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43화 외전 37화
사려 깊은 밤바람의 숨결을 받으며 배는 미끄러지듯 동정호의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젊은 뱃사공이 노를 저을 때마다 수면을 수놓던 별빛, 달빛이 산산이 부서졌다.
밤을 머금은 수면의 일렁임을 물끄러미 보던 노인은 드리운 어둠 너머에서 흐릿하게 비치는 불빛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른거리며 눈을 어지럽히는 도깨비불도, 여름밤에 춤추는 반딧불이의 반짝임도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 밝힌 불이었다.
점차 가까워질수록 뚜렷하게 보이는 수천 개의 불빛. 불순하고 불온한 무리를 환영하는 수천 개의 등불.
그것은 어둠 속에서 탐욕스럽게 아가리를 벌린 짐승의 눈과도 같았다.
“다 왔군.”
암시장에 왔어.
노인의 중얼거림과 함께 별빛 빛나는 수면을 가르며 거대한 배의 이물이 나타났다.
뱃전에 수천 개의 홍등을 내건 암시장의 흑선.
그것은 너무나 거대했기에 사람이 만든 인공물이라는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오만하게 치솟은 선수는 그 끝이 너무나 높아 마치 절벽을 올려다보는 위태로움을 느끼게 했고, 하늘을 찌를듯한 돛대는 장정 셋이 달라붙어도 다 안지 못할 만큼 굵어 보였다.
도대체 어떤 나무가 이 배의 돛대가 될 수 있었을까. 저 거대한 돛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천이 필요했을까.
감탄사를 흘리던 노인은 뒤를 돌아 젊은 뱃사공을 향해 말했다.
“참으로 거대한 배로군. 악양루가 통째로 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자네의 비유가 이제야 이해가 가. 암시장만 아니라면 동정호의 새로운 명물이 되었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노인의 질문에 노를 움켜쥐고 있던 왕일은 조금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건조한 대답이었다. 무성의하고 무의미한, 그저 응대하기 위해 건성으로 지껄인 대답.
노인은 자신과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는 젊은 뱃사공을 지긋이 보고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왕일. 내가 한 말 기억하고 있나?”
노인의 담담한 질문에 흠칫 놀란 젊은 뱃사공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배의 이물에 선 채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왕일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 그렇다면, 자네가 해야 할 일 또한 알고 있겠지?”
입술을 달싹이던 왕일은 차마 입을 열지는 못하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는 왕일을 향해 손짓했다.
불안과 근심으로 굳어진 채 서 있던 왕일은 생기 없는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던 노인은 손을 들어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약속하지. 자네가 위험에 처할 일은 없을 걸세.”
만약 일이 끝나고 나면 자네에게 크게 사례하지.
노인의 말에 왕일은 자신도 모르게 품에 넣어둔 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노인에게 받은 주머니는 작지만, 손아귀에 가득 찰 만큼 무거웠다.
왕일의 떨림이 멎은 것을 확인한 노인은 주름진 입가를 쓸어 만지며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왕일. 할 수 있겠나?”
“하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일세.”
왕일은 대답하는 대신 배의 고물로 돌아가 노를 힘껏 움직였다. 앞으로 나아가는 동작이 아닌, 배를 멈춰 세우는 동작이었다.
갑작스러운 제동에 배가 출렁거리자 노인은 뱃전을 움켜쥐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흑선의 선체가 지척에 다가와 있었다.
배가 요동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왕일이 흑선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흑선에서 승강기가 내려올 겁니다.”
“호오, 승강기가 있나?”
“예, 도르래로 움직이는 승강기가 흑선에 설치되어 있습니다.”
“나 같은 늙은이들에게는 고마운 배려로군. 젊은이들이야 밧줄 하나만 내려줘도 날래게 타고 올라가겠지만, 늙은이들에게는 버겁지.”
노인의 너스레에 간신히 웃어 보인 왕일은 배의 고물에 걸어두었던 등을 들어 흑선의 갑판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몇 차례 등의 불빛을 가려 신호를 보낸 왕일은 도르래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듯이, 흔들리는 젊은 뱃사공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노인은 입을 열었다.
“덕분에 즐거웠네, 왕일.”
이만 가보게나.
부드러운 웃음으로 젊은 뱃사공을 등 떠밀어 보내며, 노인은 꼿꼿이 선 채 승강기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승강기가 멈춰 서자 노인은 자신의 나이를 잊은 것처럼 가벼운 동작으로 승강기로 건너뛰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은 노인이 풀쩍 뛰어오르자 왕일은 폐부를 쥐어짜는 것만 같은 비명을 토해냈다.
