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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53화 (254/314)

환관의 요리사 253화 외전 47화

황혼이 서녘에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평선 아래로 스러지며 황혼은 번뜩이는 불티를 새카만 밤하늘에 흩날렸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별. 별 무리. 그 아래에서 소년은 조촐한 저녁을 준비했다.

마른 고추와 산초. 월계수 잎과 계피. 정향과 통후추. 육두구. 생강과 마늘. 그리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족발. 도마 위에 나열된 재료들을 훑어본 태감은 의아한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오늘 저녁은 민물 가재로 만드는 마랄용하(麻辣龍蝦) 아니었느냐?”

“가재는 술안주지요. 손가락 부르트도록 껍질 까봐야 나오는 건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걸로 언제 배를 채우겠습니까. 마침 마랄용하를 만들면서 양념이 남으니, 맵게 족발이나 볶아서 향랄저제(香辣猪蹄)를 만들 생각입니다.”

역시 식탁에는 고기가 있어야지요.

태감의 전폭적인 동의를 얻으며 소년은 품에서 칼을 꺼내 들었다.

기름 먹인 소가죽으로 만든 칼집에서 번뜩이는 검보랏빛 칼날이 빠져나온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오철 칼.”

“근래 들어선 운철 칼만 써서 그리 쓸 일이 없었지요.”

“오철 칼은 성능이 떨어진단 말이냐? 섭섭하구나.”

“성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운철 칼의 칼날이 더 얇아 가벼우니 그동안은 운철 칼을 쓴 겁니다. 오늘은 족발을 뼈 채로 토막 쳐야 하니 날이 두꺼운 오철 칼을 꺼낸 거고요.”

그런데 오철을 내어주신 건 황제 폐하신데, 왜 생색은 태감님이 내십니까.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은 소년은 이내 솥에 물이 끓어오르기 시작하자 서둘러 족발을 토막 치기 시작했다.

탕! 탕!

뼈가 끊어지는 섬찟한 소리가 울릴 때마다 두툼한 족발은 먹기 좋은 크기로 조각나 솥으로 던져졌다.

족발을 삶을 때는 편으로 썬 생강 한쪽과 쪽파, 그리고 술을 넣어 누린내를 잡아준다.

고기가 반쯤 익었을 때 소년은 고기 삶는 솥 옆에 무겁고 바닥이 두꺼운 철과를 걸고는 넉넉하게 기름을 둘러 설탕을 볶기 시작했다.

“설탕을 누렇게 태워 고기를 볶으면 고기에 먹음직스러운 색이 날 뿐만 아니라 고소한 향까지 더해지지요.”

열기에 설탕이 녹아 노르스름한 색이 돌 때쯤 소년은 건져낸 족발을 철과에 넣고는 마른 고추 한 줌과 계피 등의 향신료를 더해 재빠르게 볶아냈다.

소년의 손이 철과를 흔들 때마다 튀겨진 족발의 고소한 향과 향신료의 알싸한 향기가 초여름의 밤을 뜨겁게 달구었다.

기름지고 강렬한,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향기.

가만히 앉아 있질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태감은 소년의 어깨너머를 힐끔거리며 자꾸만 재촉했다.

“아직 멀었느냐?”

“이제 반 했습니다. 볶은 다음에 물을 부어 조리고, 그다음에 다시 튀겨야 하거든요.”

“그냥 이대로 먹어도 충분히 맛있을 것 같은데.”

“이가 튼튼하시면 한번 도전해 보시지요.”

안달하는 태감을 놀리듯 소년은 느릿하고 신중한 동작으로 간장을 철과에 흘려 넣었다.

노릇하게 튀겨진 족발을 먹음직스러운 갈색으로 물들이는 간장의 은근한 짭조름함.

족발에서 배어 나온 달큼한 기름과 섞인 간장의 향기는 견고한 이성의 벽을 허물어뜨릴 만큼 고혹적이었다.

