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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80화 (281/314)

환관의 요리사 280화 외전 69화

“아아, 납미합증(臘味合蒸)……. 분명 맛좋았을 테지. 그 기름진 고깃점을 흰쌀밥에 얹어, 볼이 미어지도록 욱여넣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행복할까. 얼마나 만족스러울까.

태감은 마차의 좌석을 병석 삼아 드러누운 채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태감의 머리맡에서 그가 앓는 소리 하는 것을 듣고 있던 소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리도 아쉬우십니까?”

“아쉽다. 아쉽다마다. 손에 움켜쥔 금을 놓친 것만큼이나 아쉽고, 품에 안은 연인을 떠나보내는 것만큼이나 애달프고, 마침내 이룬 꿈이 무너지는 것만큼이나 공허하다.”

태감은 탁하게 흐려진 눈을 감고는 배 위에 가만히 양손을 포개 올렸다.

마치 패악질을 부리는 성난 위장을 달래려는 듯이. 이대로 잠들어 요동치는 허기를 잊으려는 듯이.

하지만 짭짤한 기름기로 불붙은 위장의 폭동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마치 갈고리발톱으로 뱃속을 긁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태감은 배를 끌어안은 채 웅크렸다.

아아, 그 짭조름하고 기름진 납육 모둠 찜을.

오뉴월 햇볕에 비들비들 말려 볏짚 태우는 연기에 훈연한 그 잉어.

뻣뻣하고 푸석한 그 살점은 쌀뜨물에 불리고 기름에 볶고 다시 찌며 쫄깃해졌을 테지.

씹으면 결대로 풀어질 감칠맛 나는 살점. 그윽한 훈연 향이 배어든 그 짭짤한 생선 한 토막.

그것만 있었어도 밥 한 공기를 비우는 것은 일도 아니지.

납육. 돼지고기로 만든 납육은 또 어떤가.

도토리와 밤을 먹이며 살찌운 돼지를 겨울에 잡아 소금에 절이고 참나무 태우는 연기에 그을려 숙성시킨 그 풍미 깊은 납육은.

삶고 튀기고 찌며 수분을 한껏 머금었을 납육의 야들야들한 살점.

은은한 소금기가 배어든 그 기름진 살코기를 밥 위에 올려놓으면 고슬고슬한 밥알에 고소하고 짭조름한 돼지기름이 배어 진주 알처럼 빛나겠지.

그것을 한술 그득하게 떠 입에 넣고 우물거리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역시 납미합증의 백미는 훈연한 오리 다리 아니겠는가.

산과 들에서 사냥한 깡마른 들오리가 아니라, 울타리 안에서 모이를 먹이며 애지중지 기른 집오리의, 그 실팍하게 살이 오른 다리.

그 통통한 다리를 소금과 향신료를 문질러 말리고, 향기로운 사과나무 연기로 훈연하여 숙성시켰으니, 그 얼마나 맛좋겠는가.

돼지기름과는 격을 달리하는 그 달착지근한 기름, 쫀득하고 탄력 있는 육질. 아아, 그 진미가 한데 어우러진 모둠 찜을.

“그런 맛도 모를 애송이 놈에게 고스란히 헌납하고 오다니.”

이 한은 모래에 새겨도 지워지지 않고 물에 새겨도 흐르지 않으리라.

피를 토하듯 장렬한 태감의 독백에 소년은 혀를 차고는 고개를 숙여 그를 굽어보았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천장을 올려다보는 태감의 눈은 피의 복수를 부르짖고 있었다.

“거, 젊은 친구에게 밥 한 끼 대접한 것 가지고 뭔……. 그렇게 배알이 꼴리십니까.”

이 쪼잔한 인간아.

한숨과 함께 던져진 질문에 태감은 두 눈을 부릅뜨고는 굳게 쥔 주먹을 치켜들며 대답했다.

“결정했다. 동창 제독의 자리에 복직한 뒤 가장 먼저 할 일을.”

“대강 짐작은 갑니다만, 그래도 그간 쌓아온 정이 있으니 여쭙기는 하겠습니다. 뭘 하실 겁니까?”

“그야 물론 피의 복수지. 감히 동창 제독의 식사를 탐한 어리석은 자에게 자신의 분수를 알게 해줘야 하지 않겠느냐? 우선은…….”

제국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짊어진 자. 위대한 금룡께서 지상을 굽어살피신다는 증거. 여의주를 품은 그릇이자 전 사례 태감이었으며 이제 곧 동창 제독이 될 사내가 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치졸한 발언이었다.

세상에 이런 한심한 양반을 보았나. 애들도 보는데 부끄럽지도 않수?

소년의 핀잔에도 태감은 자신의 장대하고도 잔혹한 복수 계획을 구상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삭정이를 올려두면 그대로 불이 붙을 것만 같은 태감의 얼굴을 보며 소년은 그의 주의를 돌릴 만한 화제를 고민했다.

역시 일 이야기가 제일 좋으리라.

“송반 그 친구를 손봐주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 아닙니까. 그보다는 당장 눈앞의 과제에 집중하시는 것이 합리적이고 올바른 일 아니겠습니까?”

