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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85화 (286/314)

환관의 요리사 285화 외전 74화

껍질 깐 새우 한입에 칼칼한 백주 한 잔, 장미술과 양파를 넣고 삶은 삼황닭에 향기로운 매실주 두 잔, 야들야들한 오리고기 볶음에 달착지근한 황주 석 잔, 꿀 향기로 치장한 기름진 곰 발바닥에 맑고 청아한 죽엽청 넉 잔. 그리고.

온갖 산해진미의 달고 기름진 육즙을 담뿍 빨아들인 말랑한 무 한 토막에 구수한 탁주 한 동이.

큼직한 뚝배기 하나에 과실주 한 병, 청주 세 병, 탁주 한 동이로 거나한 잔치를 끝낸 소년이 왕부의 문턱을 밟았을 때는 이미 중천에 뜬 달이 기우뚱한 각도로 기운지 오래였다.

벌겋게 물든 얼굴로 아이들과 단혜림을 잠자리로 등 떠밀어 보낸 후, 소년은 기우뚱거리며 왕부의 주방으로 향했다.

술기운에 달아오른 목을 축이기 위하여, 그리고.

“역시, 여기 계실 줄 알았습니다.”

일을 끝마치고 지친 몸을 끌고 돌아온 태감에게 야식거리를 내어주기 위하여.

소년의 예상대로 태감은 호롱불 하나 켜두지 않은 캄캄한 주방의 식탁에 엎드려 있었다.

창백한 달빛을 받으며 긴 머리카락을 상 위에 풀어헤친 채 엎드려 있는 그 모습은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비련의 여인 같기도 했고 원한에 사무친 처녀 귀신 같기도 했다.

이게 산 태감일까, 아니면 죽은 태감일까. 고민하던 소년은 후자일 가능성을 고려하여 문 쪽으로 한 걸음 발을 빼고는 입을 열었다.

“왜 불도 안 켜시고 혼자 청승이십니까.”

다행히도 산 태감이었다.

소년의 말에 태감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폐부를 쥐어짜 내는 듯한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배가 고파 불 켤 힘도 없다. 그리 말씀하시겠지요.”

소년은 낄낄 웃고는 불씨통에서 불을 가져다 아궁이에 불을 피웠다.

그러자 뜨거운 불빛이 확 일어나 주방 안에 고여 있던 어둠을 걷어내었다.

따스한 열기에 굳은 손발이 좀 녹았는지 태감은 한결 부드러워진 동작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윤기가 자르르 도는 소년의 입술을 보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잘 먹고 온 모양이구나.”

“예. 태감님은 피죽도 못 먹고 오신 모양입니다.”

“그래, 일이 바빠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지.”

허기진 배를 누르며 처연하게 중얼거리는 태감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져서는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처럼 위태롭게만 보였다.

누가 보면 한 석 달쯤 굶고 온 사람 같구만.

소년은 속으로 핀잔을 삼키며 아궁이 앞에 섰다.

“그럼 뭔갈 좀 드셔야겠군요. 허기가 지면 잠도 안 오니 말입니다.”

“이왕이면.”

“예, 고기 종류로 올리겠습니다.”

소년은 마치 생의 마지막 유언을 남기듯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하는 태감에게 건성으로 손을 내저은 후 찬장과 창고를 들쑤셔 먹을 만한 것들을 추려왔다.

씨알 굵은 여름 감자 몇 알에 닭장에서 졸고 있던 닭 한 마리, 그리고 청고추 몇 개와 양파.

제법 그럴듯한 요리를 낼 수 있을 법한 재료가 갖추어지자 태감은 기대감을 한껏 담아 소년을 바라보았다.

“호오, 여름 감자가 있구나.”

포슬포슬하면서도 맛이 모난 데 없이 순하고 담백하니, 감자는 어떻게 먹어도 좋은 음식이지.

