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48화 외전 42화
동정호의 인근에 세워진 황실 소유의 저택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정원에는 허리 굽은 소나무와 그보다 키 작은 관목이 늘어서 있었고 곱게 자란 잔디 위로는 드문드문 자연스럽게 연출된 야생화가 피어 있었으며, 비단잉어가 유영하는 연못가 옆으로는 고풍스러운 탁자와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따사로운 늦봄, 혹은 초여름날 함께 찻잔을 기울이며 담소를 나눠도 좋고, 아니면 살짝 늦은 점심을 여유롭게 즐기기에도 좋은 자리.
자리가 자리인 만큼 모여앉은 이들의 입을 오가는 화제 또한 한가한 것이었다.
“참, 날강도가 따로 없더구나.”
“날강도라니요?”
“순진한 여인에게 사기를 치지 않았느냐?”
“사기라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그려.
뻔뻔한 얼굴로 대꾸하고는 차를 홀짝이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심술궂은 투로 말했다.
“무역상이라는 신분을 참 알뜰하게도 이용해 먹더구나. 누가 보면 정말 서방 무역상 출신인 줄 알겠어.”
“무역상을 하는 친구를 사귀었더니 그쪽으로 주워들은 게 좀 있지요.”
표자승이라고, 태감님도 아시지요?
소년의 능글맞은 대꾸에 태감은 실소를 흘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확실히 가르치며 배운다는 옛말이 맞는 모양이다. 표자승을 가르친 만큼 너도 그 친구에게 배운 게 많은 모양이야. 그러니 닳고 닳았을 암시장의 여인을 속일 수 있었겠지.”
“속였다니요. 전 어디까지나 사업제안을 하고, 그 대가로 선물을 받았을 뿐입니다. 좀 볼품없는 선물이기는 했지만.”
“금 천 전짜리 선물이었지.”
“솔직히 그깟 가죽에 금 천 전을 요구하는 그 아가씨야말로 날강도지요. 그에 비하면 전 양심적인 편이지 않습니까.”
그래? 내가 양심이라는 단어를 잘못 알고 있었구나. 요즘은 달콤한 말로 독이든 술잔을 권하는 일을 양심적인 일이라 하던가?
태감의 말에 소년은 빙긋 웃어 보였다.
“그 처자가 잔을 비우지만 않는다면 별일은 없을 겁니다. 아마 그 처자의 상사, 암시장의 주인이라면 알아차리겠지요. 설령 알아차리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그 여인이 널 애타게 찾을 때쯤이면 넌 무역상 승조가 아닌 동창 제독의 요리사, 혹은 숙친왕 진연운일 테니 그 여인이 널 알아볼 일은 없을 테지.”
“암시장의 주인 되는 양반이 성격이 유한 사람 같으면 감봉 정도로 끝날 테고. 현명한 사람 같으면 파직하거나 직위를 강등시키겠지요.”
“죽을 수도 있지.”
“멍청한 게 죽을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 바닥에서 멍청한 건 죽을죄다. 하지만, 그 여인이 죗값을 치를 일은 없을 것 같더군.”
소년은 굳이 어째서냐고 묻지 않았다. 소년은 자신이 속여 넘긴 속물 같은 여인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했다.
과한 욕심을 부리기는 했지만, 그건 죽음으로 갚을 죄는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서른쯤의 김승조였다면 그녀가 죽는다는 소식에 더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마흔쯤의 김승조였다 해도 같았으리라.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육십이 훨씬 넘은 김승조였다.
“잘됐군요.”
“교훈을 준 것으로 만족하느냐?”
“만족합니다.”
“용서가 되더냐?”
용서가 필요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그 나이 때면 누구나 한 번쯤 과욕을 부리기 마련이지요. 이 나이를 먹고 젊은이들 실수에 일일이 날뛰기도 민망한 일입니다.
그 나이에 어울리는, 자애와 귀찮음의 중간쯤 되는 노쇠한 무덤덤함을 얼굴에 띄운 소년은 길게 늘어지는 게으른 하품을 하고는 눈을 비볐다.
화제가 지겹다는 뜻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태감은 조금 더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오늘 점심은 뭘 먹는 게 좋을까?”
“글쎄요. 그건 애들이 뭘 사 오는지에 따라 달렸지요.”
통통하게 살 오른 민물 게를 사 오면 내장과 살을 발라 연하고 보들보들한 연두부와 함께 끓인 해황두부보(蟹黃豆腐煲)를 만들어도 좋겠고.
아니면 아직 겨울 배추 남은 것이 있으니 게살과 내장을 걸쭉하게 볶아 데친 배추 위에 올린 해황백채(蟹黃白菜)도 좋지요.
아니면 점심답게 돼지고기에 게살을 섞어 만든 소로 따끈하고 고소한 국물이 담뿍 담긴 해황소롱포(蟹黃小笼包)를 만들어 볼까요?
