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54화 외전 48화
등 떠밀리고, 걷어차이고, 목줄 잡힌 개처럼 질질 끌려간다.
뺨 안쪽이 찢어졌는지 혀 밑으로 미적지근하고 비릿한 피가 침과 섞여 고이고 있었다.
왕일은 피를 뱉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자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피를 뱉어냈다간 뱉어낸 피로 세수를 해야 하리라.
뱉을 수 없다면 삼킬 수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단단하게 자루를 졸라맨 끈이 목을 조이고 있었기에 삼키는 것 또한 여의치 않았다.
결국은 입에 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왕일은 숨을 몰아쉬었다. 숨은 자루를 통과하지 못하고 왕일의 얼굴로 돌아왔다.
더운 숨이 훅 끼쳐오자 왕일은 혼절할 것만 같았다. 더웠다. 숨 막힐 만큼.
오 년이라는 시간 동안 암시장에 봉사해 온 왕일에 대한 예우 차원인지, 그를 끌고 가는 이들은 제법 부드럽고 촉감 좋은 비단 자루를 준비해 왔다.
아마 예우를 위함이라기보다는 혹여나 값싼 삼베 자루를 쓰면 그 성긴 틈으로 바깥 풍경을 볼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일 테지만.
왕일은 전자의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왜 이런 일이, 하필 나에게.
이유는 자명했다. 비단 자루에 숨이 막히는 와중에도 왕일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여아홍을 시켰기 때문이었다.
생색이나 실컷 내면서 싸구려 탁주나 한 동이 샀으면 좋았을 것을. 모처럼 들어온 거금으로 선심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돈의 출처를 의심받은 것이다. 장석에게. 오 년간 그를 감시해 온 감시인에게.
세상에. 그놈이 설마 암시장의 감시인이었을 줄이야.
왜 진작 의심해 보지 않았을까.
그 순간 왕일은 휘청거렸다. 하지만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의 양팔을 뒤로 꺾어 붙잡은 억센 팔이 그를 잡아 세웠다.
왕일은 어깨가 탈골될 것만 같은 둔탁한 통증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비명은 자루 안에서만 맴돌았다.
벌어진 입술로 끈적한 핏물을 게워내며 몸서리치던 왕일은 이내 자신이 휘청거린 이유를 깨달았다.
자신을 끌고 가던 자들이 걸음을 멈춘 것이다.
자루를 쓰고 있었지만 왕일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렸다.
‘어디일까. 암시장의 비밀 지부? 아니면 동정호 인근의 야산? 아니면…….’
부둣가.
왕일은 자신이 끌려온 곳이 부둣가이리라 짐작했다.
암시장의 관계자가 처형되는 방식은 말단이라고 칭하며 소속감을 드러내기도 민망한 자신조차 알고 있을 만큼 유명했다.
굳이 땅을 파는 수고를 들일 필요도 없는 간결한 방법이었다.
동정호의 물고기들에게 색다른 별미를 제공하기만 하면 된다.
동정호에 오랜 시간 뿌리내려 온 암시장은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지역사회에 공헌해 온 것이다.
어부들은 색다른 별미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물고기로 만선의 기쁨을 누릴 수 있으니 좋고, 유람객은 살집 좋은 푸짐한 물고기 요리를 즐길 수 있으니 좋고, 암시장은 수고를 들이지 않고 깔끔하게 배신자를 처분할 수 있으니 좋고.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실로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자신이 물에 빠지는 모습을 그린 순간 왕일은 어깨의 뻐근한 통증보다도 뼈아픈 것이 뇌리에 치밀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백일몽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무기력하게 멀어져 있던 현실감이 갑작스럽게 그를 엄습했다.
하지만 그를 끌고 온 이들은 왕일이 익사의 공포 앞에서 허우적댈 수 있도록 기다려주지 않았다.
우악스러운 손이 거칠게 자루를 벗겨내자 여름밤의 바람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물기 어린 습습한 바람은 아니었다.
‘부둣가는 아니야. 최소한 부둣가는 아니야.’
일말의 안도감은 자루의 밀폐감에 질려 흐릿하게 풀린 그의 초점을 또렷하게 잡아주었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든 왕일은 아직도 시야가 어둡다는 것을 깨닫고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내가 아직도 자루를 뒤집어쓰고 있는 걸까?
그때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단 자루를 씌워왔군. 숨쉬기 퍽 곤란했겠어.”
차라리 안대를 씌울 것이지.
느릿하게 다가온 목소리는 왕일의 뒷덜미 근처를 맴돌고는 그의 귀 옆으로 빠져나갔다.
왕일은 자신의 옆으로 지나가는 중년인의 얼굴을 보았다.
비록 직접 본 것은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렇기에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가 바로 암시장주 장철명이었다.
짙은 눈썹 아래로는 살짝 처진 갸름한 눈이 있다. 코는 콧방울이 도톰하고 콧대는 오뚝하다. 그리고 작은 입술 아래로는 점이 하나 있었다.
