다.”
어때, 납득이 되었느냐?
태감이 묻자 소년은 깊이 탄복했다는 투로 대답하였다.
“태감님, 내일 식사는 혼자 알아서 드십쇼.”
“아니, 솔직한 답을 원한 것 아니었느냐?”
“제가 언제 솔직한 답을 듣고 싶다 했습니까?”
이런 눈치 없는 양반을 봤나.
대놓고 사탕발림을 원했다고 말하는 소년의 뻔뻔함에 혀를 내두른 태감은 어쩔 수 없이 말한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그. 사사오입 하면 이류쯤은 된다.”
“예, 거참 위안이 됩니다그려.”
너무 위안이 돼서 앞으로 일주일쯤은 식탁을 파릇파릇한 거로만 차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년은 빈정거리듯 입술을 비죽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참나, 해달라는 대로 해줬는데 뭐가 또 불만인지.
대놓고 툴툴거리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던 태감은 휘적휘적 걸어가는 소년을 보고는 물었다.
“그래서, 내일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
“예. 있지요. 일.”
“나한테 심술부리는 것 말고도?”
소년은 입꼬리 한쪽을 씰룩거리며 킬킬거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심술이 주된 이유기는 합니다만, 그것 말고도 일이 있습니다.”
이제 정치를 해야 하니, 우선은 기반을 다져둬야 할 것 아닙니까.
* * *
이튿날. 숙친왕부에는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다.
보통 사내보다 머리 하나가 큰 탄탄한 체격에 단정하게 무복을 차려입은 사내는 절제된 폭력성과 강직한 인품을 고루 갖춘, 그야말로 무관의 표상과도 같은 자였다.
만약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이라면 누구나 그가 금군의 차기 별장이라 불리는 비룡대주라는 것을 알 것이다.
비룡대주 악진평.
그는 어떤 이유로 숙친왕부를 방문한 걸까.
숙친왕께 부름을 받은 것인가.
호사가들이 눈이 빠지도록 왕부의 대문을 주시하는 가운데, 왕부의 응접실에선 숙친왕과 비룡대주가 마주 앉아 서로를 응시하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비룡대주였다.
“숙친왕 전하를 배알하나이다.”
“커흠, 비룡대주.”
사적인 공간입니다.
더없이 정중하고 극진한 인사에 숙친왕은 난처한 얼굴로 투정을 부리듯 말했다.
그에 비룡대주 악진평은 근엄한 무관의 얼굴에 순박한 미소를 띠고는 대답했다.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어쩔 수 없구려.”
그 무덤덤한 평대에 소년은 그제야 막힌 숨이 뚫렸다는 듯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소년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진 것을 본 악진평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호기심이 깃든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소년의 앞쪽에 놓인, 분명 달콤한 미주가 들어 있을 것이 분명한 청자병을,
은은한 옥빛이 도는 청자병에는 푸르스름한 안료로 구름과 난초가 그려져 있었다.
술병으로 쓰기보다는 근사한 받침대에 받쳐 서고나 응접실 한구석을 장식하는 용도로 쓰여야 마땅할 훌륭한 물건.
하지만 눈앞의 청자병에는 미술품으로 쓰이는 병에는 없어야 할 것, 내용물을 간수 하기 위한 ‘마개’ 가 있었다.
과연, 저런 훌륭한 병에 담긴 술은 어떤 맛일까.
기대감으로 반짝이는 악진평의 눈을 들여다본 소년은 피식 웃음을 짓고는 병목을 가볍게 쥐었다.
“내용물이 궁금하신가 봅니다.”
“예술에는 문외한이네만, 병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겠네. 분명 진귀한 물건일 테지. 그리고 그런 귀한 병에 담긴 것이라면 분명…….”
“허우대가 멀쩡하다고 해서 속 알맹이까지 그럴듯하리란 법은 없지 않습니까. 이것도 병만 번드르르하지, 속은 싸구려 분주일 수도 있지요.”
전하께서 그런 장난을 치실 분은 아니지 않은가.
목울대를 움찔거리며 마른침을 삼키는 악진평의 재촉에 소년은 하는 수 없다는 듯 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요사스럽게 빛나는 새빨간 칼날이 병목의 밀랍을 뜯어내고 마개를 뽑아내자.
