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79화 특별외전
정월 초하룻날.
새로운 년 새로운 월 새로운 일을 기념하여 만백성이 떠들썩하게 웃고 떠들며 들뜨는 날.
1월 1일은 제국 최대의 명절인 동시에.
“죽을 것 같아.”
제국 의례의 중심인 황궁이 가장 소란스럽고 바쁜 날이기도 했다.
안락한 침대에 몸을 누인 채 태감을 맞이한 소년은 마치 일정이 짓눌려 압사당할 것만 같은 태감의 얼굴을 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거, 바쁘신 분이 아침부터 어쩐 일이십니까.”
“잠깐 숨을 돌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
“병문안을 핑계 삼아 잠깐 빠져나오셨다?”
태감은 핼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병석에 누운 자신보다도 안색이 파리한 태감을 보며 소년은 지금이라도 침대를 양보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했다.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숨을 몰아쉬는 태감을 향해 소년은 이불을 슬쩍 걷어치우고는 빈자리를 툭툭 두드렸다.
침대는 성인 남성 셋은 앞구르기를 해도 충분할 만큼 넓었고 소년은 기껏해야 침대 면적의 십 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정 피곤하시면 한숨 주무시고 가십쇼. 깨워드릴 테니.”
“그러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다만, 그랬다간 기껏 차려입은 옷이 엉망이 될 것 같구나.”
중요한 예식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고위 환관용 예복은 손을 데면 베이는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빳빳하게 풀을 먹여 놓았고, 옥과 금으로 만든 화려한 장식이 한껏 붙어 있었다.
날씬하여 옷맵시가 사는 태감이 입으니 참으로 그럴듯하기는 했지만…….
소년은 지나치게 격식에만 치중되어 있어 활동성과 통기성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은 예복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잘도 그런 걸 입고 돌아다니셨습니다그려.”
“어쩌겠느냐. 이 또한 사례 태감의 일이니, 은퇴하기 전까진 최선을 다해야지.”
피로에 찌든 태감의 얼굴에 순박한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자유를 손에 쥔 이의,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던 어둠 속에서 마침내 탈출구를 발견한 이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이의 해방감이 태감의 얼굴에 말갛게 떠올라 있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자유를 떠올리자 기운이 낫는지 태감은 한결 피로가 가신 얼굴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태감의 시선이 자신의 가슴께를 보고 있음을 깨달은 소년은 쓰게 웃으며 이불을 끌어 올렸다.
“상처는 좀 괜찮으냐.”
“가끔 안쪽이 간지러운 것만 빼면 괜찮습니다. 종일 누워만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죽을 것 같기는 합니다만.”
소년은 낄낄 웃으며 옷을 들쳐 붕대가 감긴 가슴팍을 보여주었다.
태감은 가슴팍을 동여맨 붕대에 핏물이 배어 나온 자국이 없음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소년은 되려 태감이 더 걱정스럽다는 듯 그의 창백한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서, 이제 얼마나 남으셨습니까?”
“일단 오전 행사는 대부분 마무리되었다. 이제 황제 폐하께서 금룡께 술을 올리고 한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풍년제, 대소신료들이 금룡께 절을 올리며 복을 기원하는 길성제, 그리고…….”
“거참, 피곤하시겠습니다. 어차피 두 번 할 것도 아니니 후딱 끝내고 오십쇼.”
“원래는 숙친왕 진연운 전하께서도 참석해야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안양비 님께 베인 상처가 깊어 병석에서 일어날 수가 없으니.”
아이고! 베인 데가 쑥쑥 쑤시는 것이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겠네.
뻔뻔한 얼굴로 침대 위에 늘어지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년은 고개만 빼꼼 올려서는 태감을 배웅했다.
“벌써 가십니까?”
“슬슬 가봐야 할 것 같구나. 저녁 무렵에는 돌아올 터이니, 몸조리 잘하고 있거라.”
