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77화 외전 67화
솥 하나를 두고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은 소박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야영지에는 성큼 밤이 찾아들었다.
소년은 손수 모래와 이파리로 솥 바닥을 문질러 설거지를 끝낸 다음 졸린 눈을 비비는 아이들을 이불에 뉘어 주고 난 후에야 모닥불 가로 돌아왔다.
모닥불 주위에는 아직 잠들지 못한 어른들이 불기운을 쬐며 흐르는 별을 보고 있었다.
소년은 취기에 발갛게 달아오른 태감과 단혜림의 얼굴을 보고는 피식 소리 내어 웃었다.
“잠이 영 안 오십니까?”
“애는 써봤는데, 영 잠이 오질 않더구나. 별이 너무 밝아서 그런 것 같다.”
“아니면 술기운이 부족해서 그런 걸 수도 있겠지요.”
소년은 잠 못 이루는 어른들을 위한 비장의 위문품을 꺼내놓았다. 육포 한 주먹과 술 한 병.
간소한 술상이었지만 술이 고픈 어른들은 화려한 미사여구로 소년의 사려 깊은 배려심을 한껏 칭송했다.
“그만들 하고 잔이나 받으십쇼. 얼른 한잔 마시고 자게. 잠을 자야 또 내일 길을 떠날 거 아닙니까.”
“평소였다면 ‘주접들 떨지 말고’라든가 ‘개소리 작작하고’쯤은 말했을 것 같은데 오늘은 무척 부드럽구나? 혹시 드디어 지위에 어울리는 교양과 품위를 함양한 것이냐?”
“그동안 단 호위님이 옆에 계셔서 좀 순화했습니다만, 태감께선 육두문자가 그리우셨나 봅니다. 원하신다면 해드려야지요. 지랄 말고 잔이나 드십쇼.”
담백하고 구수한 육두문자가 튀어나오자 태감은 마치 오랜 단골 맛집을 다시 찾은 듯한 그리운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에 들으니 퍽 정겹구나. 네 욕을 들어본 게 대체 얼마 만인지…….”
“그간 사는 게 바빠 욕설 한번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했군요. ”
앞으로는 섭섭하지 않은 폭언과 넉넉한 욕설을 늘 준비해 두겠습니다.
씹어 뱉듯이 약속한 후, 소년은 육포를 대나무 꼬치에 꿴 다음 모닥불 위에 걸어놓았다.
육포에 밴 간장 양념이 모닥불에 그을리며 짭짜름한 향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그대로 먹어도 맛있는 육포를, 굳이 구울 필요가 있느냐?”
“불에 한 번 구워주면 더 부드러워집니다. 그리고 그을리면서 그윽한 불 향까지 배지요.”
“그런데 그 꼬치는 혹시…… 아까 찬찬향에 쓴 것을 재활용하는 건 아니겠지?”
“새 겁니다. 새것. 뭐, 의심스러우시면 그냥 드시던지요. 전 구워 먹을 테니.”
아니, 뭐. 누가 안 먹는다고 했느냐?. 그냥 혹시나 해서 그런 거지.
어쭙잖은 변명을 늘어놓으며 살가운 웃음을 지어 보이는 태감을 흘겨본 소년은 한참 툴툴거리고 나서야 꼬치 하나를 내놓았다.
“어차피 줄 거면 좀 곱게 줘도 되지 않느냐?.”
“오는 말이 곱지 않은 데 가는 거라고 곱겠습니까. 아 참, 단 호위님도 꼬치 필요하십니까?”
“남는 것 있으면 하나 주게.”
태감의 것과 소년의 것. 그리고 단혜림의 것. 세 개의 육포가 모닥불 위에서 노릇한 빛으로 익어가기 시작했다.
걸대 위에 꼬치를 걸어놓고 빙글빙글 돌리던 소년은 따뜻한 불기운에 녹아 나온 지방으로 육포 표면에 윤기가 자르르하게 돌 때쯤 칼을 꺼내 밀랍으로 봉해둔 병을 열었다.
