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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74화 (275/314)

환관의 요리사 274화 외전 65화

따뜻하게 데워둔 넓은 사기 접시 위에 두툼한 스테이크 한 덩이가 오른다.

굵게 간 흑후추와 돌소금이 솔솔 뿌려지고, 석쇠에 구운 가지와 애호박, 피망과 토마토 등의 싱그러운 여름 채소, 껍질째 튀긴 감자.

그리고 버터에 튀기듯 익힌 반숙 달걀프라이가 접시의 빈자리를 채운다.

고기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흰 융단 위에는 여섯 개의 선명한 태양이 떠올라 있었다.

마지막으로 접시의 한 귀퉁이에 봉긋하게 모양을 잡은 쌀밥을 올린 후, 소년은 완성된 아침 식사를 상에 올렸다.

“모자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더 있으니.”

고기도, 달걀도, 버터도. 얼마든지 있으니 양껏 드십시오.

그 축복과도 같은 말을 신호 삼아 태감은 은빛으로 빛나는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었다.

아마 보수적인 제국인 이라면 오직 젓가락만이 교양있는 문명인이 자신의 품위를 지키며 식사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라고 단언하겠지만, 태감은 이 튼튼하고 날카로운 한 쌍의 도구가 가진 매력에 푹 빠져든 지 오래였다.

물론 요리사가 한껏 기교를 부려 한입 크기로 예쁘게 썬 요리를 젓가락으로 우아하게 집어 먹는 것도 즐거운 일이지만, 그래서는 이런 기쁨을 느낄 수 없지 않은가.

살코기를 찍고 썰고 찢는다는, 이 강렬하고 야성적인 희열을.

스테이크의 왼편을 포크로 찌르고 썰어내며 태감은 손아귀가 뻐근해지는 만족감을 맛보았다.

잘라낸 고기의 단면은 은은한 선홍빛이었다.

큼직한 고깃덩어리를 든 태감은 잠시 입을 벌려보고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것을 본 소년은 어림짐작으로 고기의 면적과 태감의 턱관절 가동범위를 가늠해 보고는 실소를 흘렸다.

“태감님, 그러다 입 찢어지겠습니다.”

“좀 찢어지면 어떠냐. 원래 가치 있는 것을 얻으려면 작은 희생쯤은 감수해야 하는 법.”

“칼 한 번만 놀리시면 굳이 희생을 감수하실 필요가 없을 텐데요.”

태감은 소년의 조언을 한 귀로 흘리며 고깃점을 그대로 입에 밀어 넣었다.

혀끝에 닿는 가슬가슬한 촉감. 송곳니가 표면을 누를 때 느껴지는 바삭함. 그리고, 뜨거운 황홀함이 그의 목구멍을 타고 흘러 넘어왔다.

섬세하고 촘촘한 질감의 육질은 씹을 때마다 육즙이 한껏 배어 나온다.

메마른 목구멍에 윤기를 내고 혀를 촉촉하게 적시고 나서도 혀 밑에 흥건하게 고일 만큼의 육즙이.

그 육즙은 달고 향기로웠지만, 결코 사람을 질리게 할 만큼 진저리나게 기름지지는 않았다.

곡물이 아닌 풀로 살찌웠기 때문일까. 고기에 얇게 덮여 있는 보드라운 지방층에서는 은은한 풀 향기가 느껴졌다.

길게 웃자라는 뻣뻣하고 거친 들풀이 아니라, 신선하고 향기로우면서도 어딘가 야생의 느낌이 나는, 공들여 가꾼 향초의 그윽한 향기가.

한 점을 씹어 삼킨 태감은 더운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분명, 식사로 빵을 내어 달라 했던가?”

“예. 지금 내드릴까요?”

소년은 바구니에 가득 든 빵을 태감에게 내밀었다.

소금물로 반죽한 빵은 껍질은 단단하고 속은 쫀득쫀득하여 그냥 먹어도, 버터를 발라도, 속에 얇게 저민 고기를 넣어 먹어도 일품이었다.

하지만 태감은 소년이 내민 바구니를 받아들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후, 태감은 소년에게 빵 대신 조미료를 요구했다.

“간장을 좀 다오.”

“간장을요? 혹시 소금간이 부족하십니까?”

“아니, 고기에 뿌릴 것이 아니다.”

소년은 의아해하면서도 종지에 간장을 담아 태감에게 내밀었다.

간장을 받아든 태감은 신중하게 밥 위에 간장 몇 방울을 떨어뜨렸다.

그것을 멀뚱히 지켜보고 있었던 소년은 태감의 의도를 깨닫고는 신음을 삼켰다.

“태감님, 설마.”

“어쩌면 이것은 정도가 아닌 사도일지도 모르지. 요리사가 정성껏 완성한 작품을 제 욕심으로 가필하는, 오직 자기만족만을 위한 이기적인 행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분명히.

태감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고기를 잘게 썰어, 밥 위로 올렸다.

간장의 은은한 갈색으로 물든 쌀알 위로 고기의 육즙이 배어든다.

