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50화 외전 44화
소년은 정원의 담장 위로 내려앉은 황혼을 바라보며 차를 홀짝였다. 차는 꿀을 넣은 국화차였다.
점심 겸 저녁으로 먹은 게 요리의 잔향을 지우기 위한 것이었다.
달착지근하고 향긋한 국화 향을 입에 머금은 채 담장 위의 황혼이 검푸른 색으로 변하는 것을 보던 소년은 정원의 한구석에 무언가가 풀썩 쓰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마치 속이 빈 포대 자루가 땅바닥에 던져지는 듯한 가벼운 소리였다.
그 가벼운 소리와 함께 앓는 듯한 신음이 정원의 잔디 위에 낮게 깔렸다.
오늘 하루 동안 몇 번이나 정원에 울려 퍼졌던 신음이었지만, 이번 것은 조금 더 비통하고 서글펐다.
소년은 끝이 왔음을 직감했다.
“끝나셨습니까?”
단혜림은 허리춤으로 검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는 그녀의 모습은 기분 좋게 운동을 한 이의 상쾌한 만족감이 드러나 있었다.
비참한 몰골로 바닥을 구르는 아이들과 그녀를 번갈아 본 후, 소년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출출하시겠습니다. 요깃거리가 필요하진 않으십니까?”
“저녁을 든든하게 먹어 괜찮네. 아, 그러고 보니 아직 감상을 말하지 않았군. 오늘 게 요리 무척 맛있었네.”
난 괜찮으니 아이들이나 챙겨주게나.
그 말을 남긴 직후 단혜림은 성큼 걸음으로 정원을 걸어나갔다.
아마 검을 휘두르러 가는 것이리라.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소년은 아이들에게 다가가서는 쪼그려 앉았다.
아이들은 꼭 물에 빠뜨린 다음 다시 흙바닥에 굴린 생쥐 같은 꼴을 하고 있었다.
“에구, 요 녀석들.”
“아, 할아버지. 단 호위님 가셨어요?”
“그래. 가셨다.”
바닥에 늘어져 있던 아이들은 고개를 빼꼼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했던 소년은 땀과 흙먼지로 떡 진 머리칼을 보고는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와 아이들 앞에 내려놓았다.
“자, 손 씻고, 세수도 하고. 그다음에 밥도 좀 먹자꾸나. 배고프지?”
“네!”
기운차게 대답한 아이들은 금세 세수를 끝내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여전히 전쟁터에서 갓 돌아본 패잔병 같은 꾀죄죄한 몰골이었지만 최소한 손과 입가만큼은 깨끗했다.
그리고 소년은 그것으로 만족했다.
주방 안엔 아직 더운 온기가 남아 있었다. 오리를 굽기 위해 달군 돌 화덕이 아직 식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열기가 빠지도록 화덕 문을 열고는 그 가까운 곳에 아이들을 앉혔다.
격렬한 대련으로 비명을 지르는 근육과 관절에 뜨뜻한 기운이 파고들자 아이들은 마치 여름날의 고양이처럼 의자 위에 축 늘어졌다.
하여간, 모처럼 여행을 왔는데. 좀 마음 놓고 쉬어도 될 것을.
풍광 좋은 여행지에서까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는 성실한 호위무사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소년은 아이들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길 때쯤 조용히 요리를 시작했다.
“늦은 밤에 기름진 걸 내면 너무 부담스러울 테고, 그렇다고 부드러운 죽을 내놓으면 금세 꺼지겠지?”
기름지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밍숭맹숭하지도 않고 적절한 포만감을 주는 그런 야식.
홍콩에서 다년간 일해온 소년은 그 답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운탄면(云呑面)이지.”
운탄(云呑)이라 하면 중국 남방에서 흔히 먹는 피가 얇고 보드라운 물만두의 일종을 말하는 것으로 사천에서는 혼돈자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며, 한국에선 흔히 완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음식이었다.
운탄은 중국 전역에서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었지만, 운탄면은 중국 본토에서 개발된 음식이 아닌 1950년대 홍콩에서 처음 개발된 음식이었다.
“그리고 본토의 운탄은 돼지고기 소를 쓰는 게 보통이지만, 홍콩의 운탄은 반드시 싱싱한 새우가 들어가야 하지.”
찬란한 네온사인의 그늘 아래 문을 연 포장마차에서, 지친 노동자들이 퇴근 후 한 끼를 때우는.
24시간 노천식당에서. 혹은 홍콩을 떠나 외지에 정착한 화교들이 차린 중화요릿집에서.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밤까지.
운탄면은 늘 홍콩인들의 위장을 빈틈없이 채워주는 영혼의 동반자요 향수병을 치료해 주는 유일한 처방전이었다.
그런 만큼 운탄면은 젊은 날 대부분을 홍콩에서 보낸 소년에게도 무척 각별한 음식이었다.
운탄면의 유래에 관해 설명하던 소년은 슬쩍 고개를 돌려 아이들이 잘 듣고 있는지 확인했다.
소년의 예상대로 아이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코를 골며 소년의 금과옥조와 같은 설명을 경청하고 있었다.
