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84화 외전 73화
정오. 사람들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태양은 낮이 가장 길어지는 계절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 기운찬 태양이 지상에 쏟아붓는 한여름의 햇살은 음습하고 축축한 경사의 뒷골목 구석에 있는 초라한 대장간에까지 고개를 들이밀었다.
가열로의 잿가루를 긁어내던 늙은 대장장이는 반가운 여름 손님이 문지방을 밟는 것을 보고는 고무래를 내려놓았다.
들이친 햇살 속에는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늙은 대장장이는 입꼬리를 추켜올리고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 일이냐.”
“어쩐 일이긴.”
술 퍼마시러 왔지.
화답하는 목소리는 어린아이의 것이었다. 대답과 동시에 햇살과 함께 소년이 문지방을 넘어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품에는 큼직한 광주리를 안은 채.
백윤은 광주리를 받아들고는 허름하게 차려입은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고는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유람 다녀온 놈이 몰골이 왜 그 모양이냐. 피죽도 못 얻어먹은 것마냥 핼쑥해서는.”
“말도 말아, 하여간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더니, 육시럴.”
“하여간 팔자소관 사나운 놈은……. 그런데 애들이랑 그 아가씨는 어디 가고 너 혼자 덜렁 왔냐?”
“잠깐 심부름 좀 부탁했지. 먹을 것 좀 사 오라고.”
뭘 얼마나 처먹으려고 그래. 싸 온 것도 많구먼.
백윤은 광주리에 덮어놓은 천을 들춰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손때묻은 낡은 광주리 안에는 온갖 진귀하고 맛좋은 산해진미가 그득하게 담겨 있었다.
말린 해삼이며 전복, 상어 지느러미에 말린 가리비 관자며 사슴의 힘줄이며 곰 발바닥에 곰보버섯에 능이버섯, 꾀꼬리버섯, 달걀버섯 등 호사스럽기 그지없는 광주리의 내용물에 얼이 빠진 백윤을 보며 소년이 낄낄거렸다.
“물 좋지? 역시 반룡궁 주방에서 꿍쳐온 거라 그런지 때깔부터가 틀려.”
“반룡궁? 이 오사랄 놈아. 어디 꿍쳐올 게 없어서 폐하께서 드시는 걸 꿍쳐와?”
“뭐 어때. 조카가 삼촌한테 밥 좀 얻어먹겠다는데.”
소년의 뻔뻔함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던 백윤은 이내 옹졸한 쥐 수염을 푸들대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여간 낯짝 두꺼운 놈 같으니. 세상에, 오래 살다 보니 별꼴을 다 보는구먼. 왕이라는 놈이 황제 폐하 곳간을 도적질해 오는 꼴을 다 보네.”
“내 덕에 진귀한 거 많이 보네.”
“하여간 저놈의 육시랄 주둥아리.”
물에 한 번 빠뜨려 봤으면 소원이 없겠네.
늙은 대장장이는 피식거리며 싱거운 욕설을 늘어놓고는 작게 잔치를 벌일 수 있을 만큼의 식재료가 담겨 있는 광주리를 가리켰다.
“그래서, 뭘 만들려고 저렇게 바리바리 싸 왔냐?”
“영감 혹시 분채(盆菜)라고 아나?”
분채?
모른다고 대답하려 했던 늙은 대장장이는 해묵은 기억 속에 그 이름이 남아 있음을 깨닫고는 달싹이던 입술을 눌러 닫았다.
그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기술을 쌓던 편력 장인 시절, 분명 광동 쪽에서였을 것이다.
단편적인 기억을 꿰어맞추며 백윤은 오래전 우연히 작은 마을을 지나며 맛보았던 광동의 전통 연회 음식을 떠올렸다.
“분채면 그거 아니냐. 큰 뚝배기에 이것저것 담아서 먹는…….”
분채란 정월 등의 명절이나 큰 연회가 있을 때면 빠지지 않는 광동의 전통 음식으로 큰 뚝배기에 조리한 갖가지 고급 식재를 층층이 담은 후 불에 올려 뜨거운 상태로 맛보는 이른바 모둠 요리였다.
큰 뚝배기에 다양한 식재료를 풍성하게 담아놓으니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요로워져 좋고, 양이 넉넉하니 모두가 함께 둘러앉아 먹을 수 있어 오붓하고 정겨워 좋고, 먹으면 먹을수록 새로운 요리가 등장하니 먹는 재미가 있어 좋은, 삼박자를 고루 갖춘 분채는 광동을 넘어 중국 전역에서 사랑받는 요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웬 분채냐? 무슨 경사라도 있냐?”
“경사는 무슨 놈의 경사. 그냥 날도 더워지는데 영감탱이 몸보신 좀 시키려고 그러지.”
“니가 어쩐 일로 내 걱정을 다 하냐.”
“영감쟁이 더위 먹고 쓰러지면 챙길 사람도 없잖아.”
그리고 기운 나면 칼이나 좀 만들어주고.
소년의 말에 광주리 안에서 홀짝거릴 만한 것을 찾던 백윤은 귀를 손가락으로 후비며 고개를 들었다.