분명히, 맛있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노른자가 반숙으로 익은 달걀프라이를 골라 밥 위에 올린 다음, 태감은 포크를 숟가락으로 바꿔 쥐었다.

그러고는 허락을 구하듯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접시 위에서 완성된 또 하나의 요리. 스테이크 덮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밥을 먹는데 정도가 어디 있고 사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먹는 사람이 맛있게 먹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른길이지요.”

어서 드셔보십시오.

소년의 재촉에 태감은 숟가락으로 노른자를 깨뜨린 다음 크게 한 숟갈을 떠올렸다.

기름진 육즙으로 윤기를 더한 쌀알 위로 농후한 황금빛 액체가 흘러내렸다.

* * *

호사스럽고 기름지며 근사한 아침 식사가 끝나자 후식으로는 따뜻한 커피와 계피와 생강으로 향을 낸 쿠키가 나왔다.

“잘 드셨습니까?”

“그래. 배부르게 잘 먹었다.”

만복감에 한껏 젖어 나른한 표정으로 과자를 입에 문 태감은 작게 하품을 하고는 의자 등받이에 늘어지듯 몸을 기댔다.

마치 배부른 고양이처럼 금방이라도 꾸벅꾸벅 졸 것만 같은 태감을 보며 소년은 엄격한 헛기침으로 그를 일으켜 세웠다.

태감은 투정을 부리듯 입술을 내밀고는 말했다.

“이제 경사로 돌아가면 한동안은 밤잠도 제쳐 두고 일에 매진해야 하는데, 이 정도 느긋함은 누려도 되지 않느냐?.”

“느긋함을 누리시는 건 좋습니다만, 누리실 거면 침실로 가시든 정원으로 가시든 하십쇼. 치우는 사람 복잡하게 주방에 늘어져 있지 말고.”

성가시다는 듯 늘어진 태감을 쏘아보던 소년은 한 아름쯤 되는 설거짓거리를 한꺼번에 들어서는 개수대에 호쾌하게 밀어 넣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태감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혹시 칼 벌써 씻었느냐?”

안 씻었다면 한 번만 더 수고해다오.

태감의 부탁에 소년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칼 쓰실 일 있습니까?”

“그래, 비룡응에게 삯을 줘야 하니.”

“마침 자투리 고기가 있으니 잘됐군요.”

그런데 보내실 서신이 있으십니까?

소년의 질문에 태감은 콧등을 매만지며 말했다.

“폐하께 보낼 서신이 있다.”

“아아, 그렇지요. 일이 다 끝났으니 보고서를 올리셔야겠군요.”

소년은 끌끌 웃고는 도마 위에 기름기 없는 빨간 소고기 한 덩이를 올려 얇게 저며냈다.

선홍빛의 고깃점을 보던 태감이 입맛을 다셨다.

“그러고 보니, 기름기 없는 소고기는 날것으로 먹어도 맛이 좋다고 했지?”

“이제는 새 모이까지 탐을 내십니까.”

“아니 뭐, 꼭 먹어보고 싶다는 건 아니고…….”

“거참, 맛만 보십쇼. 맛만. 새 줄 것도 없으니까.”

소년이 즉석에서 만든 참기름장에 얇게 저민 고기 한 점을 찍어 내밀자 태감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받아먹었다.

날것으로 먹는 소고기는 익혀 먹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혀에 착 감기는 묵직하면서도 서늘한 촉감.

첫맛은 금속을 연상시키는 비릿한 맛이 올라오는 듯하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하고 감칠맛이 난다.

금세 한 점을 꿀떡 삼킨 태감은 눈을 빛내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먹어보니 썩 맛이 좋은데, 어디 한 점만 더.”

“날 것 많이 드시면 탈 납니다.”

“새도 날것을 먹고 호랑이도 날것을 먹는데, 사람은 왜 날것을 먹으면 안 되느냐?”

“날짐승, 들짐승이랑 사람이 같습니까?”

이런 짐승 같은 인간을 봤나.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태감을 흘겨보던 소년은 이내 설득을 포기하고는 따로 빼둔 우둔살 한 덩이를 가져와 도마에 올렸다.

“거참, 고기라면 덮어놓고 좋아하시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날고기까지 잘 드실 줄은 몰랐는데.”

“지금까지는 회를 즐기는 이들을 이해 못 했는데, 한번 먹어보니 이제야 그 이유를 알겠구나. 이리도 야들야들하고 감칠맛 날 줄이야. 역시 용기를 내보기를 잘했어.”

“왜 하필 쓸 일 많은 용기를 이런 데다가 쓰십니까. 참나.”

너무 즐기지는 마십쇼. 그러다 배에 기생충이라도 들어가면 큰일 납니다. 가뜩이나 여긴 구충제도 없는데…….

소년의 염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태감은 희희낙락하며 새로이 발견한 미식을 탐닉했다.

아니꼽다는 듯 태감을 흘겨본 소년은 품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호각을 꺼내 힘껏 불었다.