쫄깃한 껍질이 충분히 수축하여 야들야들한 살코기가 드러나고, 기름에 녹아 나온 향신료의 톡 쏘는 매운 향기가 족발 전체에 스며들 때쯤, 소년은 다 볶아진 족발에 자작하게 물을 붓고는 그대로 뚜껑을 덮어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태감의 입에선 안타까운 탄성이 흘러나왔다.

“아!”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잠깐만. 금방 다 익습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느냐?”

“음, 작게 토막 쳤으니 한 시간 정도 삶으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 한 시간이 잠깐이 되었지?”

속았다는 듯이 자신을 바라보는 태감에게 소년은 대단히 미안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보여주었다.

진정성 있는 소년의 사과에 감정이 상한 태감은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팩 돌렸다.

소년은 낄낄거리며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어쩌겠습니까. 이미 물을 부어버렸는데. 이제 한 시간만 기다리시면 맛좋은 족발 볶음이 완성될 겁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고추와 산초 넉넉하게 넣은 매운 양념에 마른듯하게 볶아진 족발을. 기름에 지져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보들보들하겠지요. 쫀득쫀득한 껍질과 말캉한 비계. 오돌오돌 꼬들꼬들한 물렁뼈. 그리고 간이 잘 배인 촉촉한 살코기. 상상만 해도 입에 군침이 돌지 않습니까?”

“군침이 돌다 못해 속이 쓰리구나. 굳이 치밀한 묘사로 내 허기를 부채질하는 이유는 무엇이냐.”

“옛말에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더 만족스러운 식사를 위해 식전에 시장기를 돋궈드리려는 배려였습니다.”

“조금만 더 기력이 있었으면 너에게 지나친 배려가 야기하는 폐해에 대해 말해줬을 텐데.”

내 기력이 없어 참는다.

허기에 지쳐 늘어진 태감은 꼭 소금에 절여 말린 생선처럼 생기가 없었다.

비틀어 짜도 물기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처럼 시들시들한 태감을 보며 피식 실소를 흘린 소년은 점잖게 군입거리를 권하였다.

“정 입이 궁금하시면 씹을 거리를 좀 내드릴까요?”

“호오, 뭐가 있느냐?”

“씹을 거리면 역시 이부상서가 제일이지요. 아니면 비교적 최근에 입고된 암시장주도 있습니다.”

“둘 다 내키지 않는구나. 이부상서는 경사에서도 자주 씹어 질리고, 암시장주는 아직 씹고 뜯을 만큼 친근하지가 않아서. 다른 씹을 거리는 없느냐?”

“그럼 딱히 권해 드릴 만한 씹을 거리는 없군요. 육포라도 좀 가져올까요?”

너무 많이 드시지는 마십쇼.

소년의 권고를 따라 태감은 육포를 가늘게 찢어 입으로 가져갔다. 짭짤한 소금기는 굶주린 배에 퍽 위안이 되었다.

도저히 고위 공직자의 품위가 지켜지고 있다곤 말할 수 없는 방만한 자세로 앉아 육포를 질겅이던 태감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뭉근하게 끓어오르는 솥 안을 들여다보느라 태감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 아, 말씀하십시오. 듣고 있습니다.”

“네 계획이 시작되려면, 우선 왕일 그 친구가 암시장주에게 네 이름을 고해바쳐야 하지 않느냐?.”

“그렇지요.”

“만약에, 왕일 그자가 신의를 지킨다면 어찌할 생각이냐?”

그자가 끝까지 네 이름을 발설하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암시장주가 네 정체를 모른 채 넘어간다면. 그때는 어찌할 생각이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든 소년은 태감의 말을 곱씹어 보고는 대답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 미심쩍은 투였다.

“만약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거라면. 글쎄요.”

그런 신의가 있는 인재를 그냥 둘 수 없지요. 중용하여 큰일에 쓰는 수밖에.

