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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59화 (260/314)

환관의 요리사 259화 크리스마스 외전

밤이 하루의 대부분을 점유하는 계절이 왔다.

발끝을 시리게 하는 한기에 움츠러든 태양을 대신하여 별과 달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계절.

겨울이었다.

창틀에 솜털처럼 가벼운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처마 끝엔 고드름이 열리는 밤.

그 긴긴밤에 잠 못 드는 아이들을 위해 소년은 따뜻한 차와 달콤한 간식과 나른한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딱 지금쯤이구나. 내가 살던 곳에선 연말이 가까워지면 성탄절이라는 성대한 기념일이 있었단다.”

“성탄절이요?”

“그래. 연인, 가족, 친구, 이웃과 함께 즐거운 한때를 보내곤 하지”

화로의 반쯤 타들어 간 숯에 고구마 몇 개를 묻은 후, 소년은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축제 분위기에 물든 거리의 풍경. 캐럴을 부르는 아이들과 꼭대기에 황금빛 별을 장식한 크리스마스트리. 크리스마스 정찬에 오르는 각종 달콤한 먹거리. 그리고.

“성탄절 전날 밤이 되면 아이들은 침대 다리나 벽난로에 양말을 매달아 놓는단다.”

아이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산타클로스의 선물 이야기.

소년은 마치 무릎에 착한 아이들을 앉혀놓고 ‘어떤 선물이 가지고 싶니?’라고 묻는 산타할아버지 같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물론 아무리 인자한 웃음을 지으려 해도 칼로 찢어놓은 것처럼 쭉 찢어진 날카로운 눈매와 교활하기 그지없는 매부리코, 얇고 창백한 입술 때문에 인자함과 다정함은커녕 음울하고 섬뜩함만 감도는 비웃음이 되었지만.

이미 그 흉악한 얼굴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오히려 곰살맞게 웃으며 소년의 옆에 착 달라붙었다.

“산타클로스는 아이들이 잠드는 깊은 밤이 되면, 코가 빨갛게 빛나는 순록이 끄는 썰매를 타고 온단다. 그리고는 굴뚝을 타고 내려와 아이들이 매달아둔 양말 속에 선물을 넣어둔단다.”

“선물을요?”

“와아, 좋겠다.”

사실 산타의 정체는 동심을 지켜주고 싶어 하는 부모님이지만,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는 종달새처럼 조잘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소년은 쓴웃음과 함께 ‘아이들은 몰라도 될 진실’을 폐부 깊숙한 곳으로 밀어 넣었다.

아직은 몰라도 돼. 아직은.

소년은 아이들의 질문에 적당히 대꾸해 주며 재에 묻어둔 고구마를 꺼내 껍질을 벗겼다.

검게 그을린 껍질 속으로 노오란 속살이 드러난다.

마치 석탄처럼 새카만 껍질을 벗겨낼 때마다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는 우아한 황금빛.

소년은 뜨겁지도 않은지 맨손으로 껍질을 벗겨내고는 유백색 신선한 버터 한 덩이를 올려 아이들에게 내주었다.

“자, 소금을 친 가염버터이니 따로 소금은 안 뿌려도 될 거다. 어서 먹으렴.”

“잘 먹겠습니다!”

검댕이 군데군데 묻은 호박색의 촉촉한 고구마 위로 신선한 버터가 사르르 녹아든다.

호두나 개암나무 열매를 연상시키는 고소한 향기. 향기로운 버터로 윤기로 더한 고구마는 입안을 가득 채우는 뜨거운 열기조차 잊게 할 만큼 달콤했다.

물기를 담뿍 머금은 말랑말랑하면서도 촉촉한 질감, 불에 직화로 구워내며 담뿍 농축된 달콤함. 그리고 그 달콤함을 더욱 부가시키는 진하고 고소한 버터의 풍미.

버터를 잔뜩 얹은 군고구마 한 접시는 춥고 외로운 밤에 잠 못 이루는 이들에게 처방할 수 있는 최고의 수면제였다.

군고구마에 새큼하게 익은 동치미 한 사발을 비운 아이들은 어느새 성큼 찾아와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졸음기를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소년은 눈을 비비는 아이들의 옷깃을 여며 주고는 등을 떠밀어 침실로 보냈다.

“이만 가서 자야지. 이불 잘 덮고 자야 한다.”

“네에.”

아이들은 하품하며 졸린 목소리로 소년에게 인사하고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일어났다.

소년은 아이들이 복도의 모퉁이를 돌 때까지 손을 흔들며 아이들을 배웅했다. 그러고는 흰 잿가루만 남은 화로에 새 숯을 채워 넣었다.

아이들은 자러 갔지만, 그를 찾아올 손님이 한 명 더 있었다.

“냄새 참 좋구나. 버터인가?”

“역시, 아직 안 주무셨군요.”

소년의 예상대로, 아이들이 모퉁이를 돌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태감이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얇은 비단 침의만을 걸친 태감은 주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화롯가에 앉아서는 서늘한 밤공기에 언 몸을 녹였다.

