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275화 (276/314)

환관의 요리사 275화 특별외전

어찌 되었든, 세상에 열흘 붉은 꽃은 없는 법이다.

흐르는 계절과 함께 꽃은 시들고, 풀잎은 마르며, 과실은 썩고. 사람은 늙는다.

거칠게 맥동하던 심장이 여유를 찾고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볼 거죽이 느슨해지는 시간.

사람들이 흔히들 직설적인 표현 대신 원숙해진다, 노련미가 더해진다. 그리고 무르익었다고들 말하는.

제자리에 멈춰 서서는 그간 쌓아온 것들을 돌아보며 숨을 돌리는 평온한 안정의 시간.

그러나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찾아오는 그 안온한 나날을 거부하고 발버둥 치는 이가 있었다

유난히 눈이 많이 온 어느 겨울날.

다관 막심의 특실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던 소년은 무겁게 숨을 토하고는 표자승을 바라보았다.

“그간 숨 가쁘게 달려왔구나. 큰 성과를 이루었어.”

“스승님께서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그것이 어찌 나의 공이냐. 난 그저 네가 씨 뿌릴 곳을 알려주었을 뿐이지.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과실을 키운 것은 전부 너의 공이다.”

구슬땀 흘리며 일해온 봄과 여름, 그간 흘린 땀의 결실을 추수하는 가을이 지나고. 다관 막심에는 마침내 겨울이 찾아왔다.

더는 나아갈 수 없는, 멈춰선 채 가을에 채워둔 곳간을 파먹으며 웅크리고 있어야만 하는 겨울이.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그 계절이 마침내 표자승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소년은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 말했다.

“정상에 오른 이에겐 당연한 일이다. 더 올라설 곳이 없다면 이제 남은 것은 그간 일군 것들이 상하지 않도록 가꾸고 지키는 일뿐이지. 이미 경사의 다관 시장 대부분을 점유한 네가 이 이상 밟지 않은 땅이 어디 있겠느냐?”

더는 개척할 수 있는 영역이 없다. 올라설 곳이 없다. 나아갈 곳이 없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어디를 향해 걸어야 하는가.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 하는가.

멈춰 설 것인가. 안온함에 취해, 지금껏 일구어놓은 것에 만족하며. 주저앉을 것인가. 아니면.

소년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러고 싶지 않다면, 새로운 땅을 찾아야지.”

“새로운 땅, 새로운 시장을.”

“표자승. 이제 더 큰 것을, 더 넓은 시장을 꿈꿀 때가 되었다.”

결국, 다관 사업으로 네가 차지할 수 있는 땅은 좁을 수밖에 없다.

소년의 말에 표자승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차지한 땅이 좁다니요?”

“상계에서 땅이란 무엇이겠느냐?. 바로 사람이다. 네 물건을 사는 사람. 표가 상단의 이름을 알고, 표가 상단이라는 이름을 신뢰하는. 표가 상단이라는 상표가 붙었다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지갑을 여는 사람. 구매자. 그것이 바로 땅이고, 네게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며.”

네가 앞으로 차지해야 할 것이지.

소년의 입가에 미소가 차오른다.

강퍅한 매부리코 아래로 길게 찢어지는 얇은 입술. 그 아가리 가득 황금을 물고도 만족하지 못하여 더 큰 것을 삼키기 위해 아우성치는 탐욕스러운 상인의 미소.

표자승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입가에 손을 얹었다. 그의 입 또한 소년과 같은 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다른 사대 상단은 이미 누대에 걸쳐 그런 땅을 점유해 왔다. 하지만 넌? 표가 상단은 신흥 상단이다. 네 대에 우연히 세를 이룬 역사가 짧은 상단이지. 자연히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표가 상단의 인상 또한 빈약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운으로 시류를 탔을 뿐인,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사상누각과 같은 상단.”

사람들에게 뿌리내리지 못한 것이다. 인식에 박히지 못한 것이야. 그것은 네가 주력한 업종이 다관이기에 더욱 그렇다.

표자승은 기다리지 못하고 벌컥 일어서서는 질문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다관 막심의 주 고객층을 생각해 보면 답을 알 수 있다. 다관 막심을 주로 이용하는 고객층은 누구지?”

“그야…….”

“돈 많은 한량 놈들이지. 왜, 표현이 조금 껄끄럽다면 풍류를 즐길 줄 아는 문화인이라 할까?”

다관 막심은 지금껏 그런 놈들을 주 고객으로 삼고 번창해 왔지.

그것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놈들 하나만 잘 물어도 평범한 손님 백 명을 받아도 손에 쥘 수 없는 돈이 한 번에 들어오니. 상인이라면 누구나 꿈꿔볼 만한 장사지.

하지만.

“그런 고급화 전략, 일부 한정된 계층을 주 고객으로 삼는 장사를 해왔기에, 표가 상단의 이름은 세간에 뿌리내리지 못했다.”

