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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82화 (283/314)

환관의 요리사 282화 외전 71화

소년은 편지의 서두를 읽고는 그대로 편지지를 접어버렸다. 그러고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태감을 쏘아보았다.

“태감님.”

“못 읽겠느냐?”

“애석하게도 외국어는커녕 모국어도 제대로 습득하기 어려운 열악한 환경에서 유년기를 보낸 터라.”

소년은 다시 한번 편지를 들어 위아래로 죽 훑어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편지지에는 수려한 필체로 써진, 아마 뜻을 아는 이에게는 정중하고 격식 있는 편지글로 보일 꼬부랑 글씨가 가득했다.

눈살을 찌푸린 소년에게 편지지를 받아들며 태감은 어수룩하고 무식한 촌뜨기를 몹시 얕잡아보고 업신여기는 세련된 교양인의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젠체하는 교양인 놈의 콧대를 뭉개주기 위해 주먹을 치켜들었다.

당장에라도 당신의 턱주가리를 갈기고 입안에 든 것들을 털어주겠다고 선언하는 듯한 차돌 같은 주먹은 태감에게 겸허함과 예절을 되찾아 주었다.

소년은 예의범절이 충분히 함양된 태감의 얼굴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역시 세 치 혀보다 빠르군.

소년은 열 걸음쯤 뒤로 물러난 태감을 향해 양 손바닥을 펼쳐 공격 의사가 없음을 보여주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편지에는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편지의 내용은 몰라도 편지지를 보았다면 이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어떤 경로로 온 것인지는 추측할 수 있을 테지.”

태감의 말에 소년은 주의 깊게 편지를 바라보았다.

제국에서 쓰이는 붓이 아닌, 조금 더 날카롭고 뾰족한 필기구로 쓰인 글씨. 끈이나 띠가 아닌 붉은색 밀랍으로 봉해진 편지봉투.

서방에서 건너온 것임이 분명한 편지는 어떻게 황실까지 전달된 것일까.

소년은 어렵지 않게 편지의 배송인을 추측해냈다.

“서방 사절단이 전하고 간 편지로군요.”

“그래. 그렇다면 발신인은 누구일 것 같으냐.”

“황제 폐하께 서신을 전달한 것은 사절단의 단장이었던 백작이었으니.”

사절단의 단장이었던 젊은 백작. 샤를 에두아르 아르농.

소년은 젊은 백작의 이름을 혀 위에서 굴려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그리움에 태감이 입술을 비죽였다.

“그 당돌한 백작을 생각하고 있구나. 그렇지?”

“만약, 그때 그 친구 제안을 받아들였더라면 지금쯤…….”

“왕은 못되었겠구나.”

“속 편하게 잘살고 있었겠지요.”

소년은 뾰로통하게 볼을 부풀리고는 고개를 홱 돌린 태감을 보며 낄낄거렸다.

한참 동안 키득거린 후, 소년은 경련하는 입가를 매만져 표정을 엄숙하고 진중한 것으로 바꾸고는 태감을 바라보았다.

“젊은 백작은 엘 마라 법국 사람이고, 태양 정교회의 사제였지요. 그리고 그 젊은 친구가 사절단의 단장 역을 맡았던 이유는.”

“엘 마라 법국이 서방 종교계의 종주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지. 어째서인 줄 아느냐?”

모든 신에게 받쳐진 신전. 만신전이 법국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법국은, 법국의 국교인 태양 정교회의 수장인 교황은 서방 종교계의 맹주로서 대접을 받아왔다.

그리고 이 편지는.

“교황께서 보내신 거로군요. 폐하께.”

태감은 빙긋 웃는 것으로 소년의 말에 긍정했다.

태감의 웃는 얼굴을 보며 무겁게 한숨을 내쉰 소년은 다시금 손을 내밀어 태감에게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그러고는 교황의 수려한 필체를 감상했다.

“과연 교황 성하다운 우아하면서도 깊이 있는 필체로군요.”

“그 뜻을 읽을 수 있으면 더욱더 감격스러울 텐데. 혹시 법국어를 배워볼 생각 있느냐?”

“다른 나라말 배운다고 머리 싸매고 끙끙거리는 건 전생에 경험한 걸로 족합니다.”

염병할 중국어. 염병할 성조.

소년은 새카맣게 죽은 얼굴로 진저리치고는 태감을 재촉했다.

그 유려하고도 그윽한 문장을 함께 탐독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끼며 태감은 천천히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제국의 지배자에게 보내는 서신답게 편지의 서두는 존경의 의미를 담은 정중한 인사말이 길게 이어졌다.

“그리고.”

“이제 본론입니까?”

“아니, 다음에는 계절 인사가 이어지는구나. 어디 보자, 법국의 하늘은 어느새 완연한…… 알았다, 알았어. 본론부터 이야기해 주마.”

태감은 시큰둥해지다 못해 슬슬 짜증마저 느껴지는 소년의 표정에 재빨리 편지지를 뒷장으로 넘겼다.

그리고는 천천히, 또렷한 목소리로 편지를 낭독했다.