소년은 태감의 길고 흑단처럼 새카만 머리카락이 화로의 불티에 그을리지는 않을지 걱정하며 손짓했다.

“비녀는 두고 오셨습니까?”

“아아, 잘 때 빼놓은 걸 깜빡 잊고 그냥 왔구나.”

간신히 뭍 궁녀들의 선망과 질투를 한몸에 샀던 태감의 곱디고운 머리카락을 지켜낸 소년은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머리칼을 뒤로 넘긴 태감은 조금 전까지 아이들이 앉아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성탄절이라. 재밌는 풍습이구나. 괜찮다면 내게도 이야기 좀 들려주렴.”

“태감님도 산타클로스 이야기가 궁금하십니까?”

“물론 그쪽도 흥미가 없지는 않지. 그쪽 세계 부모들의 교활함에 감탄이 절로 나오더구나. 당근은 채찍보다도 강력한 통제의 수단이지. 산타의 선물은 착한 아이에게만. 난 이토록 온유하고도 강렬한 협박을 들어본 적 없다.”

“그렇게 정치적인 의도로 성탄절을 이용하는 부모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소년은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리고는 주방 벽에 걸어둔 자루에서 감자와 고구마 몇 개를 골라와 화로에 올렸다.

부지깽이로 잿가루를 긁어모으는 소년을 보며 태감이 질문했다.

“역사 깊은 기념일이라면 응당 기념일을 상징하는 특별한 음식이 있기 마련이지. 성탄절에는 어떤 음식을 차려 먹느냐?”

“그 말씀 하실 줄 알았습니다.”

중추절이나 춘절이라면 모를까 성탄절은 제 전문이 아니지만…….

머리를 긁적인 소년은 친분이 있었던 요리사들에게 주워들은 것들을 떠올리고는 떠듬떠듬 설명을 시작했다.

“우선은 칠면조나 오리, 거위, 닭 같은 가금류를 화덕에 통째로 구운 로스트가 식탁의 중앙을 차지하지요. 감자나 과일, 혹은 콩이나 육수를 넣어 지은 밥 등으로 속을 채우고, 굽기 전에 섬세한 가슴살을 보호하기 위해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를 얇게 저며 가슴살을 감싸서 굽습니다.”

가금류 외에도 기름이 잘 오른 소의 등심이나 살집 두툼한 돼지의 어깨살, 양의 다리 등이 로스트에 이용되고, 특히 돼지 뒷다리 햄을 통째로 구운 햄 로스트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별미지요.

소년의 말을 진지한 자세로 경청하던 태감은 낯선 단어의 등장에 고개를 갸웃했다.

“햄? 햄이라면 서방에서 화퇴(火腿)를 부르는 말이 아니더냐. 설마 화퇴를 통째로 구워 먹는다고? 그 짠 것을?”

“물론 굽기 전에 충분히 소금기를 빼는 과정을 거치지요. 우선은 하룻밤 동안 물에 담가주고, 그런 다음 부드러워질 때까지 푹 삶아 소금기를 뺀 다음에야 구울 수 있지요.”

햄을 구울 때는 대부분 달콤한 양념을 곁들이는데, 그중에서도 최고로 치는 양념은 향기롭고 농후한 꿀입니다.

꿀에 정향과 계피 등을 넣어 졸여둔 다음 십자로 깊게 칼집을 넣은 햄 위에 골고루 발라 화덕에서 익혀내면.

소년은 참지 못하고 설명을 중단해야 했다. 입안을 가득 찬 군침 때문에 그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태감은 소년이 잠시라도 설명을 중단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래서, 맛은 어떻지?”

“그야 당연히…….”

눈을 희번덕거리며 대답을 재촉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희미하게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직접 확인해 보시지요.”

* * *

“기념일에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정찬이라.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어쩔 수 없겠지?”

설렘과 기대로 잠 못 이룬 태감의 벌건 눈을 마주한 위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념일에만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정찬. 미식가인 동시에 탐식가이기도 한 태감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것도 이해가 되었다.

태감의 책상에 올리려 했던 서류와 목간들을 바라본 위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것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일도 손에 안 잡히시는 것 같으니, 오늘은 조금 일찍 마감하시지요.”

대신, 내일은 기필코 처리해 주셔야 합니다.

긴 시간 함께해 온 심복의 사려 깊은 배려에 감명받은 태감은 ‘평소 그를 마음 깊이 존경하고 있었으며 이런 충직하고 유능한 부하를 만난 것은 둘도 없는 행운이다’에 해당하는 단어들을 빠른 속도로 읊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 전까지 허기와 수면 부족을 토로하며 골골거리던 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경쾌한 동작이었다.

업무시간에도 그런 열의를 보여주셨다면 얼마나 좋을까.

심복의 서글픈 소망을 뒤로한 채 태감은 집무실을 나섰다.

몇 걸음 되지도 않는 식당으로 가는 복도가 오늘따라 지칠 정도로 길었기에 태감은 걷는 대신 달음박질쳤다.

얼마나 뛰었을까. 일 다경? 어쩌면 한 식경이 훌쩍 넘었을지도 모른다.

