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270화 (271/314)

환관의 요리사 270화 특별외전

“상호 오운.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는 짐의 신하인가. 아니면 사례 태감 양단의 신하인가.”

대제국의 지배자. 위대한 용의 아들. 황제의 추상과도 같은 호령이 떨어지자 소년은 마치 벼락을 피해 굴에 뛰어든 토끼처럼 넙죽 엎드렸다.

“폐하. 이 미천한 것은 틀림없이 폐하의 종복이옵니다.”

“네가 정녕 짐의 신하란 말이냐. 짐을 위하여 힘쓰고 짐에게 녹봉을 받는, 짐에게 충성하는 신하란 말이냐.”

“해가 지면 별과 달이 뜨고 비가 오면 곡식이 무르익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한, 이 미천한 것은 폐하의 종복일 것입니다.”

영원한 충성을 이야기하는 소년을 보며 황제는 무거운 숨을 몰아쉬었다.

엎드린 자신의 귓바퀴가 있는 위치까지 가라앉은 황제의 근심에 소년은 연신 이마를 땅에 찍으며 피를 토하듯 힘겹게 말했다.

“존귀하신 폐하. 예부터 가장 죄질이 악한 죄가 바로 자신이 저지른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라 알고 있사옵니다. 그런데 이 옹졸하고 천박한 것은 아둔하기까지 하여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알지 못하나이다. 부디 이 후안무치한 것을 깨우쳐 주시옵소서.”

그리고 엄중한 벌로 죄를 다스려주시옵소서.

꿇어 엎드린 소년의 굽은 등을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에 분노는 엿보이지 않았다. 분노보다도 짙은 서글픔 때문에.

하지만 엎드린 소년은 황제의 눈을 볼 수 없었다.

말없이 소년의 등을 보던 황제는 천천히,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고개를 들고 일어나라. 성치 않은 몸으로 그 자세가 편하지는 않을 테니.”

“죄인이 어찌 고개를 들어 폐하의 용안을 뵙겠습니까. 부디 죄인에게 어울리는 자세를 취할 수 있도록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고집을 부리는 소년을 보며 황제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두 번 권하지는 않았다.

황제는 말을 이었다.

“지난밤 짐은 사례 태감 양단과 독대하여 정사를 논하였다. 석반을 들고 난 직후에 시작하여 닻별이 뜰 때쯤 논의가 마무리되었지. 그 후 잠들기도 적적하여 잠깐 사담을 나누었다.”

무엇을 주제로 사담을 나누었을 것 같은가.

소년은 등허리를 타고 기어오르는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둘째가라면 서러운 두 대식가가, 출출한 늦은 밤에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겠는가.

감히 황제의 귀를 더럽힐까 소년은 한껏 고개를 숙이고는 이를 갈았다.

이 양반이 또 입단속을 못 했구나!

“태감이 그러더군. 그대가 지난밤에 차려 올린 야식 상이 어찌나 호사스럽고 푸짐한지 야식인지 연회인지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고 말이야.”

“폐하, 그것이.”

“상호 오운은 지난밤 사례 태감 양단의 상에 무엇을 올렸는지 낱낱이 고하거라.”

지엄한 황제의 명이 내려졌다. 소년은 이를 악물고는 지난밤 태감의 상에 올랐던 야식을 낱낱이 고해바쳤다.

“우선은.”

서호의 용정차로 쪄낸 다음 쪽파를 다져 올리고 흑초 간장을 끼얹은 닭고기 냉채 엽증계(葉蒸鷄)로 입맛을 살린 다음, 화산(花山)에서 나는 붉은 대추와 구기자를 넣고 푹 고아낸 자라탕으로 원기를 보양하고, 제철인 포하강의 강굴을 튀긴 굴튀김과 양갈비 수육, 마늘잎을 넣고 맵고 알싸하게 볶아낸 회과육(回鍋肉), 짭짤하게 볶은 돼지고기를 채 썬 파와 함께 건두부에 말아 먹는 경장육사(京醬肉絲) 등으로 간소하게 배를 채우시고…….

