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278화 (279/314)

환관의 요리사 278화 외전 68화

완연한 여름의 느낌이 묻어나는 하늘 아래. 숙친왕 진연운의 마차는 경사의 교외에 멈춰 섰다.

경사에 도착하기 전, 여행의 마지막을 기념할 겸, 비축해 두었던 식량을 처리할 겸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함이었다.

가장 먼저 마차에서 내려선 소년은 찌뿌둥한 어깨를 비틀어 짜듯이 힘껏 기지개를 켜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벌써 햇보리가 나올 철이군요.”

“떠날 때는 봄비가 오는 청명(淸明)이었는데, 돌아오니 여름 더위가 시작되는 소서(小暑)로구나.”

절기는 24절기 중 열한 번째에 해당하는 소서(小暑)였다. 농부들은 보리와 밀을 추수한 자리에 콩이나 조, 팥 따위를 심는 시기.

여름 과실이 무르익는 시기이며 본격적으로 혹서기가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도 다행이지요. 대서(大暑)가 오기 전에 여행이 끝났으니.”

“더위에 염소 뿔도 녹는다는 대서에 마차를 타고 움직인다니, 상상만 해도 끔찍하구나.”

“산 채로 찜통에 들어간 게 꼴이 나겠지요?”

“벌겋게 익기는 하겠지.”

태감의 너스레에 피식 웃은 후, 소년은 마차에서 그간 야금야금 먹어온 훈제육이며 납육(臘肉) 따위를 통째로 실어 내렸다.

소금에 절인 돼지 다리며 매운 양념을 한 고기를 양 창자에 채운 향장(香腸), 찻잎으로 훈연한 오리 다리. 그리고 볏짚으로 훈제한 잉어 따위가 통째로 도마 위에 올랐다.

“그간 많이 먹어치운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이만큼이나 남아 있었구나.”

“여행 중에는 모자란 것보다 남는 게 낫지 않습니까. 남으면 먹든 버리든 남 주든 하면 되지만, 모자라면 길 위에서 쫄쫄 굶어야 하니.”

“그런데 이 많은 고기를 어떻게 요리할 생각이냐?”

“훈제육이 이것저것 갖춰져 있으니 납미합증(臘味合蒸)을 만들 생각입니다.”

납미합증은 훈제육 잘 만들기로 소문이 난 호남 사람들이 즐겨 먹는 훈제육 모둠 찜 요리였다.

“납미합증은 훈제한 돼지와 생선, 가금류를 한데 모아 쪄내는 요리인데, 색이 붉고 맛이 기름지면서도 짭짤하여 밥반찬으로는 으뜸이요, 술안주로도 일품이지요.”

“허어, 훈제육 모둠 찜이란 말이지.”

짭짤하고 고소한 훈제육 한 첨을 고슬고슬하게 지은 쌀밥에 올려 먹으면…….

기름진 모둠 찜의 맛을 상상하며 태감은 군침을 삼켰다.

한껏 허기가 달아오른 태감의 얼굴을 보며 소년은 천천히 칼을 들어 올렸다.

둔중한 회색의, 각도에 따라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칼날. 운철로 만들어진 칼날을 도마에 꽂은 소년이 태감과 눈을 마주쳤다.

슬슬 시작할까요.

소년의 시선에 태감이 답했다.

양은 넉넉하게 부탁하마.

태감의 답을 신호 삼아 소년의 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아가미를 골풀로 꿰어둔 훈제잉어.

초여름의 산란기가 오기 전 늦봄에 잡아 볏짚을 태워 훈연한 잉어는 살집이 두툼하고 기름이 잔뜩 올라있었다.

소년은 잉어를 한입 크기로 토막 친 다음 쌀뜨물에 담가 불려놓았다.

“훈연하여 말린 생선은 먹기 전에 쌀뜨물에 불려야 살이 부드러워 지지요.”