가늘게 채 친 다음 기름에 볶아내면 산동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밥반찬이 되고, 아니면 강판에 갈아 기름에 지져 전을 부치면 겉은 바삭하고 속은 쫀득한 것이 간식으로도 좋고 술안주로도 일품이지.

아니면 굵직굵직하게 썰어 밥에 넣어 감자밥을 해도 맛좋고, 그저 삶거나 구워 소금만 뿌려도 훌륭하고.

하지만 이만한 재료가 갖추어져 있다면 역시.

태감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추와 양파를 넉넉하게 넣고 닭과 함께 조려내는 조림요리. 감자와 닭을 하나로 묶는 데는 역시 조림이 으뜸이지.”

동북 지역에서 즐겨 먹는 방식으로 달착지근한 간장 양념으로 조려도 좋고, 아니면 신강 쪽에서 즐기는 식으로 마른 고추를 넉넉하게 넣어 조려도 좋고, 아니면 경사에서 즐기는 식으로 짭짤하고 쿰쿰한 콩장을 넣어 구수하게 조려내도 좋으리라.

어떤 양념으로 조려내든 닭과 감자는 근사한 화합을 보여줄 것이다.

“그 달고 고소한 닭기름과 양념을 빨아들인 감자, 포슬포슬하고 샛노란 감자를 숟가락으로 뚝 잘라 입에 넣으면 은근한 단맛이 뜨거운 열기와 함께 입안을 가득 채울 테지.”

“거기에 닭고기를 곁들이면 또 맛이 색다르지요. 결대로 찢어지는 파삭한 가슴살, 통통하게 살 오른 쫄깃한 다리 살, 그것들을 감자와 양념으로 범벅이 된 밥 위에 올리면…….”

짭짤한 간장 양념도 좋고, 그윽한 콩장 양념도 좋지만, 역시 한국 사람에게는 벌건 매운 양념이 으뜸 아니겠는가.

시뻘건 양념을 입은 감자를 푹푹 으깨 밥과 비벼서, 미리 발라둔 닭고기를 올려 입안 가득 욱여넣으면, 그 행복을 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소년은 입안 가득 차오른 군침을 삼키고는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고는 닭고기 감자조림에 대한 열망으로 한껏 들뜬 태감에게 대단히 송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분명 맛좋을 테지요. 하지만.”

하지만.

그 정중하고 온유한, 그리고 차가운 말에 태감은 몸을 떨었다.

안 된다. 불가능하다. 어려울 것 같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자. 그런 말들의 서두를 장식하는 그 건조한 한마디는 태감에게서 표정을 빼앗아갔다.

절망감마저 스러진, 빈 껍데기 같은 공허함만이 남은 태감을 가만히 올려다보며 소년은 사망 선고를 내리는 의사와 같은 무정함을 담아 말했다.

“조림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째서. 태감은 뚝뚝 방울져 흐를 것만 같은 침묵으로 물어왔다.

도대체 왜.

그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은 눈으로 물끄러미 태감을 보던 소년은, 조심스럽게 답을 내놓았다.

* * *

“조림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지요.”

더 허기를 견디실 수 있습니까. 기다리실 수 있습니까. 멀건 찻물로 허기를 달래시면서. 뭉근한 불에서 끓어오르는 조림의 냄새를 참을 수 있습니까.

소년의 질문에 태감은 대답하지 못했다.

스스로의 인내력을 신뢰하지 못하는 태감과 눈을 마주친 소년은 무뚝뚝한 입가에 작게 미소를 걸고는 말했다.

“그래서, 튀김을 하기로 했습니다.”

“튀김.”

태감의 입에서 탄식과도 같은 숨이 새어 나왔다.

튀김. 이 얼마나 감미롭고 자극적인 이름인가.

밤의 끝자락에 걸린 달이 새벽으로 기우는 시간, 모두가 잠든 시간에 먹는 튀김이라니.

마치 얼어붙은 땅 위에 돋아난 한 떨기 화사한 봄꽃과도 같은 미소를 지으며 태감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괜찮겠느냐?. 밤중에 튀김이라니.”