감히 말 꺼내기도 민망하다는 듯 소년이 말끝을 흐리자 황제는 초조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목소리로 재촉했다.

“그리고, 더 있느냐?”

“예. 고기만 먹으니 헛배가 부르시다며, 역시 식사의 마무리는 쌀이나 밀가루가 있어야 한다고 마늘을 듬뿍 넣은 양주식 달걀 볶음밥과 고소하고 텁텁한 땅콩장과 고추기름에 씹는 맛 좋은 굵은 면을 버무린 무한의 명물 열간면(热干面)을 드시고.”

“설마, 또?”

그것을 입 밖에 내어도 좋을지 고민하던 소년은 눈을 질끈 감고는 입술을 비집어 열었다.

“그러고도 부족하다 하시어 광동식으로 꿀을 발라 구워낸 거위와 생강을 담뿍 넣고 푹 쪄낸 오리찜 강모압(姜母鴨)으로 마무리하셨습니다.”

왜 하필 가금류였는가.

태감은 왜 하필 오리와 거위를 식사의 마무리로 선택했단 말인가. 황제 폐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가금류를.

모시는 주인을 약 올리는 듯한 태감의 주문에 소년은 살의를 느꼈다.

“짐이 외로운 옥좌에 앉아 고뇌를 씹는 동안, 사례 태감은 달고 기름진 것들을 씹고 있었구나.”

짐의 식탁은 쓰고 괴로운 것으로 차려졌거늘, 사례 태감은 호사스럽고 유쾌한 것들로만 식탁을 차렸군.

황제는 고통스러운 눈으로 소년을 굽어보았다. 그러고는 질문했다.

“다시 묻겠다. 그대는 짐의 신하인가.”

소년은 무릎걸음으로 황제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대답했다.

폐하. 저는…….

* * *

“그러니 오늘 저녁은 적당히 때우셔야겠습니다.”

태감은 혼란과 충격과 공포, 그리고 배신감에 젖은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삐딱한 자세로 서서는 뻔뻔한 얼굴로 그 시선을 받았다.

태감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적당히 때우라니. 설마…….”

“뭐, 그렇게 됐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존귀하신 제국의 지배자께서 저를 찾으시는데.

소년은 낄낄 웃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마치 자신에게 무슨 힘이 있냐고, 나는 그저 명령에 따른 것뿐이라고 강변하듯이.

현기증을 느낀 태감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몇 번 휘청거리다 결국 버티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기대 세워둔 포댓자루가 쓰러지듯이, 풀썩하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폐하께. 폐하께 가겠단 말이냐.”

나를 버리고, 그분의 상을 차리겠단 말이냐.

쓰러진 태감에게선 나라님에게 탄원하러 나선 비련의 여인과도 같은 애절함이 묻어났다.

섬세한 슬픔에 잠긴 긴 속눈썹과 금방이라도 젖어 들 것만 같은 눈, 애처롭게 떨리는 고아한 입술은 보는 이의 애간장을 끓게 만들기에 충분했으나 태감에게 익숙해진 소년은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그것도 슬슬 질립니다. 태감님.”

“너무 자주 써먹었군.”

멋쩍은 표정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선 태감은 이번엔 새침한 표정으로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야멸찬 태도로 날카로운 말을 쏘아붙였다.

“너도 결국은 권력을 선택한 게로구나. 권력은 아편과도 같아 한번 입에 대면 헤어나올 수가 없지. 그래도 너는 다를 줄 알았건만, 사위지기자사(士爲知己者死)를 말하던 넌 다를 줄 알았건만.”

너도 결국은 소인배에 불과하였구나. 권력에 찌든, 끝없이 더 큰 권력을 갈망하는.

사례 태감의 심복으로는 만족할 수 없더냐.

태감의 질문에 소년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는 대답했다.

“기왕이면 사례 태감의 심복보다는 황제의 심복이 낫지요.”

