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69화 외전 61화
“어, 음. 그러니까…….”
“편하게 있게. 편하게.”
이튿날. 저택의 응접실에서 상처를 추스른 번광을 맞이한 소년은 난처한 기색이 역력한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수세미 대용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까칠한 수염에 양팔을 한껏 벌려야 간신히 너비를 잴 수 있을 것 같은 장대한 어깨, 소뿔도 단번에 꺾을 것만 같은 두툼한 주먹을 가진 사내가 제 허리춤에나 올까 싶은 어린아이에게 쩔쩔매는 광경은 빈말로도 보기 좋다 하기 어려웠다.
머리를 긁적이던 소년은 ‘무례를 저지르지 않을 자신이 없으니 차라리 침묵하겠다’고 주장하는 듯한 번광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거참, 뻣뻣한 친구구만. 너무 데면데면하게 굴지 말게.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사이 아닌가.”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사이라니.
차마 드러내놓고 비웃지는 못하고 콧방귀를 뀌는 번광을 보며 소년은 앞섶을 풀어 자신의 가슴팍을 보여주었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살가죽 위를 길게 가로지르는 비스듬한 흉터.
번광은 자신도 모르게 붕대에 칭칭 감긴 자신의 가슴팍을 쓸어 만졌다.
“그건 설마…….”
“내 것은 좀 깊었지.”
그땐 진짜 죽을 뻔했지. 내장이 다 쏟아질 뻔했다니까. 피가 어찌나 쏟아지는지 바닥에 웅덩이가 생겼는데…….
마치 무용담을 이야기하듯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상처를 보여주는 소년을 보며 번광은 숨을 삼켰다.
그 역시 날붙이를 쓰는 이였기에, 그녀에게 베여본 이었기에, 번광은 소년이 입었던 상처의 깊이를 알 수 있었다.
그 검흔에는 자비가 없었다. 자신의 것과는 달리.
“죽이려고 벤 것이군.”
“그랬겠지.”
“호위무사 아니었나?”
“그땐 적이었어.”
“적이었다고?”
운이 좋았지. 아마 칼을 부러뜨리지 않았으면 그대로 두 동강 났을걸? 응? 어떻게 부러뜨렸냐고? 그걸 말하려면 좀 긴데.
마치 오래전 참전했던 전장의 기억을 되새기는 노병과도 같은 태도로 수염 한 올 나지 않은 턱을 쓰다듬던 소년은 자신을 보는 번광의 미묘한 시선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번광은 아직 그를 왕으로 대우해야 할지, 경험 많은 노련한 싸움꾼으로 대우해야 할지, 아니면 미친놈으로 대우해야 할지 기준을 잡지 못한 듯했다.
그리고 소년은 그가 성급하게 판단하기를 원치 않았다.
소년은 심심한 덕담을 전한 후 그를 내보냈다.
살았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그가 자리를 뜨자마자 뒤를 이어 단혜림이 들어와 소년과 마주 앉았다.
“그가 무례를 저지르지는 않았나?”
“예? 아아, 담백한 친구더군요. 매일 능구렁이 같은 양반하고만 부대끼고 살았더니 가끔 질박하고 솔직한 대화가 그리웠는데, 그 친구 덕분에 해소됐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단혜림은 쓰게 웃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소년이 입을 열었다.
“저 친구를 왕부의 호위무사로 들이고 싶다 하셨지요?”
“괜찮으시겠나?”
“딱히 문제 될 만한 것은 없어 보이더군요. 실력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말투가 투박하기는 하지만 성품까지 흉하고 악한 자는 아닌 것 같더군요.”
그런 인재를 쓰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잠시 말을 멈춘 소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단혜림을 바라보았다.
“무인은 검으로 말하고 검으로 느낀다지요. 직접 검을 나눠 본 단 호위께서 보시기엔 어떻습니까.”
“최소한 친구의 등을 찌를 만한 이는 아닌 것 같더군.”
“다른 이들은요?”
단혜림은 대답하는 대신 지긋이 소년을 응시했다.
그의 의도를 파악해야겠다고 말하는 듯한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 앞에서 소년은 가슴을 펴 보였다.
단혜림은 한참 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필요하신가 보군.”
“머지않아 투기장은 문을 닫을 겁니다. 투기장을 비롯해 암시장주가 운영하는 사업체 대부분이 문을 닫겠지요.”
“쏟아져 나오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중 전하께 필요한 재주를 가진 이들은 많지 않겠지.”
“재주는 부족해도 좋지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무엇을 대비하려 하시는가.”
소년은 대답 대신 고개를 깊게 숙였다. 사죄를 전하는 그 동작에서 단혜림은 소년의 답을 깨달았다.
“이부상서와의 일전을 대비하려는 것이군.”