평소였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한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텐데.

태감의 말에 소년은 멀건 웃음을 지었다.

“그야 평소였다면 그랬겠지만, 지금은 위급 상황 아닙니까. 우선은 급한 불부터 끄고 봐야지요.”

소화불량과 성인병은 내일의 일 아닙니까. 어차피 용의 피는 병도 안 걸린다니, 그걸 믿어봐야지요.

말을 끝마친 소년은 아직 잠에 취해 꾸벅꾸벅 졸고 있는 닭을 잡아다 손질한 다음 도마 위에서 여덟 등분 해 펼쳐 놓았다.

다리와 허벅지살, 날개, 그리고 척추를 따라 나눈 몸통. 껍질 붙은 뽀얀 고기 토막을 보며 태감은 엄습해 오는 허기를 느꼈다.

“이대로 튀겨도 좋지만, 그렇게 하면 익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오늘은 작게 토막 쳐서 튀기겠습니다. 혹시 큼직한 살코기를 뜯고 싶으시면.”

“커도 좋고 작아도 좋으니 빨리 입에 넣을 수 있게만 해다오.”

태감의 재촉에 소년은 한입 크기로 모든 고기를 토막 친 다음 큰 대접에 옮겨 담았다. 그리고는 양념 통에 손을 넣어 밑간하기 시작했다.

소금에 후추, 마늘가루 듬뿍. 훈제한 고추로 만든 고춧가루…….

정해진 레시피도 없이, 계랑도 없이. 소년은 오직 자신의 감각에만 의지하여 밑간을 끝냈다.

튀김옷은 물 반죽 없이 전분 가루만을 입혀서, 소년은 전분 가루에도 향신료와 소금으로 간을 맞춰준 다음 닭에 얇게 가루를 입혀냈다.

“자, 닭은 준비가 되었으니.”

이젠 감자를 준비할 차례군요.

소년이 감자를 길쭉하고 큼직하게 여덟 조각을 내는 것을 본 태감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자도 튀길 것이냐? 양념을 입혀서?”

“예, 경사 쪽에선 주로 찌거나 굽거나 해서 먹지만, 산서성에선 감자를 튀겨먹기를 즐기지요. 드셔보시면 놀랄 겁니다.”

감자가 말린 향초와 매운 양념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닭이 튀김옷을 차려입는 동안 아궁이에 올려둔 기름솥에선 황금빛 기름이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하나둘, 솥 밑바닥에서 기포가 솟아오르는 것을 본 소년은 젓가락이나 튀김 가루로 온도를 재보지도 않고 닭을 솥에 던져넣었다.

넘실거리는 황금의 바다에 흰 거품이 솟아오른다. 맑고 투명했던 바다는 탁한 빛으로 물들어서는 부르르 끓어오른다.

귓가를 간질이는 자글거리는 소리. 그와 함께 향기가 어두침침한 주방 안을 가득 채웠다.

매콤하고 기름진, 황금의 향기가.

* * *

치킨과 감자튀김.

그렇게 명명된 음식이 상 위에 오른다.

한입에 쏙 넣을 수 있을 만큼 작게 토막 쳐진 닭은 먹음직스러운 황금빛으로 익어 있었다.

바싹하고 향기로운, 아직도 기름방울이 톡톡 튀어 오르는 황금빛 튀김옷.

태감은 그 황금색 아래쪽으로 엿보이는 불그스름한 양념의 색을 보았다.

“곁들이로, 초절임한 양파와 고추입니다. 금방 만들어 맛이 덜 배기는 했지만, 느끼함을 가시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겁니다.”

젓가락은, 예, 필요 없으시겠지요.

그 말과 동시에 소년은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속삭이듯이 조용한 어조로 말했다.

“식기 전에.”

드시지요.

소년을 바라본 태감은 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천천히, 조급하지 않게.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닭튀김을 눈앞에 둔 채 소매를 접어 올리는 그 동작에선 의식을 치르는 경건함마저 느껴졌다.

