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61화 외전 54화
단혜림은 가만히 모래판을 내려다보았다.
새로이 모래판에 오른 신인 투사라면 으레 신고식으로 거치는 짓궂은 야유와 조롱이 그녀를 향해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마치 소리 지르는 관중의 경박함을 비웃듯 무덤덤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무심하게 허리를 숙여 모래 한 줌을 쥐었다.
수많은 피와 땀과 목숨을 받아들였을 테지만, 모래는 붉지 않았다.
핏물과 땀방울은 모래 속에 스며들었을 것이고 목숨은 무정한 시간의 사토 속에 파묻혀 스러졌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투기장의 모래는 해변이나 강변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모래판에는 기억이 남아 있었다. 스러져간 투사들이 남기고 간 투쟁의 기억이.
단혜림은 손을 펴 모래의 기억을 보았다. 그곳에는 모래 속에 파묻힌 이빨과 손톱이 있었다. 피와 땀. 승리와 패배. 생존과 죽음. 그리고 치열한 투쟁의 증거.
단혜림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좋군.”
그 이유가 동전 서푼짜리의 저열한 유흥이라 할지라도, 투쟁이었기에 그것으로 좋았다.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며 격렬하게 맞부딪혔기에 좋았다. 도덕성을, 인륜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기에 좋았다. 상대의 숨통을 끊을 수 있기에 좋았다.
적과 나. 오직 둘만이 존재하는 작고 좁은 세계였기에 좋았다. 살가죽을 찢고 심장을 터뜨리고 내장을 뽑고 눈을 찌르고 턱을 부숴 버릴 수 있기에 좋았다.
그저 싸울 수 있기에, 싸울 수 있는 곳이기에 좋다.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맥동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검을 쓸 수 없다는 점. 검을 쓸 수 있었다면 더없이 좋았으리라.
그녀는 조용히 잠들어 있을 자신의 검을 떠올리며 짙은 아쉬움을 느꼈다.
그녀의 검이 다시없을 명검이었기에 그 아쉬움은 더욱 크고 깊었다.
이름 높은 표가 상단의 상단주와 철왕의 마지막 후예. 그리고 존귀한 용의 피를 이은 숙친왕 전하.
한자리에 모이기 쉽지 않은 이들이 오직 이름 없는 한 명의 무사를 위해 땀 흘리고 밤을 지새우며 칼을 벼려냈다 하면 어느 누가 믿어줄까.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단혜림은 작게 키득거리는 시간을 가졌다.
세상에, 왕이 내린 검이 아니라 왕이 벼린 검을 찬 무사라니.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반대편에 있는 출구에선 대전자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단혜림은 허전한 허리춤을 한번 쓸어 만지고는 어깨를 돌려 굳은 근육을 부드럽게 이완시켰다.
그래. 주먹다짐도 싫어하지는 않아. 아니, 사실은.
“꽤 좋아하는 편이지.”
사나운 미소를 끌어올리며 단혜림은 자신의 대전자를 바라보았다.
모래판에 발을 내디딘 것은 말쑥하게 차려입은 젊은 사내였다.
치렁치렁하거나 장식적이지는 않았지만, 사내의 검소한 의복은 무복이라기보다는 문인들이 즐겨 입는 문사복에 가까워 보였다.
그런 인상을 주는 데는 품이 낙낙한 의복과 함께 사내의 선량한 얼굴 또한 한몫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그녀의 적임이 분명했다.
가느다란 눈매와 낮은 언덕처럼 완만한 곡선의 콧대, 작은 입술과 얇은 턱선 아래론 굵직한 목과 담대하게 벌어진 어깨, 흉터 가득한 손이 있었다.
그 잘 단련된 손은 그녀를 만족시켰다.
‘근면하게 단련했군.’
밧줄을 감은 나무 기둥, 쇳가루를 섞은 모래, 바위, 인간의 살가죽.
수많은 것을 때리며 단련했을 손의 주인이 그녀와 마주 서자 노름꾼들의 휘파람 소리와 기대감 섞인 응원이 울려 퍼졌다.
돈 좀 따게 해다오.
묵사발을 내줘라.
아가씨라고 봐주지 말고.
응원의 함성인지 야유의 고함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란을 돌아본 단혜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상대를 돌아보았다.
“할 말 없는가? 이런 자리면 으레…….”
“예. 도발적인 언사가 오가고는 하지요. 관객의 흥도 돋울 겸, 전의도 고양할 겸.”
“생각 없나?”
불법 투기장의 투사치고는 지나치게 점잖은 사내군.
김이 샜다는 듯 구는 단혜림을 보며 사내는 난처한 얼굴로 손사래 쳤다.
“도발도 어느 정도 수준이 맞아야 성립이 되지요. 기대하셨다면 죄송하지만, 수준 차이를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하수는 아닙니다.”
면사를 쓰신 것은 정체를 노출하고 싶지 않으시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니 저도 굳이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배움을 청하는 하수의 자세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 사내는 자세를 잡았다. 오른손을 벽처럼 앞에 세우고 몸을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두는 자세.
