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52화 외전 46화
사람의 눈으로는 감히 올려다볼 수 없었던 정오의 태양이 서서히 권좌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미끄러지는 태양은 하늘을 개양귀비꽃과 같은 색으로 물들였다.
선명한 붉은색과 짙은 다홍색. 지평선 아래로 닿을수록 흐려지는 노란색. 그리고 벌써 성큼 찾아온 밤하늘의 자주색.
동정호에 내려앉는 황혼을 등진 채 배들은 부둣가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왕일의 배도 있었다.
“오늘 즐거웠네, 왕일.”
“모실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자넨 좋은 뱃사공이야.”
다시 노인의 거죽을 붙인 소년은 담담한 어조로 왕일의 노고에 감사를 표했다.
황혼을 머금은 동정호의 수면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던 왕일은 조금 늦게 고개를 숙였다.
소년은 웃으며 그의 어깨를 한번 두드리고는 등을 돌렸다. 다음에 보자는 의례적인 인사말과 함께.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왕일은 멀어지는 이들의 등 뒤로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배를 뱃말에 묶어두기 위해 밧줄을 들었다.
동정호의 부둣가로는 따스한 광선이 비스듬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빛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들의 등허리를 내리쬐고 있었다.
부산한 군중들. 그 사이를 거닐던 소년은 하루 장사를 마감하는 가판대에서 반가운 얼굴을 발견하고는 입을 열었다.
가판대의 광주리에는 팔다 남은 가재가 집게를 달각거리고 있었다.
“벌써 가재가 나왔군요. 제철이 오려면 아직 한참 남았는데. 첫물인가 봅니다.”
“좋아하느냐?”
“좋아하는 편입니다. 무더운 여름밤에 찬술 한잔과 즐기기에 이만한 게 또 없지요. 산초에 고추 넉넉하게 넣고 볶아 살은 안주로 먹고, 남은 양념은 국수나 밥을 비벼 먹으면 더위에 잃은 입맛 살리는데 그만이지요. 태감님은 좋아하십니까?”
“글쎄. 발라먹기가 귀찮아서.”
“확실히 품이 많이 드는 음식이기는 하지요. 낑낑거리며 씨름해도 남는 건 손가락만 한 살점 한 입뿐이니. 하지만 그게 또 좋지 않습니까.”
원래 술안주는 먹기 좀 귀찮고 자질구레한 게 제격입니다. 가재나 새우, 조개도 좋지요. 은행이나 메추리 알 같은 것도 좋고. 전에 손아귀 힘 좋을 때는 안주 삼아 자주 호두를 깨 먹었지요.
시시콜콜한 옛이야기를 하며 가판대를 정리하는 상인에게 민물 가재 한 광주리를 산 소년은 잔돈을 꺼낸 전낭을 통째로 아이들에게 안겨주고는 심부름을 부탁했다.
“저녁거리 좀 부탁한다. 사고 남으면 간식도 사 먹고, 아. 저녁 먹을 배는 남겨둬야 한다.”
“어떤 걸 사 올까요?”
“장도 끝물이라 좋은 게 있을지 모르겠구나. 너희들의 안목을 기대하마.”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부탁한 후, 소년은 말을 꺼내기 어렵다는 듯 주저하며 단혜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이미 부탁을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손을 내밀었다.
“뭐가 필요하신가?”
“술을 좀 사다 주십시오. 궤짝으로 하나.”
“내 안목에 맡기겠나?”
“예. 씁쓸하고 개운한 거로 부탁합니다.”
왕을 지켜야 할 호위무사는 왕의 명에 따라 물러났다.
자리에 남은 것은 둘 뿐이었다. 노인으로 분장한 왕과 면사로 얼굴을 가린 동창 제독.
호위무사들을 모두 떠나보낸 왕은 이제 되었냐는 표정으로 동창 제독을 바라보았다.
“이제 하실 말씀 있으면 하십시오.”
“하지만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구나. 거리를 오가는 모든 이가 절대적인 맹세로 침묵을 서원했을 것 같지는 않아.”
“확실히, 길바닥은 좀 개방적이지요. 그럼 기밀성이 충분히 유지되는 곳으로 가시지요.”
“그런데, 오늘 저녁은 가재 요리냐?”
“태감님과의 담소가 언제 끝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매콤한 가재 요리를 중심으로 온갖 산해진미가 차려진 푸짐한 저녁상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식은밥 대충 볶은 볶음밥 한 그릇일 수도 있지요.”
소년의 은근한 협박에 쓴웃음을 지은 태감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년은 노인으로 분장한 모습에 어울리는 걸음걸이로 그의 뒤를 따랐다.
둘은 말없이 소문난 관광지에서 한가로운 어촌의 모습으로 변한 동정호의 거리를 걸었다.