“향기가 아주 좋구나. 달착지근한 향이 돌지만, 그렇다고 과실주는 아닌 것 같고. 은근하게 봄기운이 주향에 묻어나는 것이 매화주인 것 같은데, 그렇다 하기엔 또 향이 묘한 것이. 꿀로 담근 밀주인가?”
“허어, 하여간 귀신같은 양반이라니까. 맞습니다. 밀주.”
지난봄에 화산 근처의 양봉장에서 채취한 매화꿀로 담근 밀주인데, 맛이 제법 들어 한 병 싸 왔습니다. 꿀로 담근 밀주는 불면증에 효과가 좋다 하니 한잔 드셔 보십시오.
소년은 시큰둥한 어조로 말하며 태감의 잔에 병을 기울였다. 푸르스름한 청자병의 잘록한 병목에서 시냇물 굽이쳐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침내 병목을 타고 넘어온 황금빛 액체가 깔때기 모양의 주둥이에서 쏟아졌을 때 태감은 희열과도 같은 감정을 느꼈다.
잔을 가득 채우는 은은한 금빛 액체에선 농밀한 꿀 향기가 샘솟았다.
“참으로 근사하군. 잠 못 이루는 밤 불면증 해소용으로 쓰기엔 아까울 정도야.”
이런 근사한 술이라면 조금 더 융숭한 대접을 받아도 좋을 것이다. 잘 차려진 식탁 위에서, 옥을 깎아 만든 술병에 금으로 만든 술잔에 담겨서. 온갖 찬사를 받아 마땅하리라.
태감의 말에 소년은 괜한 호들갑을 떤다는 듯 작게 키득거리고는 싸구려 백주를 마시듯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러고는 거나한 트림을 토해내며 말했다.
“잘 빼입고 마시지 않으면 술이 덜 취하기라도 한답니까. 이래 마시나 저래 마시나 취하기만 하면 장땡이지.”
“술 주인이 그리 말하니 별수 없지.”
얻어 마시는 처지에 공연히 참견하기도 우스운 일이니.
태감은 히죽 웃어 보이고는 자신의 잔을 들이켰다. 들숨과 함께 달큼한 꿀 향기가 목구멍으로 훅 밀려오고, 조금 뒤늦게 농후한 액체가 혀끝을 적신다.
달고, 향기롭고, 서늘한 것이 잇몸 사이사이에 스며든다.
태감은 숨을 몰아쉬었다. 길고 가늘게, 입 안쪽에 머금은 꿀 향이 오래도록 머물러 있도록.
술에 담긴 취기보다는 술의 달콤함에 더 취했다는 듯 몽롱한 표정을 한 태감을 보며 소년이 걱정스럽다는 듯 염려의 말을 꺼내놓았다.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십시오. 경사에 도착하시면 한동안은 이런저런 술자리에 끌려다니셔야 하지 않습니까.”
“술자리?”
“동창 제독으로 복직하시면 그야 이런저런 술자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태감님 얼굴 한번 뵈려고 몸이 단 이가 한둘이 아닐 텐데.”
한동안은 고달프시겠습니다그려.
혀를 끌끌 차는 소년을 보며 노릇하게 익은 육포를 입에 문 태감은 한참 동안 우물거리고는 입안에 육포의 짠맛이 흠뻑 스며들었을 때쯤 빈 잔을 들며 대답했다.
“아직 정식으로 복직이 윤허 된 것도 아닌데, 제독직에 앉은 후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시기상조인 것 같구나.”
“이를 것도 없지요. 어차피 감투야 폐하께서 내려주시는 것인데, 다 짜고 치는 일 아닙니까.”
아니면, 그간 내외하셨던 양심이라는 친구와 교분이라도 나누신 것은 아니겠지요?
마치 못된 친구와 어울리는 자식을 보는 부모와 같은 소년의 시선에 태감은 마치 춘화를 들킨 사춘기 사내아이처럼 화들짝 놀라 변명했다.
“커흠, 설마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내 정계에 발을 들이며 그 친구와는 연을 끊은 지 오래다.”
“하긴 태감께서 그러실 분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소년은 서두를 열어 놓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태감의 잔에 술을 가득 채웠다.
