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68화 외전 60화
동녘에서 번지기 시작한 불티가 지평선 끝자락을 태우기 시작했다.
새카만 밤하늘은 그 끝단부터 서서히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을린 것만 같은 먹색에서 점차 검푸른 색으로, 그리고 새파란 색으로. 동살이 잡히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본 왕은 검을 거두고는 죄인을 굽어보았다.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준비하거라. 머지않아 너를 찾을 것이니.”
무릎걸음으로 세 걸음 물러난 후, 암시장주는 깊게 읍하고는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등이 고함을 질러도 닿지 않을 만큼 멀어진 후, 왕의 얼굴에선 엄숙한 가면이 떨어져 내렸다.
소년은 권검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고생 많았다.”
소년은 고개를 들지 않고 대답했다.
“태감님 오셨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태감이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고 있었다.
소년은 손수건을 받아들고 나서야 자신의 이마가 식은땀에 흥건하게 젖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년은 싱거운 웃음을 짓고는 목 언저리를 훔쳤다.
땀투성이가 된 소년의 등허리를 물끄러미 보던 태감은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소년이 그의 긴 옷자락을 가리키며 핀잔을 주었다.
“태감님, 옷 버립니다.”
“버리면 좀 어떠냐. 빨면 되지.”
“그야 그렇지요.”
소년은 피식 웃고는 손수건을 비틀어 짰다.
흠뻑 젖은 손수건에서 땀방울이 주르륵 떨어진다. 소년은 배배 꼬인 손수건을 들어 올렸다.
물기를 짜냈다 한들 젖은 손수건은 다시 쓸 수 없다. 다시 쓰려면 민물에 빨아 말리고 다림질을 해야 한다.
손수건은 그리하면 다시 쓸 수 있다. 하지만.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돌려 태감을 바라보았다. 그의 옆자리에 앉은 태감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무엇을 보고 있을까.
일출에 반짝이는 동정호의 수면일까. 아니면 아침 해에 쫓겨난 달과 별일까.
태감의 시선을 쫓던 소년은 건조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람은.
소년의 입술이 달싹이자 태감이 고개를 틀었다.
의아함에 물든 시선을 향해 소년이 피식 웃어 보였다.
“봐줄 만했습니까? 왕 흉내 내는 거.”
“썩 그럴듯했다. 제법 위엄이 있었어.”
“처음이라 그런지 아주 진땀이 다 나더군요. 나름대로 칼도 좀 뽑아 들고 무게를 잡긴 했는데…….”
솔직히 개벼룩만 한 꼬맹이가 폼 잡는다고 누가 무서워하겠습니까. 그나마 칼이라도 한 자루 차고 있으니 먹힌 거겠지요.
낄낄거리던 소년은 바닥에 널브러진 권검을 발끝으로 툭 차고는 태감에게로 눈을 옮겼다.
태감은 여전히 먼 곳을 보고 있었다.
소년은 흙먼지가 들러붙은 자신의 옷자락을 들치며 말했다.
“더러워진 옷은 빨면 되지요.”
“땀에 전 손수건도, 빨면 다시 쓸 수 있지.”
“하지만 사람은.”
사람은 그리할 수가 없지요.
소년은 고개를 떨군 채 혼잣말이라 주장하듯 웅얼거렸다.
소년의 옆자리에서 태감은 침묵으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소년이 입을 열었다.
“공으로 덮기에는, 죄가 너무 크지요.”
“암시장주가 협력한다면. 암시장을 폐쇄하고 부패한 관리들을 척결하고 이부상서를 곤경에 빠뜨린다면. 그것은 큰 공이지.”
“하지만 그 공으로도 부족하지요. 예, 아무리 공이 커도. 그런 죄를 그냥 덮을 수는 없지요.”
태감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리고 소년은 태감의 반응은 고려하고 싶지 않다는 듯 자신의 땀에 젖은 땅바닥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아편 팔아먹고, 사람 장사하고, 그놈이 잡아먹은 사람이 몇 명입니까. 그놈 때문에 신세 망친 사람이 몇 명이겠습니까.”
그런 놈이.
소년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놈이 편하게 죽으면 안 되잖습니까.”
남의 눈에서 피눈물 뽑은 놈이. 그 피눈물 받아마시고 제 살을 찌운 놈이.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다 가면 안 되잖습니까.
소년은 자신이 조금 전 한 말들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태감은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죽여 마땅한 놈입니다. 그냥 죽여서도 안 되고 극형으로 다스려야 마땅한 놈이지요. 자른 목은 구더기가 필 때까지 장대에 걸어놓아야 할 놈입니다. 그런 놈이 평범하고 소박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다 가면 안 되지요. 무수히 많은 남의 일상을 빼앗은 놈이, 그러면 안 되지요.”
좋은 아버지이자 유쾌한 친구, 친절한 이웃이 되면.
소년은 그 말을 질겅질겅 씹고는 가래침과 함께 내뱉었다.
그러고는 암시장주의 면전에 대고 쏘아붙이지 못했던 무수한 욕설을 주절거렸다.