“한숨 자고 있으렴. 다 되면 깨워줄 테니.”
어느새 작게 코 고는 소리를 울리며 단잠에 든 아이들을 보며 소년은 바쁘게 손을 놀리기 시작했다.
* * *
맑게 우려낸 진한 닭 육수와 소금물, 달걀로 반죽한 꼬들꼬들하고 얇은 달걀면. 그리고 소가 꽉 찬 야들야들한 운탄.
뭉근하게 피어오른 수증기를 타고 흘러넘친 그윽한 향기는 곤히 단잠에 든 아이들을 깨우기에 충분했다.
신체에서 가장 극성스러운 기관. 위장의 촉급한 채근에 힘겹게 눈을 뜬 장소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이삼과 눈을 마주치고는 정겨운 인사를 보내었다.
잘 잤어? 이거 무슨 냄새야?
답은 이삼이 아닌 소년에게서 돌아왔다.
소년이 잘 잤냐는 인사와 함께 내민 앙증맞은 크기의 사발에는 장소의 의문에 대한 답이 담겨 있었다.
손안을 가득 채우는 따스한 열기. 맑은 닭 육수와 노랗고 꼬불거리는 가는 면발. 그리고 큼직한 운탄 네 개.
아직 초점이 명확히 잡히지 않은 몽롱한 눈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던 장소는 자신도 모르게 사발을 입가로 가져갔다.
국물은 입술을 델 만큼 뜨거웠다. 마치 가뭄에 말라 버린 논바닥처럼 까끌까끌하던 입안에 진한 닭 육수가 흘러들어온다.
푸석푸석하던 혀뿌리. 메마른 입술과 희미하게 피 맛이 나던 뺨 안쪽을 따스한 온기가 적신다.
담백하고 살짝 후추 향이 나는 국물은 마시고 나면 가슴이 탁 트이는 것처럼 개운했다.
더운 숨을 토해낸 장소는 맞은 편에서 국물을 들이켜는 이삼을 향해 배시시 웃음 지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그렇지?
이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발을 들어 올렸다.
“아, 이거 고추기름 뿌려 먹어도 맛있데.”
“고추기름?”
국물을 마신 이삼은 소년에게서 받아든 작은 단지를 열어 장소에게 보여주었다.
단지엔 새빨간 고추기름이 가득 담겨 있었다.
뚜껑을 열자마자 코끝을 톡 치고 지나가는 알싸한 매운 향. 고추의 아릿함과 산초의 얼얼함이 뒤섞인 그 자극적인 향기는 부드러운 온기에 나른하게 풀어진 위장을 바싹 조여들게 했다.
너무 많이 넣으면 이 섬세하고 담백한 국물의 맛을 해칠 것이다.
열성적인 매운맛 애호가인 장소에게도 그 정도 분별력은 있었다.
소년의 밑에서 온갖 미식을 경험하며 장소는 때론 음식 본연의 맛을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러니 국물이 맑은 국수에 고추기름을 뿌릴 때는.
“국물에 직접 넣는 게 아니라 면을 집어 올린 다음 그 위에 살짝. 이렇게 먹는 거 맞죠?”
“요리야 먹는 사람 마음대로 먹는 게 제일 좋지만, 요리사 입장에서 그렇게 먹어주면 고맙지.”
소년의 동의를 얻은 장소는 신중한 표정으로 면을 집어 올렸다.
가느다란 면발 위로 점점이 붉은 얼룩이 번진다.
장소는 붉은 얼룩이 말간 국물에 닿기 직전 면을 후루룩 빨아들였다.
입술과 잇몸을 부드럽게 간질이는 면발의 탄력 있는 촉감. 그와 함께 혀끝을 달구는 강렬한 자극.
장소는 다시 국물을 마셨다. 뜨겁게 달아오른 혀 위에 다시 순하고 부드러운 감칠맛이 번진다. 그리고 정순한 국물로 정화된 혀는 또다시 통렬한 자극을 갈구했다.
요리사의 의도를 존중하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특권.
영원토록 이어질 것만 같은 맛의 선순환에 빠져 허우적대던 장소는 아직 자신이 누리지 못한 선물이 하나 더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먹고 있는 음식은 운탄면이었다. 그런데 어찌 국물과 면만을 즐기고 요리사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했다 자부할 수 있을까.
장소는 얇은 피가 찢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운탄을 입에 넣었다.
향기로운 육수를 담뿍 흡수한 부들부들한 피. 반항적인 탄력으로 어금니를 튕겨 올리는 포동포동한 새우살. 민물새우의 달착지근한 감칠맛.
기름진 돼지고기 소에 박혀 있는 큼직한 새우 살이 씹힐 때마다 차오르는 행복감은 너무 쉽게 목구멍 너머로 미끄러졌다.
너무 빨리 스쳐 지나가는, 이미 하나 줄어버린 행복을 보며 서운해하는 장소에게 소년은 마법과도 같은 말을 속삭였다.
“운탄은 추가 주문할 수 있단다.”
그것은 장소와 이삼에게는 복음이었다.
* * *
가혹한 피로와 그득한 만복감. 수마를 버티기에는 가혹하다 싶을 만큼의 악조건이었다.
