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49화 외전 43화
동정호의 수면은 완연한 여름에 접어들어 있었다.
무더운 계절을 대비하여 짙푸른 녹빛으로 자신을 치장한 연잎. 그 위로 피어오른 소담한 꽃봉오리.
산란을 대비하여 살을 찌운 갑각류들과 그런 갑각류를 먹고 살집을 불린 잉어.
호수는 여름을 받아들일 준비가 끝나 있었지만, 수면 위에 번진 물빛 하늘만큼은 여전히 봄을 추억하고 있었다.
봄의 잔향이 남아 있는 하늘에 비스듬하게 기운 태양. 그 아래 잘 가꿔진 정원에 차려진 식탁.
뭉근하게 끓인 게 요리로 늦은 점심을 먹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오랜만이구나. 낯선 하늘 아래서 밥을 먹는 건.”
둘러앉은 이들의 얼굴을 면밀히 살필 수 있는 원형의 식탁엔 쪽빛 식탁보가 깔려 있었다.
은으로 테두리를 두른 청자 앞접시에 옥을 깎아 만든 젓가락 받침. 식탁의 한가운데를 장식하는 것은 탐스럽게 핀 청보라색 수국이었다.
전체적으로 푸른색을 강조한 식탁에선 계절감이 물씬 느껴졌다.
쨍하는 햇살 아래 넘실거리는 시원한 물결. 바위에 부서지며 흰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 그리고 초여름의 하늘.
소년의 상차림에서 연상되는 것은 그런 풍경이었다.
“상차림이 아주 시원하구나. 신경을 많이 썼겠어.”
“그간 요리는 몰라도 상차림은 신경을 못 썼지요. 그래서 기분 좀 내봤습니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 그런데 떡은 언제 볼 수 있느냐?”
보기 좋게 장식한 식탁은 눈은 만족시킬 수 있어도 입과 위장은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식탁은 떡의 포장지라 보아야 옳다. 그리고 나는 몹시 배가 고프다.
태감의 말을 풀어서 해석한 소년은 대단히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 단 호위와 아이들의 대련이 끝나지 않아서…….”
정원의 한편에선 단혜림과 아이들이 검과 비수를 나누며 땀을 흘리고 있었다.
소년은 단혜림의 얼굴에 짓궂은 장난기가 엿보인다는 점. 그리고 아이들의 얼굴에 승부욕이 아닌 오기가 드러났다는 점에서 대련이 쉽사리 끝나지 않으리라 예측했다.
그리고 소년의 예측에 태감은 몹시 서글픈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걸리겠군. 오늘 안에는 끝날 것 같으냐?”
“흐음,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 배고프시면 따로 상을 차려드릴까요?”
몹시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럴듯한 명분이 마련되어 있었기에 더욱더 그러했다.
하지만 태감은 소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대단히 후회스럽다는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아니, 기다리겠다. 상은 사람들이 다 모이면 그때 차리거라.”
“진심입니까?”
태감은 경악감에 물든 채 자신의 정신감정을 시도하려는 소년을 손짓으로 밀어내었다.
금치산자 판정을 내릴 때 유용하게 사용되는 몇 가지 질문을 준비하고 있던 소년은 이어진 태감의 말에 간신히 그가 아직 정상이라고 판단할 수 있었다.
“여행길의 고락을 함께한 길동무들을 두고 혼자서만 식사하고 싶지는 않구나. 먹는다면 다 함께 먹어야지.”
“길동무입니까?”
“길동무다.”
지금은.
소년은 태감의 말끝에 숨은 그 한마디를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차마 말하지 못하고 삼킨 그 한마디에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동창 제독 양단이 아닌 길동무와 함께 동정호를 유람하고 싶은 진오운이고 싶다는 그의 소망이 담겨 있었다.
말없이 그를 보던 소년은 이내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는 그의 작은 소망과 그의 큰 위장 양쪽을 모두 만족시킬 만한 제안을 꺼냈다.
마치 불법은 아니나 합법이라 하기도 애매한, 탈법행위를 권하는 듯 음흉하고 비열한 미소였다.
“크흠, 그러고 보니 오늘 끓인 탕이 조금 짠 것 같던데…… 혹시 괜찮으시면 간 좀 봐주시겠습니까?”
“네가 음식을 짜게 만들었다고?”
태감은 마치 제국군이 반란을 일으켰다거나 이부상서가 갑작스럽게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만 같은 얼굴로 되물었다.
놀라움의 농도가 더 짙었더라면 해가 서쪽에서 떴다거나 고래가 하늘을 난다 등의 소식을 들은 얼굴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소년은 태감이 대놓고 떠먹여 주기 위해 준비한 제안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사실에 속으로 실소했다.
누구를 뭐 요리의 신이나 악마쯤 되는 줄 아시나 본데, 애석하게도 그냥 인간이올시다. 그것도 늙은.
“아무튼, 간 좀 봐주십쇼. 염병할, 그럼 허기도 좀 면할 것 아닙니까.”
