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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76화 (277/314)

환관의 요리사 276화 외전 66화

금룡의 피를 이어받은 용의 아들이 기거하기에 가장 신성하고, 유일무이한 제국의 지배자가 몸을 누이는 곳이기에 가장 안전하며, 보통 사람은 일평생 그 담장조차 볼 수 없기에 가장 쓸쓸하고 적막한 곳.

반룡궁.

황제는 반룡궁의 내원에서 팔짱을 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배자의 시선 속에서 하늘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가장 높이 뜬 태양이 이제 서녘 끝자락을 밟는 시간.

무더위가 약속된 초여름의 하늘엔 따스한 노을빛으로 단장한 색색의 꽃구름이 지평선을 향해 흐르고 있었다.

낭만과 풍류를 아는 이가 아니더라도 무심코 시선을 빼앗길 만한 하늘이었다.

만약 그 아름다운 시간을 함께할 수 있는 영광을 허락받은 이가 있다면 황제가 그 압도적인 풍광이 가져다주는 감흥에 취해 있으리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서서, 우수에 젖은 눈으로 지배자의 존엄한 옆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할 것이다.

폐하, 노을이 참 아름답습니다.

혹은 조금 더 상상력이 풍부한 이라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 황제 폐하께서 노을을 보시며 시름을 달래고 계시구나. 나라가 어지러우니 폐하께서도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시겠지.

하지만 존귀하신 분께선 다른 이에게 쉬이 근심을 털어놓으실 수도 없으실 테지. 그러니 지는 노을로 홀로 삭이고 계시는구나.

이런 경우라면 나올 말은 절대자의 고독을 위로하는 부드럽고 다정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 영광을 허락받은, 황제와 나란히 서서 지는 노을을 올려다볼 수 있는 여인은 그러지 않았다.

황제가 그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웃음 짓게 하고 그를 위로할 수 있는 존재는 그녀가 아니었기에.

그녀는 황제를 웃음 짓게 하고 황제를 위로할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다는 치기 어린 욕심 대신 사려 깊은 배려심을 발휘하여 조용한 발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섰다.

“폐하. 아직도 기다리고 계셨나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에 황제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오셨소.”

난화비임을 확인한 황제는 다시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잠시 황제의 시선을 좇아 노을 지는 서녘 하늘을 보던 난화비는 하늘 어디에서도 황제가 기다리는 전령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음을 깨닫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동정호는 멀지요. 아무리 하루에 일만 리를 나는 비룡응이라 한들…….”

“오늘 올 거요.”

“오늘인가요?”

“오늘이요.”

난화비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그것이 황제의 말이었기에. 제국을 가호하는 금룡의 피를 이어받은 이가 한 말이었기에.

그 대신 난화비는 황제에게 지루함을 달랠 유흥거리를 제공하기로 했다.

“괜찮으시다면 한 수 어울려 주시겠어요?”

오지 않는 전령을 기다리시느라 지루하실 텐데, 심심파적 삼아…….

애교 있는 권유와 함께 난화비가 내민 것은 육중한 도끼날과 두 뼘이 넘는 창날을 가진 월극이었다.

그제야 난화비의 옷차림이 평상시에 입는 화려한 예복이 아닌 움직이기 좋은 간편한 무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황제는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괜찮겠소?”

“전에, 안양비 님이 계실 때는 자주 어울리셨다고 들었어요.”

황제는 그 이름을 듣는 것이 무척 오래간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십 년 전쯤에 멀어졌던 지인의 이름을 다시 듣는 듯한 낯섦과 어색함이 황제의 입속에 맴돌았다.

고작 반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비이자 그의 정적이었던 여인의 이름을 곱씹어본 황제는 다시 월극을 쥐고 자세를 잡은 난화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대단한 검수였지.”

“승률은 어떠셨나요?”

“기량은 비등했소. 이긴 날고 있었고, 진 날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무승부로 끝났지.”

황제는 문득 검을 휘둘러본 것이 언제인지를 떠올렸다.

늘 국무에 쫓겨야 하는 황제에게 마음껏 검을 휘두를 수 있는 날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 때 항상 어울렸던 것은.

달이 뜨는 밤, 한 자루 검을 쥐고 마주했던 여인의 얼굴을 그려내며 황제는 가만히 팔을 들어 올렸다.

그는 이제 난화비가 무기를 쥔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함인가.’

객관적으로 난화비가 안양비의 빈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순수한 무의 기량만을 따졌을 때 난화비와 안양비는 어린아이와 집채만 한 대호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 평가를 난화비는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명백한 사실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난화비는 안양비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황제의 앞에 섰다.

그리고 황제는 그 이상 그녀를 무안하게 하지 않았다.

황제는 자세를 잡았다. 몸은 비스듬하게 사선으로, 왼쪽 다리를 뒤로 빼고 오른팔을 앞으로 뻗은 자세.

황제의 오른손은 검지와 중지를 곧게 세우고 있었다.

“검결지로군요.”

“부족하겠소?”

“지금의 제게는 검결지도 과분하겠지요.”

