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67화 외전 59화
동정호의 수면 위로 조각달이 미끄러졌다. 내려앉은 밤에선 제법 여름의 느낌이 묻어났다.
풀잎 뒤에 숨어 속살거리는 풀벌레도, 둥지에 내려앉아 날개깃을 손질하는 들새도,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고 이부자리를 펴고 누운 어부도.
목덜미에 들러붙는 후덥지근하고 습습한 바람에 뒤척이며 잠 못 이루는 밤.
허리 구부정한 노인이 동정호의 부둣가를 서성이고 있었다.
노인은 손에 술병을 쥐고 있었다.
밤을 담뿍 머금은 잔물결이 밀려오고 다시 쓸려간다. 떠나가는 물결을 잡지 못한 모래와 자갈과 조가비가 아쉬움을 속삭이며 잘그락거린다.
밤바람은 우연히 수면에 떨어진 나뭇잎 한 장에 꿈을 담아 호수의 한가운데로 떠밀어 보낸다.
여름밤의 숨결을 따라 미끄러지는 나뭇잎의 뒤로 가느다란 물띠가 그려진다.
밤중의 동정호는 그런 작은 소란에 젖어 있었다.
먼 여정을 떠나는 나뭇잎을 배웅한 노인은 무릎을 툭툭 두드리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배를 매어놓은 뱃말이 보였지만 노인은 습기를 빨아들여 축축한 뱃말에 걸터앉는 대신 근처의 마른 땅을 찾아 주저앉았다.
자리를 잡은 노인은 이빨로 마개를 뽑은 후 술병을 기울였다. 달이 밝았다.
“손톱만 한 조각달이기는 하다만, 그런대로 안줏거리는 되는군.”
“어르신, 밤중에 홀로 드시면 안 좋습니다.”
노인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체격이 왜소한 중년인이 서 있었다. 키는 작지만 어깨가 단단하게 벌어져 있고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마치 차돌과도 같은 이였다.
물끄러미 중년인을 위아래로 훑어본 노인이 병을 흔들어 보였다.
“날이 후덥지근하지 않나. 밖에서 자도 얼어 죽을 걱정은 없을 걸세.”
“그건 그렇군요.”
“늙으면 밤잠이 줄어서, 술 한 모금 넘기지 않으면 눕질 못하겠단 말이지. 그런데 젊은이는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인가?”
“저도 영 잠자리가 편치 않아 산책 중이었습니다.”
“젊은이가 벌써 그러면 안 될 텐데. 어떻게, 술기운이라도 빌려볼 텐가?”
노인의 은근한 권유에 중년인은 쓴웃음을 지으며 병을 받아들었다.
그럼 염치 불고하고 한 모금 실례하겠습니다.
공손하게 인사한 후, 중년인은 장쾌한 동작으로 술병을 기울였다.
마치 폭포라도 들이마실 수 있을 것만 같은 시원한 모습에 노인이 탄사를 터뜨렸다.
“거참 시원하게 마시는군.”
“술맛이 아주 좋습니다. 어르신. 어디 술도가 물건입니까?”
“이 늙은이가 직접 담근걸세. 맛이 좋다니 다행이군.”
중년인에게 병을 받아든 노인은 입술을 살짝 적실 만큼 술을 들이켠 다음 다시 술병을 건네었다.
중년인 역시 한 모금 남짓하게 술을 들이켜고는 병을 노인에게 건네었다.
그렇게 몇 순배가 돈 후,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그래. 이 늙은이는 작게 무역상을 꾸리고 있는 승조라 하네.”
“저는 동정호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는 명철이라 합니다.”
“잡화상? 주로 어떤 물건을 취급하는가?”
“그야 뭐, 이것저것 돈 되는 건 다 취급하지요.”
요즘 동정호 경기는 어떤가. 아무래도 여름철이 대목이겠지?
예. 아무래도 그렇지요. 유람객도 많이 오고, 어부들도 한창 바쁠 때지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목을 축이다 보니 술 한 병이 금세 동이 났다.
애석하다는 듯 병을 흔들어 남을 술을 가늠해 보는 중년인을 보며 노인이 실실 웃음 지었다.
“왜, 한 병으로는 부족한가?”
“어르신 술맛이 원체 좋아서 그런지, 병이 빈 줄도 몰랐습니다.”
“그럼 한 병 더하세.”
내 원래는 한 병만 꺼낼 생각이었는데, 술맛이 그리 좋다니 내놓지 않을 수가 없군.
노인이 낄낄거리며 술 한 병을 내놓자 중년인이 반색하며 병을 받았다.
“거, 젊은 친구가 달게도 마시는군.”
“크흠, 원래 이렇게 즐기지 않았는데, 오늘은 유독…….”
“그래, 살다 보면 가끔 술이 달게 느껴질 때가 있지. 일이 잘 풀릴 땐 기분이 좋아 달고, 일이 안 풀릴 땐 근심을 삭이느라 달게 느껴지지. 이렇게 말하니 꼭 술꾼이 핑계 대는 것 같구먼.”
