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40화 외전 34화
올려다본 하늘은 어느새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선명한 쪽빛 하늘에 다홍색 안료를 덧칠한 듯, 마치 엉겅퀴를 연상시키는 색채였다.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년은 자신이 배가 고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복이 길었다.
암시장 연락책과의 접선이 생각 이상으로 길어진 탓이었다.
소년은 태감이 있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그려.”
“초면이니 어쩔 수 없지.”
“조심성이 많더군요. 대놓고 암시장을 벌이길래 얼마나 간이 큰가 했더니.”
신분 검사, 보증금, 비밀유지 서약. 그 외의 자질구레한 절차들.
동사무소 공무원처럼 까탈을 부리는 암시장 관계자들을 향해 투덜거리던 소년은 골목 끝자락에 모인 군중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골목길의 끝. 작은 가판대 앞에서 웅성대는 군중은 너나 할 것 없이 잔술에 꼬치구이를 들고 있었다.
“가판대에서 국수가 아니라 술을 팔 시간이군요. 염병할 놈들, 사람을 그렇게 오래 잡아둘 거면 요깃거리라도 줘야지.”
소년의 말은 마음 씀씀이가 박한 암시장 관계자들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태감은 비난이 아닌 다른 어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가판대에서 파는 국수라. 그러고 보니 가판대에서 파는 국수는 먹어본 적이 없구나.”
소년은 잠시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태감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입 밖으로 자신의 당혹스러움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소년은 자신의 배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저도 먹은 지 오래되었군요. 차자면(车仔面)을 먹은 게 벌써 언제 적 일인지 기억도 안 납니다.”
차자면. 가판대나 포장마차에서 파는 면.
외국에선 홍콩 카트 누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국수를 부르며 소년은 지긋지긋한 그리움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즐거웠다 하기엔 너무나 힘겨웠고, 고통스러웠다 하기엔 너무나 찬란했던, 젊은 날을 추억하며 차오르는 향수.
소년은 눈을 지그시 감고는 생각에 잠겨 들었다.
가난한 시절의 홍콩을 경험한 이라면 누구나 경찰의 단속을 피해 불법 영업을 하던 포장마차 국수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녹색 플라스틱 젓가락. 이가 나가고 금이 간 사기 사발.
김이 펄펄 날만큼 뜨겁고, 배부르고 값싼, 맛좋은 포장마차 국수 한 그릇은 주머니 가볍고 허기진 이들의 영원한 단짝이었으며, 젊은 날 칼 한 자루 달랑 들고 홍콩을 찾았던 스무 살의 김승조에게는 지긋지긋하면서도 뒤돌아서면 그리운 추억의 음식이었다.
손님의 취향에 따라 소스만 슬쩍 뿌릴 수도 있고 뜨끈한 닭 날개 육수를 부어 먹을 수도 있고, 호주머니 가볍다면 단출하게 면만, 잔돈푼이 남는다면 대여섯 가지 고명을 올려 즐길 수도 있었다.
그 고명의 가짓수는 또 얼마나 대단했는지.
상념에 젖어 있던 소년은 태감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것을 보고는 자신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줄줄 샜습니까? 이런…….”
“어차피 샌 김에 조금 더 말해 보거라. 고명으론 뭐가 올라간다고?”
태감의 채근에 소년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비죽 내밀고는 설명을 시작했다.
“뭐든지 올릴 수 있었지요. 간장에 부들부들하게 졸인 돼지 껍데기며 족발, 닭 날개. 소고기 사태, 돼지고기 편육. 완자 같은 육고기부터 돼지 간이며 대창, 허파, 소의 벌집위 같은 내장류, 오징어나 문어, 어묵, 생선 살 같은 해산물을 넣을 수도 있고, 채소도 원하는 만큼 올릴 수 있지요. 시금치며 청경채, 부추 같은 녹황색 채소. 특히 무르게 삶은 무 한 토막은 반드시 올려야 하고. 그리고 국물을 흠뻑 빨아들인 튀긴 두부랑.”
