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262화 (263/314)

환관의 요리사 262화 외전 55화

투기장의 총관.

퍽 고상하게 수염을 기르고 질 좋은 비단옷을 걸친 왜소한 체격의 중년인은 착석 허가가 있었는데도 한참 동안 말없이 소년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년은 노회하고 음험한, 서푼의 동전에 영혼을 판 상인의 얼굴로 그 시선을 태연히 받았다.

마치 먼저 시선을 피하는 쪽이 패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사전에 합의라도 한 듯이, 소년과 총관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먼저 패배를 인정한 것은 총관이었다. 오래 마주하고 있기 거북한 그 탐욕스러운 얼굴에 진저리가 난 것인지 눈살을 찌푸린 그는 시선을 살짝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야. 소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가 바라는 이름을 들려주었다.

“서역에서 작게 무역상을 운영하는, 승조라 하네.”

교활한 상인의 얼굴을 보는 총관의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통증을 삼키듯 입술을 씹은 채 으르렁거리던 총관은 씹어 뱉는 듯한 날카로운 어조로 되물었다.

“그렇다면, 장주님을 뵈러 오신 겁니까.”

암시장주가 미리 언질을 주었던 건가?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치민 분기를 삭이며 입술을 달싹이던 총관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고함을 지르는 군중들이 있었다. 술병을 던지고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소란을 피우는.

그것은 마치 끓어 넘칠 것만 같은 냄비에 억지로 뚜껑을 눌러놓은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총관의 시선을 따라 군중을 내려다본 소년은 히죽 웃었다.

“잘 끓었군. 좀 있으면 넘치겠는걸.”

냄비가 넘칠 것 같으면 어찌해야 할까.

불을 빼든지, 뚜껑을 열어 찬물을 붓든지 해야지.

낄낄거리는 소년을 돌아보지 않으려 애쓰며 총관은 입을 열었다.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까. 굳이 이런 소란을…….”

“그래? 이 늙은이는 영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더군. 미안허이.”

총관은 소년의 느물거리는 사과를 받지 않았다.

이미 벌어진 일에 사과를 받아봐야 무의미한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총관은 창백하게 질린 주먹을 소매 안쪽으로 숨기고는 말을 이었다.

“장주님을 뵈러 오신 거라면, 우선.”

“이 소란을 진정시키는 데 협조해 달라?”

내키지 않는다는 듯 턱 끝을 매만지던 소년은 얼어붙은 총관의 얼굴을 힐끔거리고는 대답했다.

“어쩔 수 없군. 목마른 놈이 우물을 파야지. 아쉬운 것은 이쪽이니. 그래, 어찌 협조하면 되겠나.”

“군중을 진정시키기 위해선, 투기장이 승부 조작을 하지 않았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생각이지?”

무엇으로 결백을 증명하겠나.

머뭇거리던 총관은 이내 결심을 굳혔는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예로부터 결백은, 붉은 피로 증명해왔지요.”

소년은 조금 늦게 대답했다.

“피로 증명하겠다고.”

“이 투기장의 자랑이 있다면 규칙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바깥에선 비겁하다 지탄받는 물어뜯기, 눈 찌르기, 낭심 걷어차기. 이곳에선 모두 당연하게 통용되는 기술의 하나로 대접받았지요. 하지만 아무리 무규칙을 규칙으로 삼는 투기장이라도, 단 한 가지 불문율은 있습니다.”

무기 사용 금지. 오직 맨몸으로만 싸울 것.

그것이 이 투기장의 유일한 규칙이었지요.

총관은 소년이 숨 고르기를 기다린 후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규칙을 깰 생각입니다. 물어뜯고, 급소를 공격하고…… 그리고 무기마저 허용한다.”

“파격적이군.”

“그만한 파격이 없다면 저 성난 군중에게 저희의 결백을 증명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모래판은 지금껏 받아들였던 것보다 더 많은 피를 한꺼번에 받게 되겠지요.

때리고 걷어차고 조르고 메치며 생기는 출혈은 사실 대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날붙이로 생긴 상처는, 아무리 작은 것이더라도 엄청난 피를 쏟아내지요.

이어진 총관의 설명에 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떨어진 목과 흩뿌려진 내장 앞에서 군중은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지. 이런 끔찍한 일을, 이런 잔혹하고 무시무시한 일을 거짓으로 꾸며냈을 리가 없다고. 그래,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군.”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소년은 난처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그 얼굴에서 당장에 대답할 수 없는 이유를 깨달은 총관은 재촉하는 대신 고개를 숙이고는 등을 돌렸다.

“설득하시는 데 시간이 필요하시겠지요.”

시간 여유를 드리겠습니다. 잠시 시합을 중단할 테니, 출전시키신 투사분과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특실의 문을 열고 나서는 총관의 등을 보며 소년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 * *

“그것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반색하는 단혜림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피로에 찌든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단 호위님께서 칼 쓰는 일을 마다하실 리가 있나.

