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55화 외전 49화
“이 친구 대낮부터 술이라도 푸러 간 건가? 아니, 마시기엔 너무 이른 시간인데.”
동정호 인근의 한적한 주택가. 왕일을 보기 위해 이른 오전 그의 집을 방문한 소년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다시 대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대문은 엄숙한 침묵으로 집주인의 부재를 알려왔다.
“아직 잠들어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아예 인기척이 안 나는 걸 보니.”
“제가 한번 들어가서 보고 올까요?”
장소의 제안에 잠시 고민하던 소년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주인의 허락 없이 무단으로 담장을 넘는 것은 예의도 아닐뿐더러, 확인하고자 한다면 굳이 장소의 도움을 빌릴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불청객을 막고 집주인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할 담장은 허물어져 내부의 세간살이를 훤히 드러내고 있었다.
굳이 풀쩍 뛰어넘을 필요도 없이, 들어가고자 한다면 두 발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손사래를 치며 장소를 말렸다.
“아니다. 괜히 잘못 들어갔다가 뱀이라도 밟을라.”
“뱀이, 음…… 있을 것 같기는 하네요.”
무너진 담장 너머로 마당을 둘러본 장소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걸음 내디디면 풀잎에 발목이 쓸릴까 걱정되는 울창한 수풀. 그 사이로 마치 자신들 또한 집의 구성원임을 주장하듯 당당하게 쏘다니는 쥐 떼.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는 장독대.
방치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왕일의 집은 아무리 호의적으로 평가하려 해도 폐가 이상의 평을 얻기는 어려울 듯했다.
“참, 내 자식 아니라 뭐라고 말은 못 하겠다만…… 이래서 사내놈들은.”
오래전 자신이 부모님께 들었던 잔소리를 떠올리며 피식 웃음 지은 소년은 담장 너머를 한번 힐끔 보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소년의 뒤로 아이들이 쪼르륵 따라붙었다.
“뱃사람이 갈 곳이야 뻔하지. 부두로 가자꾸나. 근처 시장 구경도 할 겸.”
“시장이요?”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면 으레 시장이 있기 마련이지. 마침 호수가 옆이니 어판장도 있을 테고. 유람객들에게 기념품을 파는 가게도 있겠지. 모처럼 동정호까지 왔는데 그럴듯한 추억거리 한두 개는 사 가야 할 것 아니냐.”
가서 눈요기도 하고, 군것질도 하고. 그리고 점심 장도 보자꾸나.
평소 지을 일이 자주 없는 인자한 노인의 미소를 지으며 소년은 아이들을 부둣가의 시장으로 이끌었다.
새벽녘에 드리운 그물을 걷어 돌아오는 어부들, 소일거리삼아 설치해 둔 통발을 건지는 노인과 소금 친 물고기를 햇볕에 널어 말리는 아낙네. 마른 어포 조각을 입에 물고 골목길을 쏘다니는 개구쟁이들.
늘 복잡하고 시끄러운 경사보다 시간이 조금 느리게 흐르는듯한 어촌의 풍경을 지나쳐 소년은 동정호의 시장가로 들어섰다.
그저 거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들뜨게 만드는 기운찬 활기와 소란으로 가득 찬 동정호의 시장은 제국 각지의 물산이 모이는 경사의 사장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머나먼 서방의 사막길을 건너온 값진 비단과 향유, 남쪽 끝 해남에서 들여온 야자 열매.
가을에 서리가 내린다는 흑룡강성에서 들여온 석이와 운남의 보이차가 모두 만나는 경사의 시장과 같은 눈 돌아가는 화려함은 없었지만, 대신 동정호의 시장은 지역민들의 자부심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장 먼저 아이들의 눈길이 향한 곳은 펄떡펄떡 뛰는 온갖 생선들이 진열된 어판장이었다.
큼직한 비늘이 달린 것. 흉악한 아가리에 날카로운 이빨이 줄지어 선 것. 긴 수염이 있는 것.
미끌미끌한 점액에 쌓인 길쭉한 것.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것. 주둥이가 뭉툭하게 튀어나온 것.
그중에서도 아이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은 것은 날렵한 공기역학적 몸체에 얼룩덜룩한 무늬를 가진 강꼬치고기였다.
아이들에게 이끌려 가판대 앞에 선 소년은 낯선 물고기가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정호에서 강꼬치고기도 잡히던가?”
“이 물고기 이름이 강꼬치고기예요?”
“그래. 서방에선 즐겨 먹는 고기지만 이 근방에서도 나는 줄은 몰랐는데.”
가물치나 쏘가리도 한 수 접어주는 민물의 제왕. 강꼬치고기는 주로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즐기는 민물고기로 매우 빠르고 포악하기로 유명한 물고기였다.
“크고 빠르고 이빨이 송곳처럼 날카로운 데다가 흉포하기까지 하지. 거기다 식성도 대단해서 자기보다 작다 싶은 건 뭐든지 집어삼킨단다. 작은 물고기나 개구리, 벌레가 주식이지만 배가 고프면 수면 위에 내려앉은 물새까지도 잡아먹지.”