개잡놈. 호래자식. 소년은 조금 전 했던 욕설이 다시 혀끝에 맴돌 때쯤 입을 다물었다. 창의력이 고갈된 것이다.
소년의 광태를 조용히 지켜보던 태감이 소년에게 물었다.
“죄책감이 드느냐.”
“그놈에게 말입니까? 제가? 무엇 때문에?”
“그를 속인 것. 왕의 권위로 그를 용서하겠다 약속한 것. 그리고 그의 기대를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배신한 것.”
소년은 짤막한 욕설을 내뱉은 후 한숨을 쉬었다. 긍정의 의미였다.
“아무렇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더군요.”
통쾌하고 후련하기만 할 줄 알았는데.
소년은 쓴 침을 삼키고는 태감에게 물었다.
“사람 속이고 고꾸라뜨리고 묻은 다음 그걸 정의로운 일이었다 포장하는 게 저희 일이지요.”
“그래. 그게 정치가의 일이지.”
“태감께선 어떠십니까.”
익숙해지면, 죄책감도 좀 무뎌집니까.
대답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태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역시 못 할 노릇입니다.”
“정치가 노릇 말이냐. 아니면 왕 노릇 말이냐.”
“둘이 다릅니까?”
똑같이 거지 같지요.
소년의 명쾌한 평에 태감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소년은 킥킥 소리 내어 웃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푸석푸석하게 말라붙은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진다. 대충 차림을 정돈한 소년은 태감에게 손을 내밀었다.
“슬슬 갑시다. 일도 바쁜데.”
“또 무슨 일이 있느냐?”
“일이야 많지요. 암시장주가 비록 지금은 감복하여 개심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감시할 사람을 붙여야지요. 그리고 동정호에서 할 일을 마무리 지었으니 경사로 돌아가야 할 것 아닙니까. 가는 길이 또 한세월일 테니 단단히 준비해야지요. 그리고…….”
“그리고?”
소년은 배시시 웃고는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왕일, 그 친구를 구하러 가야지요. 그런 보기 드문 신의 있는 친구를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럼 어찌할 생각이냐?”
“어쩌긴요.”
잘 구슬려서 중용해야지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 * *
왕일은 벽의 미세한 틈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보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새벽인 듯했다. 어쩌면 저녁놀이 지는 걸지도 모른다.
왕일은 부디 새벽이기를 바라며 볕이 드는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팔다리가 묶여 있었기에 볕이 드는 자리로 당도하기까지는 퍽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한 줄기 햇살이 그의 지친 육신에 드리웠을 때 왕일은 짙은 만족감을 느꼈다.
뼈 마디마디에 스민 한기가 조금은 누그러지는 듯했다.
하지만 온기가 그를 어루만진 것은 잠시뿐이었다.
왕일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벽의 갈라진 틈을 보았다. 볕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새 해가 자리를 옮긴 것일까. 아니면 성미 급한 바람이 구름을 떠밀어 해를 가린 것인가.
그도 아니면 바깥쪽에서 벽의 틈새를 메운 걸지도 모른다.
볏짚을 섞은 진흙으로 메웠을까. 아니면 판자를 덧대어 막았을까.
전자일 것이 뻔하다. 판자를 덧대었다면 못을 박는 소리가 들렸을 테니까.
왕일은 몸을 떨었다. 잠시 누그러졌던 한기가 치밀어 올랐다. 뼛골이 욱신거린다.
내가 왜 여기 있었더라.
왕일은 멍한 기분으로 생각에 잠겼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오 년 전의 일이었다. 뼈 빠지게 모은 돈으로 간신히 배 한 척을 마련했을 때. 미련하고 우직하게 살기 싫어 몸부림치다 처음으로 암시장과 접선했을 때.
왕일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멍청한 놈에게 어울리는 유쾌한 나날이었다.
주머니에 돈푼이 들어오면 까끌까끌한 목구멍을 축이러 주막으로 달려가고, 잔돈이 좀 남으면 노름꾼들에게 적선 좀 하고.
우연히 목돈이 좀 들어오면 계집 살 내음을 맡으러 기루에 드나들던 시절.
그렇게 주머니에 든 걸 깨끗하게 탕진하고 나면, 내일은 또 내일 벌이가 있겠지 하며 하루하루 살다가. 어떻게 되었더라.
왕일은 웅크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매부리코의 노인이었다. 눈두덩이에 검버섯이 피고 뺨엔 주름이 자글자글한, 허리가 굽은, 추레한 늙은이.
그런 주제에 걸친 것은 또 얼마나 화려하게 걸쳤는지. 남 보기 부끄럽지도 않은지. 화려하게 모피에, 비단을 덧댄 가죽신에, 순금 장식이 달린 지팡이에.
그렇게 자신의 부를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만 같은 차림을 한 노인이, 내 배에 올라서 나한테 뭐라고 했더라.
“전……하…….”
입 밖으로 나온 말이 머리에 도달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버석버석한 혀끝에서 메마른 입술을 타고 찢어진 뺨을 기어오른 그 말이 귓속을 파고든 순간.