그제야 소년의 말에 내포된 진의를 파악한 태감은 겸연쩍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사려 깊은 배려에 대한 감사를 전하였다.
“그리도 간절히 원하니 어쩔 수 없지. 내 혀를 빌려줄 수밖에.”
“아예. 거참 눈물 나게 감사합니다그려.”
짧게 빈정거린 후, 소년은 그를 저택의 주방으로 이끌었다.
황실 소유의 저택답게 주방은 족히 열 사람의 요리사가 부산을 떨어도 동선이 얽히지 않을 만큼 넉넉했다.
그리고 주방에 준비된 음식은 족히 열 사람의 요리사가 필요했으리라 짐작될 만큼 푸짐했다.
살과 내장이 꽉 찬 민물 게 요리로 시작하여 동정호의 온갖 명산물이 주방에 모여 있었다.
태감은 구중에서도 화덕 안쪽에서 지글거리며 기름을 뚝뚝 떨어뜨리는 큼직한 오리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아이들이 가져온 것 중에 깃털 달린 것은 없었던 것 같은데?”
“당연히 따로 준비한 거지요. 없으면 섭섭해하실 거 아닙니까.”
“이로써 오래 묵어 좋은 것은 술과 친구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군.”
오래 묵은 술과 오래 묵은 친구. 오래 묵은 요리사.
셋의 공통점은 모두 지치고 피로한 영혼을 위로하는데 특효약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요리사는 술과 친구와는 차별화된 장점이 하나 더 있었다.
오래 사귀어 자신의 입맛을 낱낱이 꿰차고 있는 요리사는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마저 채워준다.
자신의 행운에 솔직하게 기뻐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미소와 함께 사발을 내밀었다.
사발은 작았고 무늬가 없는 소박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박한 사발과는 달리 담긴 내용물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게의 살과 내장을 발라 제비집과 함께 쪄낸 해분회관연(蟹粉燴官燕)입니다.”
“제비집이라. 처음부터 강력한 후보를 내놓았군.”
작은 사발에는 걸쭉한 국물과 투명한 제비집이 담겨 있었다.
은은한 황금빛으로 빛나는 국물 속에 담긴 투명한 제비집의 자태는 매끈하고도 유려했으며 고혹적이었다.
무미하며 무취한 식재료가 받기에는 과분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찬사였다.
하지만 태감은 제비집이라면 그만한 찬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식감이었다. 농후한 황금의 감칠맛을 걸친 채 혀를 희롱하는 그 식감.
오돌토돌 씹히는 듯하다가도 매끄럽게 혀 위를 미끄러져서는 목구멍 너머로 사르르 줄달음질 쳐 넘어간다.
그리고 그 야릇한 식감이 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게의 내장에서 뽑아낸 달고 기름진 맛이 혀를 쓸어 만졌다.
초여름의. 아직 알을 품지 않은. 그리고 알을 품기 위해 자신을 살찌운 게의 내장.
한껏 기름이 오른 내장의 그윽함은 무더웠던 지난 여름날의 희열을 깨끗이 지워냈다.
태감은 후궁의 밤을 짓눌렀던 그 날의 열기를 기억했다.
타는듯한 주홍빛으로 빛나던 그 달콤한 게 알을 기억했다.
“기억하느냐.”
“여름이었지요? 태감님께서 갑작스럽게 게가 드시고 싶다 하셔서 고생 좀 했지요. 신선한 게 구하랴, 찜기 준비하랴.”
“그날 먹었던 게는 분명 내 인생 최고의 게였다.”
소년의 게 요리를 만나기 전까지, 태감에게 게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에 의례적으로 먹고 넘어가는 많고 많은 음식 중 하나였다.
하지만 소년은 그의 인식을 바꿔놓았다. 그는 이제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고,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다.
그 빛나는 추억, 그 황홀경이 덧칠된 것이다.
“갱신되었다는 표현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런 단어도 있었지.”
“그리고 죄송하지만, 한 번 더 갱신하셔야겠습니다.”
방금 그거, 전채요리였습니다. 본 요리는 이쪽이지요.
그 설명이 태감을 지나치게 흥분시키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건조한 어조를 유지하며, 소년은 다음 요리를 태감에게 내밀었다.
소년이 내민 작은 그릇에는 한 숟가락 정도 되는 양의 고슬고슬한 쌀밥과 황금빛 걸쭉한 소스로 졸인 연두부 요리가 담겨 있었다.
* * *
특별히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소년은 오늘의 늦은 점심을 위해 많은 공을 들였다.
소년이 준비한 재료는 대부분 진귀한 식재료였고 그것들을 이용해 차려낸 요리는 호사스러웠다.
화퇴에 꿩, 사슴의 힘줄을 끓인 최상의 상탕(上汤)에 졸인 상어지느러미를 넣고 게의 내장을 끼얹은 것.
건해삼을 불려 게살로 속을 채운 다음 달착지근한 간장양념에 찐 것. 동정호가 자랑하는 큰 잉어를 통째로 튀겨내 새콤달콤한 당초 양념을 입힌 것.