검을 쥐지 않았다 하나 상대는 황제였다.

제국의 지배자. 위대한 무의 나라. 창칼로 일어선 전쟁의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

그런 이를 상대로 무기의 격차를 불평할 만큼 그녀는 오만하지 않았다.

“담소가 너무 길면 투쟁의 흥이 식으니.”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공손한 인사와 함께, 당찬 기합성을 지르며 난화비가 황제를 향해 뛰어들려는 순간. 가늘게 울리는 매 울음소리가 황제와 비의 대련을 가로막았다.

“대련은 잠시 미뤄야 할 것 같소. 동정호에서 소식이 왔군.”

“숙친왕 전하께서 보내신 소식인가요?”

황제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고는 정신없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난화비는 줄이 바뀔 때마다 변하는 황제의 표정을 보며 입술을 뾰로통하게 내밀었다.

그리고 황제의 시선이 서신을 두세 번쯤 훑었을 때쯤, 난화비는 참지 못하고 질문했다.

“제게도 좀 알려주세요, 폐하.”

서신과 샐쭉한 난화비의 얼굴을 번갈아 본 후, 황제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아, 여행 기념으로 기념품을 사 온다는군.”

“기념품이요?”

“오직 동정호에서만 구할 수 있는 귀한 것이라는데…….”

아주 뜻깊은 선물이 될 것 같소.

* * *

동정호의 하늘 아래서 발송된 서신이 경사의 하늘에 도착했을 때쯤, 동정호와 경사를 잇는 길 위에서 멈춰선 숙친왕은 황제가 보는 것과 같은 노을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노을이 참 아름답습니다그려.”

이 감수성을 자극하는 서정적인 풍경을 고상한 단어로 묘사하며 함께 자신이 풍류를 즐기는 품위 있는 인간이라는 우월감에 빠져보지 않겠냐는 소년의 제안은 애석하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태감을 비롯한 일행의 시선은 오직 나무 걸대에 걸려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솥에 집중되어 있었다.

‘빨간 고추기름이 둥둥 뜬 얼큰한 마라 육수가 눈앞에 있는데 노을 따위가 눈에 들어오겠느냐?’라고 주장하는 듯한 태감의 얼굴을 보며 소년은 혀를 찼다.

“그러다 솥 바닥 뚫어지겠습니다.”

“그럼 솥이 못쓰게 되기 전에 어서 먹어야겠구나.”

“아직 더 끓어야 합니다.”

소년의 말에 태감은 이 이상 기다림을 요구한다면 손가락을 쪽쪽 빨지도 모른다며 동창 제독의 체면을 지켜주고 싶다면 당장 요리를 제공하라 으름장을 놓았고, 그에 소년은 아직 깎아 먹을 체면이 남아 있을 줄 몰랐다며 신랄한 핀잔을 던졌다.

결국, 아쉬운 놈이 지고 들어간다는 협상의 법칙에 따라 한발 물러선 태감은 주린 배를 움켜쥐고는 솥을 들여다보았다.

고추기름이 뜬 육수 위로는 때때로 산초 알갱이나 생강 따위가 거품과 함께 떠오르고 다시 가라앉았다.

“그런데 어쩐 일로 화과를 준비했느냐? 야외에서 즐기기에 적절한 요리는 아닐 텐데.”

“여행 도중에는 이런 손 많이 가는 음식을 먹기 어렵지 않습니까. 그러니 아직 여유가 있을 때 만들어두려고 그럽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화과는 아닙니다. 화과는.

소년의 말에 태감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과와는 어떻게 다르지?”

“화과의 한 종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화과라고 뭉뚱그려 부르기에는 자신만의 개성이 강한 요리지요. 찬찬향(串串香)은.”

찬찬향이란 음식을 설명할 때 ‘맵고 뜨거운 화과 국물에 꼬치에 꿴 재료를 익혀 먹는 요리’라 한다면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건조한 몇 마디의 설명으로 찬찬향이 가지는 그 독특한 느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누군가는 서민의 술안주라 부르고, 누군가는 무더운 여름밤의 친구라 부르지요. 그리고 누군가는 훠궈의 저렴한 하위 호환이라 부르기도 하지요.”

위생 환경 불량한 노점에서 값싼 재료로 대충 만들어낸 싸구려 음식. 가난한 학생들이 잔돈푼 긁어모아 한 끼 때우는 후줄근한 음식. 먹고 나면 탈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하는 음식.

늘 그런 악평이 뒤따르지만, 그런데도 뒤돌아서면 그립고 눈에 보이면 무심코 먹게 되는 음식.

그것이 바로 찬찬향이였다.

“비록 저렴한 길거리 음식이라는 인식이 강해 화과보다 질이 떨어지는 음식으로 취급되지만, 찬찬향은 사실 무척 매력적인 음식입니다. 특히 온갖 꼬치를 매운 마라 국물에 익혀 쏙쏙 뽑아먹는 재미는 화과에서는 맛볼 수 없는 특별한 즐거움이지요.”

