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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42화 (243/314)

환관의 요리사 242화 외전 36화

제국 최대의 담수호. 동정호의 수면에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서서히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는 태양은 너무 짧은 하루를 아쉬워하는 이들의 등을 부드럽게 떠밀고 있었다.

뱃놀이를 즐기러 나온 부호들. 배를 모는 뱃사공들. 그리고 부두에서 장사하는 장사꾼들과 하역장에서 일을 끝마친 일꾼들.

만선의 기쁨을 누리며 돌아온 어부들은 점차 묽어지는 황혼의 채근을 받으며 부산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마침내 하루를 빛내느라 지친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고개를 떨구고, 붉게 타오르던 동정호의 수면 위로 창백한 달이 떠올랐다.

따스한 온기를 품지 않은 차가운 빛. 시린 달빛이 부둣가에 길고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고된 노역을 마치고 하루 치 삯을 받은 부두의 노동자들이 창부와 노름꾼에게 자신의 피땀을 헌납하러 떠났기에 부두는 쓸쓸하고 적막했다.

하지만 부두는 곧 새로운 손님들을 맞이해야 했다.

부지런한 어부들과 뱃사공들이 모두 배를 정박하고 돌아간 시간. 그제야 어슬렁거리며 나온 이들.

그들 역시 뱃사공이었다. 낮에 일하는 이들과는 다른, 불건전한 업종에 종사하는 뱃사공.

그리고 그들을 찾는 손님들 역시 대낮에 떳떳하게 얼굴을 내놓고 돌아다닐 수 없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불순하고 불온한 무리. 그 부도덕함을 꾸짖을 태양이 부재중인 밤하늘 아래에서 뱃사공들은 밤 뱃놀이를 즐기러 나온 손님들을 맞이했다.

지나치게 몰개성한 이름이었기에 늘 불만족스러워했지만, 자신을 소개할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기에 자신을 왕일이라 소개하는 젊은 뱃사공 또한 그런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대단히 수상쩍거나, 혹은 자신의 부를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은 이들.

왕일은 개인적으로 후자의 손님을 더 좋아했다.

전자의 손님은 왕일이 아무리 친절한 봉사 정신으로 대접해도, 가끔 자신의 머리에 의외로 문학적 천재성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만큼 유쾌한 농담을 던져도 과묵하게 입을 닫은 채 인사 한마디 없이 떠나버리지만, 후자의 손님은 비위만 조금 맞춰 주면 곧잘 웃어줄 뿐만 아니라 때론 두둑한 봉사료를 챙겨주기 때문이었다.

과연 오늘은 어떤 손님이 오실까. 저번에 오셨던 손님은 참 괜찮았는데.

왕일은 배의 밧줄을 매어놓는 말뚝 위에 걸터앉아 손님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달은 높이 떴고, 밤바람은 잔잔했다. 왕일은 이지러진 달이 물결치는 수면을 보고는 오늘 밤 항해가 순조로우리라 짐작했다.

“뉘신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오실 손님들은 횡재하셨군.”

“허허, 그런가?”

가래가 낀 듯 쿨럭거리는 기침이 섞인 목소리에 왕일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간을 떨어지게 만든, 그가 기다리는 손님이 그곳에 있었다.

놀란 가슴에 손을 얹으며 뒤돌아선 왕일은 자신을 바라보는 손님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피식 미소 지었다.

손님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횡재할 것 같다는 예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그를 부른 사람은 세상 모든 부호가 한 번씩 거쳐 간다는 동정호에서 다년간 배를 몰아온 왕일도 짐작하기 어려운 부로 몸을 치장한 노인이었다.

제국산이 아닌 서역에서 들여온 것이 분명한 자주색 비단옷에 주름진 목이 지탱하기엔 너무 버거워 보이는 금목걸이. 앙상한 팔목에 부담을 주고 있음이 명백한 온갖 팔찌. 상아로 치장한 혁대.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압권인 것은 힘겹게 장신구의 무게를 버티고 있는 노인을 지탱하는 지팡이였다.

‘세상에, 지팡이 손잡이 저거 순금으로 만든 건가? 만든 솜씨는 대단하지만…….’

독니를 바싹 드러낸 독사의 머리 모양으로 세공된 지팡이 손잡이는 보편타당한 심미안을 가진 왕일에게는 대단히 악취미적으로 보였다.

자신의 눈이 촌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노인의 취향이 지나치게 전위적인 것인지 고민하던 왕일은 자신이 아직 대답하지 않았음을 깨닫고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오늘 손님을 모시게 된 왕일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하네, 왕일. 그런데 아까 한 말은 뭔가? 횡재했다니?”

“오늘은 달이 아주 밝고, 수면이 잔잔하더군요. 달빛에 빛나는 동정호의 풍경은 환한 낮에 보는 것과는 다른 맛이 있지요.”

“그렇다면 이 노인네가 횡재한 것이 맞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웃은 노인은 느릿한 동작으로 품 안에서 표를 꺼내 왕일에게 건네었다. 표는 전부 다섯 장이었다.

