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39화 외전 33화
“동정호에 들러 어찌 악양루(岳陽樓)를 그냥 지나치고 소상팔경(瀟湘八景)을 보지 않을 수 있을까. 동정호에서 나는 귤을 먹으면 장수하고 동정호의 대나무로 만든 물건은 십 년을 써도 빛이 바래지 않고 백 년을 써도 썩지 않는다는데 어찌 이를 보지 않고 발길을 돌릴 수 있겠느냐?”
예봉을 떠난 지 이레가 되던 날이었다.
손에 밴 피비린내도 옅어지고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여행의 기대감이 다시 살아날 시간.
마차 창틀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태감은 쾌활한 어조로 말했다.
제국 최대의 호수이자 이름난 명승지로 소문난 동정호에 가까워져서인지 일행들은 상당히 들뜬 모양새였다.
기대감에 물든 태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소년은 ‘공무가 급한데 한가로이 유람이나 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같은 우려의 말이 그에게 필요할지를 고민했다.
눈앞에 있는 것이 황제 폐하의 충실한 심복이자 경사의 그늘에서 정계를 감시하는 동창 제독이라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랜 꿈을 이룬다는 흥분에 젖은 스무 살 청년이라면.
소년은 씨익 웃고는 태감의 말을 거들었다.
“동정호는 볼 것도 많고 놀 것도 많고 살 것도 많으며 먹을 것도 많지요.”
볼 것으로는 앞서 태감이 말한 악양루와 소상팔경, 놀 것으로는 동정호의 이름난 뱃놀이와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 축제, 살 것으로는 동정호의 수려한 풍광을 담은 그림과 시. 그리고 먹을 것으로는.
“우선은 동정호가 자랑하는 명차 군산은침(君山银针)을 빼놓을 수 없지요.”
군산은침은 동정호 중앙에 있는 일흔두개의 봉을 가진 군산(君山)이라는 섬에서 나는 차로 예부터 군산에 은거한 도인들이 즐겨 마시던 차였다.
매년 황실에도 진상품으로 바쳐지는 유명한 명차의 이름에 태감과 단혜림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군산은침의 명성을 어찌 모를까. 청명(淸明)에 딴 어린 잎의 달고 상쾌한 향기는 가슴을 내리누르는 근심의 천적이요, 문인들에겐 붓보다 가까운 지기가 아닌가.”
“군산은침과 닭을 볶아 만드는 호남의 군산은침계편(君山銀針鷄片)은 용정차와 새우를 볶은 절강의 용정하인(龍井蝦仁)과 함께 이대 차 요리로도 유명하지.”
같은 차를 두고 판이하게 갈라지는 둘의 감상에 실소를 흘린 소년은 헛기침으로 목을 다잡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동정호에서 잡는 물고기 또한 빼놓을 수 없지요. 원체 큰 호수다 보니 향어나 초어 같은 크고 맛좋은 민물고기가 두루 잡히지만, 그중 제일로 치는 것은 역시 무창어(武昌魚)와 수사어(手撕魚)지요.”
“무창어라면 들어본 적 있지. ‘짠물에 비늘 달린 거로는 석반어가 으뜸이며 민물에 비늘 달린 거로는 무창어가 제일이다’란 말은 경사에서도 유명하니. 하지만 수사어란 물고기는 들어본 적이 없구나.”
“수사어는 호남 지방 류양(瀏陽)인근에서 즐기는 생선으로 보통 소금에 절인 다음 꾸덕꾸덕하게 말려 먹지요.”
“말린 생선이라. 술꾼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별미겠구나.”
바싹하게 말려 굽거나 찐 짭짤한 생선 한 토막.
술꾼들을 열광하게 할만한 주제였으나 태감의 흥미를 끌 만한 것은 아니었다.
심드렁한 얼굴을 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류양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민물고기로는 잉어에 수돈(水豚)을 잡아다 줘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바다 생선으로는 방어에 하돈(河豚)도 싫네. 수사어 한 토막이면 술이 한 말이오, 밥이 서 말인데 어느 누가 싫다 할까.”
“호오. 수돈이라 하면 쏘가리를 말하는 것이고 하돈이라 하면 복어를 말하는 것인데, 그 말린 수사어 한 토막이 강과 바다의 진미보다도 낫다는 것이냐?”
“낫다마다요.”
태감의 건조한 표정에 한 줄기 호기심이 떠오른 것을 확인한 소년은 메마른 입술을 혀로 핥고는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수사어는 그 명성만큼 요리하기도 까다롭기로 유명하지요. 우선은 배를 가르지 않고 원형을 고스란히 유지한 채로 말려야 하며 구울 때는 기름을 두른 번철에 한 번, 다시 땅콩껍데기와 귤껍질 태운 불에 두 번 구워야 제맛이 납니다. 이리하면 껍질 밑에 고인 기름이 흘러나와 생선 전체가 반짝반짝 빛나지요. 그다음 구운 생선은 따뜻한 물에 담가 불리고 고추를 올려 찌면 류양의 명물 수사어가 완성되지요.”
“공이 많이 드는 요리로구나.”
