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73화 외전 64화
미식가라면 누구나 기나긴 밤중의 공복이 끝난 직후 처음으로 입에 대는 식사. 아침 식사에 공을 들이기 마련이다.
그리고 설령 평상시엔 ‘음식이란 그저 배만 채우면 족하다’고 말하는 무심한 사람들도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여정의 첫 아침 식사만큼은 공들여 준비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태감님, 저희 방금 저녁 먹었습니다.”
아무리 까탈스럽고 괴팍한 미식가라도, 저녁을 먹자마자 바로 내일 아침을 걱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유별난 일일 것이다.
소년은 전전긍긍하는 태감에게서 고개를 돌려 초토화된 상을 바라보았다.
큼직한 자라와 비둘기 알, 동과, 닭고기 완자가 가득 들어 있었던 솥은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바닥을 들어내고 있었고, 양과 돼지와 송아지의 갈비 통구이는 고깃점 하나 붙지 않은 앙상한 뼈만이 흉물스럽게 전시되어 있었다.
꿀을 발라 말린 다음 기름을 끼얹어가며 튀겨낸 닭과 오리와 거위, 파와 생강을 얹어 찐 다음 튀긴 마늘을 얹어낸 민물 농어와 쏘가리에서 발라낸 잔뼈와 가시는 봉긋한 언덕처럼 쌓여 있었고, 먹기 좋게 뼈를 발라내 튀긴 쏘가리는 그나마 장식으로 놓아둔 머리와 꼬리만을 간신히 남길 수 있었다.
자신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이 스러진 을씨년스러운 잔해를 돌아본 소년은 할 말 있냐는 표정으로 태감을 흘겨보았다.
“이렇게 거나하게 드시고도 또 밥 생각이 나십니까. 거참.”
“우자는 당장 배가 부른 것에 만족하여 근심하지 않고, 지자는 오지 않은 내일을 근심하는 것이 무용함을 알기에 근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자는 아니나 지자라 하기도 어려운 범자인 나는 다가올 내일을 근심하지 않을 수 없구나.”
“하여간,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소년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투덜거리고는 다리를 꼬고 앉아 태감의 말을 곱씹어 보았다.
아침으로 무엇을 먹을 것인가.
멀고 험난하고 고된 여로에 오르기 전. 그 기념할 만한 아침 식사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무엇을 올릴 것인가.
왕이 아닌. 정치가가 아닌. 한 사람의 요리사에게 주어진 그 소박한 과제에 소년은 조용히 침잠했다.
아침 식사란 무엇인가. 유사 이래 인류의 아침 식사를 책임져 온 것은 곡물 요리였다.
뜨겁거나 차갑거나 미지근한 곡물 요리. 거기에 먹다 남은 고기나 약간의 달걀과 채소. 그리고 짐승의 젖이나 차.
‘아침이라는 패악적인 난봉꾼을 도저히 맨정신으로 맞이할 수 없을 때 많이들 애용하는 특정 음료’ 등을 곁들이는 것이 많은 이가 생각하는 전통적 아침 식사의 표본이었다.
하지만 문명이 발전하고 취향의 다양성이 존중받게 되며 현대의 아침 식사는 개개인의 취향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으로 차려졌다.
누군가의 아침 식사는 인공 과일 향이 첨가된 시리얼 한 사발일 수도 있고, 따뜻한 커피 한잔을 곁들인 크루아상일 수도 있으며, 달걀과 베이컨과 소시지에 치즈와 버터, 잼을 곁들인 팬케이크로 차려진 근사하고 화려한 것일 수도 있고.
두부와 감자와 애호박이 들어간 된장찌개에 콩나물무침과 달걀말이, 새큼한 배추김치와 하얀 쌀밥으로 차린 정겹고 소박한 아침 식사일 수도 있다. 그리고.
“누군가는 아침부터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스테이크와 달걀프라이로 아침을 먹었지요.”
“스테이크라? 아아, 전에 말했던 그 구운 소고기 요리 말이지? 아침부터 구운 소고기와 달걀이라. 그것참 부러운…… 아니. 그건 너무 무겁지 않을까?”
