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66화 외전 58화
창틀 너머에서 살금살금 넘어온 오전의 햇살이 주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떠도는 먼지와 맺힌 이슬을 보석과도 같이 빛나게 하는 따스한 빛무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태감은 작게 하품하고는 탁자에 엎드렸다.
기울어진 시선 속으론 탁자 위를 어지럽히는 잡다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희고 고운 밀가루, 알갱이 굵은 설탕, 새벽에 닭이 낳자마자 몰래 가져와 아직 따뜻한 달걀.
흰색인 것과 갈색인 것. 그리고 상아색인 것. 하나, 둘, 셋.
달걀을 세던 태감은 그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큼직한 돌절구, 쓰기 좋게 막대 모양으로 말린 계피와 정향, 육두구, 생강 등의 향신료. 통통한 건포도와 살짝 볶은 호두. 그리고 버터.
버터는 파란색 테두리의 흰 사기그릇에 담겨 있었다.
당근이나 치자 따위로 노란 물을 들이지 않은 그 고상하고 순박한 흰색.
오전의 햇살에 짓눌린 채 탁자 위에 눌어붙어 있던 태감은 자신도 모르게 버터가 담긴 사발로 손을 뻗었다.
살짝만, 새끼손가락으로 콕 찍어서, 맛만 볼까
그 순간 투박하고 거친 목소리가 태감의 손목을 붙잡았다.
“뭐하십니까.”
“아니, 그. 맛있어 보여서. 맛이나 좀 볼까 하고.”
“참나, 먹을 거면 저기 가염버터를 드시지, 제빵용으로 내둔 무염버터를.”
입이 궁금하셨나 봅니다.
겸연쩍은 표정으로 손을 도로 내리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피식 웃음 지었다.
“슬슬 다 구워진 것 같은데, 맛이나 좀 보시겠습니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식사 전에,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서 몰래 혼자만, 먼저 맛본다.
더없이 감미로운 제안은 사람이 도덕성과 예의라는 무게추로 눌러둔 배덕감이라 하는 말초적 쾌감을 자극했다.
오늘 연회의 주인이 그가 아니었기에 그 쾌감은 더욱더 진하고 강렬했다.
하지만 말라죽은 줄 알았던 양심이라는 것이 어느새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자기주장을 해왔기에, 태감은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어야 했다.
“커흠. 그래도 오늘 연회는 단 호위를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냐. 주빈보다 먼저 음식을 입에 대는 결례를…….”
“단 호위님은 너그러우신 분 아닙니까. 이해하실 겁니다.”
“그럴까?”
“그럼요. 단 호위님께서 굶주린 태감님을 모른 척하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단 호위님이라면 흔쾌히 허락하실 겁니다. 고작 맛만 보는 건데요, 뭐.”
소년은 마치 못된 장난을 꾸미는 악동과 같은 웃음을 지으며 태감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일러 보았지만, 태감은 결국 우쭐거리는 자신의 입꼬리를 단속하지 못했다.
그럼 맛만 좀 볼까?
태감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소년은 두툼한 장갑을 끼고 와서는 기세 좋게 화덕의 문을 열어젖혔다.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만들어진 두툼한 문이 열리자 그 안쪽에서 뜨거운 기운과 함께 그윽한 향기가 태감의 얼굴까지 훅 끼쳐왔다.
현기증마저 느껴질 정도로 고소한, 갓 제분한 밀을 신선한 달걀과 버터, 물과 설탕과 소금을 넣고 반죽해 한나절 간 따뜻한 곳에서 부풀린 다음 화덕에서 구워낸 것의 향기.
빵의 향기였다.
“달걀이랑 버터가 많이 들어가서 그런지, 냄새가 아주 달군요.”
아무리 많아도 과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바로 달걀과 버터가 그러하리라.
소년은 문득 버터와 관련된 프랑스의 오래된 격언을 떠올렸다.
버터와 사랑엔 적정선이 없다.
소금을 많이 넣으면 소태처럼 써지고 설탕을 많이 넣으면 혀가 저리지만, 버터는 많으면 많을수록 음식과 영혼을 풍요롭게 한다.
실로 그러했다. 향기에 취해 녹아내릴 듯한 태감의 얼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수줍음 많은 청년처럼 눈을 샛별같이 빛내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고린내 나는 늙은이 혼자 보기엔 아까운 얼굴이군. 밝은 날 대로에 내놓으면…….
“아니, 어쩌면 혼자 봐서 다행일지도 모르겠군. 애꿎은 처자들 밤잠 못 들라.”
“응? 뭐라 했느냐?”
“거참, 잘생겨서 피곤하시겠습니다.”
소년은 혀를 한번 차고는 화덕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팔에 근육이 솟아오르고, 번뜩이는 화광 속에서 둔탁한 직사각형의 철판이 빠져나왔다.
한 손에 각각 하나씩, 두 개의 철판에는 각각 아이 주먹만 한 크기의 동그란 빵이 열두 개씩 놓여 있었다.