그리고 기름지고 향긋한 오리구이.
태감은 경사의 오리보다 조금 작은 동정호의 오리가 품은 무한한 가능성에 탄복하고야 말았다.
경사의 오리처럼 좁은 우리에서 가둔 채 곡물 사료를 먹여 비대하게 부풀린 오리가 아니었다.
자유롭게 동정호의 수면을 유영하며 내키는 대로 피라미와 갑각류를 잡아먹고 자란 오리였다.
기름기는 적었고 살코기는 붉었다.
그리고 그 살코기에는 갑각류의 달콤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마치 얇은 설탕 막처럼 섬세하게 바스러지는 껍질.
그 아래의 탄력 있는 살코기에선 씹을 때마다 향기로운 육즙이 샘솟았다.
하지만 그 훌륭한 오리구이조차 식탁의 주연은 아니었다. 식탁의 주연은.
“해황두부보(蟹黃豆腐煲)지요.”
단조로운 어조로 말하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황두부보. 민물 게의 내장과 연두부를 볶아 만드는 요리.
앞서 열거했던 요리에 비하면 특별하다 할만한 요리는 아니었다.
특별히 더 귀한 재료가 들어간 것도 아니었고, 그럴듯한 이야기가 있는 음식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식탁의 주연은 틀림없이 해황두부보였다.
그 진하게 졸여 농축된 게의 내장을 하얀 쌀밥에 비벼 입에 가져간 순간, 태감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먹었던 다른 모든 요리는 오직 이 부드러운 두부 요리 한 접시를 부각시키기 위한 전채요리에 불과했다는 것을.
백일몽에 취한 듯 달뜬 숨을 몰아쉬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조금 큰 소리로 기침했다.
간신히 여운을 떨쳐낸 태감은 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들었다.
“남아일언중천금(男兒一言重千金)입니다. 태감님.”
“늘 궁금했던 거다만, 환관을 남자의 영역에 포함 시키는 것이 올바른 일일까? 이미 남성성을 잃은 이들에게 남자의 책임을 요구할 수 있을까?”
“거세하지 않으셨잖습니까. 거세하고 오시면 한 입으로 두말하셔도 인정해 드리지요.”
태감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구었다.
흑단처럼 길고 윤기 흐르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태감은 과거의 경솔한 발언을 후회했다.
잠시 점잖은 어조로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다는 등의 인생 조언을 하던 소년은 태감의 한숨이 잦아들 때쯤 화제를 바꾸었다.
“아무튼, 내일 시간 좀 있으십니까?”
“시간이야 있지. 암시장의 일이야 경사로 돌아가 동창 제독으로서 권한을 모두 회복한 후에 처리할 일이고, 새끼 호랑이 가죽도 네가 찾아왔으니.”
“그럼 이제 남은 시간은 좀 여유롭게 보내도 되겠지요?”
비록 기구한 팔자 탓에 꼬이고 뒤엉켜 엉망이 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여행을 떠난 본래의 목적은 유람이었다.
팔자 좋게 흐르는 구름 따라 걷다가 볕 잘 드는 곳 있으면 잠시 멈춰 쉬어가고, 시원한 계곡물에 발 담그고 세월 보내다 또 걷고 싶어지면 걷고.
지는 황혼을 보며 자리를 펴고 누워 빛나는 별 하늘을 덮고 잠드는.
가혹한 긴장 속에서 지치고 병든 몸과 영혼을 치유하는 시간.
그것이 이번 여행을 결정한 이유 아니었던가.
지난 여정을 돌아보며 소년은 피로감 짙게 밴 숨을 몰아쉬었다.
“홍문에서부터 예봉까지 놀기는커녕 일거리만 실컷 떠안고 죽상을 썼으니. 이제 남는 시간은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드는 데 좀 써도 괜찮겠지요.”
“네 말이 옳다. 동정호까지 와서 공무만 처리하고 돌아가기엔 너무 아쉽지. 폐하께서도 이해하실 거다.”
“애초에 좀 쉬겠다고 간 유람에 억지로 공무를 끼워 넣으신 건 황제 폐하 아닙니까. 아직 폐하께 양심이라는 기관이 남아 있다면 이해해 주시겠지요.”
“불경죄를 물을 수는 없겠군.”
태감은 빙그레 웃고는 대화를 진전시켰다.
그래서, 뭘 먼저 하고 싶으냐?
소년은 무언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음을 광고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동정호 하면 역시 뱃놀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뱃놀이를 빼놓을 수는 없지. 밤의 동정호를 봤으니 이젠 낮의 동정호를 구경할 차례구나.”
“마침 유능한 뱃사공 한 사람을 알아뒀으니, 그 친구에게 부탁하면 되겠군요.”
“그 친구, 입은 무겁다더냐?”
소년은 입꼬리를 길게 찢어 올렸다. 하얀 송곳니를 드러내며 소년은 대답했다.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