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83화 외전 72화
동녘에선 어느새 태양이 성급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낮이 가장 길어지는 계절. 여름의 태양은 미적거리며 늦장을 부리는 밤의 꽁무니를 태울 듯 잰걸음으로 하늘을 오르고 있었다.
오동나무가 듬성듬성 심어진 반룡궁의 내원을 거닐던 황제는 긴긴밤의 그늘을 걷어내는 돋을볕의 따스함에 걸음을 멈추었다.
하늘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곧 희푸르게 변할 것이다.
황제는 뒷짐을 지고는 다가오는 아침을 맞이하였다.
아침이 온다. 새로운 날이 밝는다.
“폐하.”
아침 냄새가 물씬 나는 바람결에 실린 목소리가 황제의 귓바퀴를 간질였다.
어린아이의 목소리다. 하지만 동시에 노인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높고 낭랑하게 울리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피로감과 회한에 찌들어 있는, 쉰듯한 목소리.
황제는 볕이 드는 자리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는 몸을 뒤로 돌렸다.
그곳에는 소년과 태감이 서 있었다.
존귀한 지배자를 배알하는 태도치고는 대단히 불량한 자세로. 삐딱하게 짝다리를 짚고 서서는 팔짱을 낀 것이 꼭 ‘피곤하니 빨리 끝냅시다. 가서 자게.’라고 말하는 듯했다.
황제는 피식 웃음을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고단한 것은 피차 마찬가지이니,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겠지.’
어차피 정식으로 사절단을 보낼 때가 되면 싫어도 엄숙한 표정으로 온갖 미사여구를 덧붙여가며 떠들어야 할 테니.
황제는 근엄한 표정으로 ‘결심이 섰느냐’라던가, ‘제국의 미래를 위하여 신명을 다할 각오가 되었느냐.’는 등의 말로 분위기를 잡는 대신 품 안에서 짧은 검 한 자루와 둥근 옥패를 꺼내 들었다.
황제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 소년에게 내밀었다.
검을 받아든 소년은 한눈에 그것이 사람을 베는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의 날은 고작 두 뼘 되는 길이였으며 끝은 뭉툭했고 날은 무뎠다. 그리고 금과 옥과 수실로 한껏 장식되어 있었다.
“제국 대사의 권검이다.”
막대한 권한과 막중한 의무가 실린 검을 소년에게 쥐여준 다음, 황제는 옥패를 태감에게 내밀었다.
호사스러운 장식이 달린 검과는 달리 옥패는 수수했다.
그것을 본 태감은 짐짓 놀랐다는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폐하. 이것은…….”
“정식으로 임명장을 내리는 것은 훗날의 일이 되겠지만, 이미 동창 내부에서는 네 제독 복직이 확정되었다 여기는 이들이 많더구나.”
그리고, 일을 하려면 제독의 신분패가 필요할 게다.
황제의 말에 태감은 쓰게 웃고는 패를 받아들었다.
“서방으로 가기 전까지, 곳간 단속을 해놓으라는 말씀이시군요.”
황제는 부드러운 웃음으로 답하고는 다시 뒷짐을 진 채 볕이 드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날이 무딘 권검을 만지작거리던 소년은 황제의 어깨너머로 쏟아지는 햇살을 보고는 배에 손을 얹었다.
허기를 느끼고 있음을 알림과 동시에 뭐 좀 먹으러 가자는 뜻을 은유적으로 전하는 동작이었다.
그에 태감은 같은 동작을 하는 것으로 소년의 제안에 찬성했다.
그리고 말보다 눈빛과 동작으로 소통하는 것에 익숙해진 둘을 보며 황제는 헛웃음을 흘렸다.
“어허, 둘이서 무슨 작당 모의를 하는 것이냐. 바른대로 고하지 못할까.”
“커흠, 그저 아침으로 무엇을 먹을지를 상의하였을 뿐입니다.”
“호오, 아침 식사라?”
황제가 호기심을 보이자 태감과 소년은 떨떠름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태감님이 하십쇼.
소년의 턱짓에 태감은 끙 소리를 내뱉고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충심이 절절히 묻어나는 진중한 목소리로 진언하였다.
“폐하. 아랫것들이 먹는 식사인지라 맛이 거칠고 투박하여 존귀하신 폐하께 올릴 만한 음식이 아니옵니다. 곧 있으면 식방각에서 아침 진선을 올릴 터이니 그런 보잘것없는 음식으로 혀를 더럽히지 마시옵고.”
“거칠고 보잘것없는 식사라면 더욱 좋다. 거친 것을 모르고 달고 좋은 것만을 아는 이가 어찌 백성들의 사정을 헤아리는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느냐?. 식방각에 전하여 아침 진선을 물리라 할 터이니, 짐의 몫까지 아침을 준비해다오.”