“색이 잘 나왔군요.”
달걀물을 발라 구워낸 빵의 겉면은 은근한 금빛이 도는 근사한 갈색이었다.
모양은 통통한 타원형에 반죽을 말아서 만드는 빵 특유의 층이 살아 있었다. 소년은 빵을 뒤집어 바닥까지 색이 잘 나왔는지 꼼꼼히 확인한 후 숨을 몰아쉬었다.
“오랜만에 구워서 솔직히 걱정했는데, 다행히 잘 나왔군요.”
물론 먹어보기 전까진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껄껄 웃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도 불안을 느끼느냐?”
“그야 느끼지요. 전공 분야가 아닌 요리를 하면 당연히 실패할까 봐 떨리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지요.”
“너도 결국 사람의 아들이었구나.”
“그럼 뭔 줄 아셨습니까?”
소년은 낄낄거리며 철판의 가운데에 있는 가장 잘 구워진 빵을 집어 태감에게 내밀었다.
화끈한 열기가 손끝을 달아오르게 한다.
빵은 큼직하지만 의외로 무겁지는 않았다. 굽는 과정에서 부풀어 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버터롤이라고 합니다.”
“버터롤이라.”
“예, 보통은 아침 식사용으로 많이들 찾는 빵이지요. 그대로 먹어도 좋고 잼을 발라 먹어도 좋고, 짭짤한 속 재료를 끼워 먹어도 좋지만.”
소년은 태감의 목울대가 움찔거릴 때까지 충분히 뜸을 들인 후, 그의 애간장이 닳을 때쯤에서야 버터롤을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비방을 들려주었다.
“버터롤은, 뜨거울 때 짭짤한 가염버터를 얹어 먹는 것이 가장 맛있습니다.”
“이미 버터가 듬뿍 들어간 빵인데, 거기다 버터를 더 얹어 먹으란 말이냐?”
“부담스러우십니까?”
“설마 그럴 리가. 너무 황홀한 제안이라 잠시 귀를 의심했다.”
태감은 지체 없이 빵을 반으로 갈랐다.
아직 바삭한 느낌이 살아 있는 겉껍질과 잘 부푼 부드럽고 폭신하며 가벼운 질감의 속.
황금색과 흰색의 극명한 대비를 이루는 뜨거운 바탕에 연한 상아색의 농후하고 신선한 버터 한 덩어리가 얹어진다.
소금기가 더해져 더욱 고소한 가염버터. 그 짭조름하고 달착지근하고 풍성한 감칠맛이 갓 구워낸 빵의 열기에 녹아내린다.
섬세한 빵의 속살에 배어든다. 버터가 촉촉하게 배어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한입이 완성되자 태감은 더 이상 자신의 충동을 자제할 수 없었다.
그 누가 이 한 입을 마다할 수 있을까.
하나를 다 먹기 전에 두 번째 것을, 두 번째를 손에 쥐기도 전에 세 번째를 찾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그의 귓바퀴에도 닿지 않을 당부를 전했다.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십시오. 이제 곧 연회가 있지 않습니까.”
* * *
계절은 아직 완전히 무르익지 않은 싱그러운 초여름이었다.
목덜미를 쓸어 만지는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서늘하고 가장 높이 뜬 정오의 태양이 상냥하게 따스한, 들새와 풀벌레와 나뭇가지의 합주를 즐기며 야외에서 식사하기 좋은 계절.
소년은 정원의 연못가에 연회장을 마련하고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모두가 평등하게 둘러앉을 수 있는 둥근 원탁에 새끼 비둘기의 솜털처럼 하얀 식탁보. 식탁의 정중앙에는 연분홍빛 백일홍. 그리고 온갖 요리들.
주방에서 갓 구워낸 따끈따끈한 빵과 꿀을 곁들인 버터, 토마토로 새큼한 맛을 내고 파슬리 가루를 살짝 뿌린 나송탕(罗宋汤)을 시작으로 흑후추와 베이컨, 달걀노른자에 버무린 까르보나라에 마요네즈와 감자로 만든 샐러드, 닭 간으로 풍미를 더한 진한 크림소스로 만든 치킨 리버 스튜, 스위스소스에 졸인 닭 날개와 소고기 완자 요리 등이 차례로 상에 올랐다.
뼈가 붙은 돼지 등심을 두드려 편 다음 빵가루 옷을 입혀 바싹하게 튀겨낸 상하이식 돈가스가 연회의 대미를 장식하고, 후식으로는 따뜻한 커피와 달콤한 과자, 그리고 심심한 늙은이의 인생 이야기가 제공되었다.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다른 세계가 있단 말이군. 우리와 같은, 사람이 사는 세계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는, 쉰의 나이에 사망하신 다음…….”
“다시 태어났습니다.”