‘조심하십시오’라고 외쳐야 했을까. 아니면,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
화려한 모피를 두른 노인의 노쇠한 등을 바라보며 갈등하던 젊은 뱃사공은 자신도 모르게 마음에도 없던 말을 꺼내놓고야 말았다.
“잘, 다녀오십시오?”
기대하지 않았던 배웅에 놀라움을 들어낸 노인은 이내 쇠를 비트는 것만 같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껄껄 웃고는 뱃사공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경쾌하고 힘 있는 동작이었다.
“그래, 다녀오겠네. 다음엔 낮에 보세나.”
낮의 동정호도 밤의 동정호만큼 아름답겠지? 낮에 보거든 뱃놀이 좀 부탁하네.
가가대소하는 노인의 주위로 수행원들이 그를 둘러싸듯이 서자 왕일은 다시 등불을 들어 흑선에 신호를 보내었다.
깜빡. 깜빡. 깜빡.
손님이 탑승을 완료했다는 신호에 도르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하는, 순간 등허리에 소름이 쭈뼛 돋게 만드는 흔들림. 그리고 부유감과 함께 승강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승강기에서 내려 흑선의 갑판을 밟은 노인은 고개를 들자마자 깊은 한숨과 함께 피로감을 드러내어 마중 나온 안내인을 당혹스럽게 했다.
정중한 인사와 함께 선내에 마련된 각종 유흥시설을 권하려 했던 안내인은 결국 도박장이나 창관 대신 객실로 노인을 안내해야만 했다.
“그럼 경매장이 개장할 때까지 쉬실 곳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그럼 고맙겠군. 나이 때문인지 잠기운이 쏟아지는구먼.”
안내인은 노인을 갑판 아래의 객실로 안내했다.
선박이라는 특성상, 그리고 주목적이 여객선이 아닌 암시장 흑선의 객실이야 말 그대로 눈만 잠깐 붙일 수 있을 만큼 협소한 공간일 것이다.
그런 예상을 품은 채 객실에 들어선 노인은 자신의 예상이 기분 좋게 빗나간 그 화사한 공간에 탄성을 질렀다.
“이거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잘 꾸며두었군?”
다섯 명이 전부 들어와도 불편함이 없을 만큼 넓은 객실에는 족히 셋은 누울 만큼 큼직한 침상은 물론 사람 수대로 준비된 의자와 탁자가 준비되어 있었다.
심지어 탁자에는 우아한 난초 한 송이가 꽂힌 화병까지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노인의 탄성에 마음이 놓였는지 안내인은 은은한 웃음을 머금고는 허리를 깊게 숙였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그리고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 저를 불러주십시오.”
“고맙네. 일이 있으면 찾을 테니 자네도 쉬고 있게나.”
젊은이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노인 특유의 고집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안내인을 내보낸 후, 방 밖으로 발걸음이 멀어지고 나서야 노인의 입에선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면사를 쓰고 있던 젊은 사내의 입에선 담백한 위로의 말이 흘러나왔다.
“고생 많았다.”
“태감님도 노인네 수발드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내가 무슨 고생을 했다고. 수고야 단 호위랑 애들이 다 했지.”
“그건 그렇지요.”
낄낄거리던 노인은 자신의 주름진 뺨 거죽을 떼어내고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뺨에서, 콧잔등과 이마에서. 목덜미에서 한 움큼씩 거죽을 떼어낸 끝에 본래의 얼굴을 되찾은 소년은 진저리가 난다는 듯 혀를 차고는 뺨에서 떼어낸 인피면구를 탁자 위에 내던졌다.
축축하게 젖은 인피면구에서 피어오르는 더운 김에 태감은 혀를 내두르고는 소년에게 약속했다.
“내 반드시, 동창의 기술자에게 네 건의사항을 전달하마. 인피면구를 만들 때 조금 더 사용자의 편의성을 고려하길 바란다고.”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러다가 애먼 사람 잡을지도 모르니.”
소년은 그 애먼 사람이 누가 될지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태감 역시 묻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둘의 마음이 통했음은 분명했다. 태감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으니까.
소매로 땀을 훔친 태감은 씨근거리던 소년의 입에 점잖은 침묵이 돌아올 때쯤 헛기침으로 탁자에 둘러앉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자축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암시장의 흑선에 잠입했음은 물론 흑선의 정박지를 아는 뱃사공을 포섭할 수 있었으니 이만하면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하기엔 충분하겠지.”
“예정에는 없던 성과였지요.”
소년은 쓰게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 뱃사공을 포섭하는 것은 순전히 소년의 독단이었다.
태감의 지시 없이 일을 저지른 것에 대한 사과와 그런데도 자신을 믿고 제지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한 후, 소년은 단혜림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물론 변명이 필요하겠지요. 하지만 따분한 변명이나 늘어놓고 있기에는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군요.”