복마전에서 해묵은 마귀와 같은 관료들을 세 치 혀로 무찔러온 황제의 노련한 답변에 소년은 혀를 내둘렀다.
그 이상 황제를 설득할 명분을 찾지 못한 태감은 결국 풀이 죽은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양이 충분하겠느냐?
난처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던 소년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먹고 남은 자투리로 만드는 식사라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거친 식사를 원하셨으니 별수 없지요.”
* * *
그날 아침은 지난밤 서호초어를 만들며 발라낸 초어의 등뼈와 머리를 푹 고아내 만든 어골어두죽(魚骨魚頭粥)이었다.
황제는 세로로 빠갠 초어 머리와 등뼈가 둥둥 떠다니는 뽀얀 국물을 보고는 탄성을 질렀다.
“호오, 머리와 뼈만 넣고 우려 국물이 얼마나 나올까 걱정했는데, 이리도 뽀얀 국물이 우러날 줄이야.”
“초어는 잉어과 민물고기 중에서도 가장 크게 자라는 놈답게 먹을 것도 많고 국물도 사골처럼 진하게 나지요. 물론 특유의 냄새가 강하고 잔가시가 많아서 먹기 까다로운 고기입니다만.”
푹 고아 먹으면 자양강장에 좋고 특히 산모나 병석에 누운 환자의 허해진 기를 보충하는 데는 으뜸으로 치지요.
소년은 뽀얗게 우러난 국물에서 파와 생강을 건져내고는 도수 높은 백주 한 국자를 넣어 국물의 비린내를 날렸다.
그러고는 불려둔 쌀을 건져 도마에 올린 다음 칼등으로 두드렸다.
“이렇게 쌀알을 굵직하게 부수는 것은 흔히 광동에서 죽을 끓일 때 쓰는 방식이지요. 이렇게 쌀알을 부스러뜨린 다음 참기름 한 숟가락을 부어 스며들게 하면 죽을 끓였을 때 쌀알에 윤기가 돌고 고소한 맛이 배가되지요.”
하지만 오늘은.
소년은 찬장에서 병목이 잘록한 기름병을 꺼낸 다음 재빨리 한 숟가락을 덜어내 쌀과 뒤섞었다.
기름은 은은한 녹색이 돌았고 코를 가져다 대면 톡 쏘는 알싸한 향기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흔히 가열용으로 쓰기보다는 그대로 냉채나 기름장에 쓰는 경우가 많은, 때로는 약용으로도 이용되는 기름이었다.
태감은 소년에게서 병을 받아 피어오르는 향기를 확인하고는 말했다.
“산초 기름이로구나?”
“예. 산초 기름을 소량 쓰면 초어의 텁텁한 흙냄새를 깔끔하게 잡을 수 있지요.”
국물에서 익은 머리와 등뼈를 건져낸 후, 소년은 산초 향기 물씬 풍기는 쌀알을 뽀얀 육수에 넣고는 뭉근한 불에서 쌀이 푹 퍼지도록 끓여냈다.
쌀이 퍼지고 국물이 진득해지면, 마지막으로 따로 두었던 등뼈와 머리를 넣고는.
“파 한 줌을 뿌려내면 어골어두죽 완성이지요. 자, 드셔보시지요.”
특별히 폐하께는 가장 맛있는 부위인 대가리를 몰아드렸습니다. 예로부터 짐승 고기는 꼬리가, 생선은 대가리가 가장 맛이 좋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소년은 사근사근한 어조로 말하며 황제의 앞에 생선 대가리가 툭툭 튀어나온 죽사발을 내려놓았다.
뽀얗게 우려낸 육수에 쌀을 넣고 묽게 쑨 건더기 없는 삼삼한 죽을 기대하고 있었던 황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설마 생선 대가리가 통째로 올라갈 줄은 몰랐는데.”
“허허, 이 맛좋은 부위를 국물만 내고 버릴 수는 없지요.”
어서 드셔보시지요.
황제는 순박한 웃음을 짓고 있는 소년을 보고는 다시 죽사발을 보았다.
묽은 죽 위로는 큼직한 초어 대가리가 도저히 식욕을 자극한다곤 말하기 어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열에 익어 탁하게 변한 초어와 눈을 마주친 황제는 얌전히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어디, 우선은 죽 맛부터 볼까.”
생선 대가리로 끓인 죽이라.
황제는 튀어나온 대가리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죽을 한술 떠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이리도 감미로울 수가.”
생선 대가리에서 우러나온 깊은 감칠맛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죽 한 술에 탄복한 황제는 조금 전의 조심성은 어디로 갔는지 급하게 숟가락을 움직여 죽을 입안에 쓸어 담았다.