국물까지 깨끗이 비우고 추가로 삶아온 운탄을 젓가락으로 콕콕 찍어 먹은 후, 아이들은 범람하는 졸음의 파도를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침몰했다.
식탁 위에서 난파한 둘을 보며 살며시 미소 지은 소년은 둘을 침실에 눕히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혼자서 둘을 안아 들 생각이냐?”
“언제 오셨습니까? 태감님.”
“방금. 주방에서 좋은 냄새가 나길래 무슨 일인가 해서 와봤다.”
나 몰래 아주 즐겁고 신나고 흥겨웠겠구나?
심통 난 표정으로 툴툴거리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실소를 흘렸다.
“태감님도 단 호위님과 대련하고 오시지요. 그럼 아주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드리겠습니다.”
“상다리가 부러지기 전에 내 다리가 먼저 부러질 것 같으니 사양하마.”
“설마, 단 호위님도 좀 봐주시겠지요. 옛정을 생각해서.”
“글쎄, 단 호위와의 옛정을 생각하면 다리가 아니라 목이 부러질 것 같다만.”
밥값은 하고 왔으니 좀 봐다오.
태감의 말에 소년은 흥미롭다는 듯 물었다.
“밥값이라. 성과가 그럴듯하면 뜨끈한 국물에 운탄 가득 올려서 한 그릇 말아드리지요.”
“면은 곱빼기로 넣어줘야 한다.”
“예. 면 사리 곱빼기에 추가로 튀김 운탄 한 접시까지 덤으로 내드리지요.”
“튀김 운탄이라. 기대되는구나.”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얇은 피에 육즙이 꽉 찬 탱글탱글한 새우살.
상상만 해도 몸이 저릴 만큼 유혹적인 조합이었다.
입안에 흥건하게 나온 군침을 삼킨 후, 태감은 목소리를 다잡고는 낮고 무거운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동창의 무력부대에 동정호로 집결하라는 명을 보내었다. 늦어도 달이 넘어가기 전에 도착할 테지.”
“그때쯤이면 저희는 경사에 도착해 있겠군요.”
“여독을 풀 시간도 없이 이부상서와의 전면전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안온하고 무료하게 보냈던 시간은 이제 끝났다.”
이부상서와 협상하여 암시장과 결탁한 관리들을 척결해야 하고, 관리들의 척결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이부상서와 대립해야겠지. 길고 지루한 싸움이 될 거다.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춘 태감을 대신해 소년이 태감의 말을 이었다.
“예. 장기전이 되겠지요. 서로 상대가 먼저 실수하기를, 약점을 노출하기만을 기다려야 하니. 하지만 시간은 저희의 편이지 않습니까.”
“물론 시간은 젊은이의 편이지.”
“이부상서께선 이제 연세가 어떻게 되지요?”
“올해로 지천명(50)이 조금 넘었을 거다.”
“지천명! 하이고, 아직 한창때군요.”
남자 나이 쉰이면 한창일 때지요. 이것 참, 그 양반 힘 빠지려면 적어도 십 년은 꼬빡 드잡이질해야겠군요.
소년은 벌써부터 질린다는 듯 혀를 찼다.
소년의 한탄에 태감 또한 기가 빠진다는 듯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십 년씩이나? 이부상서가 환갑이 될 때까지?”
“남자 나이 쉰이면 딱 좋을 땝니다. 서른이면 일이 손에 익고, 마흔이면 일에 재미가 붙고. 쉰은 되어야 겨우 일에 원숙해진다고 하지요. 쉰. 가장 전성기일 나이입니다.”
“이부상서와 십 년이라. 하아, 끔찍하군.”
“어쩌겠습니까. 태감님께서 고르신 길인데.”
경사로 돌아가면 이제 이런 기회가 많지 않을 테니,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놀고 가야지요. 미련 남지 않도록.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태감을 보며 소년은 가볍게 장소를 안아 들었다.
“자, 얼른 애들 눕혀주고 야식이나 듭시다. 노는 것도 잘 먹어야 놀지요.”
“그래, 사실 노는 것도 꽤 피곤한 일이지.”
애 깨지 않게 살살 드십쇼.
소년의 자세를 참고하여 이삼을 안은 태감은 허리에 힘을 주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 동작 그대로 얼어붙었다.
소년은 탄식했다.
“태감님.”
“커흠, 잠깐만 기다려 보거라. 삼이는 그, 평소에 암기를 이것저것 많이 휴대하니까…….”
“평소에 붓보다 무거운 걸 드신 적 없다고 하셔서 근력이 약하실 줄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안타까운 눈으로 태감을 보던 소년은 장소를 어깨에 걸친 채 태감의 품에서 이삼을 빼앗듯이 안아 들었다.
거뜬하게 둘을 들어 올리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무기력하게 비켜섰다.
“태감님. 이부상서랑 십 년간 부대끼시려면, 우선 체력부터 기르셔야겠습니다그려.”
이거 사람이 이렇게 부실해서 원, 정치하겠나.
의기소침한 태감을 뒤로한 채 소년은 뚜벅뚜벅 주방을 걸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