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51화 외전 45화
왕일. 묻겠네. 자넨 죽는 게 좋은가, 아니면 돈이 좋은가?
초여름을 담은 동정호의 수면에 오전의 햇살이 일렁이고 있었다.
뭉게구름을 떠미는 남실바람이 수면에 잔물결을 만들 때마다 오전의 햇살은 산산이 부서지며 호수를 은빛으로 물들였다.
부둣가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어부를, 배에 물건을 하역하던 일꾼을, 손님을 맞기 위해 배를 단장하던 뱃사공을 무심코 한숨짓게 하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뱃말에 걸터앉은 젊은 뱃사공이 한숨짓는 이유는 한순간의 아름다움에 시선을 빼앗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젊은 뱃사공, 왕일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주머니는 붉은 비단 재질에 옥색의 끈으로 묶은 것이었다.
주머니는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크기였지만 쥐고 있으면 손목이 시큰해질 만큼 묵직했다.
속에 채운 것이 그만큼 무거운 것이기 때문이리라.
동의 무게도, 은의 무게도 아니었다. 그것은.
멍하니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던 왕일은 다시 동정호의 수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작은 붕어 한 마리가 수면 위로 입을 뻐끔거리고 있었다.
큰놈도 아니었다, 기껏해야 한 뼘이나 될까.
물끄러미 붕어를 보고 있던 왕일은 괜스레 기분이 나빠져 발치의 돌을 수면에 집어 던졌다.
첨벙, 물보라가 요란하게 튄다.
“왕일? 웬일이야?”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에 왕일은 다급한 동작으로 주머니를 품에 집어넣었다.
대낮부터 연초라도 피웠는지 사내의 목소리는 가래가 끓는 듯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섞여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다, 아는 사람이야.
왕일은 고개를 돌렸다.
“장석?, 어쩐 일이야?”
“그건 내가 할 소리지, 이 시간에 네가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네 얼굴 본 게 얼마 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
해 떨어지고 나서야 부둣가에 기어 나오던 놈이 오늘은 웬일이야?
짤막한 싸구려 곰방대를 입에 문 젊은 사내는 휘적휘적 걸어와서는 왕일의 옆쪽에 걸터앉았다.
걸친 옷은 팔뚝 부분을 싹둑 자른 간편한 복장이고 사내의 팔뚝에는 그물에 쓸린 흉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장석, 동정호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 어부였고 왕일과는 제법 오래 불순한 교우 관계를 유지한 사이였다.
왕일은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허연 이를 드러냈다.
“어쩐 일이긴, 일하러 나왔지.”
“일하러 나왔다고? 뭐야, 밤일은 때려치운 거야?”
“때려치운 건 아니고.”
그냥 뭐.
말끝을 흐리며 애매하게 답하는 왕일을 보며 장석은 히죽 웃고는 곰방대의 물부리를 문 입술을 달싹였다.
갈라진 입술 틈으로 탁한 연기가 뭉클뭉클 새어 나왔다.
“그럼, 가욋돈 벌이라도 하고 있었나?”
“뭐, 그렇다고 봐야지.”
“벌이가 제법 쏠쏠한가 봐.”
주머니, 제법 묵직해 보이던데.
장석의 말에 왕일은 소스라치게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 동요를 눈치채지 못한 장석은 히죽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검지와 중지, 그리고 엄지를 이용한 독특한 손동작.
평소였다면 낄낄 웃으며 함께 음탕한 말을 지껄였겠지만, 지금의 왕일은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심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돈 아냐.”
“계집질할 돈 아니라고? 그럼 노름할 돈이냐?”
“노름할 돈도 아냐. 선수금 받은 거야.”
일 잘못되면 돌려줄 돈이라고. 왕일의 말에 장석은 김이 샜다는 표정으로 하품을 쩍 했다.
그와 함께 실연기가 그의 코로 빠져나왔다.
잠시 곰방대만 뻐끔대던 장석은 그늘진 왕일을 삐딱하게 보며 물었다.
