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71화 외전 62화
외궁의 정전(正殿)인 태의전(太意殿).
대제국의 지배자이자 만백성의 어버이이며 위대한 금룡의 화신, 황제는 일곱 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 해와 달을 거머쥔 금룡을 수놓은 일월금룡병(日月金龍屛)이 둘러쳐진 옥좌에 앉아 대소신료들을 굽어보았다.
‘오늘따라 무척 조용하군.’
물론 입궐한 신료들이 불경하게도 어전회의에서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묵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봄기운이 퇴색하고 산과 들에는 싱그러운 푸른빛이 도는, 연못에선 개구리가 울고 밭에는 참외꽃이 영그는 절기. 입하(立夏)였다.
한해 농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절기인 만큼 입하는 부지런한 농부뿐만 아니라 신료들에게도 대단히 바쁜 절기였다.
농번기가 오기 전 관청에서 백성들에게 부과하는 부역(賦役)의 면제 여부, 이맘때쯤이면 한 번씩 찾아오는 폭우로 인한 수해와 혹시나 모를 가뭄의 대비 등.
육부에 속한 신료들은 황제의 인가를 받아야 하는 안건을 화려하고 복잡하며 긴 미사여구를 덧붙여 진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엄숙하고 경건한 소란 속에서도 황제가 조용함을 느낀 까닭은.
‘오늘은 다들, 무척이나 협조적이군그래.’
대전에 모인 신료 중 누구도 잡음을 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안건을 내놓는 이가 없었다.
모두가 반드시 나라의 앞날을 위해 필요한 안건만을, 다른 이의 안건에 훼방을 놓는 일도 없이 절제되고 강직한 태도로 말하고 있었다.
마치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황제의 충신이며 제국의 미래를 위해 분골쇄신할 각오가 있다고 말하는 듯한, 제위 이래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신료들의 태도에 황제는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무능한 적신은 현재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지껄이고, 유능한 적신은 훗날 그 무능한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함께 떠들며, 무능한 충신은 단순히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그들을 성토하고, 유능한 충신은 그런 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게 작은 불티로 시작된 소란이 점차 큰 소란으로 번져 끝내 아수라장이 되는. 그것이 황제가 지금껏 경험해 온 어전회의였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 광경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혹시 지금이라도 자신이 처음 정계에 발을 디뎠을 때 꿈꾸었던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며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던 청렴한 관리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일까?
황제는 스스로의 망상에 조소를 던졌다.
차라리 오늘 아침 우연히도 신료들이 쥐약, 수인성 질환, 물리적 충격 따위로 정신적 문제가 생겨 심신상실 상태가 되었을 가능성을 따져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관리들의 눈에선 금치산자 판정을 내릴 만한 근거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관리들은 입을 헤벌쭉하게 벌리고 침을 질질 흘리거나 미친 듯이 웃고 떠들며 춤을 추지도 않았고 위협적으로 눈을 희번덕거리며 벼룩에 쏘인 개처럼 고개를 정신없이 털지도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근엄하고 진지하기 그지없는 신료들을 둘러보며 작게 한숨을 쉰 황제는 심중에 싹튼 실망감을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고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신료들이 갑작스러운 재난으로 광증을 얻은 것도, 대오각성하여 관리가 해야 할 본분에 눈뜬 것도 아니라면.
황제의 시선이 대전의 앞쪽을 향했다. 황제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은 중년인에게로.
‘이부상서. 그대가 획책한 것인가.’
육부의 수장. 이조의 상서. 모든 문관의 우두머리.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앉았다 전해지는 황제 아래 최고 권력자. 그리고 황제의 정적.
그런 수식어로 일컬어지는 이가 황제의 시선에 작게 고개를 숙였다.
이부상서를 보던 황제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위화감이 들 정도로, 불쾌감이 들 정도로. 이부상서는 세속의 삿된 욕망에 눈 돌리지 않고 절개를 지키는 지조 높은 문인과도 같은 차림새였다.
질 좋은 비단 관복에 호피 가죽신이며 옥으로 장식한 혁대, 칠보 팔찌와 옥가락지, 각종 금붙이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다른 신료들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청렴결백의 표본과도 같은 차림새.
만약 누가 본다면 일찍이 낙향하여 홀로 독야청청(獨也靑靑)하는 문객이 아닌가 여기리라.
남몰래 쓴웃음을 지은 황제는 이부상서의 차림새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비단 재질의 관복을 입기는 했지만 다른 관료들처럼 자신의 사치와 허영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 난 듯한 차림은 아니었다.
걸친 것도 간신히 관료의 품위를 유지할 만한 값싼 비단, 그것도 오랜 시간 함께해온 소매 끝과 옷깃에 손때가 묻은 것이었고 검지 쪽에 도드라지는 굳은살이 박인 손에는 흔한 금가락지 하나 끼지 않았다.
