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44화 외전 38화
“뜨거운 국물이라. 확실히 어느 때보다도 국물 한 모금이 간절하기는 하지만.”
지금 여기서 말이냐?
미심쩍다는 투로 물으며 태감은 한기가 스민다는 듯 팔짱을 꼈다.
비록 초여름에 가까운 늦봄이라고는 하나 한밤중의 호수는 그 자욱한 습기 탓에 뼛골이 저릴 만큼 서늘했다.
김이 펄펄 끓어오르는 뜨끈한 국물 한 사발 들이킬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으리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뜨끈한 국물 타령을 하기에는 장소가 좋지 않았다.
밀폐성이 강한 객실을 다시 한번 둘러본 후, 태감은 타이르는 투로 부드럽게 말했다.
“땔감이야 넘치도록 마련할 수 있지만, 불을 피웠다가는 질식하기 딱 좋은 구조구나. 국물을 데우기에는 어렵겠는걸.”
“국 한 그릇 데우는 데 큰불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저기 문짝 한 귀퉁이만 뜯어내면 저희 다섯이 모두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확실히, 문짝을 뜯어내면 통기성은 확보할 수 있겠군. 수리비도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을 테고.”
피식거리며 실없는 농담을 나눈 후, 소년은 두 번째 보따리를 상에 올렸다.
그 안에는 길쭉한 원통이 들어 있었다. 재질은 양철이었고 네 개의 걸쇠가 달려 있어 뚜껑이 꽉 닫히도록 정교하게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태감은 그것이 유목민들이 말젖이나 양젖을 받을 때 주로 사용하는 물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쉽게도 이 자리에 북방 유목민족 출신은 없는 것 같군요. 유목민족이 있었으면 대번에 어떤 요리인지 알아봤을 텐데.”
“유목민족 출신은 아니지만, 어떤 요리인지는 알 것 같구나.”
소년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깜빡이고는 입을 닫았다.
소년에게 설명할 권리를 넘겨받은 태감은 입술을 달싹이며 생각을 정리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춥고 눈이 많이 오는 북방에선 예로부터 뜨거운 국물 요리가 발달해왔지. 특히 유목민들은 뜨거운 국물 요리가 식지 않도록 보관하는 다양한 방법을 궁리해 왔는데, 다 끓인 탕을 포장할 때 뜨겁게 달군 기름을 국물에 붓는 방식이 가장 유명하다 들었다. 뜨거운 기름으로 기름층을 만들면 국물이 찬 공기와 닿지 않아 식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름기가 국물에 스며 더욱 고소하고 맛이 짙어진다고.”
“그 외에 달군 돌을 통 밑에 넣어 식지 않게 하는 방법도 있지요.”
태감의 설명을 이어받은 소년은 뚜껑을 누르던 걸쇠를 풀어 양철통의 내용물을 공개했다.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더운 김. 그와 함께 물씬 피어오르는 고소한 기름 냄새.
호기심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양철통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국물 위로 두껍게 뜬 노오란 기름층. 하지만 국자로 기름층을 살짝 걷어내면 뼈를 오래 우려낸 뽀오얀 진국이 드러났다.
그 속에 잠긴 양 뼈와 무르게 삶아진 무. 그리고 국물을 달구는 반질반질한 돌.
기름을 걷어낸 소년은 무 토막과 살점이 실하게 붙은 뼈를 건져 상에 올렸다.
“양육라복탕(羊肉蘿蔔湯)입니다.”
마지막으로 큼지막한 돌 한 덩어리까지 건져 올린 소년은 넌지시 그것을 태감에게 권했다.
육수에 젖어 반지르르 빛나는 돌을 보며 태감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인다만, 애석하게도 내 치아가 부실하여 그 별미를 맛보기 힘들 것 같구나. 장소나 이삼에게 주면 어떠냐? 돌도 씹어먹을 나이이니.”
“허허, 역시 아이들을 먼저 챙기시는군요. 자, 사이좋게 나눠 먹으렴.”
아이들에게 맛좋은 건더기를 떠넘긴 태감은 말갛게 웃고는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한술 떠올렸다.
기름을 걷어낸 국물은 그윽한 우윳빛이었다.
굵은 후추 알갱이와 파 한 줌이 흩뿌려진 국물을 앞에 두자 차갑게 식은 위장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배에 손을 얹은 태감은 위장을 달래며 입김을 불었다. 국물은 후후 불어 식히지 않으면 입술을 대지 못할 만큼 뜨거웠다.
‘조금만 기다려라. 곧 후끈하게 데워줄 테니.’
위장의 재촉을 받으면서도 태감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습기 찬 밤공기를 달구는 국물의 열기가 한 김 식을 때까지 충분히, 여유를 가지고 기다린 끝에 국물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가늘어지자 태감은 신중한 동작으로 입을 열었다.
한밤의 습습한 냉기가 응어리진 입술에 더운 열기가 흘러 들어간다.
혀를 데우고, 입안 전체를 가득 채운다. 입안에 담아두었던 열기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쯤, 태감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후우.
