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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81화 (282/314)

환관의 요리사 281화 외전 70화

반룡궁의 내원.

오동나무가 드문드문 심어진 정원의 자갈밭에선 갑작스럽게 먼지구름이 피어올랐다.

마치 면 보자기 위에 가루를 올려두고 아래에서 쳐올리는 듯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피어오른 먼지구름과 자갈을 들추며 커다란 금속판이 불쑥 솟아오른다.

그 금속판 아래로 소년이 고개를 내밀었다.

소년은 더운 숨을 몰아쉬고는 통로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하늘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고 그림자는 길게 늘어진 채 담장 아래로 흐르고 있었다.

저녁이었다. 곧 밤이 될 늦은 저녁.

소년은 무릎 언저리를 조금 주무르고는 마지막 계단을 밟았다.

그러고는 숨을 헐떡이는 태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저희가 너무 쉬엄쉬엄 늑장을 부리며 걸었나 봅니다. 늦어도 초저녁쯤에는 당도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무뿌리가 얽힌 계단에 걸터앉아 가지와 나뭇잎으로 이루어진 벽에 기대고 있던 태감은 우묵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어깨너머로 쏟아진 노을의 불그스름한 빛이 피로에 얼룩진 그의 얼굴에 쏟아졌다.

춥고 어둡고 외로운 시간을 대비하라 전하는, 지평선 아래로 저무는 태양이 남기고 간 고별사.

그 따스한 열기를 받으며 태감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늦었구나. 먹는다면 저녁이 아니라.”

“야식이 되겠지요.”

“탕은 다음을 기약해야겠구나. 탕을 끓이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탕은 점심이나 저녁에 어울리는 음식이지, 야식으로 좋은 음식은 아니지요.”

그래, 탕은 야식으로 먹기 좋은 음식은 아니지. 한밤중에 국물 음식을 먹으면 잠자리가 편치 못하니. 오늘은 탕을 먹지 못하겠구나. 오늘은, 아니, 어쩌면.

태감은 한숨을 내쉬고는 무릎을 끌어당겨 머리를 파묻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던 소년은 부루퉁한 목소리로 태감을 불렀다.

“태감님, 안 가십니까?”

“조금 쉬었다 가자꾸나. 어차피 탕도 못 먹게 되었는데,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느냐.”

태감은 마치 가슴 한복판에 바람구멍이 난 사람처럼 공기가 새는 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든 꿈과 희망 따위의,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것들을 모조리 빼앗겨버린 이의 가여운 절망. 공허가 그가 내쉬는 숨결에 묻어났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내려다보던 소년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만 같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부드럽게 흔들었다.

하지만 태감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소년은 신음처럼 말했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실 텐데요.”

“폐하께서도 양해하실 거다.”

“아니, 양해 못 할 것 같구나.”

소년은 다급히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황당하다는 듯 팔짱을 낀 채 태감을 바라보는 황제가 있었다.

소년은 벅차오르는 기쁨을 느끼며, 정확히는 풀 죽은 태감을 떠맡길 대상을 발견했다는 안도감을 느끼며 황제에게 외쳤다.

“폐하!”

“그래, 오느라 고생 많았다. 아직 여독도 풀리지 않았을 텐데……. 그런데 무슨 일 있었느냐?”

황제의 질문에 소년은 하소연을 늘어놓고 싶다는 표정으로 떠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물론 소년은 제국의 지배자 앞에서 푸념을 늘어놓는 추태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년이 꺼내는 말 마디마디에는 피로감이 군살처럼 군데군데 매달려 있었다.

황제는 소년의 말을 경청한 후, 그가 두서없이 늘어놓은 말들을 꿰어맞춘 다음 반듯하게 다듬이질하여 조리 있는 것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러고는 자신의 언어구사력이 평균점 이하는 아닐지 의심하고 있는 소년에게 되물었다.

“송반이 도착한 것이 식전이었단 말이지. 이런, 그 변변치 않은 승마 솜씨를 고려하여 일찍 보낸 것이 화근이 되었군.”

그리고 너희들은 입궁하라는 말을 듣자마자 먹으려던 식사도 내팽개치고 반룡궁으로 온 것이고. 그 때문에.

황제는 침중한 얼굴로 수염을 쓸어 만지고는 얼이 빠진 것처럼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태감을 바라보았다.

“그 때문에 이 녀석이 두 끼나 굶었단 말이지.”

이 녀석이라.

소년은 친근함을 넘어 살짝 불량하게까지 들리는 황제의 말에 작게 웃음 짓고는 말했다.

“오는 길에 육포를 조금 드시기는 했습니다만.”

“육포라니. 오히려 먹지 않으니만 못했겠구나.”

“활활 타는 불에 장작을 집어넣은 꼴이 되었지요.”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근엄한 지배자의 얼굴로 소년을 마주한 황제는 그에게 똑같은 질문을 돌려주었다.

그것은 질문인 동시에 황제가 직접 하달하는 명령이기도 했다.