“그럼, 일 끝나면 네 돈인 거 아니냐.”
“그렇지.”
“일 끝나면 뭐할 건데, 너 혹시 노름빚 졌냐?”
“노름빚은 무슨, 빚질 만큼 큰 판 잡아본 적도 없구만.”
“그럼 뭣 하러 가욋돈을 벌어, 노름빚 갚을 것도 아니고. 계집질할 것도 아니면.”
술 마시고 노름하고 계집질하고.
젊은 뱃사람이 돈 쓸 일이 그것 외에 또 있을까.
왕일은 자신도 모르게 품 안에 손을 넣어 주머니를 만졌다.
주머니는 무거웠다. 동도 은도 아니다. 주머니를 가득 채운 것은 금이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금을 안겨준 것은.
왕일은 갑작스럽게 현기증을 느끼며 뱃말에서 미끄러졌다.
중심을 잃고 허우적대는 왕일을 보며 장석은 해괴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왜 그래? 술 푸고 왔냐?”
“술은 무슨. 일하러 왔다니까.”
왕일은 장석의 물음에 대충 대답하며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금이 가득 든 주머니를. 마치 불길한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던 왕일은 문득 그것을 내던지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차라리 동정호에 빠트려 버릴까. 그럼 없던 일이 되지 않을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예전처럼. 아무 걱정도 없이, 암시장에 사람을 실어나르며 돈푼 받고 희희낙락하던 시절로.
차라리 그때 돈을 받지 않았으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후회의 끝에는 불안과 공포가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암시장의 뱃사공일 수 없었다. 그는 흑선의 정박지를 누설했다. 그는.
왕일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을 미친놈 보듯이 보는 장석을 향해 물었다.
“만약에, 급전이 생기면 뭐 할래?”
“계집질하지, 술 마시고. 좀 남으면 노름하고.”
“잔돈 말고, 큰돈이면.”
“비싼 술 마시지. 노름판 크게 벌이고.”
이 무식한 놈아, 넌 돈 벌면 할 게 그거밖에 없냐.
제 얼굴에 침 뱉기 격인 핀잔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왕일은 참을성 있게 되물었다.
괴이한 질문을 던지는 친구를 미심쩍다는 듯 보던 장석은 입술을 비죽였다.
“큰돈 벌면? 글쎄? 이 바닥 뜰 수도 있겠지.”
“이 바닥 뜬다고.?”
“그래. 솔직히 돈 있으면 물비린내 맞으면서 살 필요 있나? 번듯하게 장사를 차리든. 아니면 땅뙈기 좀 사서 소작을 주든, 할 거야 많지.”
그런데 이 지랄 하는 거 보니 돈 좀 들어왔나 봐?
왕일은 빈정거리는 장석에게 대답해줄 수 없었다.
비로소 머릿속에 꽉 들어차 있던 불안의 해답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왜 전전긍긍하고 있었지? 해답은 간단한 거였는데.
동정호를 뜨면 해결될 일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곳을 떠나 새 삶을 살면 될 일이었다.
돈도 있었고, 나이도 아직 젊으니 어디서 뭔들 뭣하랴.
설령 돈이 떨어져도 뱃일을 할 줄 아니 밥벌이는 하겠지.
왕일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장석을 바라보았다.
일 끝나면 술 한잔 거하게 살게!
하지만 고개를 든 왕일은 술 약속을 하지 못했다.
장석의 어깨너머로 배를 타러 온 손님이 그를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치렁치렁한 비단옷에 온갖 장신구로 치장하고. 뱀 머리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노인이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보게 왕일.”
배는 준비 됐는가?“
왕일의 배는 조용히 동정호의 수면 위를 미끄러졌다.
배는 동정호가 자랑하는 명소인 악양루를 그냥 지나쳤고 제국의 십 대 명차로 손꼽는 군산은침의 생산지로 유명한 군산도 스쳐 지나갔다.