잉어 다음으로는 이제 돼지고기와 오리를 손질할 차례였다.

돼지는 먹기 좋은 크기로 납작납작 썰고 오리 다리는 뼈 채 그대로 토막을 친다.

그렇게 대접에 수북하게 훈제육이 쌓이자 소년은 철과를 불에 올려 물을 끓이고는 고기를 그대로 끓는 물에 집어넣었다.

먹음직스러운 훈제육이 끓는 물에 빠지는 것을 본 태감이 화들짝 놀라 물었다.

“찜 요리를 만든다 하지 않았느냐? 훈제한 것을 다시 물에 삶아서 어쩌려고…….”

다급함으로 물든 태감의 얼굴을 보며 빙그레 웃은 소년은 대답 대신 자투리 고기 한 첨을 집어 태감에게 내밀었다.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기를 받아든 태감은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고기를 코 밑에 가져다 대보았다.

하지만 느껴지는 것은 은은한 훈연향과 기름진 육향이 어우러진 식욕을 자극하는 향기뿐이었다.

잠시 주저하던 태감은 결국 고기를 입안으로 던져넣었다. 그리고…….

“으웁?!”

“아주 소금 소태 같지요?”

소년은 목을 부여잡고 기침하는 태감을 보며 낄낄거렸다.

태감은 한참 동안 기침을 하고 나서야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지친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소년은 진이 다 빠진 듯한 태감을 보며 나긋나긋한 웃음을 머금고는 말했다.

“오래 두고 먹는 훈제육 중에는 보존 기간을 늘리기 위해 소금에 아예 묻어두었다가 훈제를 하는 경우도 있지요. 그런 훈제육은 소금기가 너무 배어 있을 뿐만 아니라 소금에 절이는 과정에서 수분이 과하게 빠져 뻣뻣하고 질깃질깃해 그냥은 못 먹지요.”

“그래서 이렇게 한번 삶아 소금기를 빼주고, 육질을 부드럽게 한단 말이구나.”

깨우침이 느린 나의 우둔함을 배려하여 설명 대신 체험으로 깨우쳐 준 것은 고맙다만.

태감은 소금기가 목을 찔러 말하기 괴롭다는 듯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다음부터는, 설명을 우선시해 주면 고마울 것 같구나.”

“예, 다음부터는 그리하지요.”

또 언제 기회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입꼬리를 씰룩이며 정중하게 태감의 요망에 답한 후, 소년은 충분히 삶아진 훈제육을 건져낸 다음 철과에 남은 육수를 바닥에 쏟아버렸다. 그리고는 빈 철과를 마른 천으로 한번 닦아주고는 노란 유채씨 기름 한 국자를 철과에 둘렀다.

기름이 달아오르자 소년은 대파와 생강을 굵게 썰어 기름에 튀겨냈다.

기름에 향이 충분히 우러나왔을 때쯤 생강과 파를 건져내고는 삶은 훈제육과 쌀뜨물에 불렸던 잉어를 철과에 넣어 센 불에 볶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야들야들해진 훈제육이 기름에 바삭하게 튀겨진다.

연기에 그을리며 불그스름해진 고깃점에 노릇한 색이 돌고 달착지근한 냄새가 살금살금 코끝을 기어오른다. 살 오른 돼지와 오리의 기름 향기였다.

소년은 오리와 돼지에서 충분히 기름이 배어 나왔을 때쯤 굵은 고춧가루를 넉넉하게 넣었다.

“자, 이제 볶은 걸 다시 쪄주기만 하면 납미합증은 완성이고, 향장은 어떻게 할까요? 살짝 쪄서 그대로 먹어도 좋고, 아니면 꼬치에 꿰어서 모닥불에 구워도 맛 좋지요.”

“모닥불에 구운 향장이라. 그것도 참 별미지.”