“눈앞의 과제?”

“예, 폐하께서 저흴 반룡궁으로 부르셨잖습니까.”

반룡궁.

존귀한 제국의 지배자께서 몸을 누이고 눈을 붙이시는 곳.

그곳은 금남의 구역인 후궁의 최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집 드나들 듯이 헤집고 다녔던, 어떤 의미론 제집이라 할 수도 있는 곳을 떠올리며 소년은 씁쓸한 표정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설령 황실의 피를 이은 자라 한들, 거세하지 않은 남자는 후궁에 들어설 수 없지요.”

“후궁은 오직 황제만을 위해 준비된 화원이니. 설령 황족이라 할지라도, 남아라면 두 다리로 설 수 있게 된 순간부터 후궁에 발을 붙일 수 없지.”

“어쩔 수 없군요. 그간 미뤄왔던 ‘수술’을 할 시간인 것 같습니다. 어차피 크게 쓸 일도 없지 않습니까.”

“쓸 일이 없다 하여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혹시 아느냐? 언젠간 쓸 날이 올지도 모르지.

태감의 너스레에 소년은 성의 없는 웃음으로 답하고는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럼 어찌하시겠습니까. 거세하지 않은 남자는 후궁의 땅을 밟을 수가 없는데.”

“언제부터 그렇게 규정과 관례를 깍듯이 존중했다고 그러느냐?”

거세할 거였다면 진작에, 후궁에서 환관 노릇 할 때 했어야지.

소년은 피식거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은 여기까지만 합시다.

“그러면, 하던 대로 환관복 하나 주워입고 들어갈까요?”

“그건 어렵겠지. 나나 너나 너무 눈에 띄는 얼굴이니, 사람들의 이목을 피할 수 없을 것이야. 우린 아직 폐하께서 송반 그 친구를 고르신 이유를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한다면.”

“상정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만 하겠지요.”

어쩌면 이부상서가 이미 자신의 눈과 귀를 후궁에 빈틈없이 깔아두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후궁의 중추적인 인물들, 고위 환관과 궁녀들이 이미 이부상서에게 포섭당한 상태일 지도 모른다.

어쩌면.

태감은 길고 가느다란 숨을 몰아쉰 후,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동창의 일부가 이부상서에게 넘어갔을지도 모르지.”

아무리 결속력이 강하고 규율이 엄격한 조직일지라도. 우두머리가 없다면 흐트러질 수밖에 없다.

무너질 수밖에 없다. 변절할 수밖에 없다.

그들 역시 더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었기에. 그렇기에.

“그렇기에 이번에는, 동창의 눈에 띄지 않는 길을 이용할 것이다.”

“경사에 동창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 있습니까?”

“있다.”

예상보다 선선히 떨어진 태감의 대답에 소년은 멍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소년은 되묻는 시선을 태감에게 보내었고 태감은 가벼운 고갯짓으로 소년의 질문에 긍정했다.

동창의 눈길을 피해 반룡궁으로 갈 수 있는 비밀스러운 길은 존재한다.

미심쩍다는 듯 태감을 보던 소년은 머리를 긁적이고는 되물었다.

“정말로 있습니까?”

“있다마다. 네가 가려는 곳이 어디냐. 황궁 아니냐.”

설마 황궁에 남들 모르는 비밀통로 하나가 없을까.

* * *

차가운 돌로 이루어진 통로에는 음산한 거미줄과 축축한 이끼, 그리고 탁한 먼지만이 가득할 것이다.

돌 틈 사이, 드리운 그늘 아래쪽으로는 황실의 사유지를 무단 점거한 작은 불한당들이 득실거릴 테지.

과연 그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오직 용의 피를 이어받은 황족만이 비밀통로에 출입할 수 있다는 규율에 따라 태감과 단둘이 선 소년은 그에게 자신의 상상을 조용히 털어놓았다.

복잡한 절차를 거쳐 비밀통로의 자물쇠를 해제하고 있었던 태감은 그의 말을 흘려듣고 있음을 강조하듯 건성으로 고개를 흔들고는 한숨을 쉬며 답했다.

“애석하게도 상상은 상상으로 끝나야 할 것 같구나.”

태감의 말에 고개를 갸웃한 소년은 이내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엄중한 봉인이 풀리며 마침내 문이 열리고, 그 안쪽으로 드러난 비밀통로의 풍경은.

“이거, 황실 비고로 가는 통로랑 똑같지 않습니까.”

나무뿌리가 얽혀 만들어진 계단에 나뭇잎과 가지가 뒤엉켜 만들어진 벽, 그리고 은은하게 빛나며 통로를 밝히는 꽃.

처음 보는 이라면 누구나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만 있을 환상적인 광경이었지만, 소년에게는 몇 번이나 보아 무덤덤해진 광경일 뿐이었다.

실망감을 숨기지 못하는 소년을 보며 쓰고 있던 가면을 품에 넣은 태감은 조심스럽게 나무뿌리 계단을 밟아 내려가며 말했다.

“같은 분께서 만드셨으니 똑같을 수밖에.”

만약에 불만이 있다면 그분께 따지거라.

