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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64화 (265/314)

환관의 요리사 264화 외전 56화

거대한 발이 모래판을 밟는다. 손 뼘으로는 감히 가늠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거인의 발은 남긴 족적마저 깊고 거대했다.

모래 위에 뿌리내리듯 깊게 내디딘 발 위로는 수천 년의 풍파를 버텨낸 고목과도 같은 굵은 다리가 있다.

그리고 그 장엄한 두 다리 위로는 강인한 어깨와 호수를 들이마실 것만 같은 목, 뱀과도 같은 핏줄이 툭툭 불거진 팔. 청동으로 주조한 것만 같은 두꺼운 가슴팍이 있다.

마치 수백 문의 화포로 중무장한 전투선과도 같은 폭압적인 위압감. 산이 밀고 들어오는 것만 같은 장대한 체격.

보통 사내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자신이 목이 아프도록 올려다봐야 하는 사내를 보며 단혜림은 확신했다.

이자가 바로 무패 전승의 투신(鬪神), 투기장의 왕자라고.

투기장의 왕자는 거머쥔 무기 또한 범상치 않았다.

금군의 규격화된 것보다 족히 배는 더 크고 배는 더 두껍고 배는 더 무거운,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자루까지 철로 만들어진 언월도가 그의 무기였다.

체격의 차이. 병장기의 차이.

이미 승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맨손으로도 적수가 없던 투기장의 왕자가 무기를 쥐었는데 그 누가 그 앞을 가로막겠는가.

날개를 단 호랑이도 뒷걸음질 치겠구나.

지켜보는 군중의 눈동자는 이미 뜨거운 투쟁이 아닌 잔혹한 도살극을 바라는 저열한 흥분에 찌들어 있었다.

이제 저 계집년도 끝이군.

모가지가 잘려 구르면 그 꽁꽁 싸맨 얼굴도 드러나겠지.

얼마나 잘난 낯짝인지 두고 보자. 예쁠까?

설마? 그랬으면 뭣 하러 싸매서 감췄겠어. 분명 세상 둘도 없는 추녀일 거야.

돈을 잃은 노름꾼과 술에 한껏 취한 주정뱅이들이 천박한 조롱을 지분거리며 낄낄거린다.

그 순간, 투기장의 왕자가 언월도를 사선으로 휘둘렀다.

마치 심지에 불붙인 화포를 겨누는 듯한 긴장감, 허공을 베는 가벼운 동작에 숨통을 옥죄는 묵직한 기세가 사방을 내리누른다.

촉새처럼 떠들던 이들이 한기를 느끼며 움츠러들자 모래판 위엔 정숙한 침묵이 찾아들었다.

침묵 속에서 투기장의 왕자가 그 장대한 고개를 숙였다.

그것은 조롱당한 단혜림의 자존심을 위로하는 사과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위대한 무인에게 경의를 표한다.”

하룻밤 만에 스무 명의 투사를 꺾고 자신에게까지 도달한, 경이로운 무인을 향한 존경의 표시였다.

번광(繁曠)이라 이름 밝힌 사내는 머뭇거리는 단혜림을 보며 고개를 가로젓고는 수염 부숭부숭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름을 밝힌 것은 어디까지나 이쪽이 멋대로 저지른 일. 부담가질 것 없다.”

무사의 친교에는 통성명이 필요 없지. 안 그런가?

번광은 껄껄 웃고는 천천히 손에 쥔 언월도를 뒤로 당겼다.

그와 함께 단혜림의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온다.

서로의 살점을 헤집고 뼈를 끊고 목숨을 빼앗기 위한, 그 어떤 말보다도 진솔한 친교의 도구.

차가운 강철을 들이민 둘의 사이로 개시를 알리는 징이 울린다.

첫수를 끊은 것은 육중한 무게를 자랑하는 언월도였다.

도끼로 장작을 패듯 내려찍는 동작에 바람이 비명을 지른다. 소를 고꾸라뜨릴 만한 일격을 향해 단혜림이 칼날을 내지른다.