그윽한 불 향이 배어든 통통한 향장, 굳어 있던 기름이 열기에 녹으며 창자는 팽팽하게 부풀어 오를 것이고, 그것을 그대로 베어 물면 터져 나오는 육즙과 함께 맵싸한 향신료의 풍미가 입안을 흠뻑 적시겠지요. 맵고 뜨거운 기름에 번들거리는 입안에 쌀밥을 가득 욱여넣으면…….

소년은 어린아이의 간드러진 미성으로 태감의 귓가에 향장의 매력을 속삭였다.

허기를 부추기는 그 음험한 요설 앞에서 태감은 장대비 앞의 호롱불처럼 흔들렸다.

“그래, 좋다. 향장은 굽도록 하거라.”

“하지만 찜통에 살짝 찐 향장도 포기하기엔 아쉽지요. 불에 구운 향장처럼 바삭하지는 않지만 부드럽고 통통한 창자에 육즙을 담뿍 담은 고기의 감칠맛. 그래도 구운 걸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신음을 흘리며 고뇌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아마 다른 것은 다 질려도 평생 이 ‘놀이’만큼은 질리지 않으리라.

그리고 태감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 역시 내심 이 ‘놀이’를 즐기고 있으리라고 소년은 확신했다.

자, 이제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할 시간이군.

소년은 두 개의 선택지 사이에서 갈등하는 태감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 한입 크기로 썰어 마늘과 볶은 향장이라는 세 번째 선택지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태감은 세 번째 선택지를 제시받을 수 없었다.

야영지 바깥에 세워둔 마차 위에서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던 장소와 이삼이 잰걸음으로 그들에게 뛰어오고 있었다.

다급하게 뛰어온 아이들은 횡설수설하며 말을 늘어놓았다.

간신히 장소와 이삼 두 명의 말을 조합하여 답을 꿰어맞춘 소년은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니까, 전령이 왔다고?”

“네!”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전령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소년은 태감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갈등과 고뇌를 벗어던진 태감이 굳은 표정으로 그의 옆에 서 있었다.

소년은 머리를 한번 긁적거리고는 질문했다.

“황제 폐하께는 오늘쯤 도착할 것 같다 보고를 드렸었지요?”

“도착한 다음 여독을 푸는 대로 입궁하겠다고 보고를 드렸지.”

“그런데도 이렇게 전령이 마중을 나왔다는 것은.”

불길함으로 얼룩진 소년의 목소리에, 태감은 굳은 표정으로 품에서 가면을 꺼내며 말했다.

“우선은, 전령을 만나보자꾸나.”

상황을 판단하는 것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

태감의 결정에 소년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고는 숙친왕 진연운의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령은 지금 어디 있지? 내 직접 봐야겠다.”

* * *

“미천한 후궁의 환관 송반이 존귀하신 숙친왕 전하를 뵙나이다.”

낯익은 자였다. 꿇어 엎드린 환관을 가만히 굽어보며 소년은 그와의 기억을 떠올려 내고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아아, 그래. 폐하의 기미 환관이었구나. 식방각주와 솜씨를 겨룰 때, 그때 처음 봤었지. 복스럽게 먹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 아직 살아 있었군.

반가움에 순간 살가운 인사를 하려 한 소년은 자신의 신분을 떠올리고는 다급한 헛기침으로 튀어나오려던 것을 억눌렀다.

그와 친분을 쌓았던 것은 후궁의 상호 오운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숙친왕 진연운이었다.

소년은 쓴웃음을 머금고는 명을 내렸다.

“고개를 들라.”

“전하.”

“급한 상황이니 예를 차릴 것 없다. 고개를 들라.”

본디 존귀한 신분을 배알할 때는 세 번의 허락이 있는 다음에 고개를 드는 것이 예의였다.

하지만 소년은 허례허식에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다는 듯 강압적인 어조로 명령했다.

송반은 주춤거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곱슬기가 살짝 있는 머리칼 아래로 눈매가 조금 처진 서글서글한 청년의 얼굴이 드러난다.