힘없는 걸음으로 방을 나서는 태감을 배웅한 후, 그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소년은 시선을 천장 쪽으로 돌리고는 말했다.
“가셨나?”
“네, 가셨어요.”
대답과 함께 천장 한 귀퉁이에서 장소와 이삼이 고개를 내밀었다.
소년은 아이들의 확답을 듣자마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서는 침대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조금 전까지 병상에 누워 있던 환자가 취하기에는 지나치게 과격한 동작으로 몸을 풀었다.
그 모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던 아이들은 소년이 베개 밑에 숨겨둔 식칼을 뽑아 들자 화들짝 놀라서는 다가왔다.
“설마 요리를 하시게요?”
“그럼, 언제까지 산송장처럼 누워만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그리고.”
그래도 새해인데, 배에 기름칠 좀 해야 하지 않겠니?
* * *
설에는 무엇을 먹어야 할까.
만약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한다면 한국 사람은 누구나 떡국이라 대답할 것이다.
길쭉하고 동그란 가래떡을 썰어 만드는 떡국은 예로부터 장수와 재복의 상징이었으며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설령 차례를 지내지 않는 집이라도 새해에는 떡국을 먹으며 한 해의 시작을 기념해 왔다.
그렇다면 제국의 새해 명절, 용두절(龍頭節)에는 어떤 음식을 먹을까.
아이들은 신이 나서는 용두절의 풍습에 관해 설명하기 위해 눈을 반짝였다.
하지만 소년은 아이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도마 앞에서 요리를 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의아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그래, 용두절에는 용두절에 즐기는 음식이 따로 있을 테지?”
그 명절을 대표하는 음식.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음식. 온 가족과 친인척이 둘러앉아 그간 쌓인 회포를 풀며 나눠 먹는 음식.
내가 살던 곳에서는…….
소년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말없이 도마 위를 쓸어 만졌다. 그러고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살던 곳에서는 새해에 꼭 떡으로 국을 끓여 먹는단다.”
“떡으로 국을요?”
“그래, 꿩이나 닭으로 국물을 내기도 하고, 소 사골이나 양지머리로 국물을 내기도 하지. 해안가에서는 굴이나 매생이를 넣고 끓이기도 한단다. 고명으로는 황백 계란지단에 김 가루, 파, 고기 등의 오색 고명을 얹어내지. 떡은 주로 가래떡을 어슷하게 썰어 쓰지만, 지방에 따라선 가운데가 잘록하게 들어간 조랭이떡을 쓰기도 한단다.”
꿩이나 닭으로 낸 육수는 깔끔하면서도 담백하고, 소 사골로 낸 국물은 걸쭉하면서도 맛이 진하단다.
양짓살로 국물을 내면 단맛이 나고, 굴과 매생이를 넣고 끓이면 시원하면서도 짭짤한 바다 향이 살지.
소년은 설명을 늘어놓으며 입안에 고인 군침을 삼키고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그 설날의 떡국을, 너희들에게도 맛보여 주고 싶구나.”
그리고 태감께도.
소년은 뒷말을 입에 머금고는 도마에 꽂아두었던 칼을 집어 들었다.
삐걱 소리와 함께 칼이 뽑혀 나오자 소년은 가장 먼저 도마 위에 가래떡을 올렸다.
떡은 너무 얇게 썰면 푹 퍼져 흐물흐물해지니 먹기 나쁘고 너무 두꺼우면 간이 배이지 않는다.
먹기 좋은 두께로 떡을 썬 다음 소년은 아궁이에 솥을 두 개 걸고는 소 사골과 양지머리 두 가지를 각각 따로 우려내었다.
“소 사골만을 우리면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 맛이 진하지만, 자칫 텁텁하고 무겁게 느껴질 수 있고. 양지머리만을 우리면 맑게 우러나 달고 개운하지만 지나치게 가볍단다. 그러니 두 가지 육수를 따로 준비한 다음 하나로 합쳐 두 육수 간의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단다.”