공손히 표를 받아든 왕일은 확인 절차라는 것을 강조하는 표정으로 노인에게 질문했다.

“뒤에 분들은 일행이신가요?”

“이 노인네가 거동이 좀 불편해서, 수발을 들어주는 친구들이라네.”

시동으로 보이는 아이 둘. 호위무사로 보이는, 검을 찬 여성. 그리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

노인의 수행원인듯한 네 명은 전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왕일은 주의 깊게 수행원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지 않도록 시선을 움직였다.

왕일의 행동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본 노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당겼다.

젊은 뱃사공의 가슴에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동작이었다.

“이 일이 무척 익숙한가 보군.”

“배를 탄 지는 십 년. 그리고 이쪽에 발 담근 지는 오 년이 좀 넘었습니다.”

“혹시 손님의 신상명세에 관심을 가져 호되게 데인 적이 있나?”

“그럴 일이 없도록 늘 조심하고 있습니다.”

왕일은 쾌속한 동작으로 한쪽 발을 자신의 배에 내디딘 다음 부두와 배 사이에 널빤지를 설치했다.

그러고는 가장 자신 있게 선보일 수 있는 미소를 지으며 손님들께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아 드리겠습니다.”

“허허, 고맙네. 아, 저 아이들은 괜찮아. 검을 찬 아가씨도. 맨 마지막에 타는 젊은이만 잡아주게.”

조심스럽게 노인을 배의 중앙에 앉힌 왕일은 자신의 도움도 없이 폴짝폴짝 건너오는 아이들과 성큼성큼 건너오는 여인의 균형감각에 혀를 내둘렀다.

남은 것은 젊은 사내, 한 명뿐이었다.

사내의 손을 잡은 왕일은 그의 손이 무척 부드럽다는 사실과 함께 검지 옆쪽에만 굳은살이 박인 것을 확인했다.

업종 상 수많은 이와 손을 마주 잡아야 하는 왕일은 직감적으로 사내가 어떤 업종에 종사하는지 깨달았다.

그와 동시에, 그런 사내를 거느린 노인이 어떤 사람인지 또한.

붓대를 하도 굴려 검지에 굳은살이 박인 사내와 그런 사내를 부리는 노인.

단순히 썩어 넘치는 돈을 자랑하고자 하는 졸부라면 먹물 냄새 물씬 나는 문사를 거느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일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부두의 말뚝에 매어둔 밧줄을 풀었다.

숨결과도 같은 밤바람이 그의 배를 부드럽게 떠밀었고, 손님을 태운 배는 소리 없이 동정호를 향해 미끄러졌다.

엄청난 거물을 태웠다는 확신에 잔뜩 긴장한 젊은 뱃사공의 기대감과 함께.

* * *

왕일의 장담대로였다.

한밤중의 항해는 쾌적했고 달빛이 비치는 동정호는 아름다웠다.

창백한 빛무리가 드리운 그림자는 동정호의 이름난 명소를 여름밤의 꿈처럼 몽환적으로 일그러뜨렸다.

수면 위에서 일렁이는 악양루를 보던 노인은 노 젓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한 뱃사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네의 말이 맞군. 큰 횡재를 했네. 한밤중의 동정호는 한낮의 동정호보다 아름답군.”

“손님께서 기쁘시다니 저도 기쁩니다.”

노를 젓는 와중에도 왕일은 겸양의 태도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노인의 얼굴에 만족의 표정이 떠올랐는지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노인은 악양루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배의 고물에서 노를 젓고 있는 왕일은 노인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 왕일의 아쉬운 속내를 듣기라도 한 것처럼, 노인은 시선을 왕일에게로 돌렸다.

검버섯 핀 입가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이 일에 종사한 지 오 년이 넘었다 했나? 배를 탄 지는 십 년이 넘었고?”

“예, 손님.”

“오 년의 경력은 동정호에서 쌓은 것일 테고, 그 전의 오 년은 어디서 쌓았나?”

“전 동정호에서 나고 자란 토박입니다. 이쪽 업계에 발 담그기 전에는 어부 일을 했지요.”

“그렇다면 동정호 물길을 훤히 꿰고 있겠군?”

하긴, 그러니 이 한밤중에 배를 몰수 있었겠지.

노인의 말에 왕일은 조금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손님께선 뱃일에 조예가 깊으시군요?”

“최소한 아무리 담이 큰 뱃사공이라도 한밤에 배를 몰지는 않는다는 것 정도는 아네. 거친 바다가 아니라 잔잔한 호수라 할지라도.”

그리고 자네가 담대할 뿐만 아니라 실력 또한 우수한 뱃사공이라는 것도 알지.

별것 아닌 칭찬이었으나 왕일은 그 몇 마디 안 되는 칭찬에 기이할 정도로 정신이 고양됨을 느꼈다.