하지만 그 보기 좋은 호감형의 얼굴은 긴장감으로 한껏 얼어붙어 있었다.

땀을 뻘뻘 흘리는 송반을 보며 소년은 상황이 그리 심각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진정 급한 상태였다면 위기 상황에서 제 한 몸 지킬 수 있는 황제 직속의 무관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들, 최소한 상황을 또박또박 설명할 수 있는 이를 보냈을 것이다.

상황을 조금 낙관적으로 판단한 소년은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멀찍이 서 있는 태감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광택이 없는 새카만 흑단 가면을 눌러쓴 채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태감은 소년의 교대 요청에 실소를 흘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과 자리를 교대한 태감은 마치 기름칠하지 않은 녹슨 경첩처럼 삐걱거리는 송반을 향해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송반.”

날 기억하겠나.

조심스럽게 태감의 얼굴을 올려다본 송반은 낯익은 새카만 가면을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 사례 태감께서 여긴 어쩌신 일로……. 아, 사례감에서 물러나셨다는 말을 듣기는 했습니다만.”

“사례감에서 은퇴한 뒤론 숙친왕 전하께 몸을 의탁하고 있었네. 자넨 잘 지냈나?”

태감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대신 가볍고 일상적인 화제로 대화를 유도했다.

그간의 근황 이야기나 날씨 이야기, 그런 시시콜콜하고 자질구레한 이야기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래, 자넨 여전히 황제 폐하의 기미 환관직을 담당하고 있나?”

“예. 폐하께서 성은을 베풀어주신 덕분에…….”

“그런데 폐하의 기미 환관인 그대가 어찌하여 전령 노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이…….”

마침내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서자 소년과 태감의 시선이 송반에게로 쏠렸다.

쏟아지는 시선에 어깨를 움츠린 송반은 이마에 흥건한 땀을 한번 훔치고는 대답했다.

“폐하께서 어떤 연유로 저를 전령으로 보내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폐하께선 가능한 한 조용히, 남의 시선에 띄지 않고 출궁하라 명하셨습니다.”

조용히. 남의 시선에 띄지 않고.

태감과 소년에게는 충분한 단서였다. 태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지만, 소년은 태감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내가 그간 자리를 비운 사이, 곳간에 쥐가 많이 늘어난 모양이구나.

그러니 기미 환관을 보내신 것이리라. 쥐들의 이목을 피하고자.

자리를 비워도 눈에 띄지 않는 기미 환관에게 전언을 맡기신 것이리라.

소년은 아랫입술을 지긋이 씹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래서, 폐하께선 뭐라 말씀하셨지?”

“그, 전하께선 경사에 당도하는 즉시 반룡궁으로 입궁하라 명하셨나이다.”

“반룡궁인가.”

만약 공적인 일을 말하려 한 것이라면 외궁으로 입궁하란 명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는 반룡궁으로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년은 숨을 몰아쉬고는 수행원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풀어두었던 말을 마차에 도로 묶어라. 곧바로 출발하겠다.”

수행원들에게 명을 하달한 후, 소년은 아직 멍한 표정으로 꿇어앉아 있는 송반에게 상냥한 어조로 말했다.

“고생 많았네, 송반. 허기가 지겠군. 미리 차려둔 음식이 있으니 그것으로 배를 채우게나.”

“그, 그것은 전하께서 드실…….”

“폐하께서 명하셨는데 어찌 느긋이 배를 채우고 있을까. 그렇다고 기껏 차린 음식을 산짐승에게 내어주는 것도 아까운 일 아닌가.”

소년은 젊은 환관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가면 너머로도 실망감과 억울함이 전해져 오는 태감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경사로 돌아가면 더 거나한 상을 차려 올리겠습니다. 오늘 못 먹은 건 아깝지도 않을 만큼.”

“훈제육도?”

예, 예. 훈제육도 잔뜩 올리겠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