저렴하게 즐기는 음식인 만큼 찬찬향은 화과에는 넣기 어려운 온갖 재료를 넣어 즐길 수 있었다.

고기와 채소, 해산물 같은 기본적인 것부터 짭짤한 스팸, 부들부들한 어육소시지, 말랑말랑한 게맛살, 그리고 얄팍하고 감칠맛 나는 베이컨 같은 가공식품.

입안에 넣고 우물우물 씹다 보면 스르륵 녹는 닭발, 알싸한 마라 양념과 톡톡 터지는 달고 향기로운 알갱이의 조화가 훌륭한 옥수수, 미끈한 감촉에 씹으면 진득한 맛이 나는 다시마, 쌉쌀하지만 향긋한 여주, 한입 크기로 말아놓은 곤약면, 심지어는 통통한 가래떡을 통째로 꽂아놓은 떡꼬치까지.

“하지만 찬찬향을 보통의 화과와 차별화하는 가장 큰 특징은, 찬찬향은 차갑게도 먹는다는 겁니다.”

“차갑게 먹는다는 말이냐? 화과를?”

태감은 마치 개가 고양이를 낳았다는 해괴망측한 소문을 떠들고 다니는 수상쩍은 놈을 보는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년은 그런 불손한 시선을 방어하는 가장 확실한 방패인 더없이 진지한 표정을 지음으로써 태감을 부끄럽게 했다.

“물론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의외로 맛있습니다.”

구름이 증발할 만큼 무더운 혹서기에도 펄펄 끓는 탕을 마시고 펄펄 끓는 차를 즐기는 제국인에게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겠지만, 찬찬향을 차갑게 만드는 냉과찬(冷锅串)은 육수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릴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중국 전역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

“보통 사골을 우려 만드는 뜨거운 육수와는 달리 차가운 육수는 닭이나 어패류 등을 이용해 가볍고 산뜻하게 우려내지요. 그 서늘하면서도 매콤 알싸한 육수에 차게 식힌 꼬치를 찍어 먹는데, 등골을 짜릿하게 식힐 만큼 시원하면서도 먹고 나면 개운한 것이 여름날 먹기엔 그만한 것이 없습니다.”

“허어, 말을 들어보니 어떤 요리인지는 알겠다만,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구나.”

어쩌면 보수적인 제국인에게 차가운 전골 요리란 낯선 세계에서 온 이방인 만큼이나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소년은 굳이 권할 생각은 없다는 의미로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졸아들어 무시무시한 색으로 끓어오르는 솥을 가리켰다.

“슬슬 꼬치를 넣어도 될 것 같습니다.”

소년은 구멍이 송송 뚫린 국자로 향을 다 우려내 흐물흐물해진 파와 생강을 대강 건져내고는 넓적한 접시에 수북하게 쌓인 꼬치를 가져왔다.

접시로 모이는 시선에 소년은 면목 없다는 듯 뺨을 긁적였다.

“애석하게도 길 위에서 만드는 찬찬향이라 꼬치 가짓수가 변변치 않습니다.”

소년은 조금 전 찬찬향의 매력은 양손 양발 다 써도 세지 못할 만큼 다양한 꼬치라 말한 주제에 이런 초라한 가짓수의 꼬치를 대접하게 된 것이 못내 부끄러운지 뺨을 조금 붉히고는 접시를 내밀었다.

하지만 자신이 먹을 꼬치를 고르는 일행 중 꼬치의 가짓수에 유감을 가지는 이는 없었다.

특히 태감은.

“난 오히려 이것이 더 마음에 드는구나.”

전부 고기로만 이루어진 꼬치라니. 이보다 더 황홀한 것이 또 있을까.

태감은 마치 진귀한 보석을 다루는 듯한 정중한 손놀림으로 꼬치를 집어 들었다.

유독 핏기가 진한 새빨간 살코기.

기름기 하나 없는 선홍빛 고기 꼬치를 본 소년이 휘파람을 불 듯 탄성을 질렀다.

“이야, 염통! 귀하고 맛좋은 걸 고르셨군요.”

“염통이라고?”

“예, 닭 염통입니다. 쫄깃쫄깃하고 담백한 데다 닭에서 하나밖에 안 나오니, 귀하기로는 으뜸이요 맛 또한 일품이지요.”

그렇게 신선한 염통은 사실 참기름 장에 살짝 찍어 먹어도 좋은데, 준비해 드릴까요?

소년의 권유에 태감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아무리 담력 좋은 미식가라도 아직 핏기가 남아 있는 닭의 염통을 날것으로 먹을 자신은 없었던 걸까.

소년은 킥킥 웃고는 염통을 용암처럼 끓는 국물 속에 집어넣었다.

각자의 꼬치가 국물에 첨벙 몸을 담그자 소년은 품 안에서 작은 잔을 꺼내었다.

잔은 총 세 개였고, 아이들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내심 기대했다는 기색이 역력한 아이들의 머리를 한껏 헝클어뜨려 준 후, 소년은 태감과 단혜림의 잔을 채우고는 기운차게 말했다.

“자, 여행길의 안전을 위하여 건배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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