마치 독한 화주를 들이킨 것처럼. 노름으로 크게 한탕 딴 것처럼. 거액의 돈을 단숨에 낭비한 것처럼.

노인은 흰 터럭 몇 가닥이 난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서 자네를 골랐지.”

“예?”

“암시장의 연락책과 접선할 때, 우릴 안내할 뱃사공으로 자네를 지목했단 말일세. 자네가 가장 젊더군.”

노인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뜻 모를 모호한 웃음을 지어 젊은 뱃사공의 가슴을 진탕 시켰다.

그 웃음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어째서 젊다는 것이 뱃사공을 선택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지 고민하던 왕일은 호숫물에 손을 담근 후 후끈 달아오른 자신의 이마를 짚었다.

그의 머리가 적당히 식었을 때쯤, 노인은 가벼운 어조로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동정호의 암시장은 큰 배에서 열린다 들었는데. 그 배의 선호(船號)가 분명 흑선 이었지?”

참, 누가 지었는지 간결하게 잘 지었군.

노인의 말에 왕일은 적극적으로 동의하며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배 전체가 암시장이며, 동시에 다양한 오락거리를 제공하는 유흥가이기도 하지요.”

“그렇다면 배의 규모가 엄청나겠군?”

“그야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요. 저기 보이는 악양루가 통째로 물에 떠다닌다고 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직접 보기 전까지는 어려울 것 같네.”

노인은 굳이 상세한 묘사를 요구하지 않았다.

잠시 후면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될 실체를 굳이 백 마디 말로 전해 들을 필요는 없었다.

그 대신 노인은 두 눈으로 본 이후에도 풀리지 않을 의문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면, 그 커다란 배가 평소에는 동정호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

“그건…….”

“동정호가 넓다 한들 결국은 호수 아니겠는가. 하루에도 수천 명의 사람이 제각기 다른 이유로 호수를 오가는데, 자네 말대로라면 악양루만큼이나 커다란 배가 도대체 어디에 정박해 있는 건지 이 늙은이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네.”

자네는 혹시 암시장의 흑선이 어디에 정박하는지 아는가?

노인의 말은 단순한 흥미 본위일 뿐이라는 듯 단조로운 어조였다.

하지만 왕일은 그것을 믿을 수 없었다. 노인의 입에 걸린 짙은 미소. 하늘에 뜬 초승달처럼 가늘게 휜 미소가 비릿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다 잡은 고기를 보는 눈.

왕일은 입술을 달싹였다.

“손님.”

“대답하기 어려운가?”

조금 전까지 서글서글한 웃음을 짓고 있던 뱃사공의 얼굴에 차가운 달빛이 쏟아졌다.

온도를 느낄 수 없는 빛이었지만 왕일은 참을 수 없는 한기를 느꼈다.

노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터질 듯 두근거렸던 심장은 이제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통증을 느끼고 있었다.

“어째서, 흑선의 정박지를 여쭈시는 겁니까?”

“궁금해서, 라고 하면 믿겠나?”

노인은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하지만 왕일은 도저히 그에 어울리는 익살스러운 대꾸를 내뱉을 수 없었다.

해학이 부족한 젊은 뱃사공을 보며 노인은 뱃전에 팔을 올리고는 턱을 괴었다.

“어쩔 텐가, 왕일. 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자넨 지금 절체절명의 상황이라네.”

“손님, 아니, 어르신. 저는 흑선이 어디에 정박하는지 정말로 모릅니다. 전 그저 지시를 받으면 손님을 실어 나르기만 하는 무식한 뱃놈일 뿐입니다.”

“그리고 십 년간 동정호에서 배를 몰아온 유능한 뱃사공이기도 하지.”

밤중에 배를 몰 수 있을 만큼 밤눈이 밝고, 위험과 기회를 구분 못 하고 무턱대고 고개를 들이밀어 볼 만큼 젊은.

빙그레 웃는 노인을 보며 젊은 뱃사공은 지금까지 자신의 강점이었던 모든 요소가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왕일.”

“예, 손님.”

어르신은 다시 손님이 되어 있었다.

얼어붙은 뱃사공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노인은 품 안으로 손을 가져갔다.

뱃사공은 본능적인 감각으로 손을 내밀었다.

“젊음은 좋은 걸세. 때때로, 위기인 줄 알았던 것이 기회로 돌아오거든.”

노인은 젊은 뱃사공의 손에 작은 주머니를 올려놓았다.

주머니는 붉은색 비단 재질이었고 옥색으로 물들인 끈으로 묶은 것이었다.

그 작은 주머니의 무게를 가늠해본 왕일은 눈을 크게 뜨고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 무게는 동도. 은도 아니었다. 그것은 금의 무게였다.

노인이 웃었다.

선택을 재촉하는 웃음. 입꼬리를 귀밑까지 찢어 올려 송곳니를 드러낸 웃음이었다.

“왕일. 묻겠네. 자넨 죽는 게 좋은가, 아니면 돈이 좋은가?”

“그야 당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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