소롱포를 끝으로 잠시 숨을 고른 후, 소년은 자신이 만들 수 있는 민물 게 요리를 쭉 열거했다.
중국의 여름을 상징하는 식재료답게 게 요리를 전부 열거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아쉽게도 알이 꽉 차고 내장에 기름이 가득 오른 제철의 게는 아니지만, 수고를 좀 들이면 제법 그럴듯한 별미가 될 겁니다.”
“껍질을 까고 손톱 밑이 찔리는 수고를 하는데 철이 아니라고 투정을 부릴 수는 없지.”
작은 민물 게. 풍요로운 호수에서 잔뜩 살을 찌운 그 통통한 게 한 마리.
그 녹진한 황금빛 내장과 달착지근한 게살을 수저에 가득 떠 입에 넣으면 얼마나 행복할까.
국화꽃 띄운 물에 손을 씻고 망치로 껍질을 두드리고 쪼개서 살을 발라내는 고된 노역을 하지 않고 그 다디단 결과물만을 취한다면.
견고한 껍데기 속에 숨은 그 극상의 감칠맛이 혀끝에 아련히 맴도는 듯하여 태감은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아이들이 부디 좋은 게를 골라왔으면 좋겠군.”
“꼭 게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전 그저 물 좋은 놈으로 골라오라는 말만 했으니. 새우일 수도 있고, 민물 생선일 수도 있고. 어쩌면 거위나 오리일 수도 있지요.”
“부디 아이들이 현명한 선택을 했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런데 거위나 오리라? 동정호의 특산물 중 가금류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다른 유명한 명산지에 비해 유명세가 덜하기는 하지만, 동정호 인근에서 기르는 가금류는 명물로 꼽기에 손색이 없지요. 작은 갑각류나 피라미를 잡아먹으며 큰 거위나 오리는 다른 지방의 것보다 기름기는 적지만 더 달콤한 육즙과 쫄깃한 속살을 자랑하지요.”
동정호엔 이미 자랑할 만한 명물이 너무나 많아 특별히 부각되지는 않습니다만, 드셔보시면 분명…….
소년은 말끝을 흐리며 엉거주춤하게 일어섰다. 그러고는 눈살을 찌푸리며 정원의 한 방향을 응시했다.
정원의 입구 방향에는 세 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둘은 작았고, 하나는 컸다. 그리고 셋은 모두 큰 광주리 같은 것을 들고 있었다.
“담소는 여기까지 해야겠습니다. 슬슬 점심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으니.”
“그래야겠구나. 흐음, 비늘 달린 꼬리는 안 보이는걸.”
“깃털 달린 날개도 안 보이는군요.”
“그렇다면 작고 딱딱하고 거품 무는 것일 가능성이 크겠군?”
소년은 어깨를 으쓱하는 작은 동작으로 태감의 기대에 긍정했다.
이제 그들의 화제는 어떤 식재료가 상에 오를 것 인가가 아닌 어떤 요리가 상에 오를 것인가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잰걸음으로 달려오고 있었고 아이들의 손에 든 광주리에는 아직 살아 있는 게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들의 얼굴이 시야에 잡힐 때쯤, 소년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태감에게 물었다.
“태감님, 태감님께선 큰 단체를 직접 운영해 보신 경험이 있으니 지도자의 심리에 대해 저보다 퍽 해박하시겠지요.”
“암시장주의 심리가 궁금한 것이냐?”
이미 묻기도 전에 답을 준비해 놓은 태감을 보며 소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높은 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는 듯한 그의 시선.
그 앞에선 그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만 같은 막막한 무력감은 소년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소년은 어떻게 알았느냐는 구차한 질문 대신 자신이 궁금한 것만을 담백하게 질문했다.
“예. 태감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었던 부하가 사실은 사고력 부족한 얼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놈을.”
* * *
“한번 보기는 해야겠군.”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묽은 어둠 속에 번진다.
일말의 흥미도 담겨 있지 않은 냉담한 목소리였지만 내용에는 희망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젊은 여인의 얼굴에 잠시 안도감과 기대감이 어렸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친절하게도 여인이 품은 희망이 부질없는 것이라고 지적해 주었다.
“헛된 기대 품지 말거라. 내가 그자를 봐야겠다 한 이유는 네가 홀린 그 얼토당토않은 제안에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 아니니까.”
“그럼 어째서입니까.”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서지. 내가 대리인으로 세운 암시장의 책임자가 한 치 앞도 못 보고 돈에 제 목줄을 넘겨주는 얼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줬으니까.”
네가 그 정도로 멍청한 줄 진작 알았더라면 너에게 중책을 맡기는 일은 없었을 거다.
대단히 노골적이고 조야한 조롱이 이어졌다. 하지만 얼굴을 붉게 물들였음에도 여인은 입을 앙다문 채 묵묵히 조롱을 감내했다.