온갖 가공식품. 혀가 오그라들 만큼 짭짤한 스팸이며 말랑말랑한 게맛살. 그리고 식용색소로 빨간색을 낸 어육 소시지.
제아무리 솜씨 좋은 요리사도 재현해 낼 수 없는 그 특유의 화학조미료 맛을 떠올린 소년은 쓴웃음을 지었다.
요리사로서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 분홍색 소시지의 맛만큼은 중년을 넘어 노년에 접어든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맛이었다.
“그리고 면 또한 자유롭게 고를 수 있지요. 기본인 밀가루 국수, 보드라운 쌀국수, 쫄깃쫄깃한 당면, 기름에 튀긴 면.”
“훌륭하구나. 온갖 채소와 고기에 면까지. 든든하고 영양가도 있으니 한 끼 식사로 손색이 없겠어.”
“사실 차자면의 맛에는 그 분위기 또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지요. 허름한 가판대에서 주인이 즉석에서 말아주는 국수 한 사발. 앉을 의자도 없이 서서 먹어야 하지만, 그렇기에 정취가 있지요.”
“자유로운 거리의 정취라. 고상하게 차려입고 화려하게 차려진 식탁 앞에 앉아서는 느낄 수 없는 각별한 것이지.”
소년은 그날 저녁이 차자면으로 결정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결정은 소년의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차자면은 다양한 고명을 골라 먹는 재미가 중요한 음식이었다.
두세 가지 고명만 올린 초라한 국수를 먹고 싶거나, 혹은 중천에 뜬 달을 올려다보며 국수를 먹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바쁘게 준비를 해야 하리라.
그리고 가능한 풍성한 고명이 올라간 국수를 최대한 빨리 먹고 싶었던 태감은 잰걸음으로 뛰는 소년을 더욱 독려하며 함께 뛰었다.
한시가 바쁜 상황이었음에도 소년은 동창 제독으로서의 체통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었다.
“태감님, 이런 와중인지라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관인의 신분으로 달음박질치는 모습이 썩 우아하게 보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내 신분을 알아차릴 만한 이가 몇이나 있겠느냐? 그리고 설령 알아차린다 한들, 동창 제독으로서 체통을 지키는 일이 굶주림에 허덕이는 나의 위장보다 우선시 되어야 한단 말이냐?”
“보통은 우선시하더군요.”
물론 태감님은 그런 보편적이라는 말로 획일화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라고 하시겠지만.
소년은 태감이 내뱉을 말들을 넘겨 짓고는 낄낄거렸다.
그리고 태감은 소년이 기대했던 냉소적인 말들을 그대로 읊어 소년은 물론 뒤따르는 아이들과 호위무사까지 미소 짓게 했다.
“하지만 조금 애석하구나. 네 말대로 차자면의 맛에 분위기 또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한다면, 그 참맛을 느끼기는 어렵겠지.”
“어려울 일도 아니지요. 가판대가 필요하면 하나 마련하면 될 일 아닙니까.”
아쉬운 표정으로 시선에서 멀어지는 가판대와 군중을 돌아보던 태감은 다급한 동작으로 소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소년은 태감에게 대답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뛰쳐나갔다.
소년이 향하는 방향을 확인한 태감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확인이 필요하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뒤따라오는 일행에게 물었다.
“저 녀석 설마, 지금부터 가판대를 만들겠다는 건 아니겠지?”
소년이 향한 곳은 조각용 목재를 잔뜩 쌓아놓은 자재상이었다.
* * *
확실히 튼튼해 보이는 물건은 아니었다. 소년이 딱 필요한 만큼만 지출을 허용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그것에 사용된 목재는 가장 질이 떨어지는 판자였다.
건설에 사용한다면 족히 십 년 치의 욕을 몰아 들어야 마땅할 만큼 질이 떨어지는 판자 쪼가리.