그런데 자넨 어쩐 일 때문에 그리도 달게 마시나?
노인의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중년인은 이내 술 한 모금을 털어 넣고는 입을 열었다.
“그것이…….”
“말하기 어려운 사정이면 굳이 안 해도 괜찮네.”
“아닙니다. 얻어 마신 술값은 해야지요.”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후, 중년인은 자신의 속사정을 꺼내놓았다.
한참 동안 중년인의 이야기를 묵묵히 경청한 후, 노인은 끌끌 혀를 차며 중년인의 근심을 되짚었다.
“그러니까, 평소 신임하고 있던 부하직원이 욕심을 부리다 되려 사기를 당했단 말이군.”
“예. 손해는 크지 않았지만.”
“속은 꽤 쓰릴 테지?”
인재인 줄 알고 중용하던 부하가 제 주제도 모르고 욕심을 부리다 사기나 당하는 얼간이였으니, 실망스럽기도 할 테고, 그런 인간을 인재인 줄 알고 신임한 자신이 창피하기도 할 테고. 또 골치도 아프겠군.
가만히 턱을 괸 채 검푸른 동정호의 수면을 응시하던 중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골치 아픈 일이지요.”
“그래. 골치 아픈 일이고말고.”
“사람이란 것이 고쳐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내칠 텐가? 실수는 누구나 하는 일 아닌가.”
말 한마디에 술 한 모금.
술이 윤활유 역할을 해주었기에 오가는 말은 점잖고 부드러웠다.
그렇기에 술이 동났을 때 둘은 대화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기름칠하지 않은 말은 날카롭고 사나울 테니까.
중년인이 빈 병을 노인에게 내밀었다. 가벼워진 병을 받아든 노인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호수에 병을 던졌다.
병은 한번 떠오를 기미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가라앉았다.
남은 술은 없었다. 이젠 차갑고 날카로운 것들을 나눌 차례였다.
노인이 입꼬리를 길게 찢어 올렸고 반대로 중년인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마치 바위나 나무 따위에 깊게 새겨놓은 것처럼, 무기질적인 중년인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본 후, 노인이 물었다.
“그래서, 대접은 마음에 들었는가?”
달빛이 길게 드리운 그늘 속에서, 암시장주가 대답했다.
* * *
“술맛은 썩 좋더군. 도수가 조금 약한 게 흠이었지만.”
“독한 걸 즐기나?”
“내게 술을 대접하는 이들은 대부분 독한 것만 내놓더군. 그런 걸 받아마시다 보니.”
“호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엉큼한 꿍꿍이가 있었나 보군.”
“남에게 술대접하는 이들은 대부분 제각기 다른 꿍꿍이를 숨기고 있지.”
암시장주는 말을 멈추고는 시선으로 답을 촉구했다.
네 꿍꿍이는 뭐냐고 물어오는 시선을 향해서 노인은 히죽 웃어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암시장주가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멀끔한 얼굴이군.”
도저히 사람장사 하는 놈 얼굴로는 안 보여. 사람은 자기 인생이 얼굴에 나타난다더니, 그것도 헛말이었나 보군.
노인의 중얼거림을 들은 암시장주는 눈썹을 조금 꿈틀거렸다.
“그래서. 나의 악행을 규탄하고 싶은가?”
“반성이 뒤따르지 않는 규탄은 무의미하지. 혹시 지금까지 자신이 저지른 악행을 진심으로 뉘우치고 바로잡을 생각은 있나?”
“그러길 바라나?”
“바라네.”
예상치 못한 대답이어서일까. 암시장주는 당혹감에 젖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동요가 드러난 눈을 향해 노인은 그가 바라던 답을 들려주었다.
“자네가 죄의식을 가지길 바라네. 그리고 지금껏 자신이 저지른 죄업을 바로잡기를, 암시장을 폐쇄하고 지금껏 암시장과 유착 관계를 형성하고 부정한 향락을 탐해온 탐관오리들을 고발하길 원해. 그게 내 꿍꿍이일세.”
암시장주는 그 이상 자신의 동요를 추스를 수 없었다.
무정물과도 같았던 암시장주는 마치 뜻밖의 청혼을 받은 숫총각 같은 멍한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좀처럼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하는 암시장주를 향해 노인은 ‘정 원한다면 다시 한번 말해줄 수도 있다’에 해당하는 시선을 보내었다.
그것이 대단히 멍청해 보일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암시장주는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내 손으로 암시장을 무너뜨리란 말인가.”
“그래.”
“내 손으로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내 인생을 송두리째 부정하라고?”
하얗게 질린 당혹감은 이내 열꽃과도 같은 분노로 변해 암시장주의 얼굴에 드러났다.
자기 손으로 자신이 살아온 역사를 파괴하라는 제안을 받은 이가 보이기에 적절한 반응이었다.