받아치는 것이 아닌 비껴내기 위한 공격, 자루를 때리는 충격에 언월도의 궤도가 틀어진다.

언월도의 흉포한 칼날이 바닥을 때리며 모래가 치솟는다.

그와 동시에 칼날을 앞세운 단혜림이 모래의 장막을 찢고 도약하여, 바닥을 찍은 언월도의 자루를 밟으며 번광의 이마를 향해 칼자루를 휘두른다.

묵직한 무게추가 달린 칼자루가 이마를 찍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격이 이어진다.

가죽 북을 때리는 듯한 묵직한 울림과 함께 단혜림이 바닥에 착지한다.

옆구리로 올라오는 충격, 뼈마디를 울리는 둔중한 통증에 미간을 찌푸린 여인의 얼굴엔 이내 사나운 미소가 떠오른다.

“과연 투기장의 왕자. 언월도만 경계한 것이 실책이었군.”

강렬한 무릎 차기였다.

담담한 칭찬에 찢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를 훔친 번광이 길게 입꼬리를 찢는다.

“공치사할 것 없다. 충격이 대단치 않다는 건 아니까. 감촉이 옅었어.”

그에 비해 이쪽은 이마가 찢어지고 머리가 울리는군. 손해가 막심한데.

씨익 웃고는 자세를 다잡은 번광이 날 끝을 겨누고는 발을 크게 내디딘다.

강철의 날개를 활짝 편 채 자신을 겨누는 언월도를 보며 단혜림이 차가운 송곳니를 드러낸다.

“인사는 주고받았으니, 이제 슬슬.”

“춤을 출 시간이군.”

자, 발을 맞추고, 손을 잡고. 함께 어울려 보자.

정겨운 눈인사와 사근사근한 권유와 함께, 무정한 칼날이 서로의 심장을 노리고 휘둘러졌다.

* * *

투기장의 모래판 위에 강림한 싸움의 신들이 투쟁을 향유하는 동안, 모래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특실에선 존귀한 신분의 사내들이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네가 보기에는 어느 쪽이 더 우세해 보이느냐? 이것 참, 도저히 가늠이 안 되는구나.”

“그걸 알아볼 안목이 있으셨으면 환관이 아니라 무관이 되셨겠지요.”

소년의 퉁명스러운 반응에 태감은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는, 다 큰 사내가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귀여운 태감의 표정에 소년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동안 자리 높아졌다고 몸 좀 사렸더니 제 성격 잊으셨나 봅니다. 오늘 한 따까리 할깝쇼? 예?

수틀리면 탁자부터 뒤집겠다는 듯 한껏 핏줄이 선 소년의 팔에 태감은 서둘러 표정을 매만졌다.

태감이 냉혈한 정치가의 얼굴로 돌아온 것을 확인한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보다는 조금 더 건설적인 화제로 토론하는 게 어떻습니까.”

“건설적인 화제라. 예를 들자면?”

“예를 들자면, 단 호위님의 노고를 위로할 연회상에 올릴 음식에 관해서 라던가.”

“허어, 그것참 조속히 논의해야 할 중대사로구나.”

심각한 어조로 답하는 태감을 보며 피식 실소를 흘린 후, 소년은 모래판 위에서 활개 치는 단혜림을 흘깃 보고는 입을 열었다.

“태감님도 짐작하셨겠지만, 단 호위께서 제 정체를 눈치채신 것 같습니다.”

“그걸 기대하고 있던 것 아니었느냐? 숨기려 했으면 최소한 어린아이인 척이라도 했어야지.”

“부정은 못 하겠군요.”

소년은 담백하게 태감의 추측을 긍정했다.

실제로 소년은 단혜림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아시다시피, 제가 말주변이 좀 없지 않습니까. 그쪽에서 먼저 알아차려 주면 말 꺼내기 쉬울 것 같아서, 지금껏 미적대고 있었지요.”