그 누가 저자를 나라에서 가장 큰돈을 움직이는 자리에 앉은 관리라 생각하겠는가.
이부상서의 검박함은 차림새뿐만 아닌 그 체구에도 묻어났다.
기름기 번들거리는 살집 두둑한 다른 고관대작들과는 달리 이부상서는 가늘고 호리호리한 마른 체격이었다.
하지만 마른 체격이라 하여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그런 마른 몸이 아닌, 병약함이 묻어나는 메마른 몸이었다.
병을 타고났다고 하였던가. 찬바람이 돌면 금방이라도 가래 섞인 기침을 토할 것만 같은 중년인을 지그시 보던 황제가 작게 손짓했다.
옥좌의 팔걸이에 팔을 걸친 채, 검지와 중지만을 까딱거리는 작은 동작.
지근거리에 앉은 자만이 눈치챌 수 있는 작은 신호에 이부상서가 미소 지었다.
예. 폐하. 어전회의가 끝나는 대로 찾아뵙겠나이다.
오직 십여 년이라는 시간을 동침해온 정적들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짧은 눈인사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디 한번 봐야겠군. 그대가 도대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
* * *
경사에선 황제와 이부상서가 혀 밑에 칼을 숨긴 채 독대하는 동안, 경사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 석 달쯤 걸리는 거리에 위치한 제국 최대의 호수에선 저녁 식사 거리라는 소박한 주제로 토론이 한창이었다.
“암시장주를 포섭하고 이부상서와 교섭할 명분을 얻었으니, 이만하면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예, 큰 성과를 얻었으니 그만큼 성대하게 축하해야지요.”
“그리고 이제 머지않아 동정호를 떠나 경사로 돌아가야 하니, 먹고 마시고 즐겨 미련이 남지 않도록 함이 옳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태감과 소년은 의견의 합치를 본 듯 정다운 웃음을 교환하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하지만 입가에 서글서글한 미소가 떠올랐던 것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했다. 둘은 마치 비늘을 세운 독사와도 같이 서로를 노려보며 첨예하게 대립했다.
“연회의 주역이라 하면 누가 뭐라 해도 당연히 고기가 아니냐.”
“물고기도 고기 아닙니까.”
“비늘 달리고 다리 없는 건 취급 안 한다. 털 나고 네 다리 달린 것. 아니면 깃털 나고 두 다리 달린 것. 이 두 가지가 아니면 고기로 인정 못 한다.”
그럼 뱀도 물고기로 취급하십니까? 비늘 달리고 다리 없는데, 라고 쏘아붙이려 했던 소년은 이내 태감과 뱀의 관계가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짧게 혀를 찼다.
불손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짝다리를 짚고 선 소년을 보며 태감은 가장 완고한 육식주의자의 얼굴로 웅변을 펼쳤다.
“아직 인간이 지성보다 본능이 앞섰던 야만적이고 야성적이던 부족사회 시절부터 연회의 주역을 맡아온 건 항상 고기였다. 부족의 힘센 전사들이 사냥해 온 짐승의 고기를 다 같이 나눠 먹는 것이야말로 연회의 기원이라 할 수 있지.”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무궁한 발전을 이뤄왔다. 우리는 문명을 만들어냈고, 우리 스스로를 보다 나은 존재로 발전시켜 왔지.
하지만 유사 이래 연회의 본질이 변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
“연회란 바로 고기를 다 함께 먹는 행위란 말이다! 그런데 어찌 너는 선조들이 대물림해 온 전통을 무시하고 비늘 달리고 다리 없는, 잔가시 많은 것을 연회의 주역으로 내겠단 참담한 말을 입에 담느냐!”
태감의 열띤 웅변에 소년은 말을 잃어버린 채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뜨거운 열정이 담긴 연설에 탄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어처구니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참, 이 양반은 원시시대 부족사회까지 들먹여 가며 고기가 먹고 싶나. 언제부터 그렇게 선조들을 존경하며 사셨는지, 내가 댁을 모시면서 위패에 절 한번 하는 꼴을 본 적이 없구만.
헛웃음을 흘리던 소년은 이내 입꼬리를 귀밑까지 찢어 올리고는 한 걸음 내디뎠다.
얼굴 거죽이 바뀌고 앉은 자리가 바뀌었음에도 퇴색하지 않은 상호 오운의 상징, 야차와도 같은 흉소가 그려지자 태감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참, 태감님 궤변도 오랜만에 들어보는군요. 정계에서 물러나신 이후로 혀도 좀 녹슬지는 않았을까 했는데, 기우였던 모양입니다.”
그러면 이제, 제 차례군요?
귀기 어린 웃음을 그리며 소년이 독기 오른 혀를 내밀었다.