점잖은 이라도 무슨 헛소리냐며 노호할 것이고 좀 다혈질인 이라면 말보다 행동으로 먼저 표현하리라.
하지만 노인은 암시장주가 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자네의 인생인가?”
“암시장은.”
“이부상서가 만든 것이지 않나.”
뚜렷했던 분노가 일그러졌다.
폐부 깊숙한 곳을 찔린 것처럼 신음한 암시장주를 향해 노인은 낮게 울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부상서의 명령을 받아, 이부상서의 정치자금을 대고, 이부상서의 비호를 받아 지금껏 암시장을 운영해왔지. 암시장은 자네의 것인가. 아니면 이부상서의 것인가.”
암시장주는 대답하지 못했다. 수치 때문이 아닌, 놀라움 때문이었다.
창백하게 질린 채 얼어붙은 그의 얼굴에 기묘한 표정이 그려졌다. 확신에 찬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자신의 확신을 부정하는 듯한.
상충하는 감정에 일그러진 그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그것을 알고 있다면. 암시장과 이부상서의 관계를 알고 있다면. 그러면서 암시장의 폐쇄를 바라는 이라면.”
두서없이 내뱉어져 허공에서 정립되는 단서들.
암시장주의 시선 속에서 경악의 불꽃이 튄다.
노인은 그의 떨리는 어깨를 바라보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추측해 보게.”
“암시장의 폐쇄는 곧 이부상서에게 막대한 부담으로 이어진다. 암시장이 그의 핵심 자금줄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제국에서 이부상서의 정적이라 할 만한 자는 오직…….”
단 한 명뿐이지.
암시장주의 추측을 긍정하며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구부정했던 허리가 곧게 펴지고 움츠렸던 어깨가 담대하게 벌어진다.
불콰하게 오른 취기에 흐리멍덩했던 시선에 힘이 실린다. 노인이 물었다.
“그렇다면 네 앞에 선 자는 누구냐.”
노인의 뺨에서 주름진 거죽이 떨어진다.
검버섯 핀 노인의 창백한 거죽 안쪽으로 어린아이의 가는 턱선이 드러난다. 가래가 끓는 노인의 탁한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게 울린다.
노인의 거죽을 벗어던진 소년이 암시장주를 향해 물었다.
“동창의 인피면구를 쓰고 네 앞에 선 자가 누구일 것 같으냐.”
“당신은…….”
소년의 품속에서 길쭉한 물건이 빠져나온다. 그것은 검이었다.
옻칠한 검은 칼집에 옥을 깎아 만든 코등이, 검보랏빛의 칼날을 가진.
오철로 만들어진 검.
검을 뽑아 든 소년이 암시장주에게 물었다.
“왕의 권검을 쥔 이가. 누구일 것 같으냐.”
왕의 권검을 쥔 자. 존귀한 용의 아들, 황제에게 검을 받은 자. 숙친왕 진연운의 요구에 암시장주는 무릎을 꿇었다.
꿇어앉은 죄인을 굽어보며 숙친왕이 말했다.
“네게 기회를 주마.”
왕은 속죄의 기회를 말하고 있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너무 오랫동안 걸어온 이에게, 이미 먹으로 몸을 물들인 이에게, 덧칠할 기회를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암시장을 폐쇄하라. 네 목줄을 쥔 자의 목을 물어뜯어라. 네가 쏟아버린 물을 도로 주워 담아라. 그리한다면.”
“그리한다면.”
흐느끼듯 어깨를 떠는 죄인을 향해 숙친왕은 약속했다.
“네가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을 네게 주겠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평온한 죽음. 네가 이부상서에게 목줄 잡혀 있다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이지.”
죄인은 혼란 속에서 숙친왕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답을 원하고 있었기에, 숙친왕은 답을 들려주었다.
“독이든 잔을 마시고 죽는 것이 아니라. 가장 믿었던 이의 칼에 찔려 죽는 것이 아니라. 비참한 사냥감이 되어 이리저리 쫓기다 죽는 죽음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을 매는 죽음이 아니라. 네가 사랑하는 이들이 지켜보는 시선 속에서, 조용히 눈을 감는, 그런 죽음을 네게 주마.”
친구와 웃으며 술잔을 기울이고 가족과 단란하게 둘러앉아 저녁을 먹고, 뜻밖의 선물을 의심하지 않고 열어볼 수 있는.
불신으로 가득 찬 삶이 아닌 소박한 사랑으로 가득 찬 삶을 네게 주겠다.
왕의 권검 아래서 무릎 꿇은 죄인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두 손과 이마를 땅에 댄 죄인은 자비를 약속한 왕을 향해 무릎걸음으로 기어갔다.
“그리하겠는가.”
“그리하겠나이다, 전하.”
암시장을 폐쇄하고, 탐관오리를 고발하고, 이부상서에게 반기를 들겠나이다. 그리한다면.
“그리한다면, 네가 잃어버린 것들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절을 올리는 죄인을 굽어보며, 왕은 베일 것만 같은 냉소를 머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