노환으로 인한 청력 저하를 의심하는 늙은 대장장이에게 소년은 청각에는 이상이 없으며 청각보다는 노망을 걱정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진단을 전하였다.
그에 대장장이는 도끼날을 벼릴 때 쓰는 육중한 벼림 망치로 소년에게 혓바닥을 반듯하게 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아 자신의 정정함을 과시하였다.
“염병할 놈 같으니. 그래서, 또 무슨 칼을 만들려고. 오철에 운철이면 족해야지. 아니면, 이번엔 식칼 말고 다른 칼이 필요하냐?”
대장장이는 눈짓으로 벽에 주렁주렁 걸린 병장기 들을 가리켰다.
날을 세우지 않았음에도 섬뜩한 느낌이 전해져 오는 기다란 장검에 도끼날이 아닌가 의심스러운 육중한 칼날이 달린 월도, 뽑을 때 상처를 헤집을 수 있도록 고안된 창날, 흉흉한 병장기가 늘어선 벽을 본 소년이 너스레를 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요리사가 사람 피 볼 일이 뭐가 있다고 칼을 주문해.”
“그런 것 치고는 자주 보는 것 같던데.”
“그건 팔자가 사나워서 그렇지. 아무튼, 이번엔 내가 쓸 칼이 아니고.”
“그러면?”
너 아니면 식칼 쓸 놈이 또 누가 있다고.
그렇게 물어보는 듯한 노인의 시선에 소년은 멋쩍게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대답했다.
“칼은 애들이 쓸 거야.”
“애들?”
허 참, 그렇게 애지중지 끼고 다니더니 결국?
시큰둥하던 대장장이의 눈에 점차 놀라움과 기쁨이 번졌다.
소년은 괜스레 헛기침하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아니 난 말리려고 했는데 부득불 하겠다니 어쩔 수 있나. 거참, 손에 물 마를 일 없는 피곤한 일이라 어지간하면 하지 말라 하고 싶은데.”
“얼씨구, 입에 침이나 발라라.”
백윤은 실실거리는 소년을 보며 피식 웃고는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고는 던지듯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래도 복이 없지는 않구만.”
장인들끼리 통하는 투박하고 건조한, 그리고 꾸밈없는 뜨거운 축하였다.
소년은 기쁨과 함께 아직 제자를 들이지 못한 외로운 대장장이에게 일말의 미안함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야. 살다 보니 복이 없지는 않아.”
그리고 영감쟁이도, 살다 보면 복 받을 날이 있겠지.
* * *
이런저런 근황 이야기에 여행길 이야기, 홍문에 있었던 호환이나 동정호의 암시장 이야기 등으로 무르익었던 잡담의 기세가 한풀 꺾일 때쯤, 아이들과 단혜림이 품에 한가득 먹을거리를 들고는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 진짜 잔치라도 벌일 생각이냐? 이걸 다 어떻게 먹으려고…….”
기름이 노란 삼황닭에, 깃털이며 발, 벼슬에 뱃속까지 까만 오계(烏鷄), 살집이 통통하고 부리에 잔상처가 없는 집오리, 그리고 깃털이 화려하고 고기는 색이 짙은 꿩까지.
가금류만 네 종류가 있었고 돼지는 내장이며 껍질, 머리 고기 등 부위별로 나누어져 있었다.
물에서 나는 것으로는 육지에서 나는 것보다 더 화려했는데, 중지만 한 통통한 민물새우와 잉어, 자라와 드렁허리에 심지어는 큼직한 민물 농어까지 한 마리 있었다.
그야말로 눈이 돌아갈 만한 광경에 백윤은 어지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 백윤에게 소년은 날씨 탓에 바다 생선을 구하지 못했다며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먹다 보면 이것도 헤퍼.”
“헤프긴 이놈이.”
“참나, 먹고 남으면 뒀다 먹으면 되지 별걸 다 걱정하네.”
소년은 턱을 다물지 못하는 백윤에게 핀잔을 던지고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분채 요리를 시작했다.
소년의 곁으로는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졸졸 따라붙었다.
“분채는 뚝배기에 재료를 넣고 한꺼번에 끓여 만드는 요리가 아니라, 이미 완성된 요리를 한꺼번에 담아 먹는 요리란다. 모든 재료를 각기 따로 조리해야 하니 시간과 공이 많이 들지만, 그 맛은 들인 수고가 아깝지 않지.”
분채의 매력은 위쪽에 쌓아둔 음식의 육즙이 점차 아래쪽으로 고이며 먹으면 먹을수록 더 깊고 맛이 진한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광동 사람들은 예로부터 분채의 가장 밑바닥에 들어가는 재료로 육즙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는 무를 골랐단다. 시간이 흐르며 산해진미의 모든 육즙이 흠뻑 배어든 말랑말랑한 무의 맛은…….”
소년은 교활하게도 맛을 상세하게 묘사하는 대신 짙은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설명을 마무리했다.
그 한숨은 백 마디의 묘사보다도 통렬하게 위장을 자극했다.
아이들의 목울대가 꼴깍꼴깍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소년은 빙그레 미소 짓고는 도마에 꽂아둔 칼을 빼 들었다.