배는 마치 목적지를 잃은 방랑자처럼 물길이 흐르는 대로, 바람이 떠미는 대로 호수의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노를 움켜쥔 채 뱃전을 때리는 물결을 보던 왕일은 호수에 드문드문 떠 있던 다른 배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쯤 노를 움직여 배를 멈춰 세웠다.
유람이 주목적인 놀잇배도 그물을 치는 어선도 오지 않는, 마치 빈 공터와 같은 수역. 망망대해에 외로이 뜬 돛단배처럼 왕일의 배는 홀로 떠 있었다.
“조용한 곳이군.”
“예, 배가 잘 다니지 않는 곳입니다. 그물을 치기엔 너무 수심이 깊고, 이렇다 할 구경거리도 없어서.”
물과 바람과 구름이 침묵을 서원한 곳.
비밀을 누설할 자가 없는 호수의 한가운데까지 배가 오고 나서야 노인은 입을 열었다.
왕일은 면사를 쓴 그의 수행원들을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둘. 문사로 보이는 남자 한 명. 그리고 호위무사로 보이는, 칼을 찬 여인 한 명. 노인은 빙그레 웃고는 말문을 열었다.
“잠은 편히 잤는가?”
“예? 아, 예. 편히 잤습니다.”
“그래, 나도 편히 잤네. 불청객도 오지 않았고.”
왕일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를 움켜쥔 그의 손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왕일의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노인은 수행원들을 향해 손짓했다.
노인의 손짓에 수행원들은 가져온 보따리를 풀어 가져온 술과 안줏거리를 상에 올렸다.
왕일의 배는 애초에 놀잇배로 개조된 배였기에 술과 안주를 차려 올릴 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바삭하게 튀긴 장어요리.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돼지고기 수육.
돼지고기와 육즙을 눌러 굳힌 효육(肴肉)이며 사슴고기를 절인 육포며 꿀에 절인 대추 따위가 상에 차려졌다.
마지막으로 잘록한 청자병이 상에 오르자 노인은 손수 병의 마개를 뽑아 잔을 가득 채우고는 왕일에게 건네었다.
“한 잔 마시게, 도움이 될 테니.”
“손님.”
“바람도 잔잔하니 배가 뒤집힐 걱정은 없을 것 같군.”
마셔두는 게 좋을걸세.
왕일은 그 이상 노인의 권유를 거절할 수 없었다.
떨리는 손으로 잔을 받아든 왕일은 조심스럽게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술은 맑은 청주였다. 뱃놈들이 흔히 마시는, 멀겋고 들척지근하고 가끔 시큼한 맛까지 올라오는 서푼짜리 탁주가 아니었다.
이런 맑은 술을 마셔본 게 얼마 만인지.
왕일은 이런 상황에도 술에 눈이 돌아가는 술꾼의 본성에 실소를 흘렸다.
맑고 쌉싸름한 독주는 마시고 나면 끝 맛에 살짝 달큰한 맛이 올라왔다.
넘길 때는 불덩이를 삼킨 것처럼 후끈거리면서도 삼키고 나면 목구멍이 얼어붙은 것처럼 싸하고, 마신 후 숨을 몰아쉬면 향기로운 과실 향이 훅 밀려 나온다.
술이면 취하기만 하면 족하다는 무식한 뱃놈에게 대접하기엔 아까운 술이었다.
볼이 조금 붉어진 왕일의 잔에 노인은 다시금 병을 기울였다.
“한 잔 더하겠나?”
“주시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안주도 좀 먹게. 빈속에 마시면 속 버리지 않나.”
그럼 염치 불고하고, 한 점 먹겠습니다.
고개를 꾸뻑 숙인 왕일은 수행원이 건넨 젓가락을 받아들고는 냉큼 효육 한 점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만든이가 퍽 솜씨 좋은 이인지 효육은 고기는 불그스름했고 묵처럼 굳은 육즙은 투명한 것이 보기 좋았으며 맛은 더 훌륭했다.
