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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47화 (248/314)

환관의 요리사 247화 외전 41화

그런 경우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패배는 승리보다 가치 있다.

금 오백 전짜리의 패배를 얻은 소년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참관인들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실례 많았소. 재미들 보시오.”

당혹스러운 신음성과 얼빠진 면면들을 뒤로한 채 소년은 경쾌한 걸음으로 갑판 위를 가로질렀다.

그의 등 뒤로 따라붙는 시선들. 그 무수한 눈동자 중에는 절망과 후회로 점철된 것이 있었다.

뒤를 돌아본 소년은 징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주 승강구를 내려갔다.

암시장의 종업원과 손님들 모두 갑판에 올라 있었기에 객실까지 가는 길은 한산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없었기에 젊은이의 성큼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객실에 도착한 소년은 거하게 숨을 몰아쉬고는 늘어진 얼굴 가죽을 벗어 던졌다.

“휴우, 오랜만에 진땀 좀 뺐군요.”

“상당히 아슬아슬했지. 금 오백 전이라. 만약 그대로 이겼으면 분통 좀 터졌겠어.”

“이불이 남아나질 않았을 겁니다.”

매일 한 시간씩 걷어차지 않으면 잠들질 못할 테니까요.

낄낄거리며 의자에 걸터앉은 소년은 방만한 자세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금 오백전 짜리 패배를 얻은 패배자에게 어울리는 자세였다.

그와 마주 앉은 태감은 면사를 들춰 손바람을 불어넣으며 소년에게 물었다.

“자, 금 오백 전짜리 승리보다 값진 패배를 얻었으니, 이제 그 패배를 밑거름 삼아 진짜 승리를 얻어낼 차례구나.”

“예. 가죽을 얻어내야지요.”

하지만 그 전에, 배를 좀 채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소년의 말에 태감이 반색하며 면사를 들췄다. 태감은 두 눈을 샛별처럼 빛내고 있었다.

“도시락은 다 먹지 않았느냐?. 또 준비해 둔 것이 있느냐?”

“예. 경매가 길어질 것 같아서 따로 떡을 좀 싸 왔습니다. 요기는 되겠지요.”

엄밀히 말하면 떡은 아닙니다만.

모호한 말을 남긴 소년은 설명하는 대신 따로 포장해 두었던 찬합을 가져와 태감에게 내밀었다.

찬합을 받아든 태감은 소년이 설명하지 못한 이유를 이해했다.

“확실히 떡은 떡이지만, 틀에 찍어 모양을 낸 것은 꼭 월병과 같구나. 피가 얇아 속에 넣은 소가 비치는데, 색을 보아하니 팥소인가?”

“직접 드셔보시면 알겠지요?”

“먹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다만, 먹기 전 요리의 이름 정도는 알아두고 싶구나.”

초면인 사이에 갑작스럽게 이빨부터 들이대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않느냐.

태감의 능청에 실소를 흘린 소년은 마치 젊은 총각에게 아가씨를 소개하는 매파 같은 태도로 요리를 소개했다.

“빙피월병(冰皮月饼)이라 합니다. 고운 이름이지요? 이름만큼 맛도 곱습니다.”

빙피월병은 1980년대 홍콩에서 처음 만들어진 월병이었다.

찹쌀가루와 멥쌀가루, 박력분을 혼합하여 만든 얇은 떡에 달콤한 소를 넣어 만드는데 창의적이고 개방적인 홍콩 사람들은 빙피월병에 넣을 소로 팥소나 녹두소 같은 전통적인 것뿐만 아니라 망고나 두리안 같은 열대과일부터 황금빛 커스터드 크림이나 연유, 심지어는 아이스크림까지 월병의 소로 이용하고는 했다.

단혜림을 의식하여 적당히 간추린 소년의 설명에 태감은 상상이 가지 않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창의적인 음식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주지만, 익숙한 음식은 우리에게 편안함을 주지. 난 생소한 열대과일 소보다는 익숙하고 정겨운 팥소가 더 좋구나.”

“그러시다니 다행입니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다른 소를 준비하지 못했거든요.”

면목 없다는 듯 말갛게 웃은 소년은 찬합을 들어 아이들과 단혜림에게도 월병을 권했다.

어차피 속에 든 소는 모두 같은 것이었기에 선택에 장고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각자 마음에 드는 문양이 찍힌 월병을 집어 들자 소년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쉽게도 뜨거운 차 한 잔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만, 허기를 면하는 데 의의를 두기로 합시다.”

“아쉽기는 하구나. 쌉싸름한 차 한 잔이 있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다디단 간식의 영원한 단짝이 부재중이라는 사실에 태감은 몹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한밤중의 선상에서, 그것도 적진이라 불러야 마땅한 장소에서 뜨거운 차를 찾을 만큼 그는 몰상식한 사람은 아니었고, 소년의 월병은 곁들일 차 한 잔이 없더라도 충분히 달콤하고 맛좋았다.