집무실에서 식당까지의 거리는 어림잡아도 오십 걸음이 채 안 되었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는 말을 비유법이 아닌 지극히 담백하고 직설적인 표현으로 이용해야 하는 거리.

하지만 벅차오른 흥분과 허기에 지친 그에게는 영원과도 같은 거리였다.

늘 일상적으로 걸어왔던 복도와 집무실과 식당의 거리를 이렇게나 멀게 설계한 대목장에게 새삼스러운 악담을 퍼부으며 달린 끝에, 태감은 간신히 식당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부드러운 적갈색으로 물들인 식탁보를 깐 식탁 위에는 화사한 동백꽃을 꽂아둔 화병만이 차려지지 않은 식탁의 적막함을 채우고 있었다.

마치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멍하니 식탁을 바라보는 태감을 발견한 소년이 피식 웃었다.

“아직 개점 전입니다, 손님.”

“내가 너무 일찍 왔나?”

“요리는 다 됐습니다만, 아직 차리지를 못해서…….”

그리고, 성탄절 정찬을 시작하기에는 아직 식탁 주위가 허전하지 않습니까.

소년의 말에 주위를 둘러본 태감은 늘 소년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정은 서류를 정리하느라 아직 오직 못했다만, 장소와 이삼은?”

“옷을 갈아입으러 갔습니다. 그래도 정찬인데 최소한의 격식은 갖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슬슬 아이들이 돌아올 때가 되었으니, 상을 차려놓아야겠군요.

따스한 목소리로 태감을 자리에 앉힌 소년은 능숙한 솜씨로 한 번에 서너 개의 접시를 날라왔다.

그 조막만 한 손, 가느다란 팔에 그릇을 걸쳐 올려 나르는 것은 마치 위험천만한 묘기를 구경하는 것만 같은 아찔함을 느끼게 했다.

소년의 손에 들린 것이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리는 뜨겁고 먹음직스러운 요리였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소년은 단 한 번도 위태로운 광경을 연출하지 않고 모든 음식을 상에 올렸다.

모시조개와 소금에 절인 대구살을 넣은 클램차우더가 가장 먼저 정찬에 참석할 손님 수대로 상에 오르고, 그 뒤를 이어 꿀에 절인 버터와 빵, 밤으로 속을 채운 닭과 감귤로 속을 채운 오리, 감자로 속을 채운 거위의 세 가지 로스트가 차례로 상의 빈자리를 채운다.

새큼한 사과 소스를 곁들인 돼지 어깨살과 구울 때 나온 육즙으로 만든 향기로운 그레이비를 더한 소의 등심. 정강이를 뼈 채 푹 끓여낸 양고기 스튜도 있었다.

소년은 통통하게 살집 오른 고기로 상을 가득 채우고도 만족하지 못했는지 곧바로 달콤한 파이며 과자류를 내왔다.

늦가을에 수확한 호박에 향기로운 계피 향을 더한 호박파이며 얇게 저민 사과를 켜켜이 쌓아 구워낸 사과 파이.

초여름에 설탕에 절여준 산버찌로 속을 채운 버찌 파이 등의 파이부터 독한 증류주를 끼얹은 케이크, 하얀 설탕 아이싱으로 눈코입을 그린 진저맨 쿠키 등이 상을 빈틈없이 채웠다.

그 모든 요리가 상에 오르고 나서야 식탁의 상석을 차지할 메인 요리가 나왔다.

“본고장의 햄을 구할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운남에서 들여온 화퇴로 대신해 봤는데, 의외로 그럴듯한 맛이 나더군요.”

소년이 쑥스러운 미소와 함께 수줍게 내민 것은 돼지 뒷다리를 통째로 염장하여 훈제한 햄 로스트였다.

격자무늬로 깊게 넣은 칼집이 교차하는 부분마다 정향을 박아넣고 졸인 꿀을 끼얹어가며 화덕에서 구워낸. 졸아든 꿀의 단내가 진동하는.

그것은 그야말로 식탁의 주인이었으며 왕이었다.

“얼치기로 배운 대로 차린 상이라 미흡한 점이 많습니다만, 부디 맛있게 드셔주십시오.”

“얼치기로 배운 게 이 정도라. 아, 혹시 의례적으로 하는 겸양의 표현이었나?”

겸손이 지나침을 지적하려는 듯 새침한 표정을 짓는 태감을 보며 실소를 흘린 소년은 그의 잔에 식전주를 따라주었다.

소년이 기울인 병에선 맑은 다홍빛 술이 쏟아졌다. 화려하고도 기름진 정찬을 시작하기에 걸맞은 달고 상큼한 앵두주였다.

태감의 잔을 가득 채운 소년은 뒤이어 자신의 잔을 채운 다음 태감을 향해 내밀었다.

“태감님.”

태감은 조금 늦게 잔을 들어 올렸다. 유리와 유리가 부딪치는 가벼운 쨍그랑 소리가 울렸고, 소탈한 웃음소리와 정겨운 인사가 뒤를 따랐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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