전통방식을 따른다면 육수는 꿩을 쓰는 것이 올바르나 소년은 꿩이 아닌 소고기 육수를 고집했다. 그것이.
“떡국에는 고명 또한 중요하단다. 지방에 따라 다진 소고기를 간장으로 양념해 볶아 올리기도 하고, 달걀 지단을 부쳐 올리거나 고기 산적을 작게 지져 올리기도 하지만.”
하지만 소년은 파 조금에 김 가루 약간만을 올리는 것을 선호했다.
왜냐면 그것이.
“우리 집에서는, 파랑 김 가루에 후추만 조금 뿌려 먹는단다. 고명이 많으면 국물 맛이 흐려지거든…….”
그것이 어머니가 해주시던, 그의 입맛에 뿌리내린 추억의 맛이었기에.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소년은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는 솥 안을 들여다보았다.
솥에선 색이 짙게 우러난 육수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소년은 다 우러난 육수에서 잘 익은 양지를 건져낸 다음 그것을 결대로 찢었다.
“결대로 찢은 고기는 마늘을 넣고 간장으로 간해 무친 다음 넣으면 국물에 간이 밸 만 아니라 고기의 맛 또한 한층 더 살아나지.”
마지막으로 양지머리와 사골 육수를 혼합한 국물에 떡을 넣어 한소끔 끓여내고, 떡이 말랑말랑해지면 양념한 고기를 넣은 다음, 파와 김 가루를 얹고 후춧가루 조금 뿌려내면.
“자, 먹어보렴.”
이 할아버지가 어린 시절 먹던 새해 명절 음식이란다.
* * *
태감은 노을이 거의 사그라든 늦은 저녁이 되어 서야 간신히 연좌궁으로 돌아왔다.
마치 소금에 절인 배춧잎 같은 꼴로 돌아온 태감을 보며 소년은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찼다.
“어지간히도 고되셨나 봅니다. 사람이 어째 피죽도 못 먹은 것처럼…….”
“피죽은 먹었다, 피죽은.”
“황실 행사에 피죽만 나왔습니까?”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년에게 사정을 설명하려던 태감은 다릿심이 빠져 서 있기 버겁다는 듯 가장 가까운 곳에 놓인 의자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용두절은 본래, 정월 초하룻날 잠에서 깨어나신 금룡께서 구름 아래를 굽어살피시는 것을 사람들이 맞이한다는 의미로 시작된 명절이다.”
금룡께선 하계에 죄 많은 이가 넘쳐날 때는 큰비와 벼락을 내려 그 죄를 씻어내시고, 선량한 자가 많을 때는 풍작과 번영을 약속하시지.
그러니 사람들은 금룡께서 하계를 굽어살피시는 정월 초하룻날에는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맑게 유지할 수 있도록 심신을 정갈하게 하는 죽으로 식사하는 풍습이 생겼다.
물론 민간에선 거의 사라진 풍습이지만, 황실에서는 여전히 굳건히 지켜지고 있지.
태감의 설명에 소년은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정월 초하룻날만 되면 보리쌀 한 줌만 나오던 게 이유가 있었군요.”
굶주리고 고단했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굳어진 표정을 풀어준 후, 소년은 마치 전쟁통을 뚫고 가까스로 도망친 피난민 같은 초라한 몰골로 앉아 있는 태감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금룡께서는 언제쯤 돌아가신답니까?”
돌아가셔야 뭐라도 드실 텐데.
소년의 말에 태감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금은 벼락을 맞아도 좋으니 뭔가 기름진 것으로 배를 채우고 싶구나.”
“마침 기름지고 뜨끈한 게 있는데, 한 그릇 드시겠습니까?”
“벼락 맞아도 아쉽지 않게 넉넉하게 내어다오.”
그런데.