“웃……!”
한순간에 이성을 증발시켜 버릴 만큼 달착지근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살금살금 기어올라서는 콧속으로 훅 파고드는 다디단 향기, 너무나 달아서 진저리가 날만큼의 단 향기.
악진평은 현기증을 느끼며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대체, 무엇이오.”
“대주님, 혹시.”
홍시로 담근 술을 드셔보신 적 있으십니까?
소년은 마치 꿀에 절인 사과와도 같은 달착지근한 미소를 머금은 채, 더없이 사근사근하고 나긋나긋한, 소원을 이루어주겠다 약속하는 악마와도 같은 투로 말했다.
“홍시로 담근 술이라.”
“홍시를 드셔보신 적은 있으시겠지요. 아시겠지만, 홍시는 정말 당도가 높지요. 늦가을에 무르익은 그 주홍빛의 말캉하고 즙 많은 과육은…….”
악진평은 자신도 모르게 소매로 입가를 훔쳤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다 큰 어른이 저질러서는 안 될 추태를 저지를 것만 같았기에.
소년은 배려심을 발휘하여 시선을 조금 내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 달콤한 과육을 주물러 으깨 술을 담갔으니 얼마나 달고 향기롭겠습니까. 한 모금 입에 머금으면…….”
“머금으면?”
“꿈결처럼 황홀하지요.”
비룡대주는 참지 못하고 더운 숨을 한껏 몰아쉬고는 허물어지듯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마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늘어진 비룡대주를 향해, 소년은 간교한 쐐기를 박아넣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보다 더 단 것도 있습니다. 바로 고욤이지요.”
“고욤? 고욤이라 하면 그, 손톱만 한 감 아니요. 맛이 떫고 아려 먹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알고 있는데?”
“덜 익은 고욤은 확실히 감보다 더 떫고 써, 혀가 아리지요. 하지만 잘 익은 고욤은.”
농익은 늦가을 감을 햇볕에 잘 말린 곶감처럼 진하게 농축된 단맛이 나지요. 그리고 그 고욤으로 담근 술은.
소년은 한껏 핏발이 선 악진평의 눈을 들여다보며 간드러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벌집에서 갓 짜낸 꿀을 마시는 것처럼 강렬하고 풍성한 단맛을 품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 술이…….”
“예, 바로 고욤으로 담근 술입니다.”
제가 지난 늦가을에 담가 아껴둔 비장의 술이지요.
소년은 손에 쥐고 있던 마개를 다시 병에 꽂아 넣고는 병을 악진평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탁자 아래로 내렸다.
“아쉽게도 오늘은 사람이 적어, 맛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람이 적어 맛보기 어렵다니, 그게 무슨…….”
“고욤주는 당도가 높아 많이 마시기 힘든 술입니다. 첫 잔은 천상의 이슬처럼 달지만, 두 잔부터는 버겁지요. 거기에 고욤은 약성이 강해 적정량 먹으면 중풍과 혈압을 치료하고 설사를 멈추는 효능이 있지만, 성질이 대단히 차기 때문에 과하게 복용하면 되레 심한 설사를 유발하지요.”
그러니 술자리를 끝맺으며 딱 한 잔, 기분 좋은 마무리를 하는 데에 좋은 술입니다만.
아쉽다는 듯 혀를 차는 소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악진평을 바라보았다.
소년이 내려놓은 술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던 악진평은 조금 늦게 그 시선에 반응했다.
“그러고 보니, 배 단주님께 경사가 있었지요?”
“경사? 아아, 그렇지.”
“배 단주님께서 득녀를 하셨으니, 축하 연회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금 늦기는 했습니다만.”
득녀라.
소년은 배 단주를 꼭 빼닮았다는 악진평의 말을 떠올리고는 한기가 치민다는 듯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떨떠름함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악진평을 바라보았다.
“만약 그쪽에서도 괜찮다 하시면 오랜만에…….”
“설마, 전하께서 직접 솜씨를 발휘하시려는 것이오?”
“그야 물론이지요.”
경사에 저보다 솜씨 좋은 요리사가 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