“태감께서 말씀하셨지요. 인류는 스스로를 보다 나은 존재로 발전시켜 왔다고. 하지만, 선조가 이룩한 것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진정 발전이라 할 수 있습니까? 아니겠지요. 발전이란 무엇입니까.”
더 낫고 더 좋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발전이지요.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더 발전시키는 원동력일까요?
바로 미지를 기지로 만들겠다는 호기심. 도전정신이야말로 발전의 진정한 원동력 아니겠습니까.
말을 끊은 소년은 동의를 구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치 소가죽 북의 울림통을 때리는 듯한 깊이 있고 호소력 짙은 목소리, 폐부를 쥐어 짜낸 단말마를 토하는 듯한 장절한 기세에 구경하던 관중들인 장소와 이삼, 그리고 단혜림은 자신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그 박수를 박차 삼아 소년은 목에 핏대를 세우고 소리쳤다.
“그렇다면 연회에 있어 발전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깃털 달리고 털가죽 달린 것들의 강점기를 끝내는 것보다 다양하고 많은 식재료에게 연회의 주역이 될 공정한 기회를 열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연회문화의 발전이고 인류의 번영 아니겠습니까!”
어째서 비늘 달린 것은 연회의 주역이 될 수 없습니까! 태감, 혹시 물에서 방금 끌어 올린 농어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 날렵하고 맵시 있게 뻗은 유선형의 몸체. 우아한 지느러미와 찬란하게 빛나는 은빛 비늘. 그 고상하고 멋진 물고기는 어째서 연회상의 중앙을 차지할 수 없습니까!
도미, 도미 역시 귀하기로도 맛으로도 연회의 주역으로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지요! 전 태어나 도미처럼 잘생긴 물고기는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범선의 돛과도 같은 위엄있는 등지느러미 하며, 비늘에 은근히 도는 붉은빛 하며.
이 길한 생선을 어찌 연회의 주역으로 꼽지 않을 수 있습니까.
태감의 육식주의를 비난하는데 열을 올리던 소년은 결국 밟아선 안 될 금기를 밟고야 말았다.
“그리고 채소, 채소 또한 연회의 당당한 주연이 될 수 있지요. 어찌 기름지고 입에 단 것만을 가까이하시고 진정 몸에 이로운 채소를 멀리하십니까.”
“채소? 지금 채소라 하였느냐?”
태감은 뇌척수에 벼락이 꽂히기라도 한 듯 어깨를 떨었다.
하지만 자신의 웅변에 스스로 심취해 버린 소년은 그 떨림을 보지 못했다.
“자고로 몸을 살찌우는 것은 고기이나 피를 맑게 하고 정신을 건강하게 하는 것은 채소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도력 깊은 도사님들께서도 불기운이 닿은 음식이나 고기를 멀리하시고 신선한 생채소만을 조금 섭취하시지 않습니까.”
물론 채식이 만병을 치유한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친 채식은 되려 심신을 허약하게 하지요.
하지만 극단적인 채식만큼이나 극단적인 육식 또한 똑같이 지탄받아 마땅합니다.
소년은 마치 채식의 전도자라도 된 듯이 열렬하게 채식의 좋은 점을 선전했다.
“배추! 배추야말로 채소의 왕이라 칭할 만하지요. 예부터 배추는 새끼 양고기와 닮아 땅에서 나는 곰 발바닥이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배추를 대접할 때도 귀한 곰 발바닥과 같은 대접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호박, 남쪽에서 즐겨 먹는 그 풍성한 것은 또 어떻습니까. 오래 묵어 늙은 호박은 껍질이 칼이 안 들어갈 정도라 도끼를 써야 하지요. 하지만 쪼개보면 으스름달 뜨기 직전의 지는 석양을 담아놓은 듯 무르익은 주홍빛이지요. 달기는 또 어찌나 단지…….”
“커흠.”
낮고 무겁게 울리는 여인의 헛기침에 소년은 말을 멈추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단혜림이 가라앉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다.
그제야 태감의 거무죽죽한 표정을 눈치챈 소년은 다급히 목소리를 명랑하게 꾸미고는 입을 열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진짜 채소로만 상을 차릴 리는 없지요. 그냥 거, 태감께서 하도 고기만 찾으시니 서운해서 한 소리 해봤습니다. 담아두지 마십쇼.”
“그랬구나. 흠흠! 그래서, 어떤 요리를 올릴 생각이냐?”
“털가죽이나 깃털 달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비늘 달린 것도 아니고. 물에서는 살지만, 아가미가 아니라 폐호흡을 하는 짐승을 올릴 생각입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배시시 웃고는 말했다.
“그리고 태감님과 제게는 꽤나 뜻깊은 식재료지요.”
제법 오랜만에 올리는군요. 폐하께서도 극찬하셨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