단혜림이 뒤늦게 자세를 잡았다.
“부디, 한 수 가르쳐 주십시오.”
기대하지도 않았던 공손한 인사에 단혜림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래서는 평범한 친선대련이겠군.
“그럼 선수는 양보하지.”
오게나.
단혜림의 허락과 동시에 개시를 알리는 징이 울리고, 관객들의 환호성과 함께 사내가 모래판을 박차고 도약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세 걸음의 도움닫기 후 뛰어오른 사내의 허리가 허공에서 활처럼 휜다.
시위에 걸린 것은 독니를 드러낸 오른발. 회전을 더한 맹렬한 뒤돌려차기는 마치 화살 깃이 허공을 가르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쏘아진다.
성문을 후려치는 충차와도 같은 뒤돌려차기를 향해 단혜림이 오른팔을 내민다.
살가죽과 살가죽이 부딪혔다 하기에는 너무나 크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린다.
나무토막, 혹은 사기그릇 따위를 억지로 비틀어 조각내는 듯한 섬뜩하고 무거운 파열음.
그 소리의 원인은 바닥에 착지한 사내에게서 드러났다.
“이런 질문이 무례가 될 것을 알면서도 여쭐 수밖에 없음을 양해해 주십시오. 혹시, 인간입니까?”
“초면에 섭섭한 말을 하는군. 사람일세. 그것도 제법 미녀지.”
단혜림의 자신만만한 발언에 놀란 사내는 이내 살포시 웃음 지었다.
하지만 웃음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의 오른쪽 정강이에서 올라오는 은은한 통증이 그의 웃음을 일그러뜨렸다.
환부는 점점 부어오르며 후끈한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사내는 다년간의 경험으로 그 상처가 골절상일 것이라 진단했다.
골절이라니.
울고 싶어지는 막막함과 무력감 속에서 사내는 자세를 다잡았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단혜림은 한 다리로도 자신의 투쟁심을 온전히 감당해 낸 투사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정중한 인사에 화답하는, 정중한 일격이 경악으로 가득 찬 군중의 시선을 갈랐다.
“원 펀치 KO. 거물 신인 다운 화끈한 데뷔전이군.”
챔피언은 긴장해야겠어.
오직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말을 중얼거리며 낄낄거리던 소년은 뒤쪽으로 손짓했다.
그 손짓에 의아함을 느끼며 다가온 장소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준 후, 소년은 창틀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는 얼어붙은 관중석의 한 곳을 가리켰다.
“저기, 저 얼간이 좀 데려오렴.”
저기 내버려 두면 죽을 테니까.
* * *
극적인 첫 승리 이후로, 마치 꼬리를 물 듯 두 번째와 세 번째가 뒤따라 붙었다.
오늘 막 모래판 위에 발을 디딘 신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자신의 연승 기록을 갱신하고 있었다.
긍정적으로 본다면 이 시대의 새로운 전설이 탄생하는 광경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마음씨 넉넉하고 낭만적인 관객은 없었다.
또 하나의 승리가 더해질 때마다 가일층 심해지는 욕설과 비난을 굽어보며 소년은 혀를 찼다.
“그럴 수밖에 없지.”
한 번이라면 이해했을 거야. 돈을 잃었으니 불쾌하긴 했겠지만. 그리고 두 번이라면 감탄했을 테고, 세 번이라면 우연이라 치부했겠지.
하지만 열 번이라면. 스무 번이라면.
“작위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아, 저 개 같은 투기장 놈들이 우리 돈을 빨아먹으려고 수작을 부리는구나. 억지로 승부를 조작해서, 우리를 호구로 보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
물론 머리에 뇌라는 물건이 제대로 탑재된 인간이라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승부 조작은 투기장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일이지.
하지만 노름꾼이라는 놈들치고 머리가 꽉 차 있는 놈들을 난 본 적이 없어. 대부분은 아편이나 술에 찌들어서 쪼그라들어 있거든.
시시껄렁한 잡담을 늘어놓는 태도로 노름꾼들을 헐뜯고 조롱하며 소년은 웃었다.
오직 계략을 성공시킨 정치가만이 지을 수 있는 음습한 만족감에 찬 웃음이었다.
“저 친구들 보게. 저 노름꾼들은 또 돈을 잃을 것을 알면서도 돈을 걸어. 그리고 단 호위가 승리하면 또 욕을 하지. 그러면서도 그만두지는 않아. 왠지 아나? 이건 이미 승리나 패배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야. 이건 이미 감정싸움이다. 오기의 문제야.”
언제까지 이기나 두고 보자. 언제까지 우릴 속이는지 두고 보자.
이건 오기인 동시에 앞으로 일어날 행동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자기합리화라 해도 되고.
“자신의 도덕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기제라 할 수도 있지.”
설명을 끝마친 소년은 특실의 가장 그늘진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젊은 노름꾼을 굽어보았다.
노름꾼, 길성은 소년의 금과옥조와 같은 설명을 한 귀로 줄줄 흘린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혼이 빠지기라도 한 듯이.
