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46화 외전 40화
더운 바람이 면사 안쪽으로 훅 밀려온다. 피부에 들러붙는 습하고 밀도 높은 열기.
면사 안쪽으로 손을 넣어 땀을 훔친 태감은 숨을 몰아쉬고는 열기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무릎에 순금으로 된 뱀 머리 장식 지팡이를 올리고 방만한 자세로 앉아 턱을 괴고 있는, 검버섯 피고 주름진 거죽을 뒤집어쓴 노인으로 분장한 소년.
열기는 소년에게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백! 백이 나왔습니다!”
천진하게만 들리는 젊은 처녀의 활달한 목소리는 태감을 짜증스럽게 했다.
그저 경매를 진행한다는 것. 그리고 목소리가 지나치게 발랄하다는 것.
태감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죄를 물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축축한 목덜미를 쓸어 만진 태감은 무릎걸음으로 소년에게 다가와 그의 귀에 속삭였다.
“백이라는구나. 어쩌겠느냐.”
“십 더 올리지요.”
“그래.”
백십. 금으로 백십.
후궁 제일의 권력자이자 황실의 첩보 기관을 운영했던 태감조차 농담으로 입에 담을 수 없는 금액이었다.
금 백십 전.
제법 괜찮은 말 한 필을 구할 수 있을 만한 돈이었고, 이름난 명주를 궤짝으로 하나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노새나 다름없는 늙은 말이 아니라, 갈기가 잘 뻗고 몸이 날랜 준마 한 필을 살 만한 금액이구나.”
“그렇지요.”
소년은 단조로운 어조로 대답했다.
어조는 평이했지만, 태감은 소년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 가라앉은 눈동자, 기이한 각도로 찢어진 입꼬리와 가늘게 떨리는 송곳니는 소년의 내면에 억눌린 그의 분노를 말하고 있었다.
닥치는 대로 찢어 죽이고 난장을 피우는, 그런 폭력적인 불꽃 같은 분노가 아니었다.
잘 갈린 칼날처럼 날카롭고 서릿발처럼 차가운, 상대의 철저한 파멸을 원하는 냉혈한 분노였다.
분노가 도를 넘어, 되려 더 차분하고 온화하게 보이는 것이다.
태감은 자신의 등허리를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서늘하게 식었음을 느꼈다.
소년과 오래 친분을 유지해 왔지만, 태감은 단 한 번도 소년의 이런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기억하는 소년은 통쾌하리만치 화끈한 다혈질이었고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두 팔 걷어붙이고 달려드는, 그런 담백하고 시원한 사람이었다.
결코, 이렇게 소름 끼칠 만큼 저릿한 살의를 드러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마른침을 삼킨 태감 조심스럽게 입을 열려고 한 순간, 단상 위에서 놀라움에 가득 찬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백이십! 백이십입니다!”
금 백이십 전이라니.
태감은 황망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환호성이 들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 끝에선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중년인이 거만한 동작으로 손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중년인의 옷자락과 걸친 장신구를 대강 훑어본 태감은 혀를 차며 말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군. 저깟 새끼 호랑이 가죽에 금 백이십 전이나 되는 돈을 투자한다고.? 저 가죽에 그만한 가치가 있단 말이냐?”
“욕심이 과한 게지요.”
“욕심이 과하다고?”
“저 가죽의 값어치는 잘 춰줘 봐야 금전 한 닢 정도일 겁니다. 그것도 후하게 쳐준 것이지요. 제정신 박힌 놈 같으면 침이나 뱉고 발을 빼는 게 정상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물건의 값어치를 따져가며 돈을 지불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세상 살날은 얼마 없는데 미련은 너무나 많은, 미련한 늙은이들은 더욱 그러지요.
소년의 말에 태감은 그제야 소년이 분노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가, 경매장의 끄나풀이란 말이구나.”
“바람잡이라 해도 되겠고, 저희 쪽에서는 호구잡이 라고도 하지요.”
“호구잡이라?”
“예. 호구 하나 잡아서 탈탈 털어먹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보십쇼. 또 값을 올리지 않습니까.”
소년이 금 백삼십 전을 부르기가 무섭게 중년인 측에선 백사십 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을 이해한 태감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분기에 찬 신음을 흘렸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구나. 그저 귀중품을 사러 온 자라면 값이 커지면 발을 뺄 테지만, 사연이 있어 꼭 그 물건을 손에 넣어야 하는 자라면 억지로라도 돈을 내놓을 테지. 그런 이들을 골라 갈취한단 말이구나.”
“원래 이 바닥도 상도덕이란 게 있기 마련이지요. 적당히 받아먹으려 했으면 모른 척하고 그냥 내줬겠지만.”
사람 호구로 보고 이렇게 대놓고 등쳐 먹으려 들면…….