“허어, 역시 대단한 놈이었군. 내 아끼는 뜰채를 박살 낸 놈이라 보통 놈이 아닐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어쩐지, 생선 장수가 아니라 낚시꾼이었군. 생선 장수였으면 자기가 잘 아는 물고기만 가판대에 올렸겠지.
소년은 짐짓 걱정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처음 잡아보셨나 봅니다?”
“내 동정호에서 낚시꾼 일을 한 지 스무 해가 넘었지만 이런 놈은 처음이우.”
“손은 괜찮으십니까?”
“아아, 하마터면 손가락 하나 잃어버릴 뻔했지. 방심할 수 없는 놈이더구만.”
잡긴 잡았는데 도저히 어찌 먹어야 할지 몰라 혹시 시장에 내놓으면 아는 사람이 사갈까 해서 팔러왔지. 그런데 도련님께선 민물고기에 대해 무척 소상하신데, 먹는 법도 해박하신가?
소년은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보는 그 낯간지러운 호칭에 진저리쳤다.
“커흠, 강꼬치고기는 잔가시가 많고 비늘이 두꺼워 요리하기 무척 번거롭다고 하더군요. 맛은 꽤 좋다고 들었습니다만.”
“에잉, 잡기 힘들면 먹기라도 편해야지. 몹쓸 놈이구만. 이걸 어쩐다.”
투덜거리며 한숨을 내쉰 낚시꾼을 보며 잠시 강꼬치고기의 적정가를 계산해 본 후, 소년은 가느다랗게 웃음을 짓고는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이렇게 둬봐야 팔리지도 않고 파리나 꼬일 거, 좀 싸게라도 팔아 치우는 게 이득 아니겠습니까?”
“도련님께서 사시겠수?”
“싸게만 주시면 제가 대신 처분해 드리지요.”
뭐, 싫으시다면 집 근처 고양이들에게 별미를 제공하시는 것도 방법이겠지요.
소년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본 낚시꾼은 자신에게 고양이 애호가의 기질이 없음을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래서, 왕일 그 친구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강꼬치고기 한 마리 사서 돌아왔단 말이냐?”
“예. 애들 기념품도 사주고요.”
태감은 아이들의 손에 들린 동정호의 명물인 귤나무로 만든 향기로운 공예품을 보고는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내건 없느냐?”
“여기 있잖습니까. 강꼬치고기.”
“흐음, 색다른 기념품이기는 하다만, 이왕이면 비늘 달린 게 아니라 털가죽이나 깃털 달린 거였으면 좋았을 텐데.”
비늘 달린 건 그리 선호하지 않아서.
시큰둥한 태감을 보며 소년은 문득 폄하 당한 꼬치고기가 튀어 올라 태감의 코를 깨물어주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떠올렸다.
하지만 민물에서는 강의 늑대라 불리며 포악함을 과시하던 강꼬치고기도 뭍에서는 도마 위의 생선일 뿐이었다.
문자 그대로. 소년은 피식 웃고는 날이 얇은 운철 칼을 들어 올렸다. 아래 입이 툭 튀어나온 대가리가 몸통과 분리되자 그 단면으로 연한 분홍빛의 탄력 있는 살코기가 드러났다.
“어떻게 요리할 생각이냐?”
“글쎄요. 강꼬치고기는 보통 석쇠에 구워 먹는 걸 최고로 치지만…….”
강꼬치고기의 석쇠 구이는 유럽 전역에서 전통적으로 즐겨온 미식으로 그 기록은 14세기 프랑스 궁정 요리사이자 타이방(Taillevent)이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요리사 기욤 티렐(Guillaume Tirel)의 요리책 비앙디에(Le Viandier)에도 남아 있을 정도였다(생선을 석쇠 위에 힘껏 내려치라는 조언으로 시작한다).
그런 만큼 강꼬치고기의 풍미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활활 타는 숯불에 바삭하게 구워내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겠지만, 태감을 돌아본 소년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가시 발라 드시기 귀찮으시겠지요?”
“흐음, 가시가 많은 생선이냐?”
“가시가 많기도 많지만 억세기로도 유명합니다.”
대번에 의욕이 떨어져 축 늘어지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조용히 강꼬치고기 완자로 점심 메뉴를 결정지었다.
소년은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내고 등 쪽으로 칼을 넣어 생선을 가르며 프랑스 리옹의 유명한 강꼬치고기 완자 요리인 크넬 드 브로셰(Quenelles de brochet)에 관한 이야기를 태감에게 들려주었다.