황제는 묵직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대제국의 지배자. 황제의 물음에 내포된 의미는 대략 이러했다.

‘어떻게 좀 해봐라.’

그 참뜻을 정확히 이해한 소년은, 숙친왕 진연운은 낭랑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답하였다.

“이 아둔한 것은 아직 배움이 짧고 견문이 얕아 폐하의 기대에 부응하기 어렵나이다. 부디 하해와 같은 은혜로 이 아둔한 것을 깨우쳐 주시옵소서.”

난 할 만큼 했수다. 이번엔 그쪽이 좀 알아서 해보쇼.

소년의 말에 황제는 힘있게 뻗은 눈썹을 꿈틀거리고는 침음에 잠겼다.

그렇다면.

소년은 마침내 열린 황제의 입술에 시선을 집중하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황제는 소년과 태감을 번갈아 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짐의 생각에, 이 일의 적임자는 짐이 아닌 그대인 것 같다.”

“폐하.”

“희망을 잃은 자에게는 무엇을 내어줘야 하는가.”

갑작스럽게 던져진 황제의 질문에 소년은 흠칫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마치 짚더미를 들어 올리듯 가벼운 동작으로 태감을 일으켜 세우고는 소년에게 물었다.

“앞으로 나아갈 희망을 잃고 주저앉은 이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무엇을 내어주어야 하는가. 대답해 보라.”

“희망을.”

희망을 내어주어야지요.

숙친왕의 대답에 황제는 빙그레 웃고는 되물었다.

“그렇다면, 허기진 일을 일으켜 세우려면 무엇을 주어야 하겠나?”

“역시. 태감님을 위로하는 건 제가 해야 할 일인 것 같습니다.”

황제는 늘어지는 태감을 허리춤에 끼고는 궁의 한쪽을 가리켰다.

황제는 어느새 존귀한 제국의 지배자가 아닌 철없는 동생을 챙기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늦은 밤이라 변변한 식재료가 남아 있을지 모르겠구나.”

“정이 없으면 제 살이라도 베어다 삶아 올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런. 그러다 이 녀석이 새로운 취향에 눈 뜨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소년은 피식 웃고는 잰걸음으로 반룡궁의 주방을 향해 달려갔다.

그 작은 등을 물끄러미 보던 황제는 소년이 충분히 멀어졌을 때쯤 자신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짐덩이를 향해 속삭였다.

“어떠냐. 이만하면 의욕이 나겠느냐?”

황제의 속삭임에 조금 전까지 산송장 노릇을 하고 있던 태감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글쎄요, 그건 어떤 요리가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습니다.”

* * *

어떤 음식을 만들어야 할까. 어떤 음식을 만들어야 탕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달아올라 있었던 태감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반룡궁의 식재료 창고 앞에서 소년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맛이 강한 요리여야겠지.”

입술에 윤이 자르르 돌 만큼 기름지고, 입에 쩍 달라붙을 만큼 그윽하며, 한입 먹으면 다른 요리는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맛이 진한 요리여야 한다.

그리해야만 태감을 만족시킬 수 있으리라.

“태감님의 상상 속에서 이미 탕은 천상의 맛에 도달해 있을 테지.”

기나긴 공복으로 숙성된 기대감. 그리고 그 기대가 미뤄졌을 때의 한없는 절망.

소년은 해답이 없는 난제를 눈앞에 두고서는 입꼬리를 길게 찢어 올렸다.

마침내, 나의 경력과 나의 실력이 도마 위에 올랐구나.

소년은 거침없이 창고 문을 열어젖히고는 야수와 같은 눈으로 창고 안을 훑어보았다.

존귀하신 황제께서 거하시는 궁답게 반룡궁의 창고에는 시중에선 구할 수 없는 진귀한 재료들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키우기 까다롭기로 유명한 금화 돼지의 뒷다리를 소금에 절여 일 년간 숙성한 금화퇴(金華腿)에, 건조하였음에도 소년의 주먹보다 크고 두툼한 건전복과 돌기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건해삼, 초겨울날 내린 첫눈을 받아놓은 것처럼 희고 투명한 제비집. 백악질의 바위와도 같은 낙타의 혹. 갈고리발톱이 그대로 달려 있는 웅장.

소년은 그것을 만져 보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오른쪽 앞발. 최상품이군.”

만약 시중에 내놓는다면 같은 무게의 금을 내줘도 구하지 못할 진귀한 재료들을 지나쳐 소년은 창고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가 원하는 것들은 이런 딱딱한 것들이 아니었다. 맛은 진하고 깊으나 그 참맛을 우려내려면 적잖은 공을 드려야 하는 식재료들.

소년은 그런 것들을 원치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좀 더 부드럽고, 좀 더 달착지근하며, 좀 더 기름진.

“그래. 바로 이런 거지.”

소년이 멈춰선 곳은 팔뚝만 한 초어들이 힘껏 첨벙거리며 자신의 싱싱함을 뽐내고 있는 수조였다.