“춘부장께 직접 칼을 겨눌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앞날의 일은 모르는 것이지. 궁지에 몰리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니.”
단혜림은 빙긋 웃고는 손가락으로 소년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제야 자신의 가슴팍이 휑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소년은 멋쩍은 표정으로 옷을 여몄다. 그러고는 헛기침으로 누그러진 분위기를 다잡은 후 말했다.
“아무튼, 단 호위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손을 겨루었던 이들 중 옥석을 가려 모집해 주십시오.”
“아깝다고 생각되는 이들이 있기는 했지. 몇 명이나 필요한가?”
“숫자는 단 호위의 재량에 맡기겠습니다. 부디 예산에 구애받지 않고 재주 있는 이들을 모집해 주십시오.”
“봉급은? 호위대의 예산이 넉넉하기는 하지만 사람을 수십 명씩 새로 들일 만큼 여유롭지는 않네.”
“제가 후궁에서 일하던 시절 모아둔 전답이 있으니, 그것으로 지불하도록 하지요.”
“전하의 사비로 운용하시겠단 말이군.”
평온한 어조였으나 그 한마디는 유독 소년의 귓바퀴에 길게 남아 있었다.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을 향해 단혜림은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모집하시는 것은 호위대인가. 아니면, 사냥개인가.”
“단 호위.”
“전하께서 원하시는 이들로 뽑도록 하겠네. 호위대든 사냥개든.”
답을 요구하는 단혜림을 향해 소년은 천천히, 입속에서 자신의 말을 곱씹는 것처럼 느릿하고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호위대입니다.”
“알겠네. 그리 알고 모집하도록 하지.”
단혜림은 두 번 묻지 않았다.
혹시나 되물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에 잠겨 있던 소년은 숨을 크게 몰아쉬며 이마를 한번 짚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응접실을 나서는 소년을 보며 단혜림이 물었다.
“그자에게 가시나?”
“예. 요 며칠 드러누워 있는데 욕창이라도 나진 않았는지 들여다봐야지요. 혹시 깨어 있으면 죽이라도 한 사발 쒀 먹이고…….”
단 호위님도 죽 한 사발 드시겠습니까?
소년의 권유에 단혜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늦잠은 살날 많은 젊은이의 특권이지. 잠이 고프다는 건 알겠지만, 그래도 배는 채우고 자야 할 것 아닌가.”
왕일은 그것이 자신의 잠꼬대라고 생각했다.
분명 갈라진 벽의 틈새로 내리쬔 볕이 따뜻하여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욱신거리는 뼈마디가 따뜻한 햇볕에 녹아내려서, 노곤해져서 그만. 그런데 내 목소리가 이렇게 좋았던가?
왕일은 작게 기침했다. 술과 연초에 찌든 목에서 튀어나온 것은 탁하게 그르렁거리는 소리였다.
왕일은 그 이상 잠에 취해 있을 수 없었다.
“잘 잤나?”
“전하?”
어린 사내아이가 앉아 있었다. 자신이 누운 자리 바로 옆에.
의자는 아마 오동나무로 만든 듯했고, 팔걸이와 등받이가 없는 간결한 것이었다.
아이는 다리를 꼬고 앉아서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눈에 담고 나서야 왕일은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하께서 어떻게? 아니, 우선은.”
“여기가 어디냐고? 황실 소유의 저택일세. 주로 동정호 인근으로 파견 나온 고관대작의 숙소로 이용되는 곳이지.”
“그리고.”
“자네가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한가?”
왕일은 멍청한 짓은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왕일은 질문하는 대신 고개를 꾸벅 숙였고, 소년은 빙긋 웃고는 왕일에게 작은 사발을 내밀었다.
사발에는 흰 죽이 담겨 있었다.
“좀 들게.”
빈속에 받지 않을 것 같아 건더기는 소화가 잘되는 거로만 넣었네. 좀 심심하겠지만, 약이라 생각하고 들게.
소년의 권유에 왕일은 멀건 얼굴로 죽을 바라보았다. 연밥이며 건두부, 은행, 소금에 절인 진피 등을 넣고 쌀알이 푹 퍼지도록 끓인 죽 위로는 볶은 땅콩과 송화단(松花蛋), 잘게 썬 쪽파가 고명으로 올라가 있었다.
더운 김이 피어오르는 따끈한 죽사발을 본 순간 왕일은 뱃속에서 저릿하게 올라오는 통증을 느꼈다.
“자네가 언제 눈 뜰지 몰라 간은 안 했네.”
금방 먹을 거라면 모를까, 소금 간을 해두면 죽이 삭으니까.
소년은 간장 종지를 내밀었다.
왕일은 간장을 담뿍 뜨는 대신 숟가락 끝으로 콕 찍어 혀끝에 대고는 죽을 후루룩 들이켰다.