권력에 만족이란 것이 있습니까. 두 손 가득 움켜쥐고도 모자라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바로 권력 아닙니까.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신 태감께선 모르시겠지요. 이미 나실 때부터 손에 쥐고 계셨으니. 하지만.

입꼬리를 섬뜩하게 찢어 올린 소년의 눈동자에 새카만 불꽃이 피어오른다. 태우고 또 태워도 충족되지 않는, 결국에는 제 몸뚱이를 사르고 나서야 꺼지는 욕망의 불꽃이.

“이 비천하고 비루한 것들은 살을 지지고 뼛골을 태워도 놓을 수 없는 것이 권력입니다.”

“결국, 수라의 길을 걷겠단 말이냐. 그 끝에 있는 것이 파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궁에 매인 이에게 안온한 미래 따위가 찾아올 리가 없지요. 어차피 파멸할 운명이라면, 있는 힘껏 발버둥이라도 쳐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스산한 긴장감 속에서 주종의 시선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하지만 바늘로 찌르기만 해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한 대립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누구의 것이 먼저였는지는 불분명하지만, 피식하는 콧소리 섞인 실소를 시작으로 마주 본 둘은 폭발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한참 동안 폭소한 끝에 간신히 웃음기를 추스른 소년은 경련하는 배를 부여잡고는 태감에게 말했다.

“그러게 좀 적당히 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나 참, 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출장 요리사 노릇 하게 생겼습니다.”

“크흠, 미안하구나. 설마 폐하께서 직접 하명하실 줄은…….”

“저야 뭐 태감님 상을 차리나 폐하 상을 차리나 똑같습니다만.”

우울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군 태감은 갑작스럽게 엄습해 오는 격렬한 허기를 느꼈다.

저녁 식사가 부실할 것을 직감한 것일까. 위장은 한껏 성이 난 듯 패악질을 부리며 태감을 괴롭혔다.

태감은 뱃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비명을 떨치고 싶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고는 소년에게 물었다.

“그러면, 폐하껜 어떤 요리를 낼 생각이냐?”

잠시 고민하던 소년은 이내 짓궂은 미소를 입에 걸고는 대답했다.

“아~주 맛있는 요리를 낼 생각입니다.”

* * *

지평선 끝자락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손톱 달이 서서히 중천에 이르는 시간.

들새도 쉬이 부리를 열지 않고 시궁쥐도 감히 들보를 기어오르지 않는, 엄숙한 침묵에 쌓여 있어야 할 황제의 처소에선 활기찬 소란이 번지기 시작했다.

화르륵 불티가 튀는 소리. 지글지글 기름이 끓는 소리. 찜기에서 수증기가 새는 새된 소리. 그리고 칼날이 도마 위를 질주하는 경쾌한 소리.

제각각 들으면 소음에 불과한 소리가 서로 섞이고 뒤엉키며 듣기 좋은 절묘한 합주를 이루고 있었다.

불과 칼의 연주에 귀를 기울인 채 요리가 완성되기를 기다리던 황제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만들고 있는 요리가 무엇이냐.”

“예. 넓적한 쌀국수를 소고기와 함께 볶은 광동식 볶음면 간초우하(干炒牛河)라 하옵니다.”

소년이 준비한 것은 다름 아닌 홍콩 직장인들의 영원한 스테디셀러, 점심 요리의 절대강자로 꼽히는 간초우하(干炒牛河)였다.

물기 없이 마르게 볶아낸 볶음면은 진하고 기름진 맛으로 지친 직장인들의 혀를 위로해 줄 뿐만 아니라 잘 불지도 않아 포장하거나 배달 메뉴로도 으뜸이었다.

소년이 꺼내놓은 간소한 재료를 본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호오, 간초우하라. 어째서 그것을 올리기로 했지?”

“간초우하는 간이 세고 먹고 나면 든든하여 늦은 밤에 먹기에 좋은 음식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간초우하는 바쁜 일상을 보내는 백성들이 점심으로 즐겨 먹는 요리이니…….”