쫀득쫀득한 묵과 짭조름하게 간이 잘 밴 고기, 고소한 비계. 그리고 기름 낀 혀 위를 쓸고 지나가는 차가운 청주 한 모금.
왕일은 더운 숨을 몰아쉬고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런 무식한 뱃놈에겐 아까운 술입니다.”
“마음에 드나?”
“예. 아주 마음에 듭니다.”
술 두 잔에 취하기라도 한 것인지. 왕일은 가슴속에서 싹터 뇌리에 파고든 불안감이 해소됨을 느꼈다.
노인의 말대로였다. 술은 무척 도움이 되었다.
술기운이 오른 젊은 뱃사공을 보며 노인은 흰 터럭 몇 가닥이 듬성듬성 난 턱을 매만졌다.
잠시 말을 고른 후, 노인은 자신의 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그 돈으론 뭘 했나?”
“주신 돈 말입니까? 그대로 있습니다.”
“쓰지 않은 건가. 못 한 건가?”
“못 했습니다.”
그랬을 테지.
노인은 키득거리며 상위에 차려진 안주 중 육포를 집어 들었다.
노인은 검붉은 사슴고기를 주욱 찢어 반은 자신의 입에 넣고, 나머지 반은 왕일에게 건네었다.
“내부고발자라는 게 원래 그렇지. 돈이 아무리 많으면 뭐하나, 마음에 근심이 꽉 차 있는데 천금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도망칠 생각은 안 해봤나?
왕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노인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 히죽 웃었다.
주름진 노인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도망친다면, 어디로?”
“그야…….”
“제국에 암시장 눈 안 닿는 곳이 있나?”
뭐, 있기는 있겠지. 사람 보기 어려운 첩첩산중에 들어가면 누가 알겠나.
나라님도 모를 곳이면 암시장도 모르겠지, 하지만.
말을 멈춘 노인은 물끄러미 젊은 뱃사공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의 가치를 평가하듯이 머리끝부터 말끝까지 위아래로 훑어보는 노인의 시선에 왕일은 한기를 느꼈다.
잠시 후 노인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으로 도망치면 모은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아직 산중에 은둔해 세월을 보내기에 자넨 너무 젊지.”
“그럼, 제가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자넨 우리가 뭘 하는 사람인 것 같은가.”
“그야…… 암시장과 적대하는 다른 조직에서 오신…….”
“틀린 말은 아니네만, 조직이라고 하니 좀 그렇군.”
하지만 암시장과 적대하고 있다는 건 맞아.
왕일의 말을 일부 긍정한 노인은 술병을 들어 올렸다. 잘록한 병목이 기운 곳은 왕일의 잔이었다.
달게 받아 마셨던 저번과는 달리 왕일은 잔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솜씨 좋은 뱃사공이 필요하네, 왕일.”
“어떤 일에 쓰시기 위함입니까.”
“그야 물론, 암시장을 뿌리 뽑기 위해서지. 동정호의 물길을 훤히 알고, 흑선의 정박지로 안내할 뱃사람이 필요해. 정박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겠더군. 이왕이면 물길을 세세히 아는 현지인이 돕는다면 좋겠지.”
생각 있나? 만약 자네가 도와준다면, 섭섭지 않게 사례하겠네.
노인의 말에 왕일은 믿기 어렵다는 듯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 불신의 눈초리가 당연하다는 듯 노인은 웃었다.
“믿기 어렵겠지.”
“죄송합니다만, 제게는 확실한 보증이 필요합니다. 이 무지렁뱅이 놈도 제 목숨은 소중한지라.”
“물론, 누구든 자기 목숨은 소중하지. 그건 그렇고, 보증이라?”
흠, 이거면 되겠나?
말을 마친 노인은 자신의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주름진 뺨을 움켜쥐는 노인의 동작을 의아하게 보던 왕일은 이내 비명을 질렀다.
“엇, 그……!”
“얼굴은 모르겠지만, 소문은 들어봤겠지, 왕일.”
숙친왕 진연운이, 아직 이립도 안된 어린아이라는 소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