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65화 외전 57화
“투기장의 왕자가, 투기장의 모래판을 떠나겠단 말이냐.”
피 흘리는 거한이 모래판을 짚고 일어선다. 사선으로 갈라진 상처에선 핏물이 왈칵 흘러내린다.
그 핏발선 눈을 마주한 단혜림은 조용히 상처를 가리켰다.
“누워 있는 게 좋을 텐데.”
“흐흐, 그럴 수 없지. 그럴 수 없고말고. 자, 대답해라.”
모래판을, 떠날 것인가.
대답을 재촉하는 번광의 목소리에 격렬한 감정이, 힘이 실린다. 시원섭섭한 미소를 그리고 있던 입가가 사납게 일그러진다.
떠나는 이를 가로막는 장벽과도 같이, 번광은 부러진 언월도를 겨눈 채 그녀를 막아섰다.
단혜림은 대답했다.
“그래. 난 떠난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왕좌를 돌려받겠다!”
도전의 포효와 함께, 핏줄이 꿈틀거리는 오른팔이 회전, 바닥을 쓰는 듯한 동작으로 언월도가 휘둘러진다.
폭풍, 모래와 함께 그 속에 묻혀 있던 이빨과 손톱 따위가 돌팔매와 같은 위력으로 단혜림을 덮친다.
마치 몰아치는 파도와도 같은 공격을 피하기 위해 단혜림이 뒷걸음질 치고, 그 자리를 메우듯 거한이 폭발적인 속도로 돌진한다.
부러진 언월도는 날붙이라기보다는 둔기에 가까운 흉흉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른다.
둔중한 빛으로 빛나는 자루를 향해 단혜림이 칼날을 내려친다.
비통한 강철의 신음과 함께 칼과 언월도가 허공에서 불똥을 튀긴다.
번광의 맹공을 멈춰 세운 단혜림이 혀를 차며 말한다.
“그만둬, 그러다 죽는다.”
그것은 상처가 벌어질 것을 걱정한 우려의 말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죽이겠다는, 지극히 담백한 경고였다.
번광은 눈을 희번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투사는 모래판 위에서 죽어야지. 그것이 투사의 숙명이다.”
번광이 숨을 들이마시는 순간에 맞춰 단혜림이 검을 밀어 올린다.
호흡을 빼앗긴 번광은 밀어내는 힘에 저항하지 못하고 뒷걸음친다.
그 작은 실수.
그러나 그 실수가 빚어낸 찰나의 시간은 숙련된 검수가 적의 목을 베어내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균형을 잃은 채 휘청거리면서도 번광은 팔을 휘둘러 다가올 독니를 쳐내려 했다.
하지만 목과 심장을 향해 표독스럽게 쏘아졌어야 할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재빠르게 한걸음 물러나 호흡을 회복한 후, 번광은 공격을 멈춘 검수를 향해 물었다.
“왜 치지 않았지? 좋은 기회 아니었나?”
목덜미를 쓸어 만지는 거한을 올려다보며 단혜림은 겨누었던 칼을 어깨 위로 걸쳤다.
공격하지 않겠다는, 잠시 싸움을 멈추자는 신호에 번광 역시 못마땅한 표정으로 자세를 푼다.
격렬한 움직임에 벌어진 상처에서 핏물을 쏟아내는 그를 보며 단혜림이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그렇게나 투기장의 왕좌가 소중한 건가.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되찾아야 할 만큼?”
“멍청한 소릴 하는군. 누가 그깟 것에 연연한다고.”
“그렇다면?”
“당연한 것 아니냐. 네가 이대로 영영 떠난다면, 영원히 설욕의 기회를 얻지 못할 것 아니냐. 그러느니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겠다?”
누가 죽을지는 대봐야 알 것 아닌가.
말을 끝냄과 동시에 번광이 노호하며 달려든다.
육중한 돌격이 모래판을 뒤흔들고 거인의 손에 들린 언월도의 날카로운 물미가 여인의 급소를 향해 날아든다.
갈비뼈를 부수고 폐부를 찢어발길 강철의 독사를 향해 검수가 뛰어든다.
“창술에도 일가견이 있었군.”
무성의한 칭찬이 피비린내 자욱한 모래판 위로 떨어진다.
억눌린 신음, 물미를 찔러온 번광은 어금니가 바스러지도록 깨물며 자루를 휘젓는다.
하지만 언월도 자루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루는 단혜림의 손아귀에 붙들린 채 고정되어 있었다.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마치 맹금류의 갈고리발톱을 연상시키는 다섯 손가락을 망연자실한 눈으로 보던 번광의 턱을 팔꿈치가 후려친다.
뇌를 뒤흔드는 충격, 무릎에 힘이 풀린 거인이 앞으로 고꾸라진다.
“아쉽군.”
짤막한 한마디로 아쉬움을 토로하며, 검수가 쓰러지는 번광을 받았다. 앞섶을 피로 적시면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번광을 지탱하며.