* * *

왕일은 인상을 찌푸린 채 사발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습 도제가 용돈 벌이를 위해 대충 빚어낸 것처럼 투박한 사발엔 희뿌연 탁주가 가득 들어 있었다.

술을 앞에 둔 채 그것을 보고만 있는 왕일을 이상하다는 듯 보며 장석은 술을 달게 들이켰다.

“크으, 좋다. 오늘따라 입에 짝짝 붙네.”

역시 술은 남의 돈으로 마셔야 제맛이지.

너스레를 떨며 술독으로 사발을 가져가던 장석은 아직도 술을 앞에 두고 미적거리는 왕일을 향해 퉁명스럽게 물었다.

“술 앞에 두고 뭐해. 고사 지내냐?”

“응? 아아. 마셔야지.”

건성으로 대꾸한 왕일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사발을 들어 올렸다. 마치 누가 강권한 술을 억지로 마시듯이.

왕일은 혀끝을 살짝 데고는 도저히 못 먹겠다는 듯 도리질 쳤다.

“원래 여기 술이 이런 맛이었나?”

“뭔 소리야. 어제도 여기서 마셨잖아. 어디, 줘봐.”

잔을 받아든 장석은 왕일에게 술은 이렇게 마시는 거라고 모범이라도 보이려는 것처럼 장쾌한 동작으로 사발을 비웠다.

잔을 내리고 거나하게 트림을 한 후, 수염에 묻은 술을 털어낸 장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어제랑 똑같구만.”

“그래? 원래 여기 술이 이렇게 시큼털털하고 끈적했나?”

“늘 이랬지. 난 또 술이 쉬기라도 한 줄 알았네.”

장석의 보증에도 왕일은 쉽사리 사발을 들지 못했다.

아예 술독을 앞에 두고 팔짱을 끼는 왕일을 보며 장석은 술을 뜨려던 사발을 도로 내려놓았다.

“거, 술맛 떨어지게. 이거 마음에 안 들면 딴 거 시켜.”

“그래, 그래야겠다. 도저히 안 들어가네.”

“아니, 평소에는 남의 술도 뺏어 처먹던 놈이 갑자기 왜 이래?”

장석의 타박에 히죽 웃어 보인 왕일은 뚱한 표정으로 하품을 쩍 하는 점소이를 불러 새 술을 시켰다.

도대체 뭔 술을 시키는지 두고 보자는 듯 삐딱하게 왕일을 보던 장석은 왕일이 거침없이 주문하는 술의 이름을 듣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아홍? 너 미쳤냐?”

“왜, 너한텐 너무 독한가? 하긴, 여아홍이 좀 독한 술이기는 하지.”

“아니, 너 그게 얼마짜린지는 알고 시킨 거냐? 나 돈 없다.”

“벼룩이 간을 내먹지. 내 지갑이 아무리 궁해도 너한테 돈 빌려달란 소린 안 한다.”

지갑을 탈탈 털어도 한 병은커녕 한 잔 마시기도 힘든 값비싼 여아홍의 이름 앞에 지레 겁먹은 장석은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불안에 떠는 것은 점소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 주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어 나름대로 안면이 있는 사이기는 했지만, 그렇기에 점소이는 둘의 지갑 사정 또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싸구려 탁주나 잔술로 시켜 먹던 놈들이 과연 여아홍값을 낼 수 있을까? 만약 못 내겠다고 드러누우면? 술값 떼먹고 그대로 도망가면?

창백하게 질린 둘의 얼굴을 번갈아 본 왕일은 못마땅한 얼굴로 품을 뒤적여 주머니를 꺼냈다.

“거참, 술값 있으니까 얼굴 좀 펴지.”

“아니, 여아홍이 한두 푼 하는 술도 아니고.”

“이거면 대충 값이 될 거 아냐. 오히려 거스름돈이 남을걸?”