태감의 말에 소년은 섬뜩한 느낌을 느끼고는 목덜미를 쓸어 만졌다.

“이 통로를 만드신 것도 역시…….”

“그래. 노공께서 손을 대신 것이지. 그분이 아니고서야 그 누가 이런 통로를 만들 수 있겠느냐.”

오직 그분만이 가능하리라.

아직 요괴와 신선이 지상을 활보하던 시절. 그 시절부터 살아온 뱀만이. 금룡에게 가르침을 받아 신통력과 지혜를 얻은 뱀만이 가능하리라.

소년은 목덜미에 흥건하게 젖은 땀을 손으로 훔치고는 성큼 걸음으로 나무뿌리를 밟아 내려갔다.

“저번에 황실 비고로 갈 때도 피똥을 쌌던 것 같은데, 혹시 이번에도 갈 길이 멉니까?”

“그래.”

“말을 아끼시는 걸 보니 어지간히 먼가 보군요. 혹시 얼마나 왔습니까?”

태감은 대답할 기력도 아깝다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과묵한 입과는 달리 그의 발은 입의 진중함을 배우지 못한 채 계단 모서리에 질질 끌리고 있었다.

소년은 혹사당하는 태감의 신발 밑창을 위하여 입을 열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조금 쉬었다 갑시다.”

“벌써 말이냐? 얼마나 걸었다고.”

“속이 비어서 그런지 영 다리가 후들거려 못 걷겠습니다그려.”

“뭐 군입거리라도 챙겨온 것이 있느냐?”

소년은 말없이 품에서 꾸러미를 꺼내 태감에게 던졌다.

튼튼하고 질기지만 촉감은 거친, 값싼 천으로 만든 주머니는 무게가 제법 묵직했다.

견과류일까. 아니면 건과일까.

아니면 혹시.

“역시 이런 데서 구시렁대면서 씹기엔 육포만 한 것이 없지요.”

“어디, 색이 불그스름한 것이 보기에 좋고, 향신료가 적게 들어가고 간이 심심해서 그런지 오래 물고 있기에 좋구나.”

사슴의 목살로 만든 겁니다. 기름기는 없는데 씹으면 부드럽고 맛이 달지요.

소년은 태감과 나무뿌리에 걸터앉아서는 반으로 찢은 육포를 나눠 입에 물었다.

허기진 입안에 씹을 거리가 들어오자 태감의 건조한 입꼬리에도 슬그머니 웃음기가 돌아왔다.

짭짤하고, 고소하며 살짝 산초 향기가 감도는 육포 한 조각을 공들여 씹으며 태감은 비명을 지르는 배 위에 손은 얹었다.

부족하겠지만, 일단은 이걸로 만족해다오.

“그럭저럭, 점심때 먹지 못한 납육의 아쉬움을 달래주는구나.”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십쇼. 저녁은 거하게 드셔야 하지 않습니까.”

“거하게라……. 그래, 호화로운 저녁을 생각하면 한때의 허기 정도는 참을 수 있지.”

물론 네가 단물을 조금 맛보여 준다면 더욱 인내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구나.

빙긋 웃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구상 중이었던 저녁 만찬의 메뉴를 천천히 읊기 시작했다.

“고된 여정 끝에 간신히 경사에 돌아왔으니, 그간 맛보지 못한 복잡하고 손 많이 가는 음식 위주로 상을 차릴 생각입니다.”

“길 위에서는 맛보기 힘든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면 역시…….”

“탕이지요.”

아무거나 대충 넣고 센 불에 부르르 끓여내는 잡탕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고르고 고른 양질의 재료에 귀한 약재를 더해, 센 불이 아닌 은은한 약 불이나 중탕 등의 간접 열을 이용하여 끓여내는 최고급 청탕(淸湯)을 말하는 것이었다.

“맑고 깨끗한 청탕이라. 확실히 여행 중에는 맛보지 못하였지.”

“오골계에 버섯을 넣고 끓인 탕, 오리와 연밥을 넣고 끓인 탕, 돼지 힘줄과 동과를 넣고 끓인 탕, 당귀와 양고기로 끓인 탕. 탕은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지친 위장을 달래주고 거칠어진 피부에 윤을 내주며 어깨를 내리누르는 피로도 씻어주니 고단한 여정을 끝낸 다음 몸을 보양하는 데는 탕 요리만 한 것이 없지요.”

화려한 미사여구로 탕 요리를 한껏 예찬한 후, 태감의 얼굴에 발그레한 홍조가 뜬 것을 확인한 소년은 느릿한 동작으로 걸터앉아 있던 뿌리 계단을 짚고 일어섰다.

그러고는 아직까지 육포 조각을 우물거리고 있는 태감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태감님, 그만 일어나서야 할 것 같습니다. 탕으로 저녁을 드시려면.”

소년은 부드러운 재촉으로 태감을 일으켜 세웠다.

마지막 남은 육포 한 조각을 입에 던져넣은 후, 태감은 우울한 얼굴로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을 들여다보고는 말했다.

“그래. 오늘 안에 폐하를 뵙고, 뜨거운 탕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려면. 그만 일어나야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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