* * *

무르익은 여름의 밤하늘에는 별들이 물결치고 있었다.

드리운 어둠을 가로지르는 별들의 무리. 밤하늘에서 익숙한 별자리들을 찾던 황제는 성큼 걸음으로 다가온 소년을 보고는 미소 지었다.

황제에게 다가온 소년은 어떤 말을 꺼내놓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그래. 편지를 본 모양이구나.”

“교황께선…….”

“만신전에 금룡을 모시고 싶다 하였지.”

그리고 짐은 그 제안을 수락할 생각이다. 너무 늦은 답변이라 교황이 응해줄지는 모르겠다만.

담담한 어조로 말하며 황제는 소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면 어찌 될 것 같으냐.”

“예?”

“만신전에 금룡의 신상이 세워지면, 어찌 될 것 같으냐. 제국과 서방의 관계가 어찌 변할 것 같으냐.”

만신전에 금룡의 신상이 세워지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지금껏 왕래가 적었던 서방 세계와 제국에 종교라는 이름의 연결고리가 생긴다면.

“그야.”

우선은, 종교인들이 찾아오겠지요?

소년이 내놓은 답에 황제는 답을 내놓은 소년이 무안해질 정도의 열렬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래, 훌륭한 혜안이다. 우선은 종교인들이 찾아오겠지. 종교인들은 신과 우주를 탐구하는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지. 그들은 새로운 종교의 교리를 배우기 위해 기꺼이 사막을 건널 것이야.”

“그리고 종교인들이 가장 먼저 국경을 넘으면.”

“뒤를 이어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지식을 탐내는 학자들이 국경을 넘을 것이고.”

“종교인들과 학자들이 오가며 길이 다져지면 그 길 위로 상인들이 오가겠지요.”

지금껏 서방과 동방의 물산을 짊어진 상인들이 서로 마주하는 지점은 모래사막 위의 찬드라 왕국이었다.

이는 위험을 감수하고 머나먼 동방과 서방을 오가는 것보다, 그 중간 지점에서 만나 교역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편이 시간적으로도,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도 합리적이기 때문이었지만.

“그 덕분에 찬드라 왕국을 비롯한 사막의 국가들은 관세를 거두는 것만으로도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지.”

“하지만 종교인과 학자들이 길을 닦아 교역로가 안정된다면.”

“그래, 상인들은 관세를 절약하고 더 저렴한 가격에 제국의 물산을 구하기 위해 기꺼이 제국의 국경을 넘을 것이다.”

그리된다면.

황제는 말을 멈추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된다면, 무엇이 변하겠느냐?

그리 물어오는 듯한 황제의 눈을 보며 소년은 치밀어오르는 섬뜩한 한기에 몸을 떨었다.

그는 그제야 황제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리된다면.

“제국이 변하겠군요.”

“그래. 제국이 변한다. 동방과 서방의 물산이 오가고, 사람이 오가고, 문화가 오갈 것이다. 그리하면 제국의 사람이 변하고, 제국의 문화가 변한다. 제국은 새로이 변할 것이야.”

그리고 그 변화의 시류를 타지 못한 이들은.

소년은 황제가 삼킨 그 말을 짐작하고선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그 변화의 여파가, 관리들에게까지 미칠까요?”

“변할 것이다. 골목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변하고, 저잣거리에서 국수를 파는 아낙네가 변하고, 밭을 가는 농부가 변하고, 대장간에서 쇠를 두드리는 대장장이가 변하면.”

황제는 한 호흡쯤 쉰 다음 단정하듯 말했다.

“제국은 변할 것이다.”

소년은 조용히 황제를 바라보았지만, 황제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좇으려던 소년은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는 제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황제와 같은 곳을 볼 수 없었다. 그와 같은 곳을 보고, 그와 같은 꿈을 꾸기에는.

소년은 헐떡이듯 힘겹게 숨을 몰아쉬고는 입을 열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황제는 한쪽 무릎을 꿇어 소년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발끝과 정원에 깔린 포석을 보던 소년은 황제가 내쉬는 뜨거운 숨결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준비되었습니다. 폐하.

황제는 소년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손바닥.

소년은 그것이 검을 쥐는 이의 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법국으로 가다오.”

“제국의 사절단으로서 가란 말씀이시군요.”

“다른 일이라면 제국의 외교관을 보낼 수도 있지. 하지만 이번만큼은 황족이 가야 한다.”

“금룡의 피가 흐르는 황족이. 제국에는 달리 사제의 신분을 가진 이가 없지요.”

황제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리고 서방까지 왕을 보필하는 것은 큰 공이다.”

동창 제독의 자리를 약속받을 만한 공이지.

* * *

“세상에, 기껏 동정호에서 개고생하고 와서는, 이번엔 법국이랍니다. 엘 마라 법국.”

“법국이라. 석 달로는 안 끝나겠구나.”

반룡궁의 주방에서 국어장을 퍼먹고 있던 태감은 소년의 푸념에 무덤덤하게 반응했다.