먹을 것이 있다는 말에 반색하던 태감이 갑작스럽게 뱁새눈을 하고는 소년을 쏘아보았다.
“설마 아픈 몸으로 주방에 선 것이냐? 내 몸조리 잘하라고 누누이 말했거늘.”
“아프다고 누워만 있으면 병이 떠나질 않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커흠, 그래서 안 드실 겁니까?”
누가 안 먹는다고 했느냐?
태감은 부루퉁한 얼굴로 소년이 내민 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큼직한 사발 안에는 뽀얀 국물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위로는 파와 김 가루, 그리고…….
“이건 설마, 떡이냐?”
“예. 제 고향 음식입니다.”
“떡으로 끓인 국이라. 난 둥글게 모양을 잡은 수제비인 줄 알았다.”
떡으로 끓인 국이라니.
태감은 신중한 표정으로 국을 훌훌 저어 식힌 다음 국물을 한술 떠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순하지만, 그러면서도 깊이가 있구나.”
떡에서 우러난 전분기로 진득해진 국물은 묵직하면서도 부드럽게 입술을 타고 입안에 흘러넘쳤다.
양질의 뼈와 고기에서 우려낸 그윽한 감칠맛. 붉은 살코기와 기름에서 우러나온 입에 착 달라붙는 달큼함과 뼈와 골수에서 우러나온 골즙의 깊이 있는 구수함.
두 가지 감칠맛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국물은 입안을 흠뻑 적시고는 식도를 타고 미끄러졌다.
태감은 뜨겁고 그윽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감각을 느끼며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내쉬는 숨에선 희미하게 후추 향이 났다.
“국물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구나. 그렇다면 떡은 어떨까.”
기름진 국물에 삶아낸 통통한 떡. 분명 말랑하고 쫀득할 테지.
태감은 대담하게 수저로 떡 위에 소복하게 쌓여 있었던 김 가루를 무너뜨려 국물에 섞은 다음 그대로 후루룩 들이켰다.
뜨거운 국물에 적셔지며 은은한 바다 향을 뿜어내는 김 가루. 그 은근한 향기와 함께 뜨겁고 보드라운 것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어떻게, 입에는 좀 맞으십니까?”
소년의 질문에 태감은 고개를 열렬하게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태감의 볼록 튀어나온 볼을 본 소년은 그가 말이 아닌 동작으로 대답해야만 했던 이유를 깨닫고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
“천천히 드십시오. 그러다 체하시겠습니다.”
소년은 태감이 그의 조언을 한 귀로 흘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면 태감이 인간이야말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하여 다람쥐에게 도전장을 내밀었거나.
소년은 후자의 경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년이 태감에게 사람의 볼은 다람쥐의 것을 능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할까 고민하는 동안, 간신히 떡을 삼킨 태감은 입가심으로 김 가루가 둥둥 뜬 국물을 들이켜고는 말했다.
“이것이 네 고향의 음식이란 말이지. 정월 초하룻날에 먹는.”
다람쥐의 우월함에 대하여 심도 있게 고민하던 소년은 조금 늦게 대답했다.
“예, 온 가족이 둘러앉아 떡국을 먹지요. 조상께 드리는 제사상에도 떡국을 올리고…….”
“앞으로는.”
태감은 한 박자 쉰 후, 깨끗하게 비운 사발을 다시 내밀며 말했다.
“앞으로는 정월 초하룻날 떡국을 상에 올려다오.”
“제법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마음에 든 것도 있고.”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던 태감은 쑥스럽다는 듯 배시시 웃고는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 고향 음식이니까.”
소년은 말없이 태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하려던 말을 막 잊어버린 사람처럼. 급하게 튀어나오던 말이 목에 걸려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사람처럼.
태감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던 소년은 이내 건조하고 무성의한 음성기호의 나열보다 더 풍부하고 솔직한 표현 방법을 찾아냈다.
소년은 환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