말끝을 흐린 소년은 태감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는 길게 입꼬리를 찢어 올렸다.
주름진 노인의 얼굴에 떠오른 흉소 위로 기운 달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얼굴의 윤곽선이 흐릿해지고 이목구비의 경계가 뭉개진 어둠 속에서 노회한 두 눈동자는 교활한 계략을 품은 채 빛나고 있었다.
“아주 작살을 내줘야지요.”
“작살이라. 황족의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말인지라 사용을 지양해 달라 말하고 싶지만, 그 강렬한 느낌은 무척 마음에 드는구나. 그래서, 어떻게 ‘작살’을 내줄 생각이냐?”
“옛날 성격 같았으면 일단 들이받았겠지만.”
“지금은?”
“제가 후궁에서 먹은 밥이 얼만데 그렇게 몰상식하고 난폭한 방법을 쓸 수는 없지요.”
이번엔 태감님께 배운 대로 해볼 생각입니다.
태감을 향해 손짓한 소년은 그의 귓가에 자신의 계획을 소곤거렸다.
소년의 말에 태감은 한기가 치민다는 듯 어깨를 떨며 말했다.
“자신이 칼을 쥐고 적을 치는 것은 무뢰배의 방식이고, 칼을 적의 손에 쥐여주고 자진하게 하는 것은 정치가의 방식이지. 참, 악랄한 계략을 생각해 냈구나.”
“보고 배운 선생이 원체 대단한 분이셔서 말이지요.”
“제대로 배웠구나.”
피식 웃은 태감은 중년인이 백육십 전을 부르는 것을 보고는 소년을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을 비죽인 소년은 신경질적인 태도로 손을 까딱였다.
백칠십 전.
경매 진행자는 열광적인 태도로 부르짖었고 그들을 바라보는 참관인들의 시선에는 열띤 흥분이 어린다.
고작 새끼 호랑이 가죽 하나에 거금을 거는 두 미치광이가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지.
열광에서 광란으로 넘어가는 분위기 속에서 태감은 그 뜨거운 시선에서 소년을 가리듯 몸을 숙여 소년의 귀에 입을 가까이했다.
면사로 가려진 입가에 그려진 미소는 짓궂은 것이었다.
“하지만 봉 취급당하는 것이 대단히 불쾌한 일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오늘은 유독 사납구나.”
“커흠.”
“이쪽 업계에 유난히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렇고. 혹시……?”
“뭐, 젊었을 때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실수지요. 한탕 해보겠다고 나섰다가 되려 돈만 까먹고 울상짓는.”
부끄러운 젊은 날을 회상하며 쓴웃음을 머금은 소년은 이를 악물고는 손을 들어 올렸다.
소년이 보내는 신호에 경매 진행자는 감격스러울 만큼 열렬한 환호성으로 답했다.
“이백! 이백 나왔습니다!”
* * *
경매 활동 보조인이라는 자기 기만적 호칭 대신 자신을 바람잡이라 소개하기를 즐기는 암시장의 종업원, 대중은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이마에 손을 짚었다.
하지만 그의 손아귀는 흥건하게 젖어 있었기에 그리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콧잔등을 적시는 땀방울을 거친 동작으로 훔친 대중은 혹시 자신이 눈을 감은 사이 낙찰이 되지는 않았는지 걱정하며 눈을 부릅떴다.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경매의 최고가는 자신이 부른 금액이었다.
금전 삼백사십 전.
대중은 자신이 부른 금액을 곱씹어보고는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금전 삼백사십 전이라니. 은전으로 환산하면 삼천사백 전이고 철전으로 환산하면 삼만사천 전이었다.
이런 기막힌 금액이라니!
대중은 등허리를 기어오르는 전율에 몸을 떨었다.
삼백사십 전. 경험 많은 바람잡이에겐 대단한 돈일 순 있어도 경악스러운 돈은 아니었다.
그가 참여했던 경매 중에는 오늘 오간 금액의 몇 배나 되는 돈이 오간 경매도 있었다.
금서로 지정된 경전. 운철로 벼려낸 명검. 서역에서 들여온 보석. 이름난 명인이 금분을 칠해 구워낸 도자기.
땀 흘려 일하는 서민들은 평생 구경도 못 해볼 온갖 사치품들.
지금 그가 바람을 잡는 것이 그런 물건이었다면 감탄은 했을지언정 경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수백 전의 금을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것은 다 자란 것도 아닌 새끼 호랑이의 가죽 한 장이었다.
이 무슨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아니, 조개에서 진주를 발견한? 어지러운 정신을 다잡으며 뜻밖의 행운에 관련된 관용구를 떠올리던 대중은 자신과 맹렬하게 경쟁하던 노인의 침묵이 길어짐을 깨닫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너무 올렸나? 역시 삼백 전 선에서 멈췄어야 했나?’