달아오른 숨을 내쉰 태감의 볼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밤중의 배 위에서 마시는 뜨끈한 탕이라. 이 사발 가득 황금을 담아준다 해도 이보다 기쁠 수는 없을 것이다.”
뜨끈하고 그윽한, 입술이 쩍 달라붙을 만큼 진한 국물 한 모금은 습기에 짓눌려 찌뿌둥해진 몸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삐걱거렸던 관절이 부드러워지고 무거웠던 어깨도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끼며 태감은 경쾌한 동작으로 국물에 담가진 건더기를 집어 들었다.
뼈 토막에 두툼하게 붙은 고깃점. 그것을 본 소년이 웃음을 터뜨렸다.
“갈자(蝎子)를 집으셨군요.”
“갈자? 전갈 말이냐?”
“예. 양의 등뼈가 꼭 전갈과 닮았다 해서 양갈자(羊蝎子)라 하지요. 저 북방에서는 옛날부터 양 등뼈를 푹 끓여 전골을 만들어 먹는데 골즙이 진하게 우러난 그 국물맛이 일품이지요.”
마른 고추에 계피, 천초와 통후추, 생강 등의 약재를 달인 국물에 양 등뼈를 푹 삶아 먹는데 땅콩장에 간 마늘을 섞어 만든 양념에 찍어 먹으면, 부들부들한 양고기에서 배어 나온 감칠맛과 땅콩장의 텁텁하고 구수한 맛, 마늘의 아릿함이 섞여 겨울철 최고의 별미가 되지요.
소년의 설명에 군침을 삼킨 태감은 젓가락 대신 손으로 등뼈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뼈에 붙은 고기가 가장 맛있다는 고금동서를 막론하는 진리가 또다시 입증되는 순간이었다.
등뼈에 붙은 살점을 앞니로 뜯는 순간 태감은 반석과 같은 믿음으로 진리를 추종하게 되었다.
뼈에 붙은 고기. 결대로 찢어지는 그 야들야들한 살코기와 쫄깃한 근막. 씹으면 담뿍 배어 나오는 육즙.
사람을 열렬한 신봉자로 만드는 맛이었다.
“고기도 좋지만, 무도 맛이 좋습니다. 푹 익어 흐물흐물한 무도 좀 드셔보시지요.”
편식하지 말지어다.
태감은 어쩐지 그의 말이 경건하게 들린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 보편타당한 진리였다. 편식하지 말고, 골고루 먹어야 건강하다. 그리고 진리의 추종자인 태감은 기쁜 마음으로 소년의 말에 따랐다.
젓가락으로 집으면 자신의 무게 때문에 스르륵 잘릴 만큼 부드럽게 익은 무.
골수와 고기에서 우러난 진한 육즙이 흠뻑 스며든 그 촉촉한 무 한 토막.
그 달콤한 한 토막은 긍지 높은 육식주의자조차 잠시 자신의 신념을 내려놓게 했다.
뜨거운 양고기탕 한 사발이 모두에게 돌아가자 무겁게 젖어 있던 방 안의 공기에 훈훈한 온기가 감돌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더운 땀을 흘리는 이들을 돌아본 소년은 텅 빈 찬합의 첫 번째 단을 들어 올렸다.
“자, 몸도 데우셨으니 슬슬 다음 단을 열어볼까요?”
* * *
두 번째 단을 가득 채운 것은 새콤하고 매콤달콤한 칠리소스를 몸에 입은 오동통한 칠리새우였다.
세 번째 단을 채운 것은 질긴 힘줄이 연하고 쫀득해지도록 충분히 삶아 식힌 오향장육. 네 번째 단은 서태후도 감동했다는 섬서의 닭요리 반로계(半爐鷄).
다섯 번째 단에는 달착지근한 간장양념에 졸인 입에서 살살 녹는 돼지고기 완자요리 홍소사자두(紅燒獅子頭).
옻칠 찬합에 정갈하게 담긴 요리는 하나같이 맛이 좋을 뿐만 아니라 양까지 넉넉하여 다섯이 나눠 먹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찬합의 마지막 단에 든 것은 식사를 마무리할 달콤한 후식이었다.
과일을 넣은 새콤달콤한 한천 젤리와 호박과 밤으로 만든 양갱. 그리고 속을 발라낸 뒤 인삼과 잣을 넣어 꿀에 절인 대추.
아이와 어른 양쪽을 모두 만족시키는 배려심 깊은 차림이었다.
“귀하기는 인삼과 잣으로 속을 채운 대추가 더 귀하겠다만, 입에 달기는 젤리가 더 달구나.”
“아직 몸에 좋은 거 찾으실 나이는 아니시지 않습니까. 입에 맞는 걸로 드십시오.”
쓰게 웃으며 대추 한 알을 입에 넣은 소년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탁자에 내버려 두었던 인피면구를 집어 들었다. 이제 다시 노인이 될 시간이었다.
태감의 옆에서 과일 젤리를 집어 먹던 장소와 이삼이 소년의 분장을 거들기 위해 다가왔다.