소년은 연민에 찌든 눈으로 텅 빈 투기장의 모래판을 굽어보았다.

오늘 죄 없는 이의 목이 떨어지겠구나.

비록 하늘의 별이 그댈 위해 떨어지지 않고, 구름이 눈물을 흘리지 않고. 떠도는 바람이 그댈 기억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대를 기억하겠네.

벌써부터 상복이라도 갖춰 입은 것만 같은 소년을 보며 단혜림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섭섭하군. 내가 무슨 살인귀라도 되는 줄 아나?”

“그럼, 손속에 사정을 두시겠습니까?”

“그러고는 싶지만.”

전하께서도 아시지 않는가. 검은 무정한 법이라네.

소년은 피식 웃음 짓고는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예. 그렇지요. 검은 무정하지요. 맨손과는 다르지요.”

제아무리 대단한 검수라 할지라도. 죽인다 약속할 수는 있어도 살린다 약속할 수는 없다.

검이란 그런 물건이었다.

그것을 알았기에 소년은 그 이상 단혜림에게 요구할 수 없었다.

소년은 단혜림에게 맡아두었던 그녀의 검을 집어 들었다.

손아귀를 묵직하게 채우는 강철의 무게감. 그가 직접 벼려낸 검이었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소년은 검을 양손으로 받쳐 들어 단혜림에게 내밀었다.

“받으십시오.”

검을 받아든 단혜림은 익숙한 동작으로 그것을 허리춤에 비껴찼다.

비로소 되찾은 묵직함. 허리춤에 고정된 단단한 감촉을 매만지던 단혜림은 건조한 표정으로 투기장을 바라보는 소년에게 속삭였다.

“장담할 수는 없지만, 가능한 노력은 해보겠네.”

설마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지라, 놀라움에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은 이내 배시시 웃었다.

“너무 무리는 하지 마십시오. 상대가 보통이 아니라더군요.”

무려 십 년간 투기장의 왕좌를 차지한 채 무패의 기록을 이어왔다 하니, 그 실력은 미루어 짐작되시겠지요.

걱정스럽다는 기색이 역력한 소년의 목소리에 단혜림은 짓궂은 투로 되물었다.

“걱정해 주시는 건가?”

“비싼 돈 주고 고용한 호위무사가 다치면 제 손해 아닙니까. 아무튼, 다음 시합까지 시간 여유가 있으니. 그 전에 가볍게 요기 좀 하시지요.”

요깃거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싸우러 가는 사람이 배가 비면 안 되지요.

소년의 말에 단혜림은 그제야 자신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계속되는 연전으로 고양된 흥분이 위장을 마비시켰던 모양이었다.

단혜림은 쓰게 웃고는 소년이 차려둔 상 앞에 앉았다.

차려진 상은 단출했다. 댓잎으로 찹쌀과 고기소를 감싸 찐 종자(粽子)와 찻잎을 달인 간장에 삶은 차엽단(茶叶蛋), 뜨겁게 끓인 차 한 잔이 전부였다.

소년은 검박하게 차린 상이 못내 부끄러운지 면목 없다는 투로 말했다.

“싸 온 것으로만 상을 차려서 차림이 영 변변치 않지요? 저택으로 돌아가면 거하게 한 상 차려드리겠습니다.”

“이것으로 족하네. 싸움터에선 간신히 허기만을 면할 정도로만 먹어야 하는 법이지. 배가 부르면 손이 느려지고 눈이 감기고 감각이 둔해지니.”

잘 먹겠네.

싱긋 미소 지은 후, 단혜림은 광주리에 쌓아둔 종자를 집어 들었다.

쪄낸 지 시간이 제법 지났을 텐데도 종자에는 아직 미지근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소는 뭐가 들어 있나?”

“간장으로 간한 돼지고기와 소금에 절인 달걀노른자, 닭고기에 밤 등이 들어 있습니다.”

“호오, 남방식이군. 남방에선 종자에 육류 소를 넣어 먹는다지?”

“그리고 북방에선 대추나 팥앙금 같은 단 소를 넣지요. 북방식에 익숙하신가 보군요.”

단단히 묶은 골풀을 풀어내자 댓잎 사이로 삼각뿔 모양으로 예쁘게 모양 잡힌 찹쌀밥이 드러났다.

윤기가 자르르 도는 찹쌀은 기름진 소의 육즙이 배어 있어 살짝 노르스름했다.

단혜림은 메마른 입술을 차로 축인 후, 종자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씹을 때마다 배어 나오는 찹쌀의 은은한 단맛과 짭조름하게 간이 배인 고기의 기름진 감칠맛.

그리고 차.

미지근한 온도감이 살짝 아쉽게 느껴질 때쯤 들이마신 김이 펄펄 끓어오르는 차는 종자의 부족했던 마지막 한 조각을 채워주었다.