“네가? 남 속일 때 보면 그런 것 같지는 않던데.”

어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어처구니없어하는 태감을 무시한 채 소년은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이젠 답을 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요리로 말이냐.”

“요리사는 요리로 말하는 법이지요.”

“확실히, 듣도 보도 못한 생소한 다른 세상의 요리를 올린다면 그보다 확실한 증거도 없겠지.”

그렇다면 어떤 요리로 너 자신을 증명할 생각이냐?

태감의 질문에 소년은 대단한 결심을 한 듯 무거운 어조로 답했다.

“경양식을 만들 생각입니다.”

“경양식?”

“예. 지나치게 생소한 음식을 만들면 단 호위님의 입에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

한국에는 돈가스나 함박스테이크로 대표되는 한국식 경양식이 있듯이, 중국에는 교역의 중심지였던 상해를 중심으로 발전한 독자적인 양식 문화가 존재했다.

러시아의 보르시치가 변형된 나송탕(罗宋汤)이나 새콤 짭짤한 우스터소스에 콕 찍어 먹는 상해식 돈가스.

콩, 달걀, 절인 오이와 당근, 감자를 마요네즈에 버무린 샐러드, 주사위 모양으로 썬 닭고기를 크림소스에 끓여낸 치킨 아라킹.

소고기며 양고기, 닭고기에 돼지고기, 칠면조, 심지어는 타조 고기까지 온갖 고기를 뜨거운 철판에 올려 후추 향 진한 소스를 끼얹어 먹는 철판 요리, 그리고.

“또 스위스 소스를 빼놓을 수가 없지요.”

“스위스 소스?”

“엄밀히 말하자면 스위스 소스는 상해식 양식이 아니라 홍콩식 양식입니다만.”

스위스 소스란 온갖 재료를 우려낸 달콤한 간장 소스를 말하는 것인데, 그 이름과는 달리 스위스와는 조금도 연관이 없었다.

“전하는 바로는 한 외국인 손님이 달콤한 간장 양념에 폭 졸인 음식을 맛보고는 달다는 의미로 스위트(Sweet)라 하였는데, 이것이 외국어에 익숙하지 않은 종업원들의 입을 오르내리며 스위트라는 발음이 스위스로 변하게 되었다, 고 합니다.”

“호오, 달착지근한 간장 양념이라. 먹어보지 않아도 대충 상상이 가는걸.”

군침을 삼키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간략한 스위스 소스의 제조법을 이야기했다.

“우선은 소의 사태, 돼지 뼈, 닭 뼈를 끓여 육수를 낸 다음 여기에 진한 간장과 얼음 설탕, 술, 말린 조갯살과 향초, 생강, 흑후추를 넣어 만들지요. 이렇게 완성된 스위스 소스는 향이 짙고 맛이 달 뿐만 아니라 불그스름한 갈색이 도는 것이 보기에도 좋지요.”

“그 스위스 소스라는 양념은 어떻게 먹어야 하느냐?”

“그야 온갖 곳에 이용할 수 있지요.”

뜨거운 철판 위에 올린 비프스테이크에 끼얹어도 좋고, 살집 두툼한 병어를 조려도 좋고, 비둘기 고기를 볶을 때 살짝 넣기도 하지만.

“역시 제일은 큼직한 닭 날개를 조린 스위스 소스 치킨윙이지요.”

“달착지근한 간장 양념이 흠뻑 배어든 닭 날개라.”

세상에 이토록 황홀한 말이 있던가.

태감은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공들여 씹어보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단어 마디에 배어 있는 맛이 혀끝에 우러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달착지근한 간장 양념이 흠뻑 배어든 닭 날개.

다시 씹어보아도 황홀했다.

황홀경에 젖어 있는 태감을 물끄러미 보던 소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뿐이군요.”

“문제? 아직도 문제가 남아 있느냐?”

“예. 있지요.”

아직 태감님과의 문제가 하나 남아 있지 않습니까.