잠시 잔을 들여다보던 태감은 단숨에 잔을 비우고는 달콤한 숨을 토해내었다. 태감은 조금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동창 제독의 자리는 사사로이 내리고 거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창 제독은 황제 폐하의 눈이며 귀가 아닙니까. 그런 자리를 임명하는 데 폐하께서 신료들의 의향을 살피셔야 한단 말입니까?”
“그런 자리이기에 더더욱 신료들의 동의가, 동의가 없다면 그 반대 여론을 묵살할 만한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생각해 보거라. 동창 제독이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하룻밤이면 없던 죄도 만들어내고 있던 죄도 묻어버리는 것이 바로 동창이고, 그 동창의 수장이 바로 제독이었다.
태감이 던져준 것들을 짜 맞춰 소년은 자신을 납득시킬 만한 답을 만들어냈다.
신료들은 언제든 제 목에 밧줄을 씌울 수 있는 동창 제독이라는 자리가 공석으로 남기를 원할 것이다.
조금 더 야심 있는 자라면 자신과 친분이 있는, 자신의 편의를 봐줄 수 있는 자가 제독직에 앉기를 바랄 것이다.
소년은 그 부분에서 희망을 느꼈다.
“태감께서 사례감의 장이던 시절 많은 신료와 교분을 나누셨을 텐데요.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내가 힘 있고 권세가 드높던 시절 나눈 교분이지. 자리에서 내려온 뒤에도 그자들이 변치 않는 우정을 유지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구나”
“그 어떤 상황에서도 조건 없는 지지를 약속할 수 있는 친우가 정녕 단 한 명도 없단 말입니까?”
“널 빼면 딱히 생각나는 사람은 없구나.”
‘거참 인생 헛사셨습니다그려.’에 해당하는 눈으로 태감을 흘겨보던 소년은 혀를 끌끌 차고는 술잔을 가득 채웠다.
세월의 고단함이 그의 어깨를 내리눌렀고 떨쳐낼 수 없는 책임감이 그의 굽은 어깨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고뇌에 잠긴 소년을 보며 태감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것이 그리도 걱정되더냐?”
“그럼 태감께선 걱정도 안 되십니까?”
“걱정할 이유가 없거늘, 어째서 굳이 사서 걱정을 하느냐?.”
‘뭔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로 반문하려 했던 소년은 그 말이 너무 불손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잠시 고민한 후 소년은 보다 정중한 표현으로 반문했다.
“뭔 개소립니까.”
태감은 소년의 말 끝자락에 분명 특정 단어가 생략되어 있으리라 확신했다.
아마 어떤 동물의 자손을 낮추어 부르는 말일 가능성이 매우 유력했다.
태감은 두세 번 헛기침하고는 말보다 즉각적인 효과를 가지는 것이 날아오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 고민은 너와 내가 해야 할 것이 아니다. 난 그저 복직 신청서를 넣었을 뿐, 그것을 수리하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황제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지.”
“그렇다면?”
“그 수단을 강구하시는 것 또한 폐하께서 하셔야 할 일이 아니냐.”
소년은 그제야 태감의 깊은 지혜에 탄복하였음을 시인하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단혜림은 그런 음흉한 계략이 있는지도 모른 채 태감과 소년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리고만 있을 황제를 생각하며 쓰디쓴 숨을 몰아쉬었다.
* * *
“자, 태감님 좀 보렴. 꼴이 말이 아니지?”
아침나절부터 태감의 천막으로 아이들을 데려온 소년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굼벵이처럼 기어 다니는 태감을 가리키며 술의 백해무익함을 성토했다.
두통과 근육통, 소화불량의 증상을 호소하며 늘어진 태감의 몰골은 참으로 볼썽사나웠지만, 그런데도 그 잘난 미모 덕분에 대단히 가련하고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뭇 여인과 일부 남성의 심금을 울리는 광경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소년은 그 일부에 해당하지 않는 남성이었다.
“태감님, 곱게 일어나셔서 아침 한술 뜨시겠습니까, 아니면 걷어차인 개처럼 낑낑거리며 일어나 아침 한술 뜨시겠습니까.”
“누운 채로 떠먹여 주는 아침을 받아먹는 선택지는 없느냐?”