뜨거운 찻물과 알알이 풀어지는 찹쌀과 고기가 뒤섞이며 알맞은 온도가 된 종자가 목구멍을 타고 투쟁의 열기로 한껏 긴장한 위장을 부드럽게 채운다.

한 입, 두 입. 그리고.

단혜림은 종자 한가운데에 놓인 황금빛 노른자를 발견하고는 입맛을 다셨다.

“소금에 절인 노른자라. 월병에만 들어가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니 반갑군.”

소금에 절여 수분이 빠진 노른자는 쫀득하게 씹히면서도 입안에 우물거리다 보면 어느새 사르르 녹아내렸다.

소금간이 배인 노른자는 어째서 이리도 달착지근한 맛이 나는가.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단혜림은 그 이유를 탐구해 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손이 향한 곳은 껍질에 실금이 간 차엽단이었다.

뜨거운 물에 살짝 삶아 껍질을 두드려 금을 가게 한 다음 다시 간장 양념에 삶아내 은근한 향과 간이 배게 한.

조심스럽게 껍질을 까면 마치 대리석과도 같은 우아한 무늬가 있는 상아색 달걀에선 찻잎의 짙은 향이 솔솔 피어올랐다.

여리고 솜털 보송보송한 어린잎이 아닌, 보다 힘 있고 강렬한 찻잎의 향이었다.

긴 시간 묵히며 그윽한 향이 밴 발효차의 향.

그런 차이기에 향이 진한 간장에 달였음에도 분명히 자기주장을 할 수 있었으리라.

그것은.

“오룡차(烏龍茶)로 향을 입힌 차엽단이라.”

그것도 최상품으로 치는 철라한(鐵羅漢)으로 만든 차엽단이라니, 호사스럽기도 하군.

황실에 진상되는 귀하디귀한 명차로 달걀을 삶은 소년의 배포에 혀를 내두르며 단혜림은 차엽단을 베어 물었다.

간장의 구수한 짠맛이 배어든 탄력 있는 식감의 흰자. 그 아래로 마치 봄날 흐드러지게 핀 봄맞이꽃의 꽃술처럼 샛노란 노른자.

노른자는 달큼했다.

이 짭짤한 간이 노른자의 단맛을 더욱 부각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단혜림은 노른자가 달콤한 이유를 궁리하며 차엽단 하나를 공들여 씹어 삼켰다. 하지만 두 개째 차엽단을 집어 들지는 않았다.

그녀가 식사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소년은 손수건을 내밀었다.

“식사는 다 하셨습니까?”

다 했네. 기운이 나는군.

한바탕 시원하게 싸울 수 있을 것 같네.

* * *

야유, 욕설. 지분거리는 음탕한 말들은 튀어나오지 않았다.

모래판을 내려다보는 관중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이봐, 저거 혹시.

에이, 설마.

미심쩍다는 듯 옆 사람에게 동의를 구해 보아도 돌아오는 것은 잘못 본 게 아니냐는 되물음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틀림없이 검이었다.

면사를 쓴 투사가 허리춤에 찬 것은.

스무 번이라는 기적과도 같은 연승을 거둔 투사에게 아낌없는 야유를 바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관중들은 그녀의 허리춤에서 흔들리는 길쭉하고 가느다란 낯선 물건에 당혹스러워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검이라 부르는 물건이었고, 주로 사람의 살점을 헤집고 숨통을 끊어놓는데 요긴하게 쓰이는 물건이었다.

어째서 검을 들고나온 거지?

쓰려고 나온 건가?

어디에?

설마?

누군가의 작은 의문에서 시작된 웅성거림은 점차 몸집을 불려 거대한 소란을 일으켰다.

그때 모래판의 한가운데로 왜소한 체격의 중년인이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을 아는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총관이다. 투기장의 총관이야.

투기장의 총관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느릿하게 한 바퀴를 돌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이 자리에 찾아주신 여러분께 우선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숨통을 쥐어짜는 것만 같은 억눌린 고요 속에서 총관은 담담한 태도로 상투적인 인사말을 전했다.

제발 본론부터 말해달라는 관중의 열띤 시선에도 불구하고 총관은 예의를 잃지 않았다.

우선은 관객 여러분의 심려가 어쩌고, 투기장 측에서는 그 점을 인지하고 있으며 저쩌고.

누군가는 호흡곤란을 일으키고 누군가는 손에 든 술병을 집어던질락 말락 하던 도중, 드디어 관중이 원하던 본론이 튀어나왔다.

“그리하여 저희는, 대전자 양측의 동의를 얻어, 여러분께 진짜 투쟁을 보여드리려 합니다.”

땀이 아닌 피를, 주먹이 아닌 강철을, 삶이 아닌 죽음을.

말을 끝마친 후, 총관은 환호를 지를 태세를 갖추고 있는 군중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박수로 맞이해 주십시오. 검과 창으로 무장한 투기장의 왕자를!

억눌려 있었던 환호와 함께, 단혜림의 반대편 출구에서 투기장의 왕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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