가늘고 긴 손목과 흰 팔뚝을 드러낸 후, 태감은 숨을 몰아쉬고는 닭튀김을 집어 들었다.

“다리를 고르셨군요.”

“다리라.”

가장 인기 많은 부위를 골랐군.

태감은 흐릿한 미소를 짓고는 작게 입을 벌렸다. 발그레한 입술, 희고 고운 앞니가 튀김을 문다.

귓바퀴에 울리는 바싹 소리. 한 박자 늦게 튀김옷에 가둬져 있던 육즙이 터져 나온다.

다리 살. 즙 많은 살코기에 배어 있던 기름진 육즙이 입술을 타고 넘어와 혀를 흠뻑 적신다.

마치 긴 가뭄에 메말라 쩍쩍 갈라진 논밭이 단비를 받아 마시듯이, 메마른 혀는 탐욕스럽게 뜨거운 육즙을 탐했다.

향신료가 녹아든 육즙은 뜨겁고도 짭짤했으며 혓바닥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 매콤함을 품고 있었다.

“달구나, 참으로 달아.”

이 기름진 것이. 이 맵고 자극적이고 바삭한 것이. 전부 나의 것이라니. 오직 나만의 것이라니.

태감은 떨리는 손으로 다음 부위를 집어 들었디. 다음은 날개였다. 가느다란 두 개의 뼈가 들어 있는 것.

한입에 쏙 넣으면 그대로 뼈만 앙상하게 남는 그 작은 고기는, 사실 닭고기에서 가장 기름진 부위이기도 했다.

“날개는 껍질이 가장 많이 붙은 부위지요. 그 때문에 가장 기름지고.”

“가장 맛있는 부위지.”

기름에 무한한 긍정을 보이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리고 소년이 헛웃음을 흘리는 동안 태감은 쉬지 않고 튀김을 탐닉했다.

살집 두툼한 가슴살, 야들야들한 허벅지살, 뜯어먹는 재미가 있는 목과 아삭아삭한 식감의 모래집. 그리고.

“감자. 그래, 닭고기에 취해 이것을 잊고 있었구나.”

감자튀김.

반달 모양으로 잘라 넉넉한 양념을 입은 그것은 닭튀김에 못지않은 매력으로 태감을 유혹하고 있었다.

껍질째 튀긴 감자는 바삭했고, 향기로웠으며, 놀라울 만큼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마치 안쪽에서 녹아내린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만큼.

정신없이 두 번째 감자를 입으로 가져가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애석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케첩도 맥주도 콜라도 없으니, 퍽 섭섭한 상차림이 되었군요.”

“그건 또 무엇이냐?”

“토마토에 식초와 설탕 등으로 만든 시큼 달큼한 양념과 보리로 만든 술, 그리고.”

도대체 콜라는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까. 색깔은 검은데 맛은 달고 입에선 톡 쏘는, 등골을 오싹하게 하는 그 짜릿한 한 모금을.

소년이 고민하는 동안 식사를 끝마친 태감은 기름으로 반질거리는 입술을 핥고는 헤실헤실 웃음 지었다.

“이제야 허기가 좀 가시는구나. 일할 기운이 나는군.”

“아직 일이 남으셨습니까?”

쥐 잡는 일이야 하루면 끝날 줄 알았는데.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을 보며 태감은 피로가 묻어나는 얼굴로 말했다.

“쥐를 잡는 일이야 진작에 끝났다. 폐하께서 이미 명단을 만들어 두셔서, 어렵지 않게 끝냈지.”

“그렇다면?”

“곳간을 들쑤신 쥐들은 잡았으니. 이제 쥐들이 들쑤셔 놓아 엉망이 된 곳간을 수습해야지. 그리고 수습이 끝나면…….”

“곳간에 쥐를 푼 작자의 낯짝을 보러 갈 차례군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입꼬리를 길게 찢어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제 이부상서를 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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