먹물 냄새 물씬 나는, 금방이라도 고즈넉한 죽림을 거닐며 시를 읊을 것만 같은 문인의 얼굴.
뭇사람들이 상상하곤 하는 잔혹하고 비열하며 음흉한, 제국의 검은돈을 쥐락펴락하는 암시장의 주인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량한 얼굴이었다.
“우선은 사과해야겠군. 조금 더 온건한 방법으로 초청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이해해 주길 바라네.”
자, 자리에 앉게나.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암시장주는 어디선가 초 하나를 가져와 왕일의 앞을 비추었다.
그의 앞에는 등받이도 팔걸이도 없는 작은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왕일이 엉거주춤하게 자리에 앉자 암시장주는 후 불어 촛불을 꺼버렸다.
왕일은 어둠 속에 홀로 남았다.
어둠 속에서 가느다란 웃음이 그려진다. 배신자를 굽어보는, 그리고 그 배신자에게 어떠한 유감도 느끼지 않는 이의 기이한 웃음이었다.
“자, 이렇게 억지로 끌려왔으니 자네도 하고 싶은 말이 많겠지.”
우선, 자네 사정부터 들어볼까.
* * *
이튿날, 새벽닭이 울기도 전에 일어난 소년은 쓰린 속을 부여잡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지난밤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육신은 마치 누군가가 사지를 잡고 비틀어 짠 것처럼 욱신거렸다.
마랄용하(麻辣龍蝦)와 향랄저제(香辣猪蹄)를 과식한 탓일까. 아니면 우물물에 차게 식혀 유난히 달게 넘어갔던 술이 원인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힘겹게 이불을 걷고 일어선 소년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참, 대단하다는 용의 피도 폭음폭식 앞에선 별수 없구만.”
하지만 60년 요리 외길인생을 살아온 소년은 이런 사태를 미리 짐작했음은 물론 그에 따른 대처방안 또한 모색해 놓은 지 오래였다.
휘적휘적 주방으로 걸어 들어간 소년은 주방 한편에 놓아둔 단지를 들여다보았다.
단지에는 전날 밤 미리 해감시켜 둔 재첩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역시 해장에는 재첩만 한 게 없지.”
그냥 재첩이 아니었다. 물 좋기로 유명한 동정호의 수심 깊은 곳에서 채취한 씨알 굵은, 제철 맞은 재첩이었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큰 크기의 작고 반질반질한 황갈색 재첩은 금방이라도 신선한 육수를 뿜어낼 듯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오뉴월 재첩을 안 먹고 지나가면 간 독이 올라 죽는다지?”
재첩을 귀하게 여겨온 것은 한국인뿐만이 아니었다. 술 좋아하기론 둘째가라면 서러운 중국인들 역시 오래전부터 재첩을 최고의 해장 식재료이자 간장약으로 대접해 왔는데, 뽀얗게 국물을 우려내거나 된장을 풀어 국으로 즐기는 한국과는 달리 중국은 멥쌀을 넣고 푹 물러지게 끓인 재첩죽을 즐겨왔다.
재첩죽(河蚬粥) 만들기.
먼저 하루 전날 해감한 재첩을 바락바락 문질러 씻은 후 찬물에 넣어 입이 벌어질 때까지 삶는다.
국물이 뽀얗게 우러나고 재첩이 다 익으면 재첩만을 건져낸 다음 굵은 체에 붓고 흔들어 살을 발라낸다.
재첩을 건친 육수는 고운 면보에 걸러 따로 준비해 둔다.
재첩 살과 육수가 준비되었으면 본격적으로 죽을 만들 차례였다.
소년은 철과에 참기름을 조금 두르고는 쌀 알갱이가 투명해지도록 볶았다.
탁한 흰색이었던 쌀알이 점차 투명해지고 참기름의 고소한 향기가 솔솔 피어오를 때쯤, 미리 걸러둔 재첩 육수를 붓고는 쌀알이 푹 퍼지고 끈기가 돌 때까지 센 불에서 끓여준다.
“마무리는 간단하지.”
쌀알이 푹 퍼지면 발라둔 재첩살과 굴게 썬 부추 한 줌을 넣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고 한소끔 더 끓여내면 재첩죽이 완성되었다.
완성된 죽을 후후 불어 한 입 맛본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탄사를 내질렀다.
“크으, 시원하다. 역시 재첩이야.”
“허 참, 그리도 좋더냐.”
“아, 태감님.”
곱디고운 눈썹을 한껏 찡그리고 비칠비칠 주방으로 다가온 태감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아궁이에 걸터앉았다.
당장 지팡이라도 하나 쥐여 줘야 할 것 같은 태감의 모습에 혀를 찬 소년은 솥에서 죽을 만들고 남은 재첩 육수 한 국자를 떠 태감에게 내밀었다.
국자를 받아든 태감은 뿌연 육수를 보고는 미심쩍다는 듯 소년에게 물었다.
“꿀물은 아닌 것 같은데.”