보들보들하고 쫀득한 피와 견과류가 담뿍 든 향기로운 팥소는 태감과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 충분했다.

소박한 간식에 만족해하는 세 사람에게 돌아가면 따끈한 차에 더 맛좋은 간식을 준비하겠다는 심심한 약속을 한 후, 소년은 아직 월병을 향해 손을 뻗지 않은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왕의 호위무사. 단혜림은 월병을 앞에 둔 채 가만히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승패의 전율에 도취 돼서 웃고 즐겼으니 이제는 방치해 두었던 현실의 문제를 풀 시간이었다.

소년은 말을 꺼내기 어렵다는 듯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우선은 사과부터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굳이 사과할 필요 없네. 사과할 일이 아니니.”

“경매의 흥에 취해 사전에 이야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배려가 부족했지요.”

“부리는 사람에게 모든 계획을 일일이 설명해나 하나? 그럴 필요는 없지.”

해석에 따라 꽤나 날카로운 의미로 들리는 말이었다.

하지만 단혜림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그녀의 눈빛은 고요했다.

소년은 낭패감과도 같은 표정을 드러냈다. 그것은 짓궂은 장난을 들킨 악동의 것과 닮아 있었다.

“이미, 알고 계셨군요? 하긴, 그렇지요. 단 호위께서 모르실 리가 없지요. 어수룩한 계획이었으니.”

“하지만 참신함과 즉흥성은 괜찮았네. 의외로 모략가로서 재능이 있더군.”

“단 호위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후궁을 휘어잡고 혀와 붓의 칼을 휘둘러 상대를 고꾸라뜨렸던 진짜 모략가의 칭찬에 소년은 볼을 붉혔다.

그 모습에 미소 지은 단혜림은 그녀가 간파한 소년의 계획을 낱낱이 까발려 그를 낯뜨겁게 하는 대신 그녀가 짐작하지 못한 것에서만 간략하게 질문했다.

“전하께선 경매를 포기하시어 금 오백 전을 절약하심과 동시에 경매를 주도한 책임자의 관심 또한 사로잡았지. 그자가 가죽을 들고 전하를 찾아올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지만, 그자에게 아무것도 내주지 않고 가죽만을 얻기는 힘들지 않겠나? 어찌 되었든 상대는 닳고 닳은 암시장의 사람일 텐데.”

“내주긴 내줄 겁니다.”

아무것도 내주지 않고 물건만을 얻겠다 하면 그건 강도 아니겠습니까?

소년의 말에 월병을 집어 든 단혜림은 빙긋 웃어 보였다.

“그렇다면 오늘 전하께선 날강도가 되시겠군.”

소년은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입에 월병을 쑤셔 넣고는 탁자에 널어두었던 거죽을 집어 들었다.

이젠 다시 노인이 되어야 할 시간이었다.

* * *

똑똑똑.

둔중한 소리로 허락을 구하는 상대에게 노인은 낮고 음산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입실을 허락했다.

“들어오시게.”

“실례하겠습니다.”

힘없는 인사와 함께 객실로 들어온 것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중년의 사내였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그를 맞이한 노인은 턱을 가볍게 까딱였다.

가까이 오라는 의미.

하지만 노인은 착석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중년인은 선 채로 노인을 마주해야만 했다.

“사죄하러 왔나?”

“예, 사죄드리러 왔습니다.”

“자네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노인의 태도에 중년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한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제법 체구가 좋은 중년인이 비켜서자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는 체구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 역시 낯익은 얼굴이었다.

“경매를 진행하던 처자구만. 경매는 마무리 짓고 온 건가?”

“1부를 마무리 짓고 왔습니다.”

“그래? 2부가 본 경매라 들었는데, 준비하느라 바쁘지는 않은가?”

“준비가 아무리 바빠도, 실수를 봉합하는 일보다 중요하지는 않죠.”

“처자의 실수인가?”

그것은 단순히 책임소재를 구분하고자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그 온화한 목소리에는 단호한 의사가 담겨 있었다.

실수를 사죄하는 것은 우두머리의 일이다. 그대가 암시장의 우두머리인가?

입술을 달싹이던 여인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예. 저의 실수입니다.”

“처자가 이 흑선의 선주신가?”

“흑선의 선주는 아니지만, 그 대리인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암시장의 주인은 아니지만, 경매장의 총책임자는 된다는 말이었다.

아직 볼에 젖살의 흔적이 남아 있는 앳된 여인이 맡기에는 지나치게 무거운 중책.

하지만 노인은 여인의 말을 의심하는 대신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사죄를 할 만한 자격이 있군. 사죄하겠나?”

“사죄드리겠습니다.”

“그것은 금 오백 전짜리 사죄인가?”

노인의 말에 여인은 생긋 웃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죄는 할지언정 성의 표시는 하지 않겠다는 여인의 대답에 노인은 과장된 태도로 섭섭함을 드러냈다.