“리옹의 명물인 크넬 드 브로셰는 곱게 다진 강꼬치고기살에 부드러운 생크림을 넣어 세게 치댄 다음 백후추로 간을 해 만들지요. 한입에 쏙 들어가는 다른 완자와는 달리 어른 주먹만 한 크기로 큼직하게 빚어 삶아내는 것이 특징인데 돌게와 가재를 잔뜩 넣고 진하게 우려낸 낭투아 소스(Nantua Sauce)를 끼얹어 먹으면 쫀득하고 탄력 있는 완자의 식감과 갑각류의 그윽한 감칠맛이 우러난 소스가 절묘하게 어울려 풍미가 대단하다는군요.”
“호오, 그럼 네가 지금 만드는 요리가 그 요리인 것이냐?”
“아쉽게도 전 프렌치 쉐프가 아니라 중화요리사라서 말입니다.”
태감은 김이 샜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삐딱한 자세로 부뚜막에 걸터앉았다.
소년은 태감의 시선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은 채 노련한 칼솜씨로 강꼬치고기를 해체하고는 족집게로 살점에 깊게 박힌 가시를 일일이 발라내었다.
마치 활대처럼 휜 날카롭고 굵은 잔가시가 딸려 나오는 것을 본 태감은 마른침을 삼키며 목을 쓰다듬었다.
“그런 게 목에 걸리면 보통 일이 아니겠는걸.”
“찬밥 한 덩이 꿀떡 삼키는 거로는 안 넘어가겠지요.”
“역시 생선은 고약한 먹거리야.”
목에 걸리면 껄끄럽고 성가시지. 당장 죽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내버려 두면 상처가 곪아 목에 염증을 퍼뜨리지.
태감의 암시를 눈치챈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리고 염증이 퍼지면 목구멍이 부어 밥을 먹을 수가 없지요. 먹지 못하면 쇠약해지고, 쇠약해지면 결국.”
“고사(枯死)하는 법이지. 뽑을 수 있을 때 뽑아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요.”
“하지만 너무 성급하게 뽑으려 하면 목구멍을 긁어 피를 보게 된다. 뽑을 자신 있느냐?”
“뽑아야지요. 그 친구가 도와주면 좀 수월할 것 같습니다.”
말없이 소년을 바라보던 태감은 소년이 생선의 꼬리 끝에서 마지막 가시를 뽑아내는 것을 보고는 질문을 시작했다.
“부두에는 가보았느냐?”
“예. 그 친구 배가 그대로 있더군요.”
“술집에는?”
“이른 시간이라 술집도 한산하더군요.”
“노름판은? 노름꾼들은 시간을 따지지 않지.”
“골패 짝 튕기고 있나 해서 가보았는데, 그 친구는 없고 그 친구에게 돈 떼먹힌 빚쟁이들만 득실거리더군요.”
뱃사람이 부두에도 없고 술집에도 없고 노름판에도 없다. 그렇다면 귀결되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손질을 끝마친 소년은 도마에 칼을 꽂아 넣고는 뒤돌아섰다. 그리고는 요리사가 아닌 동창 제독의 심복으로서 고개를 들었다.
“그 친구가 봉변을 당한 것 같습니다.”
“속단하기엔 이르다. 난 그자가 봉변을 당했을 확률보다는 암시장주에게 제 발로 걸어갔을 확률이 더 높을 것 같구나.”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아닐 수도 있고요. 소년은 건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불순하고 불건전한 놈이지요. 충분히 정직하게 벌어먹고 살만한 기술이 있음에도 땀 흘려 벌어먹기 싫어 암시장의 뱃사공 일을 선택한.”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그 일을 선택한 것도 아니었지요. 비록 가볍다고는 하나 이는 참작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죄 아닙니까. 신뢰할 만한 놈은 아니지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암시장과 결탁한 것은, 비록 손님을 실어나를 뿐인 뱃사공이라 할지라도 명백한 죄라 할 수 있지.”
“그런 놈을 정말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자는 너의 신뢰를 얻을 근거를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지.”
“예. 신뢰할 수 없지요.”
그러니 이번 기회에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년의 말에 태감은 빙그레 웃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느냐?”
“저번에 배를 탈 때, 왕일의 옆에 있던 장석이라는 자가 마음에 걸리더군요.”
“둘이 매우 절친한 사이인 것처럼 보였지.”
“그리고 배신은 보통 절친인 줄 알았던 이가 저지르는 것이 정석이지요.”
짧은 곰방대를 입에 문 어부의 얼굴을 떠올린 소년은 입꼬리를 사납게 끌어 올렸다.
미간을 가볍게 누르며 고민하던 태감은 소년의 얼굴에 떠오른 사나운 미소를 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람이 얼마나 필요하겠느냐?”
“우선은 다섯 명 정도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외에 필요한 것은?”
“흐음, 튼튼하고 큰 자루 하나 있으면 좋겠지요.”
“사람 하나 넉넉하게 들어가는 크기로?”
역시 태감님이십니다. 제가 원하는 걸 어쩜 이리도 잘 아실까.
감격에 찬 소년의 반응에 태감은 실소를 흘리며 대답했다.
“내가 동창 제독을 하루 이틀 한 줄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