“물론 아침부터 좀 거북하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른다면, 누구나 소화불량의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배부르게 먹고 싶지 않겠습니까.”
스테이크와 달걀.
그것은 세계 2차대전 당시 가장 위험한 전장에 투입되는 병사들. 특수부대원, 폭격기 조종수, 저격수에게 제공되는 아침 식사였으며 우주비행사들이 우주선 발사를 앞두고 먹은 아침이기도 했다.
태감은 그 역사 깊은 식단이 마음에 들었는지 작게 탄성을 질렀다.
“소고기와 달걀이라. 괜찮겠는걸. 독사가 우글거리는 복마전에 들어가려면 배를 든든하게 채워야지.”
“물론 죽으러 가는 건 아닙니다만, 그만한 각오가 필요하겠지요.”
“그런데 그런 질 좋은 소고기를 구할 수 있겠느냐? 경사야 한창 소고기 열풍이 불어 품종 좋은 비육우를 언제든 구할 수 있지만, 여기선 기껏해야 밭을 갈던 늙은 농우밖에 없을 텐데.”
“재료 수급은 요리사인 제가 걱정할 일입니다.”
소년은 그 어떤 무리한 요구라도 수용할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요리사의 얼굴을 태감에게 보여주었다.
말없이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던 태감은 빙그레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사양 않고 부탁하마. 내일 아침은 기름진 소고기 스테이크에 달걀을 잔뜩 내다오. 그래, 버터 바른 빵을 곁들여서. 음료로는 따뜻한 커피가 좋겠군. 우유를 넣어서 달큼하게.”
“예. 그리 준비하지요.”
그럼 전 내일 아침 준비가 바쁘니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가벼운 인사를 전하고 일어선 소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동정호에 올 때까지 대충 석 달이 좀 넘게 걸렸잖습니까? 이것저것 일이 많았으니.”
그럼 가는 길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소년의 질문에 태감은 턱 끝을 쓰다듬고는 대답했다.
“아마…….”
* * *
“한 달 하고 보름쯤 걸리겠군요.”
동정호에서 쉬지 않고 말을 달린다면 대략 한 달쯤 걸리지요. 하지만 인원이 많으면 그만큼 속도는 느려지는 법이니, 그것을 고려하면 보름쯤은 더 소요되겠군요.
이부상서는 무덤덤한 어조로 숙친왕이 경사로 돌아오는 데 필요한 시간을 계산했다.
그리고 황제는 존귀한 제국의 지배자와 독대한다는 영광을 누리고 있음에도 무미건조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이부상서를 향해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고양이가 집을 비우니 곳간에 쥐가 들끓는군. 어느 불경한 쥐가 혀를 그리 경망스럽게 놀렸는가?”
“신은 그저 황실의 담장 위에 앉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우연히 엿들었을 뿐이옵니다. 물론 하명 하신다면 당장에라도 황실의 비밀을 누설한 그 불경한 새들을 잡아 대령하겠나이다.”
“죄인을 추포하는 것은 포도청의 권한일세. 이부상서인 그대가 그것을 논하는 것은 월권행위가 아닌가.”
“이 미욱한 것이 사리에 밝지 못하여 그만 큰 죄를 지을 뻔했나이다.”
공손히 읍하는 이부상서를 보며 황제는 한껏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부상서는 그에 조금도 개의치 않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고양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부도덕하고 탐욕스러운 쥐들이 나라의 곳간을 들쑤시고 있으니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그 불순한 것들이 제 배를 불리기 위해 욱여넣은 쌀알 한 톨은 곳 백성들의 피와 땀 한 방울이 아닙니까.”
어찌 그대가 그런 말을 입에 담는가.
황제는 믿기 어렵다는 눈으로 그 불순하고 부도덕하며 탐욕스러운 쥐들의 우두머리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충심으로 간언하는 참된 충신의 열렬한 호소뿐이었다.