왕일은 자신이 손발이 묶인 채 차갑게 식어가는 이유와 이 상황을 타개할 마법과도 같은 한마디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숙친왕 진연운 전하의 사람이다.’
조금 더 일찍 말했어야 했다. 자루를 뒤집어쓰고 개처럼 질질 끌려왔을 때, 암시장주의 앞에서 말했어야 했다.
지금 당신이 끌고 온 것은 숙친왕 전하의 사람이라고. 그렇게 밝혔으면 분명 이런 모진 꼴을 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랬으면.
전하께 걸림돌이 되었을 테지. 이 멍청한 놈아.
왕일은 있는 기력을 쥐어짜 바깥에서 문을 지키고 있을 경비에게 으름장을 놓는 대신 힘껏 제 머리를 벽에 박았다.
묵직한 울림과 함께 둔탁한 통증이 머리를 울린다.
귓가에선 윙윙 파리 날갯짓 소리가 들리고, 세상은 삐딱하게 기울어져서는 일그러진다.
이 얼간이 자식아. 무식한 뱃사공 놈이, 암시장에 손님이나 실어나르며 푼돈이나 받아먹고 사는 놈이.
무슨 의리를 지킨다고. 무슨 충성을 다한다고 입을 닫고 있느냐.
전하께서. 그 높으신 양반이. 널 어찌해줄 것 같으냐. 네놈 따위를 기억이나 하실 것 같으냐.
왕일 이 미련한 놈아.
몽롱하게 흔들리는 세상이 어지러워 왕일은 그만 눈을 감았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린다.
* * *
“참, 융숭하게 대접한 모양이군그래.”
부두 귀퉁이에 있는 창고. 그늘지고 습습하고 비린내가 찌든 건물 앞에서 소년이 이죽거렸다.
그 비아냥에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은 찬물이라도 맞은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그중에는 장석도 있었다. 동정호에서 물고기를 잡아다 파는 어부. 암시장의 끄나풀. 그리고 왕일의 친구. 였던 이.
소년은 씨익 웃고는 장석을 가리켰다.
“문 안 열고 뭐 해, 이 친구야.”
“지금 열겠습니다.”
“흐음, 이거 굼뜨게 구는 걸 보니 수상한데.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닌가? 예를 들자면…….”
장석은 거의 문고리에 매달리다시피 하며 가까스로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고난은 끝이 아니었다. 소년은 창고 문을 열어젖히고는 비켜선 장석을 멀뚱히 보며 물었다.
“뭐하나?”
“예? 문을 열었지 않습니까.”
“아아, 문은 열어줬으니 갈 길은 알아서 가라? 하긴, 자네도 갈 길이 바쁠 텐데 내가 눈치도 없이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지? 어서 가보게나.”
저승길이 멀기는 하지.
소년의 말에서 생략된 뒷말을 깨달은 장석은 자신이 평소에 봉사 정신을 함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잰걸음으로 앞장섰다.
그의 뒤로 소년과 왕부의 호위무사, 동창의 요원들이 줄줄이 창고로 들어섰다.
“여긴 무슨 창고인가? 비린내가 나는데…….”
“원래는 가을에 말린 건어물을 겨우내 보관하던 창고였는데, 몇 년 전에 장주님께서 개축하여 암시장의 장물을 보관하는 창고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장물 창고란 말이지.”
“금붙이 같은 귀금속이나 도자기, 조각상 같은 무거운 것은 일 층에 있고 족자나 서적 같은 가벼운 것은 이 층에 있습니다.”
어느 것을 먼저 보시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소년은 뒤따라온 이들을 한번 둘러보고는 대답했다.
“사람은 어디에 보관하는가?”
“이곳에 보관 중인 사람은 한 명뿐입니다만.”
“그럼 그곳으로 안내해 주게.”
머뭇거리던 장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서 걸었다.
그가 소년을 안내한 곳은 창고의 가장 구석진 곳에 따로 칸을 막아 만든 작은 방이었다.
벽은 습기를 머금어 뒤틀어지고 갈라졌지만 문 만큼은 새것처럼 튼튼했다.
탈출을 경계할 거라면 벽도 좀 튼튼하게 만들어놓을 것이지.
헛웃음을 흘린 소년은 장석을 밀어내고는 문고리를 쥐었다. 기름칠한 지 오래된 경첩이 비명을 지른다.
먼지 쌓이고 곰팡이 슨 방 한가운데엔 남루한 차림의 사내가 쓰러져 있었다. 팔다리가 묶인 탓인지 대단히 불편해 보이는 자세였다.
갑작스럽게 들이친 빛에 놀랐는지 사내는 가물가물한 눈을 뜨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소년은 천천히, 느릿한 발걸음으로 사내에게 다가갔다.
발소리에 사내가 놀라지 않도록. 사내가 시력을 회복하고 자신을 볼 수 있도록.
사내의 흐릿한 눈동자에 또렷한 초점이 잡혔을 때, 소년이 입을 열었다.
“이보게 젊은 친구.”
자넨 돈이 좋은가. 아니면 출세가 좋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