하지만 하룻밤 쓸 가판대를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목재 자체가 원체 허름해서 그런지, 금방 만든 건데도 벌써 헌 것 같군요. 나름대로 멋이 있지 않습니까?”
태감은 대답하지 못했다.
가판대에서 파는 국수가 먹고 싶다는 말 한마디에 즉석에서 가판대를 만들어오는 소년의 행동력에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강인한 체력과 뛰어난 손재주, 그리고 급한 성격과 노인의 연륜이 하나가 되면 때론 평범한 젊은이들은 상상할 수 없는 결과가 튀어나오곤 한다는 것을 태감은 실감했다.
소년은 태감의 침묵을 감격의 증거로 이해하고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러고는 머리에 수건을 질끈 동여매고 가판대 앞에 서서 외쳤다.
“어서 옵쇼, 손님!”
북적거리는 시장통이었다면 그럴듯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가판대가 차려진 곳은 숙친왕의 위엄에 어울리는 웅장한 장원의 정원이었다.
잠시 헛웃음을 흘린 태감은 이내 웃음기를 정돈하고는 그 우스꽝스러운 촌극에 동참했다.
“국수 한 그릇 주쇼.”
“면은 어떻게 해드릴깝쇼?”
“밀가루 면, 굵은 거로.”
“예이!”
태감의 주문에 소년의 손이 바빠졌다. 면은 계란을 듬뿍 넣어 반죽한 노랗고 꼬불꼬불한 밀가루 면이었다.
가판대 옆에서 끓고 있는 솥에 면을 삶아낸 소년은 재빨리 물기를 털어낸 면을 사발에 담고는 고개를 들었다.
“고명은 뭐로 하시겠습니까?”
“흐음…….”
태감은 가판대에 늘어선 다양한 고명들을 천천히 검토하고는 신중하게 하나씩 손으로 가리켰다.
“우선은 돼지 간과 허파. 그리고 대창. 닭 날개 세 개에 족발 하나. 무 두 토막. 그리고 튀긴 가지와 두부.”
“채소는 더 필요 없으십니까?”
“필요 없다.”
뚱한 얼굴로 태감을 바라보던 소년은 이내 태감에게 들리도록 혀를 차고는 집게와 가위를 집어 들었다.
숭덩숭덩 가위로 큼직하게 자른 고명을 면 위에 가득 올린 다음, 간장으로 짙은 색을 낸 닭 날개 육수를 두 국자 부어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자면 한 그릇이 완성되자 태감은 얼른 그것을 받아들기 위해 두 손을 뻗었다.
하지만 국수 사발은 태감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매정한 위치에 멈춰 섰다.
“손님.”
삐딱하게 선 채로 눈을 치켜뜬 소년은 태감을 향해 손을 까딱거렸다.
마치 돈을 안 내면 국수는커녕 국물 한 방울 내줄 수 없다고 선언하는 듯한 그 완고한 태도에 태감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너무 연기에 몰입한 것 아니냐?”
“돈 없으면 가쇼.”
“있기야 있는데…… 크흠, 여기 금편도 받나?”
“금편? 미쳤수?”
“그럼 혹시 신용으로 외상은?”
“시부럴, 마수걸이부터 뭔 장난질이여.”
손님 줄 선거 안 보이쇼? 돈 없으면 비키쇼.
차가운 말에 뒤를 돌아본 태감은 어느새 자신의 등 뒤로 길게 늘어선 줄에 화들짝 놀랐다.
배시시 웃고 있는 아이들과 엄숙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전낭을 꺼내 들고 있는 단혜림. 그리고 출출한 배를 부여잡고 선 숙친왕부의 수행원들이 그의 뒤에 줄을 서 있었다.
부루퉁한 소년의 얼굴과 뒤에 늘어선 줄을 번갈아 본 태감은 결국 모진 결심을 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삼아, 혹시 동전 좀 있니?”