“물론 막심은 표가 상단의 주력 사업이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표가 상단은 많은 사업이 있지. 서방 교역을 통한 사치품, 남방에서 들여오는 향료와 설탕. 그 또한 보통 사람이 접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다면, 표가 상단의 이름이 뿌리내리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스승님, 이 불민한 제자에게 답을 알려주십시오.”

답을 구하는 표자승에게, 소년은 답을 알려주었다.

“미래는 누구의 것이냐.”

“예?”

갑작스럽게 던져진 질문에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표자승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미래는 그야…… 어린아이의 것이지요?”

“그래. 어린아이의 것이지. 현재가 너의 것인 것처럼. 다가올 미래는 자라날 어린아이들의 것이지.”

그렇다면 네가 쌓아 올린 표가 상단이 누대에 걸쳐 그 명성을 유지하려면. 거친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굳건히 버티고 살아남으려면.

어디에 뿌리내려야겠느냐.

소년이 내놓은 답을 받아든 표자승은 거칠게 맥동하는 심장에 손을 얹고는 대답했다.

“미래의 주인에게 뿌리내려야 하지요.”

소년은 미소로 표자승의 말을 긍정했다.

“아이들의 입에서 표가 상단의 이름이 오르내려야 한다. 그리하면 아이들의 부모는 자식들이 재잘거리는 소리 속에서 표가 상단의 이름을 들을 것이고.”

“훗날 어른이 된 아이들은, 자식에게 유년 시절의 추억과 함께 표가 상단의 이름을 들려주겠지요.”

“그리한다면.”

표가 상단의 성세는 천 년이 지나도 변치 않을 것이다.

말을 끝맺은 소년은 탁자 아래에서 작은 단지를 꺼내 표자승에게 내밀었다.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운 짙은 갈색의 단지는 새끼줄로 엄중하게 봉해져 있었다.

단지를 받아든 표자승은 손아귀를 뻐근하게 하는 예상 밖의 묵직함에 놀라 소년을 바라보았다.

“스승님, 이것은?”

“열어 보거라. 무엇이 들어 있는지.”

표자승은 조심스럽게 열십자로 단단히 묶인 새끼줄을 풀어헤친 다음, 뚜껑을 들어 올렸다.

작은 뚜껑에선 진득한 실 같은 것이 죽 늘어졌다. 반짝이는 옅은 갈색의.

그와 함께 은근한 단내가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것은 설마…….”

이것이,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표가 상단의 천 년을 책임질 비장의 물건이란 말입니까.

그리 묻는 듯한 표자승을 향해 소년은 나무 막대기를 건네며 말했다.

“그래. 보리 물엿이다.”

너도 어린 시절에 종종 먹어본 적 있지?

* * *

표자승은 홀린 듯 멍한 표정으로 소년이 건네는 막대기를 받아들었다.

막대기는 젓가락만 한 가는 굵기였고 한 뼘쯤 되는 길이었다.

보통 사람보다 배는 손이 큰 그의 기준으로 한 뼘이었으니 보통 사람에게는 두 뼘쯤 되는 길이일 것이다.

막대기를 검지와 엄지로 집어 들고 물끄러미 그것을 보던 표자승은 막대기의 양 끝을 잡고는 그것을 부러뜨렸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행한 일이었다.

반으로 부러진 막대기를 든 표자승은 그것을 단지에 푹 꽂아 넣고는 휘휘 휘저어 뽑아냈다.

그러자 끈적한 물엿이 실타래처럼 감겨 딸려 올라왔다.

잠시 머뭇거리던 표자승은 막대의 양 끝을 쥐고는 실타래를 감듯이 물엿을 비틀었다.

몇 번의 동작 끝에 투명한 갈색이었던 물엿이 희끄무레하고 탁한 미색으로 변했다.

“뭐하냐, 물엿 떨어진다.”

“예? 아, 예.”

소년의 타박에 표자승은 재빨리 물엿을 입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순박하고 부드러운 단맛이 혀끝에 번졌다. 설탕이나 꿀처럼 혀에 즉각적으로 반응이 오는 강렬한 단맛은 아니지만, 입에 물고 우물거리다 보면 어느새 사부작사부작 다가와서는 은근슬쩍 단맛을 보여주는, 그런 나긋나긋하고 상냥한 맛.

물엿 막대를 입에 문 채 한참 동안 우물거리던 표자승은 못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오랜만에 먹으니 나름대로 맛이 있지만, 역시 좀 모자란듯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군요.”

“아무래도 설탕이나 꿀에 비하면 단맛이 부족할 수밖에 없지.”

“그렇다면 어째서 물엿을 선택하신 겁니까?”

“그야, 애들 간식이니까.”

물론 소년은 아이들이 설탕의 자극적인 단맛보다는 모자란듯하면서도 부드럽고 은은한 보리 물엿의 단맛을 더 선호하리라 생각하여 물엿을 고른 것은 아니었다.