그녀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녀를 비웃는 이가 흑선의 선주였기에. 달리 암시장의 주인 장철명이라 불리는 이였기에.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유의미한 반응을 끌어내지 못한 암시장주는 잠시 입을 다물고는 여인을 응시했다.
하지만 사방이 어두웠고 시야를 확보할 조명기구로는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이 전부였기에 여인은 그의 두 눈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침묵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큰 한숨과 함께 암시장주는 여인의 실수를 천천히 되짚었다.
“놈이 자신을 서방에서 활동하는 무역상이라 소개했다고?”
“예. 그랬습니다.”
“그리고 네게 사업을 제안했단 말이지. 그깟 새끼 호랑이 가죽 한 장 때문에.”
“그것은 금 천 전짜리…….”
“그만. 네 아둔함을 이 이상 경멸하고 싶지 않다. 다물어라.”
뒷골을 저릿하게 울리는 냉소적인 말로 여인의 입을 막은 다음, 암시장주는 설명을 이었다.
“일단은 그자의 신분을 그대로 신뢰한 것은 차치해 두겠다. 중요한 것은 네가 그자의 제안을 의심하지 않았다는 거니까.”
“그자의 제안은.”
“서방에서 나는 귀한 물산을 암시장을 통해 매매하고 싶다. 좋다. 그자의 제안이 매력적이라는 것만큼은 동의해 주마. 그 유명한 사대 상단. 비록 한 곳은 무너졌다만, 다른 세 곳의 상단이 지금껏 성세를 누려온 이유가 바로 서방과의 교역품 덕분이었지. 사대 상단은 엄청난 관세를 내면서도 그만한 부를 쌓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관세를 내지 않는다면? 그 막대한 부를 독점할 수 있다면?”
그래. 어쩌면 사대 상단이 누대에 걸쳐 쌓아 올린 부를 단번에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암시장주의 설명을 들으며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설명을 들을수록 자신이 품었던 꿈과 욕망이 점점 더 구체화 되는 듯했다. 그리고 여인의 몽롱하게 풀린 두 눈은 암시장주를 분노하게 했다.
“진정 그것이 네가 이해한 전부냐? 여기까지란 말이냐? 여기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네 앞에 놓인 잔에 독이 담겨 있을지 술이 담겨 있을지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단 말이냐?”
분노에 찌든 비난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실망감에 젖은 탄식은 참을 수 없었다.
벼락처럼 고개를 쳐든 여인은 차마 언성을 높이지는 못하고 입술을 깨문 채 질문했다.
“답답하시다면 알려주십시오. 독입니까. 술입니까.”
“어리석은 것. 차라리 진짜 독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요.
여인은 혀끝에 응어리진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입을 굳게 걸어 잠갔다.
놀라운 인내심이었으나 암시장주는 감탄하는 대신 언성을 높였다.
“물론 큰 이익이다. 아니, 큰 이익이라는 말로는 부족하겠지. 어마어마한, 대단한, 굉장한. 기존의 미사여구로는 부족해 새로운 말을 창조해야 할 만큼 엄청난 이익이겠지. 하지만 그것은 아무리 달콤해 보여도 삼켜선 안 되는 독주다. 당장 절명하지는 않겠지만.”
“천천히 중독되어 죽는단 말씀이시군요.”
“이해했느냐?”
“설명이 더 필요합니다.”
암시장주는 또다시 말을 멈추었다.
여인의 무지함에 한탄하며 진저리를 치기 위함인 듯했다.
하지만 여인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방 안이 어두워 그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말이 돌아온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딱딱했던 암시장주의 목소리는 상당히 풀어져 있었다.
분노와 경멸과 후회와 탄식으로.
“이곳에선 돈이 힘이고 명분이다. 내가 인망이 있어 암시장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 같으냐? 내가 암시장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가장 많은 돈을 가지고 있고, 또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수단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자가 동업자가 되면 어떻게 되지?”
“더 많은 돈을 얻게 되겠지요.”
“그리고 내가 틀어쥐고 있던 힘이 그자에게 분산되겠지. 많은 사람이 그에게 의존하게 될 거야. 그자가 더 큰 돈을 벌어다 주니까. 그리고 개중에는 암시장의 주인 자리에 그를 추대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나올 거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말하지 마라. 명분은 그자가 더 큰 돈줄을 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그리고 내가 실각한다면 너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거라 믿는다.
길고 지루하고 무의미한 설명을 끝낸 암시장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굽어보는 암시장주를 여인은 충혈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여인은 암시장주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이밀어 암시장주와 눈을 마주할 수는 없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촛불이 어둠 속에서 그의 모습을 어렴풋이 드러냈다. 하지만 드러낸 것은 그의 하반신뿐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암시장주는 조용히 선언했다.
“흑선의 선주 대리이자 암시장의 책임자 장월영. 오늘부로 네게 위임한 모든 권한을 회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