소년은 수조를 헤엄치는 초어 중 가장 크고 비늘에 상처가 없는 놈 네 마리를 골라 건져 올린 다음, 곧바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었다. 그리고는.

들통에 살집 두툼한 초어를 대충 쏟아버리고는 방금 꺼낸 분홍빛 내장을 조심스럽게 도마 위에 올렸다.

그 가치를 모르는 이에게는 씁쓸하고 비릿한, 버리는 부위에 불과하나, 그 진가를 아는 이에게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진미인 부위.

소년이 선택한 것은 바로, 생선 내장 요리였다.

“그리고 기름지고 비릿한 생선 내장의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홍콩식 국어장(焗魚腸)만한 것이 없지.”

국어장은 뚝배기에 싱싱한 초어의 내장을 익혀 먹는 일종의 내장 찜으로 손질한 초어의 간을 진피와 후추로 양념한 다음 달걀물과 기름에 튀긴 유작귀(油炸鬼)를 송송 썰어 올려 만드는 요리였다.

황금빛으로 노릇노릇하게 눌어붙은 달걀의 바삭함과 야들야들한 창자, 녹진하게 녹아내리는 간의 기름진 맛. 그리고 내장의 감칠맛을 흠뻑 빨아들인 유작귀의 고소함.

뚝배기에 지글지글 익혀낸 국어장은 사랑에 빠지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매력적인 요리였다.

“허어. 네가 생선 내장에 그리도 남다른 애정을 품고 있었던 줄은 몰랐구나.”

“태감님, 오셨습니까.”

태감은 성가신 것이 왔다는 듯 찌푸려진 소년의 얼굴을 보고는 낮게 킬킬거렸다.

소년은 담즙이 터지지 않도록 신중한 동작으로 쓸개를 떼어내며 말했다.

“조금 더 늘어져 계시지. 어쩐 일로 주방에 오셨습니까.”

“나도 그러고 싶었다만, 도저히 호기심을 이길 수가 없더구나.”

네가 과연 어떤 요리로 내 상심한 마음을 달래줄까 기대되어왔는데. 생선 내장이란 말이지.

태감은 자못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네가 설마 야식으로 비린내 나는 것을 고를 줄은 몰랐다.”

“그런 의도로 하신 말씀이 아니었다고 믿습니다만, 편협한 말씀이십니다.”

“그런 의도가 맞다. 왜 하필 생선의 내장이었느냐?”

소년은 푸들푸들 떨리는 분홍빛의 간을 먹게 좋게 잘라 생강술에 버무리고는 대답했다.

“태감님. 태감님께선 본인의 편견을 신뢰하십니까. 아니면 제 손을 더 신뢰하십니까.”

“그야…….”

“제 손이겠지요.”

태감은 침묵으로 소년의 말에 긍정했다.

소년은 태감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손질한 내장을 뚝배기에 담고는 후추와 진피, 미리 튀겨둔 유작귀를 담은 다음 풀어둔 달걀물을 부어 찜기에 올렸다.

이제 찜기에서 달걀물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익힌 다음, 먹기 직전에 뚝배기를 불에 올려 겉면이 노릇한 빛이 돌도록 구워주면 국어장의 완성이었다.

소년은 찜기의 뚜껑을 닫고는 어깻죽지에서 뿌드득 소리가 나도록 힘껏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태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폐하께서는 뭐라고 하셨습니까?”

태감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소년의 태도에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치 자신은 그저 순수한 호기심으로 들렀을 뿐, 털어놓아야 할 고민 따윈 없다는 듯이.

하지만 소년은 그간 그에게 봉사해 온 나날들을 들먹이는 것으로 태감의 입을 강제로 비집어 열었다.

“제가 태감님을 하루 이틀 모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젠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다, 그 말이냐.”

“제 눈빛도 한번 헤아려 보시지요.”

소년은 이 이상 시간을 끌면 식사 시간이 늦춰지는 것은 물론 내일 식탁에 푸르른 초원이 펼쳐질 수도 있다는 뜻을 내포한 시선을 태감에게 보내었다.

그리고 그 뜻을 정확하게 이해한 태감은 군말 없이 품에 담아두었던 근심거리를 소년에게 공개했다.

“말로 듣는 것보다는 직접 보는 편이 더 이해가 빠르겠지. 이걸 보거라.”

태감이 내민 것은 고상한 청회색의 편지지였다.

제국에서 흔히 쓰이는 두루마리 모양이 아닌, 직사각형으로 모양을 잡은 편지봉투에 넣어 밀랍으로 봉한 물건.

소년은 그 기이한 편지를 받아들고는 미심쩍다는 듯 태감에게 물었다.

“이건 어디서 온 물건입니까?”

“한번 확인해 보거라.”

완고한 태감의 태도에 소년은 투덜거리며 편지지를 펼쳐 들었다.

그러고는 잠시 후, 소년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태감을 바라보았다.

긴 세월을 거치며 흐리고 탁해진 소년의 눈동자는 거센 흥분과 긴장으로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태감님, 이 편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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