그물 뭉치를 어깨에 짊어진 어부. 하루 치 삯을 받은 일꾼들. 향기로운 냄새로 허기진 이들의 발길을 붙잡는 노점상.
잔술 한잔에 취해 벌써 두 뺨을 벌겋게 물들인 주정뱅이들. 거리 한구석에서 골패 짝을 만지작거리는 노름꾼. 그리고 그 풍경에 융화되지 못한 채 겉도는 유람객.
그 속에 검은돈이 모이는 음습한 암시장을 품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소년은 곁눈질로 그 광경을 눈에 담았다. 한걸음 뗄 때마다 멀어지는 동정호의 황혼을.
충분히 감상할 시간은 없었다. 황실 소유의 저택은 동정호 인근의 작은 언덕에 있었기 때문이다.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오 분 남짓, 한숨을 내쉬며 느리게 걸어도 십 분이 채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그렇기에 소년은 일부러 지친 척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지체했다.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르기에. 언제 다시 동정호의 땅을 밟아볼지 모르기에.
소년은 황혼을 흠뻑 머금은 동정호의 수면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담아두고자 했다.
다시 이 땅을 밟는 날은, 어쩌면 십 년 후일지도 모르니.
* * *
담소를 나누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태감이 고른 회담장을 둘러보며 소년은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담소를 나누고자 한다면 더 좋은 장소도 많았을 것이다.
밤이 성큼 다가와 어둡기는 하지만 초여름의 정원도 담소를 나누기에 나쁜 환경은 아니다.
풀벌레 우는 소리와 연못의 잉어가 첨벙거리는 소리를 배경 삼아 온화한 밤바람을 맞으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운치 있는 일 아닌가.
아니면 호사스럽게 꾸며진 저택의 응접실을 이용하는 것 또한 좋은 선택이었다.
자단목 가구에 금실로 수놓은 푹신한 방석. 찻잔을 두어도 좋고 척하고 발을 올려도 좋은 멋들어진 탁자. 의자의 팔걸이는 턱을 괴기에 딱 좋은 높이였다.
하지만 태감은 저택에서 가장 방음성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평소에는 창고로 이용되는 빈방을 회담장으로 골랐다.
부산스럽게 먼지를 청소하고 탁자와 의자를 가져다 놓은 하인들에게 심심한 감사를 보낸 후, 소년은 의자에 올라앉아 태감을 바라보았다.
태감이 그곳에 있어서일까. 좁고 그늘진 창고는 어째선지 연좌궁에 있는 태감의 집무실을 연상시켰다.
태감이 의도적으로 그런 분위기를 연출했음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소년은 그의 의지를 존중하여 왕이 아닌 충성스러운 심복의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씀하시지요. 뭐든지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자신의 발언권이 존중받고 있음을 확인한 태감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이 걸려 있으니 길게 묻지는 않겠다. 이미 벌어진 일에 왈가왈부하기도 우스운 일이니.”
태감은 잠시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말을 골랐다.
그가 속에 품은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가장 건조한 말을 고르고 있는 것이리라.
소년은 조용히 그가 말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난 그 뱃사공을 다시 만난다고 하였을 때, 네가 그의 입을 막기 위함인 줄 알았다. 사람의 입은 가볍지. 돈은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입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뿐이지요.”
“하지만 넌 그 방법을 쓰지 않았지.”
“예. 그 대신 왕명을 걸었지요.”
왕명으로 그에게 협조를 요청하였고, 왕명으로 그의 신변을 보호할 것을 약속하였지요.
소년은 담백하게 긍정했다.
일체의 변명도 곁들여지지 않은 그 긍정에 태감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였다.
“그자가 너의 권위를 존중할 거라 믿느냐?. 왕의 권위를 존중하여, 굳은 믿음으로 비밀을 지킬 것이라 믿느냐?. 목전의 칼과 황금 앞에서 그자가 침묵하리라 믿느냐?”
“믿지 않습니다.”
“믿지 않음에도 왕명을 걸었단 말이냐.”
그렇다면 그것은. 그래.
태감의 얼굴에 우울한 확신이 번졌다.
“그것은, 왕명을 미끼로 암시장주를 불러내기 위함이겠구나. 왕일, 그자가 네 이름을 암시장주에게 고해바치도록. 일부러 미끼를 뿌렸구나.”
“그렇습니다.”
“그자를 불러 어찌할 생각이냐.”
“그자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겁니다.”
그리하여 그자의 손으로 암시장을 무너뜨릴 겁니다.
그리한다면 저희는 암시장과 결탁한 관리를 잡는 일에만 인력과 자금을 할애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잉여 물자는 다른 일에 투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부상서에게 쓸 수도 있고, 아니면…….
말끝을 흐린 소년은 태감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계획이 어떠냐고 묻듯이.