이미 체념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국어장의 고소함에 취했기 때문일까.

소년은 노란 달걀 속에서 기름진 간을 찾아 입에 쏙 넣는 태감을 얄밉다는 듯 노려보았다.

“입에 맞으십니까?”

“맛이 아주 좋구나. 노릇노릇하게 눌어붙은 달걀의 겉 부분은 바삭바삭 씹히고, 속은 부들부들해. 거기에 내장의 풍미가 녹아들어서…….”

“아까는 비린내 난다고 질색하시더니.”

“처음엔 비리고 역할 줄만 알았는데, 생선의 내장에 이런 근사한 풍미가 숨어 있을 줄은 몰랐다.”

소년은 어느새 열렬한 생선 내장 예찬론자가 된 태감을 보며 실소를 흘리고는 그의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태감은 소년을 흘깃 보고는 다시 뚝배기로 시선을 가져갔다.

소년은 태감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주방의 환기창을 통해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보았다.

기다림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뚝배기가 그리 크지 않기도 했고, 태감의 식사 속도가 빠르기도 했다.

아쉽다는 듯 뚝배기 가장자리에 눌어붙은 달걀을 숟가락으로 갉작이던 태감은 들이는 공에 비해 얻는 결과가 신통치 않자 혀를 차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양이 너무 적구나.”

“생선 한 마리에서 나오는 내장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지금 태감님께서 드신 게 네 마리 분량입니다.”

“그럼 내장을 뺀 나머지는 어디 있느냐?”

“저기 들통에 있지요. 드릴까요?”

태감은 소년의 손가락을 따라 들통 안을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늘을 벗기고 지느러미를 떼어낸 다음 향초와 생강, 간장으로 양념하여 기름에 지지거나 화덕에 굽거나 쪄서 끓는 기름을 끼얹은 거라면 모를까, 아직 핏물이 번질거리는 탁한 눈동자로 거리낌 없이 생명을 빼앗아 배를 채우는 부도덕한 인간들을 꾸짖고 있는 초어에선 식욕을 느낄 수가 없었다.

“되었다. 익혀준다면 모를까.”

“익혀드리는 거야 어렵지 않지요. 어떤 방식을 선호하십니까?”

소년은 입꼬리를 한번 씰룩이고는 들통에서 가장 큰 초어 하나를 고른 다음 아가미 쪽으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초어를 들어 올렸다.

살집이 두툼한 초어는 배 쪽에 노랗게 기름이 올라있었다.

분명 어떻게 요리해도 좋으리라.

“나박썰기로 썬 무를 깔고 고추를 넉넉하게 얹어 조려도 좋고, 살을 발라 다진 다음 올방개 가루를 넣고 치대어 완자로 만들어도 훌륭하지만, 역시 가장 맛좋은 초어 요리는…….”

“생강과 술을 넣고 데쳐낸 초어에 뜨거운 당초를 듬뿍 끼얹어 낸 서호초어(西湖醋魚)겠지.”

결대로 찢어지는 보드랍고 즙 많은 살점과 새콤달콤한 감칠맛이 어우러진 일품요리. 서호초어를 두고 어찌 초허 요리를 논하겠는가.

태감과 의견의 합치를 보자마자 소년은 도마 위에 초어를 올리고는 꼬리 쪽으로 칼을 넣어 초어를 반으로 갈랐다.

칼날이 등뼈를 긁는 소리.

소년은 세로로 가른 초어의 양쪽 면에 깊게 칼집을 넣은 다음 파와 생강, 황주와 함께 끓는 물에 던져넣었다.

“이제 껍질이 오그라들고 살이 하얗게 익을 때까지 삶은 다음, 다진 생강을 듬뿍 넣은 당초를 끼얹어 내면 서호초어가 완성되지요.”

원체 큰 놈이다 보니 익는데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며 소년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태감을 바라보았다.

초어가 익는 동안 가볍게 담소 좀 나누지 않으시겠습니까?

소년의 권유에 태감은 품위 있는 답변으로 응하였다.

“식전에 즐기는 담소는 식욕을 증진할 뿐만 아니라 함께 식탁에 둘러앉을 이들과의 관계 또한 돈독하게 해주지. 물론, 지나치게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가 아니라면.”

“어느 쪽이 좋으시겠습니까? 서방과의 교류가 빈번해짐으로써 변화할 제국의 앞날에 대한 견해를 나누는 것과.”

그 변화의 시류를 타지 못할 이들. 엉덩이 무거운 늙은이들을 처리할 방법. 둘 중 어느 쪽이 좋으십니까.

소년이 제시한 화제에 태감은 생각만 해도 속이 얹힌다는 듯 거북한 표정을 지었다.

“좀 가벼운 화제는 없느냐? 예를 들자면 서방의 맛좋은 먹거리라던가, 볼거리라던가. 가슴이 들뜰 만한 주제도 많지 않느냐.”

“아니면 서방 만신전과의 연대가 변화시킬 금룡 신앙의 발전 방향성에 대하여…….”

“그래, 그것참 가슴이 두근거리는구나.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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