단혜림은 더운 숨을 토하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쉽지 않나. 이대로 마무리 짓기에는.”
만전의 상태였다면 결과가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정녕 이렇게 끝낼 것인가. 패배로 마무리 지을 것인가.
흐릿해지는 거한의 눈을 들여다보며 단혜림이 얼굴에 드리운 면사를 걷어냈다.
“투기장의 왕좌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날 따라와라.”
설욕의 기회를 줄 테니.
* * *
“이젠 그쪽에서 성의를 보일 차례일세, 총관.”
아랫입술을 깨문 채 관중석을 내려다보던 총관은 소년의 말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의도대로였다. 모래판을 흥건하게 적신 피는 성난 군중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피비린내에 질린 관중들은 자신들이 분노했던 원인조차 떠올리지 못한 채 도망치듯 떠날 것이다.
모래판에 자욱한 피비린내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그리고 코끝에 맴돌던 피비린내가 옅어질 때쯤, 시시덕거리며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새로운 자극을 찾아서. 서푼 동전으로 투사들의 피와 땀을 사기 위해.
모든 것이 그의 의도대로였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고.
모래판을 굽어보던 총관은 치밀어 오르는 분기를 얼굴에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의 앞에는 손님이 있었다. ‘접대’해야 할 손님이.
물건을 내던지고 악을 쓰고 바닥을 구르는 것은 손님을 보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 사실을 상기하며 총관은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소년은 총관이 유보해두었던 행동을 실행에 옮기게끔 충동질했다.
“이것 참 유감일세. 투기장이 자랑하는 간판이 땅에 떨어졌으니, 손해가 막심하겠군.”
“예.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사에 차질이 크겠어. 안 그래도 한동안은 피비린내 때문에 발걸음이 뜸할 텐데, 쯧쯧.”
짐짓 걱정스러운 듯 혀를 차는 소년을 보며 총관은 머리가 하얘짐을 느꼈다.
뒷덜미가 뜨끔거리며 두개골과 목뼈의 연결점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한없이 멀어지는, 아찔한 현기증에 멍하니 서 있던 총관은 간신히 고개를 숙여 걱정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벌게졌다가 푸르딩딩해졌다 다시 허옇게 질리는 총관의 얼굴을 보며 세심하게 한쪽 입꼬리만 씨익 올리는, 더할 나위 없이 밉살스러운 표정을 지어준 후 소년은 본론을 꺼내놓았다.
“소란이 부족했나?”
건조한 어조로 내뱉어진 말에 소스라치게 놀란 총관은 눈을 홉뜬 채 되물었다.
“부족했다고요?”
“암시장주가 운영하는 사업체가 여러 개 있다고 알고 있네. 당장 이 투기장의 옆에 있는 도박장도 있고. 아편굴도 있고. 기루도 있다 들었는데.”
“그곳들을 돌며 소란을 벌이겠단 말입니까. 이곳에서 벌였던 것처럼.”
“설마, 그럴 리야 있겠는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소년을 보며 총관은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어진 말에 그 안도감은 무참하게 짓밟혔다.
“다음번 소란은 이번처럼 점잖게 끝나지 않을 걸세.”
총관은 자신도 모르게 모래판을 내려다보았다.
모래판은 아직 스며들지 않은 피가 그대로 고여 있었다.
저만한 피를, 저만한 소란을 일으켜 놓고서는.
총관은 더 이상 분노에 찬 눈으로 소년을 노려보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엔 두려움과 혐오가 뒤섞여 있었다.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
총관과 눈을 마주한 소년은 그의 불손한 시선을 눈치챘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그런 소란이 벌어지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
“지금, 저를 협박하시는.”
“협박일세. 그럼 뭐일 것 같나?”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건가?
냉소를 머금은 소년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독이 흘러나왔다.
“내가 너무 은유적으로 표현한 탓인가? 그래서 이해하지 못한 건가? 그런 거라면 사과하겠네. 자네의 이해를 위해 직설적으로 말해주지.”
암시장주나 불러와. 멍청한 놈아. 가소로운 짓 하지 말고.
담담한 어조로 쏘아붙인 모욕은 총관의 창백한 얼굴에 분노의 열꽃을 피워올렸다.
이마에 핏대를 세운 총관은 어금니가 으스러지도록 깨문 채 씹어뱉듯이 물었다.
“무엇이, 가소로운 짓입니까.”
“생각하는 것. 네 멋대로 판단하는 것. 얼간이 놈아, 네놈이 지금 해야 할 일은 부리나케 뛰어가서 암시장주에게 있었던 일을 고해바치는 것뿐이야. 저 늙은이가 진짜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를지 아닐지 고민할 게 아니라.”
결정을 내리는 건 암시장주의 몫이다. 네가 암시장주가 져야 할 책임을 대신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말을 끝마친 소년은 그 자리에 못 박힌 채 소년을 바라보고만 있는 총관을 향해 난폭하게 내뱉었다.