“사죄는 허리와 고개만 고생하면 되니 아까울 것 없지. 하지만 성의를 보이려면 금 오백 전짜리 가죽을 내줘야 하니 아깝지. 아까울 수밖에.”

“세상에서 오직 손님께만 값어치 있는 가죽이지요.”

“그렇지. 오직 이 늙은이에게만 오백 전의 가치가 있는 가죽이지.”

그렇다면 자네가 생각하는 그 가죽의 값어치는 어느 정도인가? 털 결도 변변치 않고, 다 크지도 않은 새끼 호랑이의 가죽은.

여인은 자신의 답에 한 치의 의심도 없다는 투로 말했다.

“금 천 전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천 전! 경사에 고래 등 같은 저택을 올릴 수 있는 돈이군.”

“흑선의 사분지 일을 살 수 있는 돈이지요.”

“허어, 이 배를 건조하는데 사천 전이나 들었나? 확실히, 그 정도는 들여야겠군.”

그래, 오늘 이 늙은이를 등쳐 먹어 건조비용을 좀 충당해 보겠다? 이거 참,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데 당해주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노인은 몹시 처량한 얼굴로 객실의 천장을 올려다보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이 보잘것없는 늙은이에게 그런 돈이 어디 있겠나. 금 오백 전도 전 재산을 달달 긁어 마련해 온 거라네.”

“암시장은 굳이 현금만 고집하지 않습니다.”

“현물도 받나?”

“현물도 받지요.”

하지만 이 늙은이는 내줄 것이 없는데? 이 볼품없는 늙은이의 유일한 버팀목인 지팡이라도 내줘야 할까? 아니면 이 늙은이 고린내가 밴 가락지라도?

노인은 키득거리며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낀 반지며 팔찌를 여인에게 보여주었다.

여인은 그 찬란한 광채에 넋을 잃었다는 듯이 감탄사를 연발했다. 대단히 가식적인 감탄이었다.

그리고 노인은 가식적인 아양에 걸맞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탐색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네. 이 이상은 시간 낭비일 것 같으이.”

“실례지만 사람 무안 주시는 게 취미이신가요?”

“악취미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멈출 수가 없더군. 대단히 중독적인 재미가 있거든.”

여인은 잠시 샐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노인은 여인의 표정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다, 그 또한 의도된 것임이 분명했으니까.

그 증거로 여인은 노인의 얼굴에 일말의 변화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무의미한 시위를 즉각 중단했다.

이젠 이성적인 대화를 할 차례였다.

“우선 서로가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정리하고 넘어가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난 가죽을 원하네. 가능한 내 주머니에서 한 푼도 지불하지 않고. 사정이 있어 그 가죽이 꼭 필요하기는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깟 가죽 한 장에 돈을 쓰고 싶은 마음 따윈 추호도 없네. 사실 은전으로 서푼 한다고 해도 세 번은 고민해 봤을 게야. 그런데 오백 전? 천 전? 말도 안 되지.”

“전 손님께서 그 돈을 지불해 주시길 원합니다. 서로의 의견이 합치되질 않는군요.”

“지불 수단은 현금이어야만 하나?”

“금 천 전짜리 거래이니, 지불 수단은 손님께서 원하시는 거로 받도록 하겠습니다.”

금 천 전.

담담하게 말하려 애쓰고 있었으나 여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짙은 탐욕이 배어 있었다.

오백 전으로는 만족 못 하고 오백십 전을 원했던 탐욕.

이미 한차례 일을 그르쳤음에도 또다시 욕심을 부리고야 마는 아둔한 갈망.

그녀를 바라보는 노인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지불 수단은 뭐든지 받는 다라. 혹시 늙은이가 쌓아온 삶의 지혜는 어떤가? 요즘 젊은이들은 그 값어치를 몰라 나날이 가격이 떨어지고 있기는 하네만.”

“매력적이지만 조금 더 얹어주셔야겠습니다. 저도 요즘 젊은이인지라.”

“그럼 덤으로, 금전 천 전의 이문이 남을 만한 장사 제안은 어떤가.”

그것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금 천 전짜리 이문이 남는 장사.

어느 누가 그런 제안을 거절할 수 있을까. 여인은 물론 여인의 보좌관인 양 서 있던 바람잡이 대중조차 눈이 돌아갈 만한 제안이었다.

흥분으로 충혈된 두 쌍의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음 지은 노인은 힘겨운 동작으로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고는 노인의 말을 기다렸다.

“거래는 성사되었나?”

“성사되었습니다.”

여인은 바싹 긴장한 채 뒤에 서 있는 대중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여인의 신호에 대중은 허겁지겁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금전 천 전짜리 새끼 호랑이 가죽을 가져오기 위해서.

어느새 등허리가 축축하게 젖은 중년인의 등이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며 노인은 자신을 소개했다.

“이젠 정식으로 동업자 관계가 되었으니, 통성명을 해야겠지?”

서역에서 작게 무역상을 하던 승조라 하네. 잘 부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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