“늘 민생을 살피고 백성들의 고충을 귀담아들어야 할 짐이 백성들이 즐기는 요리를 맛보지 않을 수 없지.”

위엄있는 지배자의 얼굴에 떠오른 기대감을 곁눈질하며 소년은 본격적으로 간초우하를 만들기 시작했다.

우선은 약지 마디 하나쯤 되는 너비의 넓적한 쌀국수를 삶은 다음 색이 짙은 간장을 고루 뿌려 색을 입히고, 소고기는 납작납작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살짝 볶아둔다.

익은 소고기를 건지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면을 볶을 차례였다.

“폐하. 달고 짭조름한 맛과 맵고 기름진 맛 중 어느 쪽을 더…….”

“밤이 늦었으니 혀가 얼얼할 만큼 맵고 입술에 윤기가 돌 만큼 기름지게 하라.”

“그리하겠나이다.”

그래, 늦은 밤에는 역시 맵고 기름진 것이 제격이지.

황제의 지혜로운 판단에 탄복한 소년은 혀를 내두르며 철과에 벌건 고추기름을 넉넉하게 둘렀다.

철과가 달아오르며 고추와 산초의 톡 쏘는 향기가 정숙한 반룡궁의 밤하늘을 붉게 타오르게 했다.

철과가 충분히 달아오를 때쯤 소년은 강남 지방에서 즐겨 먹는 붉은 설탕을 녹이고는 면을 넣어 빠르게 볶아냈다.

새빨간 기름에 은은한 갈색의 면이 튀겨지듯 익는다. 맵고 아릿하면서도 달착지근한 향기가 코를 찌르고 귀에는 지글지글 기름 끓는 소리가 메아리친다.

황제의 입에 고인 군침이 목울대를 타고 넘어갈 때쯤 소년은 익혀둔 소고기와 황부추, 숙주 한 줌을 넣고는 간장 한 큰술을 둘러 요리를 마무리했다.

“자, 간초우하 완성입니다.”

황제에게 올리는 어선(御膳)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단출한, 그러나 어선에 올라오는 그 어떤 음식보다도 뜨거운 볶음국수 한 그릇이 완성되었다.

기미를 볼 필요도 없이, 시선을 의식하며 절제할 필요도 없이. 혼자서 독차지하고 탐닉할 수 있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국수 한 그릇.

황제의 젓가락이 먹잇감을 낚아채는 물수리와도 같이 내리꽂혔다.

한 움큼 양껏 집어 든 국수 가닥이 혀끝을 간지럽힌다.

밀면과도 메밀면과도 녹말면과도 귀리면과도 다른, 혀에 착 감기는 쌀국수의 독특한 감촉.

보드랍고 야들야들하면서도, 후루룩 빨아들이면 입술에 찰싹 달라붙는다.

그런 면발에 감긴 짭조름한 간장의 감칠맛과 목구멍을 톡 치고 지나가는 고추기름의 향기로운 매운맛.

면발과 뒤엉킨 숙주와 부추는 아삭아삭하고 달고 기름진 소고기는 쫄깃쫄깃하다.

크게 한 젓가락. 두 젓가락. 그리고 세 젓가락.

후루룩.

고작 세 번의 젓가락질 만에 동이 난 그릇을 내려다본 황제는 입가에 기다란 미소를 걸고는 소년을 노려보았다.

핏물을 삼키고 살코기를 씹는, 긴 송곳니를 가진 맹수의 웃음이었다.

“세 젓갈이라니, 너무 감질나는군.”

“전채 요리로 배를 채울 수는 없지 않습니까. 폐하. 달이 아직 중천입니다.”

소년의 말에 황제는 고개를 들어 창밖의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막 태양에게서 이양받은 제공권을 확립한 달이 푸르스름한 빛으로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 아직 새벽이 오려면 멀었군. 오늘 밤은 길겠어.”

“밤은 길고, 먹어야 할 음식은 많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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