인피면구를 고정하기 위해 접착력이 강한 연고를 치덕치덕 바르고, 그 위에 주름진 거죽을 늘여 붙인다.
낑낑거리며 주름진 가죽과 악전고투를 벌이는 소년을 가만히 지켜보던 태감은 입에 든 것을 삼킨 후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히 고생스럽다면, 경매에 참여하지 않고 그대로 흑선을 떠도 괜찮다.”
사정상 일찍 떠나야 하는 이들을 위해 따로 배가 마련되어 있다는구나.
태감의 말에 신경질적으로 이마에 거죽을 붙이던 소년이 고개를 틀었다.
코를 기준으로 반은 늙고 반은 어린 그 모습은 실소를 흘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괴상망측했다.
비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잡아 누르며 숨죽여 웃은 후,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은 태감은 소년의 모습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뱃사공을 포섭하여 흑선의 정박지를 알게 되었으니, 굳이 위험을 감수하며 흑선의 수뇌부와 접선하여 정보를 빼낼 필요가 없어졌다. 암시장의 흑선이 정박하는 곳이 곧 암시장의 수뇌부가 있는 곳일 테니.”
정보가 필요하다면 수뇌부를 직접 치면 될 일이지.
태감의 호쾌한 제안에 잠시 혹한다는 표정을 지은 소년은 이내 혀를 깨물고는 태감의 제안을 반박하기 위한 궁리를 시작했다.
“수뇌부를 습격하기에는 인원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영리한 토끼는 굴을 세 개 파두는 법입니다. 암시장의 수뇌부가 탈출구 한둘 마련해놓지 않았을 거라 기대하는 것은 지나치게 낙관적인 생각일 것 같은데요.”
“물론, 손을 쓴다면 많은 인원을 동원해 단번에 몰아쳐 일망타진해야겠지. 잡음이 생기지 않게 하려면.”
태감은 손으로 무언가를 콱 움켜쥐는 시늉을 해 보였다. 마치 매가 토끼의 목덜미를 잡아채는 듯한 동작이었다.
“대규모 작전이 되겠지. 개미 새끼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완전히 포위하고, 숨통을 틀어쥐어야지. 정보를 토설할 수밖에 없도록.”
“하지만 그만한 인원을 동원하려면 군의 협력을 받는 수밖에 없을 텐데요? 이번 일이 관리들의 이목을 끌지 않도록 은밀하게 행해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태감님 아닙니까.”
그만한 인원을 비밀스럽게 동원하실 수 있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소년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태감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년은 불길한 한기가 등허리를 기어오른 듯한 느낌에 몸을 뒤틀었다.
“동원할 수 있다.”
“섬 하나를 포위할 만한 인원을 말입니까? 단순히 머릿수만 채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돈푼 쥐여주면 따라올 파락호들을 동원한다고 해결될 일이…….”
“제대로 훈련을 받은 이들이다. 적어도 다섯 가지 이상의 무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고, 필요하다면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들라는 명령도 수행할 수 있을 만큼 충직한 이들이.”
다섯 가지 이상의 무기를 다룰 줄 알 것.
그만한 인재를 찾는 것은 무의 나라 제국에선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충성심이라니.
고개를 갸웃하던 소년은 이내 태감이 말하는 조건을 충족하는 이들이 있음을 깨닫고는 신음을 흘렸다.
“동창의 무력부대를 동원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래. 동창의 무력부대라면 충분히 조건이 되지.”
“그야 그렇겠지요.”
동창의 무력부대. 그 이름 앞에서는 소년도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소년이 원하는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이들이었으니까.
결국, 소년은 태감의 제안이 합리적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굳이 배에 오를 필요도 없었군요. 이미 왕일 그 친구를 포섭한 것으로 저희가 할 일은 마무리되었으니.”
“배에 오를 필요는 있었다. 흑선의 규모를 알아야 동원할 인력을 가늠하지 않겠느냐.”
“가늠이 되십니까?”
태감은 단조로운 동작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태감에게 답을 얻은 소년은 볼에 반쯤 붙어 있던 인피면구를 떼어내고는 부루퉁한 얼굴로 태감의 제안을 곱씹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아니, 자신이 인피면구를 쓰고 광대 노릇 할 수고를 덜었으니 그만하면 퍽 훌륭한 제안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대로 동창에 일을 떠넘기고 남는 시간은 동정호의 명소를 구경 다니며 웃고 떠들다가 왕부로 복귀한다면 참 뜻깊고 알찬 여행이 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후, 소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태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는 소년에게 물었다.
“내키지 않느냐?”
“생각해 보니, 경매에 꼭 참석해야 할 이유가 있더군요.”
“사야 할 물건이 있느냐?”
“예. 있습니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담담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단혜림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허리춤에 찬 검과 굳은살 박인 손. 그리고 고요히 가라앉은 그녀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본 후, 소년은 경매에 참석해야만 하는 이유를 입에 담았다.
“아직, 홍문에서의 일이 끝나지 않았더군요.”
그 일을 마무리 짓지 않으면 영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