주어진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하자는 소년의 제안에 태감은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럼 어찌하면 좋겠느냐?”
“경매는 배짱 싸움입니다. 그런데 배가 비어서야 배짱을 부릴 수 없지요. 그러니 남는 시간 동안 가볍게 배를 채우는 게 어떨까 하는데, 태감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감탄스러울 만큼 합리적인 제안에 대한 태감의 답은 대단히 열정적이고 극렬한 것이었다.
열화와 같은 태감의 지지를 받으며 단혜림에게 보따리를 받아든 소년은 힘겨운 동작으로 그것을 탁자 위에 올렸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먹으면 얹히기 쉽지요. 천천히, 꼭꼭 씹어서 드십시오.”
말을 꺼낸 직후 소년은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 중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은 이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개탄하며 보자기를 풀었다.
이중으로 엄중히 묶은 보자기가 풀어지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찬합이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우아한 광택이 흐르는 옻칠한 찬합은 총 십 단이었으며 단마다 다른 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과연 어떤 음식이 첫 단을 장식하고 있을까. 연잎으로 싸 찐 연잎찜일까. 아니면 식어도 맛좋은 튀김?
어쩌면 식사의 시작을 알리는 새콤한 냉채 요리일지도 모른다.
기대감을 담아 찬합의 뚜껑을 열여 젖힌 태감은 그 속을 들여다보고는 달뜬 숨을 몰아쉬었다.
“역시, 냉채 요리였군.”
“처음은 산뜻하고 가벼운 요리가 좋지요. 돼지 콩팥을 실처럼 가늘게 썰어 맵게 무친 섬서의 전통요리 온반요사(溫拌腰絲)입니다. 원래는 뜨겁게 먹는 요리지만, 차게 먹는 것도 나름 별미지요.”
온반요사는 돼지의 콩팥을 가늘게 썰어 산초와 생강에 무쳐낸 요리로 맛이 일품일 뿐만 아니라 방광 기능을 원활하게 하고 기침을 멎게 하며, 허리와 무릎을 따뜻하게 하는 효능이 있어 예로부터 섬서에서 귀한 음식으로 대접받아 왔다.
젓가락을 나눠준 소년은 요리 위에 참기름을 살짝 뿌리고는 고루 뒤섞어 앞접시에 덜었다.
코를 찌르는 고소한 기름 향기. 그 속에 섞여 은근하게 침샘을 자극하는 아릿한 산초향. 그 알싸한 향기에 군침을 삼킨 태감은 가늘게 썰린 콩팥을 듬뿍 집어 올렸다.
“콩팥이라. 평소 자주 먹게 되는 부위가 아니어서인지, 무척 설레는구나.”
과연 어떨까. 고기와 같은 쫄깃한 식감일까. 아니면 내장 특유의 탄력 넘치는 식감일까.
태감은 메마른 입술을 핥고는 입을 크게 벌렸다. 혀끝에 와 닿는 서늘한 감촉. 그리고 목구멍을 간질이는 톡 쏘는 알싸한 향.
그와 함께 이빨을 타고 전해지는 아삭함.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그 생소한 식감에 소스라치게 놀란 태감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피식 소리를 내며 웃었다.
“독특한 식감이지요? 평소 드시는 고기와는 다르게.”
“무척 신기한 식감이구나. 아삭 하다고 해야 할지, 서걱서걱 하다고 해야 할지.”
“콩팥은 참 다재다능한 식재료지요. 조리법에 따라 간처럼 부드럽게 뭉개지기도 하고, 염통처럼 쫀득하기도 하고. 이렇게 닭 모래집처럼 단단하게 씹히기도 하지요.”
차가운 물에 담가 핏기를 빼내고 생강과 식초 물에 절인 다음 살짝 삶아 차게 식히면 이런 아삭한 식감을 살릴 수 있지요.
정성스러운 설명에 감탄하는 척하며 태감은 열심히 젓가락을 놀려 콩팥의 그 간드러진 식감을 탐닉했다.
앞에 놓인 요리를 먹는데 바쁜 청중들을 보며 김이 샜다는 듯 입을 비죽거린 소년은 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제 냉채를 드셨으니, 다음 요리로 넘어갈 차례군요.”
“그래, 상큼한 냉채로 입맛을 다셨으니 이제 배를 채울 차례지.”
이제야 기대와 관심을 보이는 태감을 흘겨본 소년은 이내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는 짓궂은 어조로 말했다.
“예, 냉채 요리로 속이 차가워졌을 테니, 이번엔 뜨끈한 국물 요리로 속을 데워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