혹시 개중에는 그런 품위 있고 고상한 입맛을 가진 아이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설탕의 단맛을 선호할 것이다.

그럼에도 소년이 설탕이 아닌 물엿을 고른 이유는 물엿이 가진 단 한 가지 이점 때문이었다.

“물엿이 더 싸지. 어린애 용돈으로도 살 수 있을 만큼.”

저 머나먼 남방에서 실어나른 설탕보다는, 어디서나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물엿이 더 싼 것이 당연한 이치다.

합리적으로 들릴 만한 이유를 전부 열거한 다음 소년은 준비해 온 두 번째 간식을 표자승의 앞에 올렸다.

물엿을 잡아 늘여 긴 막대기 모양으로 만든, 하얀 보리 엿이었다.

“엿 먹어라.”

“예?”

“엿 먹으라고.”

“아, 예.”

표자승은 황급히 엿을 집어 들고는 뚝 베어 물었다.

잡아 늘이는 과정에서 속에 텅 빈 구멍이 생긴 엿은 바삭바삭 씹히다 이내 달착지근한 맛과 함께 사르르 녹아내렸다.

“보통 엿과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보통 엿은 씹다 보면 끈적끈적하게 늘어지는데, 이 엿은 마치 솜털을 씹는 것처럼 가볍게 녹는 것이…….”

“당총(糖蔥)이라 한다. 생긴 게 꼭 흰 파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지. 그리고 이 당총으로 만들어 먹는 대표적인 간식이 바로.”

광동 조산의 명물, 당총박병(糖蔥薄饼)이다.

그 말과 함께 소년은 바삭한 엿을 속으로 넣은 밀전병을 표자승의 앞에 내려놓았다.

“당총과 함께 볶은 땅콩, 참깨 등을 넣고 밀전병으로 말아낸 것인데, 조산 사람들은 청명절(清明节)에 이 당총박병을 먹는 풍습이 있지.”

“엿과 땅콩, 깨. 밀전병. 다 흔히 구할 수 있는 값싼 것들이군요.”

이제 네가 해야 할 일이 무언인지 알겠지.

와삭와삭.

단 두 입 만에 당총박병을 씹어 삼킨 표자승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엿 가루가 흩뿌려진 그의 철 수세미 같은 수염을 가리키고는 말했다.

“애들을 고객으로 삼는 장사이니 수익이 변변치는 않을 것이다. 적자를 보지는 않더라도 큰 흑자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거야.”

“수익은 다관에서 들어오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중요한 것은 수익이 아니라…….”

“그래, 상단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는 것이지. 이 사업은 다관 막심의 이름으로 하지 말고 별개의 사업체로 운영하도록 해라. 표가 상단의 이름을 따서 짓는다면 좋겠지.”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당총박병 하나에 매달리지 말고, 궁리해서 품목을 늘리도록 하고.”

당부의 말을 마친 소년은 길고 피로에 찌든 숨을 몰아쉬고는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진중한 표정으로 사업을 구상하던 표자승은 의자에 늘어지듯 기대앉은 소년의 얼굴을 힐끔거리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소년이 입을 열었다.

“일이 잘 풀리면 앞으로 네 상단이 흔들릴 일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네게 부족한 것은 사람들의 지명도뿐이었으니. 자금력은 이미 충분하고, 널 고깝게 본 다른 사대 상단이 외압을 넣어도 태감님께서 막아주실 거다. 누가 봐도 망할 것이 분명한 사업에 큰돈을 투자한다거나 하는 실책을 저지르지만 않으면 지금과 같은 성세를 누릴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만약 제가 그런 실수를 저지르려 할 때는, 스승님께서 꾸짖어 주시겠지요.”

표자승은 수염이 덥수룩하고 안와가 툭 튀어나온 험상궂은 장년인에겐 어울리지 않는 사근사근한 웃음을 지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기대했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퉁명스럽게 언제쯤 이 불민한 제자 놈 뒤치다꺼리를 그만할 수 있을까 하며 투덜거려야 할 얄팍한 입술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고 표자승을 보고 있어야 할 두 눈은 멀거니 창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유리창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어느새 소복소복 쌓이던 눈은 진눈깨비로 변해 세상을 칙칙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질척하고 우울하게 변한 거리를 바라보던 소년은 눈을 감고는 고개를 등받이에 기대었다.

표자승은 문득 그가 어떤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표자승은 그 말이 듣고 싶지 않았다.

“스승님.”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뒷말은 한참 동안 이어지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헤아려주길 원해서였을까. 아니면 그 말을 단순히 입에 담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그 이유를 궁리하던 소년은 눈을 뜨고는 표자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말을 꺼내지 못했던 이유를 깨달았다.

이 말을 들으면, 분명히.

“어쩌면, 내년 봄에는 네게 조언해 주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예상대로, 울적하게 젖어 있던 표자승의 눈망울에 진눈깨비가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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