찝찌름한 간장의 맛이 푸석하게 마른 혀끝에 스며들고, 그 위로 묽고 뜨거운 죽이 쏟아져 들어왔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밍숭맹숭한듯하지만 뺨 한구석에 물고 우물거리다 보면 은근한 달큼함이 배어 나온다.
그리고 혀끝에 칠해둔 간장의 짠맛이 그 은은한 단맛을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한 모금을 들이킨 왕일은 더운 숨을 토해내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좋은 약이 어디 있습니까.”
왕일은 실실 웃고는 심심하다는 혹평을 받은 건더기들을 입으로 가져갔다.
파근파근한 연밥과 아작아작 씹히는 고소한 땅콩, 질깃한듯싶다가도 씹으면 부드럽게 풀어지는 건두부.
쫀득한 식감에 오묘한 맛을 품은 은행, 야들야들하고 농후한 송화단, 알싸한 쪽파. 그리고 그것들을 아우르는 진피의 상큼한 향기.
작은 사발이 동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소년은 발갛게 혈색이 도는 왕일의 얼굴을 보고는 웃음 지었다.
“이제 좀 산사람 같군.”
“제가 얼마나 누워 있었습니까?”
“어디, 오늘이 사흘째던가. 나흘째던가.”
무덤덤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꼽아보는 소년을 보며 왕일은 한껏 긴장된 표정으로 질문했다.
“그럼 혹시…….”
“자네 수발은 누가 들어줬냐고? 혹시 꽃다운 나이의 시녀이기를 기대했다면 미안하지만, 자네를 아들뻘로 보실 만한 나이 지긋하신 분께 부탁드렸네.”
“다행히 서까래에 목매달 일은 없을 것 같군요.”
“자살 사유는 수치스러움인가? 고작 그런 거로 수줍어할 나이는 지난 것 같은데.”
“사춘기가 늦게 왔습니다.”
마주 본 둘은 낄낄 웃으며 지저분하고 질 나쁜 농담을 나누었다.
신분 차에 의한 심리적 장벽은 완전히 허물어져 있었고 천박한 언동을 나무라는 준엄한 질책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왕일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자신과 웃고 떠들며 음담패설을 즐겼던,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핏줄을 타고난 숙친왕 진연운을.
소탈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별나다고 해야 할지.
무언가를 말하려 했던 왕일은 갑작스럽게 치밀어 오른 기침에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목 안쪽에서 가래와 함께 비릿한 것이 들끓었다.
한참 동안 쿨럭댄 후, 손으로 입가를 훔친 왕일은 조금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손등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것을 본 소년은 걱정스럽다는 투로 말했다.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군. 좀 더 자두게.”
“전하.”
일어서려던 소년은 왕일의 부름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멈춰 세운 왕일은 잠시 고민하고는 소년에게 물었다.
“전하, 그때 제가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출세와 돈 중에.”
“기억 안 나나?”
소년은 피식 웃고는 답을 들려주었다.
“대답 안 했네. 날 보자마자 그대로 기절했거든.”
“그렇다면.”
“이제 답을 할 차례지.”
그래. 답을 할 준비가 되었나?
소년은 웃음기를 거두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숙친왕 진연운의 모습으로 왕일을 마주했다.
답을 요구하는 왕 앞에서, 왕일은 마른 침을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만약에. 만약에 말입니다. 제가 출세를 선택한다면.”
그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겠지요.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왕일을 보며 소년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교활함을 발휘한다면 혈기 넘치는 젊은이 하나 도취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는 많은 것을 약속할 수 있었다.
돈과 여자, 권력. 명예 따위가 아니라. 경사에 고래 등 같은 저택에 삼처사첩을 품에 안고 떵떵거리며 살게 해주겠다는 찬란한 미래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라는. 백성들을 위해서라는. 황제 폐하를 위해서라는.
그런 가슴 뛰는 말을 약속할 수 있었다.
즐겁고 유쾌하기만 한 나날은 아닐 것이다.
때론 피비린내를 맡아야 할 것이고, 상처 입고 병상에 누워 분을 삭여야만 하는 날도 있겠지.
하지만 그 끝에는 분명.
소년은 그런 것들을 말하지 않았다. 남자를 영웅으로 만드는, 그런 충동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소년은 건조한 어조로 이야기했고, 젊은 뱃사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뱃사공은 선택했다.
왕일의 대답을 들은 소년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는 푹 쉬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섰다.
방 밖에서는 태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죽이 좀 남았는데, 드시겠습니까?”
“씹을 거리 좀 넣어주면.”
소년은 실소를 흘리고는 돼지 간과 돼지고기, 돼지 허파의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해 태감을 고민에 빠뜨렸다.
그러고는 갈등에 젖은 태감을 내버려 둔 채 경쾌한 발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