쉬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백주에 떠든다면 미치광이 취급당할 것이고, 달이 중천에 뜬 한밤중에 떠벌린다면 술주정뱅이 취급당할 것이 뻔한, 허황된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소년은 그녀가 자신을 금치산자나 한정치산자를 보는 눈으로 노려보아도 기꺼이 감내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개소리하는 놈은 응당 개 대접을 받는 법이다.
그렇다면 미친 소리를 하는 놈이 받아야 할 대접은 무엇이겠는가.
아니, 어쩌면 단 호위님께서는 자비를 보이실지도 모른다.
미친놈 보듯이 보거나 검지를 관자놀이 부근에서 빙빙 돌리는 대신, 안쓰러운 것을 보듯이 따스한 눈길로…….
그것을 상상한 소년은 문득 자신의 혀를 잘근잘근 씹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신체마저 식재료로 이용하고자 하는 열렬하고 급진적이며 극단적인 요리사의 충동에 눈뜬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군.”
한참 동안 침묵했던 단혜림이 단조로운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소년은 마른침을 삼키며 뒤를 이을 말을 기다렸다.
잠시 소년을 지긋이 바라보던 단혜림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쌉싸름하고 향기로운 커피로 입술을 축인 후, 단혜림은 첫마디와 조금도 변함없는 어조로 말했다.
“다행이라 생각하네.”
“무엇이 다행입니까?”
“전하께서 괴력난신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
대단히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소년은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알아차렸지만, 경솔하게 그것을 먼저 넘겨짚지는 않았다.
소년은 순리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갈 포석이 될만한 질문을 골라 던졌다.
“그런 소문이 돌았나 봅니다.”
“그런 소문이 있었지. 후궁의 상호 오운은 사례 태감 양단이 사특한 비술로 부리는 사람 아닌 존재임이 틀림없다. 허리가 굽고 다리를 저는데도 몸놀림은 비호와 같고 힘은 장정이 달려들어도 당하질 못하는데 몸집이 작으니 동자인 듯 보이나 얼굴은 추하고 사나우니 노인인 듯하고, 그 솜씨가 하늘 아래 따를 자가 없으니 이는 분명 이치에서 벗어난 자임이 틀림없다. 사례 태감이 황제 폐하의 혀를 홀리기 위해 그 존재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그런 소문이 있었네.”
“허허……. 이것 참, 어떤 쌍놈 새…… 아니,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는지 궁금하군요.”
“사례 태감께서 일러주지 않으셨나? 정계에는 이미 모르는 이가 없는 소문이었는데.”
하여간 저 양반은.
소년은 입안에서 육두문자를 웅얼거리며 태감을 쏘아보았다.
태감은 소년과 단혜림이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아이들과 함께 연못가 근처를 휘적휘적 걸으며 산책하고 있었다.
간식거리가 든 광주리를 품에 안고. 득달같이 달려들어 광주리를 내팽개칠 것만 같은 소년을 보며 단혜림이 손짓했다.
“정계에서 악명만큼 효과적인 방패도 없지 않나. 태감께서도 그 악명을 이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소문을 방치하셨던 것 같네.”
“그래도 괘씸하지 않습니까. 어휴, 귀띔이라도 해줄 것이지.”
소년은 태감을 씹고 뜯는 데 오랜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그에겐 아직 풀어야 할 매듭이 남아 있었다.
소년은 한번 심호흡한 다음 자신의 목덜미를 쓸어 만졌다. 그의 시선은 단혜림의 허리춤을 보고 있었다.
“절 원하셨지요. 후궁에서 말입니다.”
“그랬었지. 위정자라면 누구나 탐낼 수밖에 없는 인재였으니.”
“그 소문을 아시면서도, 원하셨던 겁니까?”
“알고는 있었으나 믿지는 않았네. 소문이란 것이 으레 그렇지 않나. 과장되고 날조되기 마련이지.”
하지만. 만약 소문이 사실이었다면.
단혜림이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멈춘 말을 소년이 이어받았다.
“삿되고 괴이한 것이 사람 틈에 끼어 있어서는 안 되지요. 만약 그런 사특한 것이 사람의 위에 선다면. 예, 막아야지요. 그것이 도리지요.”
사람은 사람이 다스려야지요.
말을 끝마친 소년은 배시시 웃어 보였다.
말없이 소년의 웃음을 응시하던 단혜림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후궁에서, 내가 전하께서 하신 제안을 받아들였던 진짜 이유는.”
목을 베기 위함이었으리라. 사람 아닌 것이 사람을 다스리는 일을 막기 위하여.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어 그녀의 입을 멈추었다.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사특한 요괴나 귀신도 아니고, 그냥 보잘것없는 늙은이입니다만.”
“글쎄, 어린 시절 꿈꿨던 퇴마사의 꿈을 이루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어린 시절의 숙원을 이루는 것도 가치 있는 인생이겠지만, 좋은 직장에서 녹봉 받으며 편히 사는 것도 나쁜 인생은 아니지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단 호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