‘그래, 요리사의 실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자극제는 바로 식욕이지. 마음껏 먹고, 마음껏 배우고, 마음껏 익히렴.’
너희들이 한 명의 훌륭한 요리사가 되는 날까지, 책임지고 먹여줄 테니.
소년은 입꼬리가 길게 찢어지는 웃음을 그리며 요리를 시작했다.
우선은 무. 무는 먹기 좋게 나박썰기로 썬 다음 닭 육수에 부드러워지도록 익혀 뚝배기의 맨 밑에 깔아준다.
“무를 깐 다음에는 이제 본격적으로 재료를 올릴 차례구나. 분채를 쌓을 때는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음식의 식감과 맛, 향을 고려하여 조화롭게 배치해야 질리지 않고 먹을 수 있음을 명심하렴.”
무의 위에 올라갈 것으로는 불에 한 번 그슬려 털을 제거한 다음 부드러워지도록 푹 살은 돼지껍질.
껍질은 국수 가닥처럼 보이도록 가늘고 길게 썬 다음 간장과 마늘에 무쳐 올린다.
“껍질 위로는 맛이 담백하고 어디에는 잘 어울리는 두부. 그냥 두부도 좋지만, 겨울철에 얼려서 말린 동두부(凍豆腐)는 국물을 담뿍 흡수할 수 있어 분채에 넣기 좋단다.”
두부의 위로는 다진 돼지고기로 속을 채워 기름에 지져낸 표고버섯 완자, 볶은 자라와 오리고기를 켜켜이 올리고 다시 기름에 볶은 버섯들을 빼곡히 채운다.
그 위로는 다시 마늘과 함께 삶은 오계를 올리고, 그 위로는 빈틈없이 진귀한 재료가 올라간다.
육수에 부드럽게 졸인 상어 지느러미에 포동포동한 전복, 매끄럽게 윤기가 도는 검은 해삼. 그리고 뭉근한 물에 삶아 야들야들해진 사슴의 힘줄.
질기고 억센 곰 발바닥은 꿀을 듬뿍 넣은 육수에 넣어 그 육수가 졸아들 때까지 삶은 다음 얇게 잘라 뚝배기의 가장 중앙에 채워 넣는다.
“이제 농어와 잉어로 완자를 만들어 올리자꾸나. 농어는 맛이 섬세하니 양념을 적게 해 살짝 데쳐서 풍미를 살리고, 잉어는 잡내가 있으니 생강을 듬뿍 넣고 튀겨내면 맛이 좋지.”
“그럼 새우는요?”
“새우는 맨 마지막에, 분채의 가장 위쪽에 올린단다. 왜 그럴까?”
갑작스럽게 던져진 소년의 질문에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먼저 답을 말한 것은 이삼이었다.
“불그스름하게 익은 색이 보기 좋아서요.”
“흐음, 그것도 일리가 있는 추측이야. 그럼 장소는?”
“음, 그게……. 껍질을 까는 게 귀찮으니까, 먹기 편하려고 가장 위에 올리는 거 아닐까요?”
소년은 마치 ‘그게, 정말, 진짜로 정답일 거라 확신합니까?’라고 묻듯이 심술궂게 눈썹을 까딱이며 장소를 바라보았다.
우물쭈물하던 장소는 이내 아랫입술을 굳게 깨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는 것 같아요.”
더없이 진중한 표정으로 확신하는 아이들을 보며, 소년은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리고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는 아이들의 머리를 토닥거리며 말했다.
“정말, 어쩜 둘이서 딱 절반씩 답을 맞히는지.”
“거참, 나중에 둘이서 가게를 차리면 되겠구만.”
성급하게 술병 마개를 뽑던 백윤의 말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겠어. 서로 사이가 좋으니 싸울 일도 없을 테고.”
“같은 스승 밑에서 기술을 배웠으니 합도 잘 맞을 테지.”
“그러니까 영감이…….”
“알았다. 알았어. 거 칼 한 자루 만들어주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백윤은 반쯤 기울였던 잔을 도로 내려놓고는 휘적거리며 걸어와서는 아이들의 손목을 쥐었다.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의 손목은 가늘었지만, 동창의 혹독한 훈련으로 다져진 단단한 심지가 있었다.
늙은 대장장이는 아이들의 손목과 팔뚝 언저리를 몇 번 주물러 보고는 말했다.
“단련이 잘 되어 있구나. 이 정도면 수련용으로 깔짝거리는 게 아니라 진짜 현장에서 쓸 수 있는 큼직하고 튼튼한 걸 쥐여줘도 되겠어.”
“정말요?”
“그래. 어려서부터 너무 무거운 걸 쥐면 뼈마디나 손목에 안 좋지만, 너희 정도면 별 무리 없이 다룰 수 있을 것 같구나. 그러니.”
백윤은 잠시 못마땅한 눈으로 소년을 쏘아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아이들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비록 성격은 배배 꼬인 놈이기는 하다만, 그대로 저런 스승 밑에서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다. 부단하게 배우고 익혀 좋은 요리사가 되거라.”
“앞부분은 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