그를 물끄러미 보던 소년은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아서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짝 소리가 나도록 박수 쳤다.
눈앞에서 폭죽처럼 터져 나온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길성은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빙긋 웃고는 질문했다.
“무엇을 위한 자기합리화고, 무엇을 위한 방어기제일까.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나?”
“모, 몰라. 모릅니다.”
“간단한 문제인데, 정말 모르겠나?”
군중의 불만은 이미 한계점에 도달해 있지. 아주 작은 계기만 있어도, 바늘 하나만큼의 계기만 있어도 저 불만은 화산처럼 터질 거야.
설마 저 노름꾼 놈들이 준법의식을 투철하게 지키며 비폭력적인 항의 시위로 자신의 불만을 표출할 거라고 기대하는 건 아니겠지?
길성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몽롱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소년은 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폭동이 일어나겠지. 처음에는 잃은 돈을 되찾기 위한 폭동이겠지만, 그 끝에는 자신들을 속인 투기장 관계자들을 응징하기 위한 준엄한 심판이 되겠지. 그리고 지금 노름꾼들이 돈을 잃는 것은 앞으로 있을 심판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 위한 밑 작업이야. 난 속았으니까. 이만큼이나 돈을 잃었으니까. 난동을 부려도 용서받을 거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하는 거지.”
궁금하지 않나? 노름꾼들이 투기장에서 폭동을 일으켰다면, 관청에서 어떻게 대응할지?
“일단은 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위협하는 집단적 폭력 행위이니 진압하려 할까? 아니면 평소 눈엣가시 같았던 뒷골목 놈들이 자기들 스스로 활활 타는 걸 구경하러 오지 않을까?”
원래 강 건너 불구경이 제일 재밌는 법이잖나?
깔깔거리며 소리높여 웃은 후,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훔친 소년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젊은 노름꾼의 어깨를 짚었다.
노름꾼은 자신의 어깨를 움켜쥔 굳은살 박인 손을 보며 이를 딱딱 부딪쳤다.
하지만 그 손을 외면하지는 못했다.
“그러니 폭동이 일어나기 전에, 자신의 거취를 결정해야지. 젊은 친구.”
소년의 채근에 길성은 대답했다.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지금 나와야 할 말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였다.
하지만 소년은 실망하는 대신 부드러운 어조로 그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그야, 자네는 투기장에서 노름꾼들을 선동하기 위해 심어둔 바람잡이니까.”
지금 내려가면 살해당할 텐데?
소년이 내려준 답에 길성은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되물었다.
“어째서? 어째서 제가 바람잡이라는 겁니까! 전!”
“물론 자네가 진짜 투기장의 바람잡이인 건 아니지. 하지만 결과적으론 그렇게 되었잖나? 인정하긴 힘들겠지만, 현실이 그런 걸 어쩌겠나. 자넨 바람잡이야. 그리고 조금 전까지 함께 웃고 떠들었던 노름꾼 친구들에겐 배신자고.”
비로소 젊은 노름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없는 공포와 참혹한 현실에 등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더 이상 잔혹한 미래를 들이밀어 그를 일으켜 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소년은 만족했다.
이제 소년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었다.
소년은 그에게 주머니를 내밀었다. 제법 묵직해 보였고, 좋은 재질에 마감도 튼튼하게 해 내용물이 새어 나올 걱정은 없어 보였다.
소년은 그것을 길성에게 건네었다.
“부족하지 않게 넣었으니 사치만 안 하면 도피 생활에 큰 문제는 없을 걸세. 애초에 도피 생활이 그리 길지도 않을 거고. 동정호를 떠나 적당한 도시에 도착하면 거기 자리를 잡고, 남은 돈으로 공방을 차려서 먹고 살게나.”
길성은 멍청한 얼굴로 주머니를 받아들었다.
그는 소년이 그에게 어째서 주머니를 주는지, 어째서 자신의 인생에 충고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소년의 말대로 등을 돌렸고 두말없이 도망쳤다. 감사 인사를 남길 새도 없이.
소년은 환하게 웃으며 그 은혜도 모르는 유리 장인을 배웅했다.
계단을 뛰어내리는 소리가 멀어질 때쯤, 소년이 젊은 노름꾼 한 명을 갱생시키는 장면을 지켜보던 태감이 입을 열었다.
“죄책감이라도 들었느냐? 저 친구를 이용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진 거지요.”
아마 앞으로는 노름 생각은 꿈도 못 꿀 겁니다.
소년의 말에 태감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노름꾼 버릇 고치는데 이렇게 거창한 방법을 쓸 줄은 몰랐다.”
“뭐, 겸사겸사 한 일입니다.”
아, 마침 오는군요. 오늘의 주목적.
소년의 말에 태감은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선 낯선 남자가 착석 허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미 허락 없이 입실했음에도. 묘한 부분에서 예의를 차리는 남자를 보며 소년은 자신의 앞쪽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시게.”
자네가 이 투기장의 총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