그 불온한 것들을 척결해야만 한다는 이부상서의 거듭된 주장에 황제는 노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그러니 새로운 고양이를 들여야겠지.”
“발톱이 날카롭고 눈이 밝으며 몸놀림이 가벼운 고양이를 들이셔야 쥐들이 경거망동하지 않고 곳간이 풍요로울 것입니다. 명하신다면 신이 그런 인재를 골라 천거하겠나이다.”
“이미 낙점해 둔 인재가 있네.”
그러니 오늘 대전에서 신료들을 단속해 둔 이유가 동창 제독으로 자신의 사람을 심어 넣기 위해서였다면, 그 건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에 해당하는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황제를 향해 이부상서는 다시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더없이 정중하고 겸허하게.
“뜻대로 하소서.”
신은 그저 따르겠나이다.
이부상서가 전해 온 그 극진한 충심의 말은 황제에게 불쾌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게 했다.
십 년간 대립해온 자가. 황실에 충성을 맹세하고 나라의 녹을 받아먹는 관리의 신분임에도 황제의 정적을 자처하며 온갖 악행을 저질러온 추악한 자가. 이제 와 무슨 낯으로 충성을 말하는가.
노여움으로 핏발이 선 황제의 눈앞에서 이부상서는 일말의 두려움도 긴장도 묻어나지 않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그저 신하 된 자로서 해야 할 도리를 다할 뿐이옵니다.”
“신하의 도리라.”
충성을 다하겠다고 말하는 이부상서를 보며 황제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어 보였다.
이제 와 그대가 나에게 다할 충성은 오직 하나뿐일세. 이부상서.
“장강후랑추전랑(長江後浪推前浪)일세.”
뒤 물결에 밀려나는 앞 물결과도 같이, 상서의 자리를 후대에 물려주고 조용히 떠나주는 것만이 그대가 다할 수 있는 유일한 충성이다.
그리 말하는 황제 앞에서 이부상서는 부드러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밀려난 앞 물결은 바다로 나아가 다시 장대비가 되어 강으로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이만 물러나겠나이다.
그 말을 남기고 물러나는 이부상서의 등을 노려보며 황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같은 물길에서 함께 흐르기엔, 우린 너무나 오랜 시간 반목해 왔지.”
* * *
이튿날 아침. 동정호의 하늘은 떠나는 이들을 배웅하기 위함인지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했다.
부산스럽게 마차에 짐을 실어나르는 수행원들 사이에서 물품을 검수하던 태감은 서류를 들여다보느라 뻐근해진 목을 주무르고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름진 고기로 아침을 먹기에 좋은 날이야.”
“흰소리하지 마시고 슬슬 들어오십쇼.”
식사 준비 끝났습니다.
정겹기 그지없는 투박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태감은 들고 있던 검수표를 내동댕이치고는 반색하며 소년을 굽어보았다.
“고기가 도착했느냐?”
“예. 고기도 준비되었고, 고기랑 달걀을 구울 번철도 달궈두었습니다.”
“사람은?”
“태감님만 오시면 됩니다.”
태감은 두말없이 잰걸음으로 주방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단혜림과 장소, 이삼. 그리고 큼지막한 고깃덩어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옅은 상아색으로 빛나는 우아한 지방에 한 겹 덮여 있는 섬세한 선홍빛 속살. 최상품의 대리석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그 웅장한 자태에 태감은 애달픈 탄식을 흘렸다.
“이것이 정녕 짐승의 살코기란 말이냐.”
“예. 표가 상단을 통해 간신히 구해온 양질의 육우 등심입니다. 곡물로 비육한 소는 아니라 지방은 조금 덜하지만, 그만큼 살코기의 담백한 풍미를 즐길 수 있지요. 아침 식사로 먹기엔 최적의 고기입니다.”
이런 고기는 사실 기름만 살짝 발라내고 그대로 썰어 기름장에 찍어 먹어도 좋지요. 하지만 오늘은.
소년은 말끝을 흐리며 칼을 집어 들었다.