“암시장주에게 전해라. 변변치 않은 대접은 두 번이면 족하니, 이번엔 우리 쪽에서 대접하겠다고.”
* * *
“대접이 변변치 않았단 말이지.”
뻔뻔한 놈이로군. 그렇지 않은가.
동의를 구하는 목소리에 투기장의 총관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화할 땐 상대와 눈을 마주한다는 기본예의를 차리기엔 장소가 좋지 않았다.
그가 있는 곳은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장소였고 그와 대화 중인 암시장주는 그와 마주 앉아 있지 않았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총관은 결국 암시장주의 위치를 찾아내는 것을 포기하고는 체념한 얼굴로 동의했다.
“예. 정말 뻔뻔한 작자였습니다.”
“그래, 객으로서 지켜야 할 예의도 지키지 않는 놈이 대접을 운운하다니. 정말이지 후안무치한 놈이군.”
하지만 최소한, 범상치 않은 놈이라는 사실 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겠어. 그놈이 어떤 대접을 준비했을지 기대되는군.
짙은 어둠 속에서 한숨과 함께 그 말이 들려온 순간 총관은 발작적으로 소리쳤다.
“그렇다면 그자의 청을……!”
당혹스러운 비명은 공허한 울림으로 변해 어둠 속으로 스러졌다. 남은 것은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에 놀란 중년의 사내뿐이었다.
방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비명에 질린 사내는 조금 작게 줄인 목소리로 말을 완성했다.
“수락하시겠단 말씀입니까.”
“궁금하지 않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장주님.”
“값싼 호기심으로 목숨을 낭비하지 말라. 그런 말이 하고 싶은가?”
총관은 숨 가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총관은 만약 필요하다면 조금 전 그를 격분케 했던 직설적인 화법을 이용해서라도 암시장주를 납득시키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함정일 것이 뻔합니다.”
“어떻게 함정을 확신하지?”
“설령 함정이 아니라 한들 함정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그자의 의도를 모르는 상황에선.”
그 순간 총관의 눈앞에 촛불 하나가 떠올랐다.
말간 불빛이 드리운 어둠을 밝히자 비로소 총관은 암시장주 장철명의 얼굴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일생을 선하게만 살아온 듯한, 선량한 중년인의 얼굴.
하지만 그 눈만큼은 소름이 쭈뼛 돋을 만큼 냉혹하다. 마치 그 노인과도 같이.
문득 암시장주의 눈과 무역상 승조의 눈을 동일시한 총관은 등허리를 기어오르는 오한에 몸을 떨었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총관의 동공을 물끄러미 보던 암시장주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 번이다. 그놈의 이름이 내 귀에 들어온 것이.”
암시장의 흑선에서 한 번. 뱃사공의 입에서 두 번. 그리고 이제 네 입에서 세 번.
놈은 나의 배와 나의 사람, 나의 사업장을 들쑤시고 다니는데, 내가 놈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고작 이름 두 자뿐이야. 그것도 본명이라 확신할 수조차 없는.
독백하듯 중얼거리던 암시장주는 빙긋 웃고는 질문했다.
“그놈이 어떤 의도로 내게 접근한 것 같나.”
“예?”
“놈은 어째서 내게 다가왔을까. 무엇을 위해서. 왜.”
어째서 흑선의 선주를 속여 내게 이름을 알렸지? 무엇을 위해 흑선의 정박지를 아는 뱃사공을 포섭하였을까. 왜 내 사업체를 들쑤셔 놓았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함일까? 나를 몰아내고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니, 그럴 리는 없지. 그렇다 하기엔 방식이 너무 조잡하고 성급해.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의도가 느껴지는 것도 아니야.”
총관의 머릿속에 노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곱사등이처럼 굽은 허리와 교활하게 휜 매부리코. 간교함이 묻어나는 얄팍한 입술.
그 입술이 내뱉었던 말.
가소로운 짓 하지 마라. 결정은 암시장주의 몫이다.
그 말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애쓰며 총관은 자신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자가 어떤 의도를 품고 있을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 의도가 결코 호의적이지는 않을 거라는 거지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지?”
“호의를 품고 다가온 이라면 조금 더 온건한 방법을 선택했겠지요. 세상에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주변인을 매수하고 운영하는 사업을 뒤집어놓는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만나도 되겠군.”
총관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그 이유를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암시장주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대답했다.
“드러난 칼은 두렵지 않지. 늘 두렵고 경계해야 하는 것은 숨겨진 칼이다. 그런 의미에서 적의를 품은 자는 두렵지 않아. 그자가 날 공격하리란 걸 아니까. 하지만 호의를 품은 자라면 경계해야 하지. 언제 날 공격할지 모르니까.”
잘 됐군. 마음 놓고 만나볼 수 있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