취구를 통해 불어넣은 숨은 기묘한 떨림으로 변해 허공에 울렸다.

사람은 들을 수 없고 땅을 기는 네발 달린 것도 들을 수 없으며 날개를 가지고 있으나 구름 위론 날 수 없는 것 역시 듣지 못하는.

오직 바람을 타고 하루에 만 리를 나는 창공의 왕만이 들을 수 있는 소리.

그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창밖에선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거참, 빠르기도 해라.”

소년은 날아들 비룡응을 받아들기 위해 오른쪽 팔을 쭉 펴고는 조심스럽게 왼쪽 팔로 창문을 열어젖혔다.

이제 몰아치는 질풍과 함께 날아든 창공의 왕이 그의 팔을 횃대 삼아 내려앉은 것이다.

퍽 가슴 벅차오르는 광경을 상상하며 소년은 팔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머리칼을 확 흩날리게 하는 강렬한 바람과 함께 비룡응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비룡응이 선택한 횃대는 소년의 팔이 아니었다.

소년은 바람과 함께 날아든 비룡응이 태감에게로 날아드는 것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태감님!”

비룡응이 찾아온 줄도 모르고 육회를 즐기고 있던 태감은 눈앞으로 날아든 시커먼 물체를 향해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렸다.

그것이 비룡응을 받아들기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날아드는 비룡응에게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는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비룡응이 앉기 좋은 자세였음은 분명했다.

그리고 비룡응은 태감의 팔에도 앉지 않았다.

날렵하게 태감의 머리 위를 스친 비룡응은 태감의 맞은편에 놓인 의자 등받이에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자신을 멀뚱히 보는 우매한 땅 짐승들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고 품위 있는 동작으로 접시에 예쁘게 놓인 육회를 콕콕 쪼아먹었다.

태감보다 먼저 가슴을 진정시킨 소년이 바싹 얼어붙은 태감을 보며 안도의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히 새로운 별미에 눈뜬 건 아니었나 봅니다.”

“별미?”

“모르십니까? 맹금류는 원래 사냥하면 눈부터 쪼아먹는다는군요.”

눈이 제일 빨리 상해서 그러는 건지, 눈이 가장 영양가가 많은 부위라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년의 말에 태감은 소름이 끼친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거, 비룡응과 겸상하시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너 같으면 기분이 좋겠느냐? 날짐승이랑 겸상하는데?”

“세상 어느 누가 황실의 신수와 겸상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나마 동창 제독은 되니 이런 영광도 누리지, 다른 사람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그래, 거 참 영광이구나.”

가장 맛좋은 부위만 콕콕 쪼아먹는 비룡응을 얄밉다는 듯이 보던 태감은 결국 비룡응의 위엄을 이겨내지 못하고 젓가락을 내려놓고야 말았다.

“크흠, 어쩔 수 없지. 먼 길을 날아가야 할 테니 내가 좀 양보하는 수밖에.”

“예, 뭐. 그렇다 칩시다.”

소년이 이죽거리고 태감이 뻔뻔한 얼굴로 응수하는 동안 식사를 마친 비룡응은 한번 푸드득 날갯짓하고는 한쪽 발을 내밀었다.

새카만 갈고리발톱이 달린 발을 본 소년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태감을 돌아보았다.

“이야, 저런 거에 잘못 걸리면 태감님의 젓가락 같은 손목은 그냥…….”

“어허, 양보한 거라니까.”

태감은 부득불 자신이 양보한 것이라 우기며 곱게 접은 서신을 죽통에 넣어 봉한 후, 비룡응의 다리에 묶었다.

몇 차례 다리를 흔들어 서신통이 잘 묶였는지 확인한 후, 비룡응은 홰를 치고 날아올라 그대로 동정호의 바람을 타고 구름 위로 사라졌다.

비룡응이 작은 점이 될 때까지 창밖을 내다보던 소년은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이젠 일을 할 시간이군요.”

“그래. 잘 먹고 잘 놀았으니, 이젠 일을 해야지.”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소년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태감은 피식 웃음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 하나 당초 예정대로 된 것이 없는 여행이었지.”

“호환에 인신매매에, 덜컥 짐까지 떠맡게 되고.”

“그래. 다사다난한 여행이었지. 그래도 난 좋았다.”

여의주의 그릇이라는 운명을 타고나 평생 후궁 밑바닥에 유폐되어 있었어야 할 몸으로 낯선 하늘을 보고 낯선 땅을 걸었으니, 난 그것으로 족하다.

말끝을 흐린 태감은 고개를 숙여 소년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에 혹시 피로감이 드러나지는 않았는지 살피기 위하여.

태감과 눈을 마주친 소년은 피식 웃고는 입을 열었다.

“예.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도 썩 괜찮았습니다.”

“일을 끝마치고 나면, 다시 여행을 오자꾸나.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땐 이번처럼 이런저런 일 떠맡지 말고 가벼운 몸으로 옵시다.”

이제 일하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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