조금 전까지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던 폐부에 초조한 긴장이 들어찼다.
턱 끝까지 치밀어 오른 숨을 조금씩 내쉬며 대중은 신중한 동작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는 주름진 노인의 얼굴이 비쳤다.
노인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역시 삼백사십 전은 너무 과했던 걸까.
노인의 얼굴에 떠오른 갈등의 빛을 읽은 대중은 애타는 마음으로 노인을 재촉했다.
그리고 노인은 대중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아니, 어떤 의미로는 배신했다고 봐도 좋으리라.
노인의 삭정이처럼 메마른 손이 다섯 손가락을 편 채 허공에 들어 올려진 순간 대중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자, 손가락 두 개만 접고, 다시 한번 들어서 쭉 펴시면 됩니다. 혹시 두 번 들기 귀찮으시면 하나만 접으셔도 되고요.
실실 웃던 대중은 시간이 지나도 구부러지지 않는 노인의 손에 의아함을 느꼈다.
어, 설마? 혹시? 실소와 함께 웅성거림 속에 번진 의문이 점차 확신에 찬 것으로 변해갔다.
한참 동안 심호흡한 진행자는 믿기 어렵다는 투로 노인에게 물었다.
“오백 전, 맞으신가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침묵은 높은 확률로 긍정의 의미일 것이다.
얼떨떨한 얼굴로 노인의 손을 바라보던 진행자는 이내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며 출품된 물건의 최고가를 알렸다.
“오백! 오백 나왔습니다!”
오백 전! 새끼 호랑이 가죽 한 장에 오백 전이라니!
이 믿기 어려운 거금은 대중의 두개골 안쪽을 이리저리 튀어 다니며 그의 뇌를 뒤흔들었다.
멍하니 노인이 앉은 방향을 돌아보던 대중은 문득 오백 전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오백 전이 있다면? 매년 풍족한 수확물을 보장하는 기름진 옥토를 살 수 있을 것이다. 그것도 마당이 넓은 집까지 딸린.
아니면 훌륭한 배 한 척을 살 수도 있다. 나루터나 오가는 민망한 물건이 아니라 드넓은 대양으로 항해를 나갈 수 있는, 돛대가 세 개 이상 갖춰진 배를.
사람 한 명이 새 출발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 액수였다.
그 돈이 전부 자신의 것은 아니었지만, 대중은 충분히 기뻐할 수 있었다.
그의 상사는 인색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번 경매를 잘 마무리 짓는다면 뜨거운 치하와 함께 두둑한 금일봉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자꾸만 치밀어 오르는 입꼬리를 가다듬으려 애쓰며 낙찰이 선언되기만을 기다리던 대중은 상사의 눈동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은 경매가를 더 올리라는 신호였다.
“오백! 더 없으십니까!”
경매가 오백. 새끼 호랑이 가죽 한 장으로 그만하면 충분하지 않습니까. 여기서 더 부르란 말씀입니까?
대중은 떨리는 입술을 깨물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상도덕을 의심받을 만한 액수였다. 이 이상을 바란다면 과욕이다.
노련한 바람잡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의 상사는 다시 한번 그에게 신호를 보냈다.
대중은 거의 자포자기에 가까운 심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오백십! 오백십입니다!”
오백십.
지금까지 껑충껑충 뛰어올랐던 상승 폭에 비하면 무척 검소한 액수였다.
이는 대중의 양심의 한계선이며 배짱의 한계선이기도 했다.
백 전도 오십 전도 아닌 단 열 전. 바람잡이는 그 이상의 액수를 감당할 수 없었다.
대중은 간절한 기도 속에서 노인을 바라보았다.
제발 열 전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열 전만 더 불러주쇼. 제발!
* * *
“보십쇼. 더 부를 거라 했지요?”
“솔직히 처음에는 반신반의했다만, 정말로 오백 전으로도 만족을 못 할 줄이야.”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렇지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러다가 폭삭 주저앉고 나서야 땅을 치며 후회하지요.”
태감은 이쪽을 향하는 수많은 시선들 중 유독 절실한 시선을 찾아내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면사로 가렸음에도 그 유쾌함이 전해질 만큼 환한 조소였다.
그와 함께 낄낄거리며 입꼬리를 씰룩이던 소년은 진행자가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구부정하게 숙였던 허리를 곧게 세웠다.
아직 웃음을 멈추지 못한 태감은 끅끅거리며 소년에게 질문했다.
“이제 어쩔 셈이냐?”
“어쩌긴요. 경매가를 한껏 부풀려 놓았으니, 이젠 발을 빼야지요.”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바람잡이와 눈을 마주친 소년은 싱긋 웃고는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즐기며 소년은 명랑한 어조로 선언했다.
“포기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