소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기에 태감은 한참 동안 소년이 말한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문제를 깨달았을 때, 태감은 웃는 얼굴로 소년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그래. 너와는 아직 풀어야 할 매듭이 하나 남아 있었지. 내 그걸 잊고 있었구나.”

“저도 잊고 있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의식적으로 잊으려 애써왔다고 해야겠군요.”

서로에게 유쾌한 문제는 아니니까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작게 끄덕였다. 그리고 둘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침묵은 길지 않았다. 열기를 더해가는 관중의 함성은 투쟁의 끝을 고하고 있었기에, 둘은 당면한 일부터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는 합의를 면죄부 삼아 그 문제를 유보하기로 했다.

“우선은 눈앞의 일부터 해결하지요.”

단 호위님께서 승리하셨군요.

잠시 벗어두었던 노인의 거죽을 다시 뺨에 가져다 붙이며, 소년은 모래판이 아닌 특실의 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문밖의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큰소리로 외쳤다.

“들어오시게, 총관!.”

* * *

찢어지는 강철의 비명과 함께 조각난 칼날이 모래판 위에 떨어진다.

그와 함께 사내의 몸이 기운다. 허물어진다.

수많은 핏물과 목숨을 받아들었던 모래판 위로 무패 전승을 자랑했던 투기장의 왕자가 쓰러진다.

흩날리는 모래 먼지, 자루만 남은 언월도를 손에 쥔 번광은 기나긴 숨을 토해냈다.

번광의 입가엔 만족의 웃음이 그려져 있었다.

“근사하다. 참으로 근사해.”

십 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싸워왔지만, 이런 싸움은 처음이었다.

내게 첫 패배를 안긴 이가 그대라는 사실에 감사한다.

헐떡이며 숨을 몰아쉬는 거한의 입에선 또다시 찬사가 터져 나온다.

“다시 한번, 위대한 무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군.”

“누워서 경의를 표할 생각인가.”

“일어나기 힘든 몸인지라.”

가슴팍에서 왈칵 스며 나오는 핏물을 가리키며 번광이 웃어 보인다.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왼쪽 옆구리까지. 상처는 깊지는 않았지만 얕지도 않았다.

한 치만 더 깊었다면 뱃속에 든 것을 모조리 쏟아냈으리라.

그럼에도 번광은 웃었다. 아직 죽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아직 죽지 않았으니, 다시 도전할 기회가 있지 않은가.

“죽일 수도 있었을 텐데.”

마지막에, 찌를 수도 있었잖나. 그게 더 간단했을 텐데. 어째서 베었지?

굳이 언월도와 함께 베느라 정작 몸뚱이는 깊게 베지 못했잖나.

번광의 질문에 고민하던 단혜림은 소탈한 웃음과 함께 답했다.

“그냥, 자기과시?”

“뭐라고?”

“시끄럽게 떠드는 놈들을 닥치게 해주고 싶어서. 뭔가를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거든.”

아, 그 와중에 자네 무기를 부순 건 미안하게 생각하네. 변상하지.

멍청한 얼굴로 단혜림을 올려다보던 번광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렇군. 시끄럽게 떠들던 놈들이 지금은 조용하군. 속이 시원해.”

하긴, 제깟 놈들이 감히 투기장의 왕자 앞에서 떠들 깜냥이 되겠어.

마치 왕위를 선양하는 노왕과도 같은 시원섭섭한 태도로 말하는 번광을 보며 단혜림은 난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음, 그렇군. 자넬 쓰러뜨렸으니, 이젠 내가 투기장의 왕자인가.”

“그래. 자고로 투기장의 왕자란 투기장에서 가장 강한 자의 몫이지.”

“흐음…….”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단혜림의 신음에 의아함을 느낀 번광은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고민에 잠겨 있던 단혜림은 대답을 재촉하는 번광의 시선에 면목 없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미안하지만, 투기장의 왕자 자리는 받지 못할 것 같네.”

머지않아 떠나야 할 이가 그런 책무를 받을 수는 없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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