남으면 너 용돈이나 해라.

호호탕탕하게 웃으며 주머니를 연 왕일은 그 안에서 큼직한 금편 한 조각을 꺼내 점소이에게 던졌다.

금편을 받아든 점소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그것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왕일을 돌아보았다.

“얼씨구, 하여간 꼭 씹어봐야 금인 줄 알아요.”

“야, 너 어떻게 금을.”

“뭐 어떻게 벌었긴, 일해서 벌었지.”

장석의 사발에 콸콸 술을 부은 왕일은 병에 남은 술의 양을 가늠해 보고는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비싼 값만큼 독하기로도 유명한 여아홍을 물처럼 들이킨 왕일의 얼굴이 대번에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 이건 좀 마실 만하네.”

“왜, 비싼 술은 좀 받는 것 같냐?”

“그래. 탁주는 도저히 못 먹을 것 같더니, 이건 좀 먹을 만하네.”

“그 노인네한테 비싼 술이라도 대접받았나 보지? 얼마나 비싼 술이었으면. 아주 입맛 다 버려놨구만.”

“그러니까. 차라리 몰랐으면…….”

그런데, 그걸 네가 왜 알고 있냐?

왕일은 차가운 한기를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술친구, 동정호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 장석은 평소와 다름없는 껄렁한 차림새 그대로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왕일은 문득 그와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는지를 떠올렸다.

분명히, 오 년 전이었던가. 그리고.

“장석, 너.”

“왕일, 우리가 만난 지 한 오 년쯤 됐지?”

“그렇지.”

“네가 암시장에서 뱃사공 일을 한 지도, 한 오 년쯤 됐고.”

왕일은 가만히 병을 기울였다.

조금 전까지도 목구멍을 태울 뜻 화끈했던 여아홍에서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떨리는 손으로 병을 내린 왕일은 입술을 깨물고는 장석을 바라보았다.

장석은 히죽 웃고는 왕일이 따른 여아홍을 한 모금 마셨다.

“술맛 좋네. 역시 여아홍인가.”

“좋다니 다행이네. 내가 사는 거니까 마음껏 마셔.”

“인심 좋네. 평소에는 탁주 한 사발 안 사던 놈이.”

도대체 어디서 무슨 돈이 나서 여아홍을 시키나. 암시장 벌이가 아무리 짭짤해도 여아홍을 선뜻 시킬 만큼은 아니잖아?

장석은 말을 끝내고는 왕일을 향해 턱짓했다. 변명하라는 듯이.

왕일은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핥고는 입을 열었다.

“너도 알겠지만, 요즘 가욋돈 벌이를 했더니 주머니에 여윳돈이 좀 생기더라고. 그래서 평소 신세 지고 있는 너한테 선심 좀 쓸까 해서 시킨 것뿐이야.”

“아무리 선심이라고 해도 여아홍은 과하지.”

좀 더 그럴듯한 건 없어?

장석의 요구에 왕일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왕일을 빤히 보던 장석은 잔을 비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네 가욋돈 벌이에 대해 좀 들어야겠는데.”

“별일 아니야. 그냥, 놀잇배 뱃사공 노릇 좀 한 거지. 밤일이랑 똑같잖아.”

“아아, 유람객 비위 맞추면서? 네 성격에?”

“내 성격이 어때서? 네 비위도 맞추면서 살았는데.”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가 내 비위를 맞춘 게 아니라 내가 네 비위를 맞췄지. 그리고 술도 내가 더 많이 샀어.

잔을 들이켜려던 장석은 잔이 빈 것을 깨닫고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술도 다 떨어졌으니, 이만 일어야지.”

“장석. 음, 염치없는 부탁이긴 한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지.”

“그간의 오랜 친분을 생각해서 나도 그냥 눈감아주고 싶은데. 이번엔 안 되겠다.”

암시장의 주인께서 널 찾으신다, 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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