둔중하게 빛나는 회색 칼날. 운철로 빚어낸 칼날이 등심 위에 드리웠다.
“오늘은 스테이크로 먹기로 하였으니. 자, 두께는 얼마나 되게 잘라드릴까요?”
“어느 정도 두께까지 되지?”
“보통은 손가락 마디를 기준으로 삼지요. 어디, 한 마디면 이 정도. 두 마디면 이 정도. 그리고 세 마디면.”
약 8센티. 인치로 하면 약 3인치.
태감의 쭉 편 검지 길이는 대략 그 정도였다.
소년은 곧게 펴진 손가락과 태감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혹시나 한다는 투로 되물었다.
“손가락 세 마디 길이로 잘라드릴까요?”
“이 정도가 적절할 것 같구나. 아침부터 과식하는 건 좋지 않으니.”
“허어, 3인치 두께 스테이크라. 도전적인 시도가 되겠는데.”
한번 해보지요.
마른침을 삼킨 소년은 조심스럽게 칼을 놀려 정확히 3인치 두께로 고기를 썰어냈다.
감히 한 손으론 다 들지 못할 만큼 넓적하고 두꺼운 등심의 무게감. 그 두툼한 두께의 위엄에 굽기도 전부터 관중의 흥분이 고조되었다.
“이거 고기가 하도 커서 한 번에 여러 개는 못 구울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태감님 것 먼저 구워 드리고, 다음 분 주문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괘념치 마시게.”
단혜림과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한 후, 소년은 벌겋게 달아오른 번철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는 편으로 썬 마늘 한 움큼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마늘이 노릇하게 튀겨지고 기름에 알싸한 마늘 향이 배어 나올 때쯤, 소년은 미질향(迷迭香 rosemary) 한 묶음과 함께 육중한 고기를 그대로 번철에 올렸다.
등허리를 타고 오싹 소름이 기어오르는, 귓가에 기름이 자글자글 끓어오르는 그 소리.
수분이 증발하며 고기가 오그라드는, 새빨간 고기가 짙은 갈색으로 그을리는 그 소리.
귓가에 통통 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참기 어려운 냄새가 번철에서 피어올랐다.
마늘과 로즈메리의 그윽한 향기를 담뿍 머금은 등심의 감미로운 기름.
그 감로수처럼 달고 향기로운 육즙이 고기의 표면에 송골송골 맺힐 때쯤, 소년은 깍뚝 썬 큼직한 버터 한 덩어리를 고기에 올리고는 그대로 뒤집었다.
버터의 향기. 콧속 점막에 눌어붙는 유지방의 달착지근함이 등심의 육즙과 뒤섞인다. 녹아든다.
뇌에서 인내와 절제라는 단어를 증발시키는, 아찔할 만큼 폭력적인 향기가 훅 끼쳐왔다.
당장에라도 번철에 뛰어들고만 싶은 충동으로 번들거리는 관중의 얼굴을 훑어본 소년은 악의적인 웃음을 지으며 번철에 고인 버터를 고기 위에 끼얹었다.
은은한 갈색으로 그을린 버터가 고기를 적신다.
“이야, 이거 고깃덩어리가 원체 커서 익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그려.”
“얼마나, 얼마나 걸리느냐?.”
“그거야 모르지요. 어이쿠, 재촉하신다고 고기가 빨리 익지는 않습니다.”
배를 움켜쥔 채 통증과도 같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기분 좋게 흥얼거렸다.
“이렇게 두꺼운 고기는 우선 팬에서 충분히 리솔레(rissoler) 해준 다음에. 아, ‘리솔레’라는 건 센 불에 겉이 노르스름해지도록 익히는 걸 말하는 겁니다. 아무튼, 충분히 리솔레를 해준 다음에. 또 화덕에서 고르게 열을 쐬어줘야 속까지 충분히 익지요. 안 그러면 겉은 까맣게 탔는데 속은 아직도 차가운, 그런 끔찍한 고기를 먹게 되지요.”
“그렇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야 맛 좋은 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