심지어는 초어 대가리를 향해 대담한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눈 아래쪽의 볼에서, 아가미 쪽과 목이 연결되는 부분에서. 황제는 젓가락으로 후빌 때마다 뭉텅이로 떨어져 나온 하얀 살점에 놀라움을 느꼈다.
“먹을 데라곤 없어 보였던 대가리에 이토록 튼실한 살점이 숨겨져 있었을 줄이야.”
“이렇게 큰 생선 대가리는 발라 먹는 재미가 있지요.”
묽게 쒀진 죽은 후루룩 마시면 뱃속을 따스하게 데워주었다.
맑고, 순하고, 깔끔하면서도. 진하고 기름지다. 한껏 기름이 오른 초어를 고아낸 육수에선 달큼한 기름기가 느껴졌다.
소나 돼지에서 느낄 수 있는 혀를 번들거리게 하는 기름기가 아닌, 흰살생선의 특유의 부드럽고 향기로운 기름기가.
그 은근한 달큼함을 한껏 빨아들인 쌀알.
부드럽게 퍼진 죽 위에 황제는 생강 간장을 콕 찍은 초어살을 올렸다.
죽 위로 간장이 번진다. 은은한 유백색을 물들이는 짙은 갈색. 달착지근한 향기 속에 섞이는 짭조름함.
그저 입안에 영원히 담아두고만 싶은, 마음 한구석을 살그머니 허물어뜨리는 그 향기에 황제는 그 이상 자신을 절제할 수 없었다.
* * *
“앞서 거친 식사라 폄하한 것을 사과해야겠구나. 어골어두죽. 훌륭하였다.”
“보잘것없는 식사를 이리도 극찬해 주시니, 황송할 뿐입니다.”
소년은 낄낄 웃고는 앙상한 뼈가 담긴 그릇을 호쾌한 동작으로 개수대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숙련된 손놀림으로 설거지를 시작했다.
기껏해야 솥 하나, 사발 세 개에 수저 세 벌이 전부였기에 설거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식탁에 팔을 괴고 앉아 소년이 내놓은 생강차를 홀짝이던 황제는 개수대에서 건진 사발을 마른 천으로 뽀드득 소리가 나게 닦는 소년을 보며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설거지 정도는 궁녀들에게 맡겨도 되지 않느냐?.”
“어지른 놈이 치우는 것이 사리에 맞지요. 굳이 아랫사람 피곤하게 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소년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닦고 있던 사발에 시선을 돌렸다.
소년이 다 닦은 사발을 찬장에 올려놓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황제는 부른 배를 안고 탁자에 늘어져 있던 태감의 뒷덜미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보게, 동창 제독. 숙친왕의 근면함을 본받아볼 생각은 없는가?”
“정식으로 임명되면 고려해 보지요.”
황제는 미운 놈에게 떡 대신 일거리라도 줘야겠다고 생각했는지 품에서 서책 하나를 꺼내 태감에게 쥐여주었다.
꼭 여름날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하품을 하던 태감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폐하, 이것은?”
“인명록이다.”
황제는 그것이 어떤 인명록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태감 또한 그것이 어떤 인명록인지 묻지 않았다.
태감은 종이가 구겨지거나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펼쳐 보고는 어슴푸레하게 웃었다.
“폐하, 잠시 자리를 비우겠나이다. 혹시 저쪽 일이 먼저 끝나거든.”
“동창 제독은 일이 바쁘니 먼저 왕부로 돌아가라 전하겠다.”
태감은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면을 눌러쓴 채 잰걸음으로 주방을 나서는 태감을 물끄러미 보던 황제는 작게 숨을 몰아쉬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막 찬장 문은 닫은 소년이 입을 열었다.
“뭐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태감께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을 맡겨 자리를 비키게 하신 걸 보면, 태감께는 귀띔 드리지 말아야 할 내용인 것 같은데.
소년의 말에 황제는 쓰게 웃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이 일은 너와 단둘이 이야기하고 싶어 그런다.”
소년은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아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소년은 황제의 눈을 들여다보고는 그가 무슨 이야기를 꺼내려 하는지 깨달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존귀한 제국의 지배자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누이를 잃은, 그리고 그 해묵은 상처에 여전히 끙끙 앓고 있는 오라비가 있었다.
소년은 숨을 멈춘 채 황제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소년을 지긋이 바라보던 황제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여, 네게 문일이 찾아온 적 있느냐?.”
“문일 말입니까.”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이름에 소년은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그가 제 뒤틀린 혈도를 고쳐줬을 때, 그때뿐입니다.”
“그 후로는 찾아온 적이 없었고?”
“예, 단 한 번도.”
“그럼, 그럼 혹시 그가 널 찾는 일이 있거든.”
그에게 누이가.
황제는 말을 끊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메말라 갈라지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네 어머니가 묻힌 곳이 어디인지, 물어봐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