“네? 있기는 있는데…….”
볼을 발갛게 물들이고는 동전 서푼을 얻어낸 태감은 거의 집어던질 듯한 기세로 돈을 내밀었다.
돈을 받아든 소년은 고작 서푼임에도 꼼꼼히 확인한 다음에야 넉살 좋게 웃으며 국수 사발을 태감에게 내밀었다.
“맛있게 드십쇼!”
“많이 파시구려.”
세상에 동창 제독씩이나 돼서 동전을 빌리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지 태감은 헛웃음을 지으며 가판대 한편으로 비켜섰다.
그러고는 손아귀를 채우는 온기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국수 사발이 전해오는 온기는 조금 전의 수모를 단숨에 날려 버릴 만큼 뜨거웠다.
국물을 한 모금 들이킬까. 아니면 면을?
태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장작불에 펄펄 끓어오르던 국물은 입천장을 모조리 벗겨버릴 만큼 뜨거웠고 그것은 국물에 담긴 면 또한 마찬가지였다.
고명부터 맛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리라.
고민하던 태감의 젓가락이 가장 먼저 집어 든 것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오동통한 닭 날개였다.
후후 불어 한 김 식힌 다음 태감은 조심스럽게 닭 날개를 베어 물었다.
날개 안쪽에 있는 두 개의 가느다란 뼈에 찔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서.
하지만 잠시 후, 태감은 아예 한입에 삼켜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무쇠솥에 삶아 다시 간장에 조려낸 닭 날개는 놀라울 만큼 부드러웠다.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다 보면 두 개의 앙상한 뼈만 쏙 빠질 만큼.
자신이 발골해 낸 뼈를 본 태감은 더욱 크고 육중한 것도 같은 결과가 나올지 궁금해졌다.
태감은 거침없이 두툼한 족발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짭짜름한 간장양념이 흠뻑 배어든 그 말캉한 껍질.
혀로 밀면 그대로 찢어질 만큼 야들야들한 껍질 아래론 달착지근한 기름기와 함께 묵직한 살코기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볼을 가득 채우는 그 무게감.
하지만 부담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주먹만 한 큼직한 살코기가 타액과 뒤섞여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녹아드는 것에 태감은 놀라움을 넘어 희열을 느꼈다.
결과는 이번에도 같았다. 어렵지 않게 뼈를 뱉어낸 태감은 짙은 아쉬움과 함께 중얼거렸다.
“역시, 족발을 두 개 얹어달라 해야 했어.”
지금이라도 다시 줄을 설까. 그래서 이번엔 족발만 잔뜩 올려달라고 해볼까.
태감은 뇌리에 파고든 그 섣부른 충동을 떨쳐내기 위해 고개를 부르르 털었다.
아직 맛봐야 할 고명은 많았다. 첫입에 만족하기엔 아직 이르지 않은가.
쫄깃쫄깃한 내장들. 기름에 튀겨 다시 국물에 담근 촉촉한 두부. 속에 다진 고기를 채운 가지. 그리고 반투명하게 익은 무.
잘 익은 무는 그 어떤 고명보다도 유혹적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래. 아직 먹어봐야 할 건 많지.”
태감은 후루룩 면을 들이키고는 국물을 입에 머금었다.
쫄깃하게 익은 면발의 탄력 있는 식감. 그와 함께 목구멍을 쓸어내리는 뜨끈한 국물의 여운.
기름진 육수에 달아오른 입으로 더운 숨을 토하며 태감은 문득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는 빙그레 웃음 지었다.
어디 한 곳 의지할 곳 없이, 앉지도 기대지도 못하고 선 채로 허겁지겁 국수를 먹는 그 모습은 초라했지만.
“그래서 더 각별하군.”
국물 한 모금을 들이킨 다음, 태감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선물해 준 소년을 향해 꾸밈없이 솔직한 감사를 담아 미소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