태감은 대답했다.
“어째서냐.”
지나치게 엉성하게 짠 계획을 비판하는 말이 아니었다. 태감은 어째서 소년이 그런 계획을 준비하였는지를 묻고 있었다.
“내가 수립한 계획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느냐?. 동창의 무력부대가 동정호로 남하하는데 필요한 삼 개월을 기다릴 수 없었느냐? 그렇기에 그런 계획을 준비한 것이냐.”
책망의 말이었다면 조금 더 날카롭고, 조금 더 집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감의 말은 책망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의문일 뿐이었다.
그가 일부러 무미건조한 어조로 말한 것에 감사하며 소년은 입을 열었다.
“이부상서가, 이제 막 불혹이 넘었다 했지요.”
예상치 못한 첫마디에 태감은 눈을 크게 뜨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태감이 얼마 전 나누었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 것은 소년의 눈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그려진 후의 일이었다.
태감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년은 이야기를 이었다.
“기억나십니까? 이부상서가 힘이 빠지려면.”
“족히 십 년은 필요하다 했지. 십 년이면 그는 지천명이고.”
“태감께서는 이립이 되시겠군요.”
이립. 달리 말하면 서른이었다.
태감은 서른이 되었을 때의 자신을 잠시 그려보았다. 외견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으리라.
불로하는 용의 피를 이었으니, 수염을 기르거나 머리를 밀지 않는 이상 극적인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우리라.
그렇다면 내면은 어떨까. 십 년이라는 시간은 내면의 성숙함을 기대할 수 있는 시간일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의 끝자락에서 태감은 십 년 후의 소년을 그렸다.
그러고는 깨달았다.
“십 년 후면은.”
“예, 고희가 되지요.”
고희. 사람 나이 일흔을 이르는 말이었다.
태감은 농담 삼아 이야기했던 십 년이라는 시간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 시간을 준비해야 했을지를 깨달았다.
아니, 여전히 깨닫지 못했다. 그는 젊은이였기에. 그는 늙어본 적 없기에. 그는 소년의 시간을 감히 이해할 수 없었다.
영원히 오르막길일 줄만 알았던, 인생의 내리막길을 눈앞에 둔 이의. 크게 쓴 글씨도 좁쌀처럼 아른거리고 준마와 같던 다리도 녹슬어 삐걱거리게 된 이의. 안온한 말년을 빼앗기고 강제로 젊은 몸으로 다시 살아야 하는 이의 시간을.
소년은 만개한 청춘을 흐드러지게 피운 듯 파릇파릇한 젊은이를 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세상살이 묵은 피로에 찌든 노회한 미소였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겁이 나더군요.”
“겁이 나더냐.”
“예. 후궁에서의 그 짧은 시간도 팍팍했는데, 십 년이나 더 정치판을 구를 생각하니 덜컥 겁이 들더군요.”
말을 멈춘 소년은 더운 숨을 내쉬고는 태감을 바라보았다.
태감은 그의 입꼬리가 가늘게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늘 보아온, 귀밑까지 길게 찢어지는 흉소가 아니었다. 입꼬리를 올리는 것마저 힘겹다는 듯이, 금방이라도 밤에 삼켜질 듯 흐릿한 그믐달처럼 가느다란 웃음이었다.
“평생 부엌일만 하고 살아온 불학무식(不學無識)한 늙은이가 지금껏 그 차가운 정치판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지금까지는 어찌어찌 요행으로 넘길 수 있었지만, 앞으로 십 년을 그런 요행으로 버틸 수 있겠습니까?”
“네가 버텨온 것이 순전히 요행이라 말한다면, 지금껏 정계에 뼈를 묻어온 뭇 정치인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겠지. 정계에 요행이란 없다.”
“그래서 한번 시험해 보려 합니다.”
그 독물이 득실대는 만마전에서 살아남은 것이 단순한 행운 덕이었는지, 아니면 진정 살아남을 만한 실력이 있어서였는지.
“나이가 드니 궁둥이가 무거워져, 확신이 없으면 도통 일어나기가 힘들더군요.”
소년의 말을 이해한 태감은 가까스로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그리고 성공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증거가 되지.”
“예. 이번 일을 제 시금석으로 삼을 생각입니다. 닳고 닳았을 암시장주를 속여넘긴다면 아직 이 늙은이도 쓸만하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아직 재주가 쓸만하다면 그걸 그냥 썩힐 수는 없지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그제야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럼, 재주 많은 이가 가진 재주를 쓰지 않고 은거하는 것은 작게는 국가적 손실이요, 크게는 범 인류적 손실이라 할 수 있지.”
“허 참, 이제는 온 세상이 이 늙은이를 원하는군요. 별수 없지요.”
한바탕 활개 치고 오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