“꿀물보다 좋은 겁니다. 약이라 생각하고 드십쇼.”
간을 보호하고 담즙 분비를 촉진시키며 악성 빈혈에도 효과가 좋고 뼈도 튼튼하게 하는 재첩 육숩니다.
소년의 재촉에 어쩔 수 없이 국물을 들이켠 태감은 예상 밖의 감칠맛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재첩의 영양가가 고스란히 녹아든 국물은 비린내 하나 없이 깔끔하면서도 입에 착 감겨들었다.
심심하게 소금으로만 간한 뽀얀 국물의 은근한 감칠맛.
톡 쏘고 맵고 독살스러운 것들로 지친 위장에 부드럽게 안기는 그 순하디순한 맛.
피로에 젖은 혀를 일깨우는 다정한 활력.
태감의 창백한 뺨 위로 발그레한 홍조가 뜨는 것을 본 소년은 죽 한 사발을 퍼 올려 태감에게 내밀었다.
“한술 뜨시지요. 한 그릇 비우고 나면 한결 개운하실 겁니다.”
재첩 살이 알알이 뜬 죽 한 사발을 받아든 태감은 손끝을 파고드는 열기에 몸을 떨었다.
주독이 쌓여 곱은 손가락 관절 마디마디가 녹아내린다.
죽에서 피어오른 뜨거운 김이 열독에 마르고 갈라진 얼굴을 쓰다듬는다.
먹지 않아도, 그저 받아든 것만으로도 피로가 가시는 것만 같은.
태감은 그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품고 싶다는 듯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쫄깃쫄깃한 재첩살과 부드럽게 익은 부추. 후루룩 마실 수 있을 만큼 묽게 쑨 죽은 그 온화함으로 황폐해진 목구멍을 쓸어내렸다.
한결 통증이 가신 목을 가볍게 주물러 본 태감은 짧게 헛기침하고는 통증이 상당히 가라앉았음을 확인했다.
태감은 경의를 가득 담은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재첩이 목에도 효험이 있을 줄은 몰랐구나.”
“아마 재첩의 효험이라기보다는 죽의 효험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술병을 낫게 한 것은 재첩의 공, 아픈 목을 낫게 한 것은 죽의 공이란 말이지. 그럼 부추의 공은 무엇이냐?”
“부추는 재첩에 부족한 영양소를 채워 주지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대할 수가 없구나. 각자 나름의 공이 있으니.”
피식 웃으며 태감을 본 소년은 자신의 죽사발을 들이켜고는 솥에 남은 죽이 얼마나 되는지 들여다보았다.
솥에는 태감과 소년이 실컷 먹고도 세 사람쯤은 더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죽이 남아 있었다.
“단 호위님이야 아침 수련을 하고 계실 테고, 아이들은 슬슬 잠 좀 깼을지 모르겠군요.”
“좀 더 자게 두어도 괜찮지 않으냐. 혹시 시킬 일이라도 따로 있느냐?”
“예. 아침 먹고 잠깐 같이 산책이라도 다녀올 생각입니다.”
“왕일 그 친구를 보러 가려는 것이냐?”
소년은 뚱한 표정으로 태감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할 말을 가로채였다는 것에 대한 짜증을 표현하는 것 같기도 했고 지나치게 똑똑한 상관에게 비밀을 만드는 것을 포기한 체념 같기도 했다.
소년은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친구 얼굴 좀 보러 갈 생각입니다.”
“흐음, 두고 볼 만큼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남자답게 생겨서 나름 괜찮던데요.”
낄낄 웃으며 너스레를 떤 소년은 태감의 빈 사발에 죽을 떠 주고는 말을 이었다.
“한 번 더 고민해 보기로 했습니다.”
“무엇을 말이냐.”
“그 친구를 중용할지, 아니면 암시장주를 꿰어낼 미끼로 쓸지 말입니다.”
제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더군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그가 무엇을 놓쳤는지 궁금해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짐작하고 있음에도 그를 위해 일부러 내색하지 않는 태감을 향해 소년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네가 무엇을 놓치고 있었느냐?”
“그 친구의 사람 됨됨이를 보지 않았더군요.”
“그자가 사실은 고결한 품성을 가진 인물이라 보느냐?”
“모르지요. 그러니 그걸 알아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됨됨이가 바른 인간은 다른 재주가 없어도 그것만으로도 귀한 법입니다. 만약 제 눈이 나잇값을 못 하고 그런 인재를 놓쳐 버린 거라면, 지금이라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년의 말에 태감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자의 됨됨이가 훌륭하여 중용할 만한 인재라면 어찌할 생각이냐.”
이미 뱃사공 일이 몸에 익어 이제 와 다른 일을 익히기는 어려울 텐데. 경사로 데려가 뱃사공 일을 시킬 셈이냐?
태감의 질문에 소년은 빙그레 웃음 지었다.
“배움에 나이가 상관있습니까? 다 늙어빠진 늙은이도 이제 와 정치판을 새로 배우는데, 그 친구 같은 한 창 때 젊은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