“글쎄요. 제가 요즘 수전증이 생겨서 제대로 떠먹여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도 원하시니 한번 도전해 보지요.”
뜨끈한 아침 식사로 세수를 하고 싶었던 마음은 없었기에 태감은 뭉그적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워야 했다.
간신히 푹신한 양탄자 위에 태감이 양반다리를 하고 앉자 작은 상에 세수할 물과 함께 아침 식사가 차려져 나왔다.
“세수 먼저 하고 드시지요. 손도 닦고.”
“오늘 아침은 뭐지?”
“어제 먹다 남은 거로 끓인 죽입니다.”
“먹다 남은 것이라?”
오늘의 아침 식사는 어제저녁 찬찬향에 넣고 남은 닭 뼈를 푹 고아 만든 육수로 끓여낸 구수한 닭죽이었다.
고명으로는 결대로 찢은 닭가슴살과 닭 간, 손질한 콩팥, 그리고.
“이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주홍빛의 경단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마치 달걀노른자만을 따로 익혀 넣은 것만 같은 그 기묘한 모양새에 의아해하던 태감은 자신의 상상이 그리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탄성을 질렀다.
“아하, 아직 껍데기가 만들어지지 않은 알이로구나. 그렇지?”
“예, 어제 닭을 손질하다 따로 빼둔 것이 있어 오늘 죽에 넣어봤습니다.”
달걀이 되기 전의 알을 넣은 닭죽이라. 아침부터 퍽 호기심을 자극하는 음식이 올라왔구나.
태감은 좀 더 또렷한 정신으로 맛봤다면 좋았으리라 생각하며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태감이 먹을 준비를 끝내자 소년은 바늘처럼 가늘게 채 썰어둔 생강에 간장을 뿌리고는 그것을 죽 위에 올려주었다.
“아무래도 내장으로 끓인 죽이라 조금 잡내가 있습니다.”
“그러니 생강으로 잡내를 잡으란 말이구나.”
“그리고 생강은 혈액순환을 좋게 하고 땀을 내어 주독을 빼주는 효과가 있으며, 닭은 쌓인 피로를 풀어주고 지친 위장을 보하는 효과가 있지요.”
그러니 숙취에 시달리는 사람에겐 이만한 아침이 또 없지요.
거들먹거리는 소년의 설명을 한 귀로 흘리며 태감은 죽의 열기에 숨이 죽은 생강 채를 죽과 섞어주고는 그대로 한술 떠 입으로 가져갔다.
술기운의 열독에 메마르고 갈라진 입술에 스며드는 닭 육수의 순하디순한 감칠맛.
쌀알이 푹 퍼진 죽은 후루룩 들이마실 수 있을 정도로 묽고 부드러웠다.
그 은은하고 보드랍고 상냥한 감칠맛에 쫄깃한 식감과 고소한 맛을 더해주는 다채로운 건더기들.
기름진 닭 간과 야들야들하고 고소한 콩팥. 그리고 알.
흰자와 노른자의 맛이 절묘하게 뒤섞여 있는 알은 쫀득하면서도 탱글탱글한 식감이었고 씹으면 반숙으로 익힌 노른자 특유의 달착지근하면서도 기름진 고소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채 썬 생강의 알싸함.
마지막 한술까지 싹싹 비운 후 그릇을 내려놓은 태감은 숙취가 한결 가신 듯 개운한 얼굴로 기지개를 켰다.
“이제 좀 살 것 같구나. 숙취도 한결 가벼워진 것 같고.”
“그거 다행입니다그려.”
무덤덤한 어조로 말하는 소년을 물끄러미 보던 태감의 안색이 갑작스럽게 핼쑥해졌다.
소년이 말한 그 다행이라는 말이 그저 숙취가 해소되었음을 기뻐하는 말이 아님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창백하게 질려서는 움찔거리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안 그래도 태감님께서 늦잠을 주무셔서 일정이 미뤄졌으니 오늘은 종일 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숙취가 심하시면 오늘 하루는 쉬어갈 생각이었는데, 숙취가 해소되셨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자, 일어나시지요. 갈 길이 바쁩니다.
소년의 재촉에 태감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송아지 같은 얼굴로 비칠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