“그 대신, 들인 공만큼 맛은 천하일품이지요. 말리고 굽고 물에 불려 쪘으니 생선 살이 쫀쫀하면서도 부드러워 말린 생선 같으면서도 싱싱한 날생선 같은 오묘한 맛이 납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먹지 않을 수가 없구나.”
즐길 것도 많고, 먹어야 할 것도 많구나. 그 좋은 것을 다 누리려면 하루로는 부족하겠군.
입가를 매만지던 태감은 손을 아래로 내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와 동시에 소년은 떠들던 입을 다물고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이제는 그가 말해야 할 차례였다.
태감은 잠시 품에 손을 넣었지만, 아무것도 꺼내지 않고 손을 빼냈다. 놔둬야 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무릎으로 돌아간 태감의 손을 보며 소년은 그가 가면을 꺼내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창 제독으로서의 의무감과 아직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싶은 젊은이의 투정 사이에서 태감은 갈등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소년은 그 뜻을 존중하여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의무를 방관하고자 하는 나태함을 비판하지도, 젊은이의 치기 어린 소망을 옹호하지도 않았다.
그저 부드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소년은 태감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소년을 향해 작게 고개를 까딱거린 후, 태감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냈다.
“하지만 이 모든 즐거움은, 나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를 다한 다음에야 누릴 수 있는 것들이지.”
동창 제독의 의무. 황족의 의무.
태감의 어깨를 내리누르는 두 가지 의무를 소년은 보았다.
내려놓고 떠나왔으나 결국에는 다시 떠안게 된 짐.
용의 핏줄에 부과된 그 무게를 짊어진 태감에게 소년은 작은 면죄부를 안겨주었다.
“그러니, 즐기는 것은 가장 나중으로 미뤄야겠지요.”
가장 마지막에. 성과를 얻고 나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였다는 변명거리를 준비한 다음에.
그러면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 공직자가 즐거움을 누리려면 그래야만 하지. 나랏돈으로 밥을 먹는 이라면 응당 그래야지.”
“참, 세금으로 밥 먹기 팍팍해서 살겠습니까. 나 원.”
농담조로 던져진 소년의 말은 마차 안에 무겁게 차오른 공기를 단번에 날려 버렸다.
시원하게 웃고는 눈초리에 매달린 눈물방울을 훔치는 태감을 보며 소년은 마차 창 너머로 동정호가 보임을 알렸다.
창가에 앉은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내밀었다.
바다보다도 넓고 하늘보다도 깊은 제국 최대의 호수. 동정호의 물결이 빛나고 있었다.
고개를 삐쭉 내민 채 탄성을 지르는 아이들을 보며 소년은 태감에게 물었다.
“이제 어쩌실 겁니까? 공사다망하시니 뱃놀이는 미뤄야겠고.”
“우선은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지.”
“급한 일이라 하시면?”
태감은 곰곰이 생각한 다음 말했다.
“혹시, 동정호의 화랑 거리에 대해 들어본 적 있느냐?”
* * *
예로부터 동정호는 그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문인들과 화가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당대 이름난 문인들이 동정호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며 시를 남겼고, 거장이라 평가받은 화가들은 동정호에 눌러앉아 흐르는 시간을 호수와 함께 늙어갔다.
“그것이 문인과 화가의 차이지. 문인은 벅차오른 감동을 말로 풀어내고 나면 호젓이 떠나 버리지만, 화가들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 시간이 필요하지.”
종이를 펼치고 문진으로 누를 시간. 먹을 갈고 붓을 찍을 시간. 그리고 목이 아프도록 종이와 풍경을 번갈아 보며 그려낼 시간.
호반을 따라 걸으면 달을 넘겨야 간신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광대한 동정호의 경관을 그리기 위해 수많은 화가가 동정호에 자리를 잡았고, 그들의 그림을 팔기 위해 화랑이 들어섰다.
“그리고 비슷한 업종의 가게들이 한곳에 뭉치면 상승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은 장사치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 동정호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모인 화가들만큼 동정호에는 많은 화랑이 필요했고, 그들은 한곳에 뭉쳐 제국 예술계에 손꼽히는 명소를 만들어냈다.”
제국의 모든 예술품이 모여드는 곳. 예술가들의 성지이자 애호가들의 낙원.
그곳이 바로 동정호의 화랑 거리였다.
제국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거장들의 숨결이 남아 있는 거리에 도착한 소년의 첫마디는 담백한 것이었다.
“인사동에 온 것 같구만.”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태감의 물음에 건성으로 답하며 소년은 거리 입구를 훑어보았다.
화가들이 드나드는 거리답게 입구에는 온갖 종류의 붓을 걸어놓고 파는 필방이며 종이만 전문으로 취급하는 지업사(紙業社), 조각에 쓸 향나무며 대리석을 전시하는 자재상이 늘어서 있었다.
그 낯선 거리를 들여다보며 소년은 묘한 향수가 흉금 안쪽으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난 세계의 것이며, 지난 시대의 것.
탁하게 흐려진 소년의 눈동자 너머에서 비치는 것은 동정호의 화랑 거리가 아닌 번화한 관광지가 되기 전, 칠십 년대의 인사동의 모습이었다.
이제는 갈 수 없는 고향 땅에서도 사라진 지 오래건만. 한없이 그곳에 서 있을 것처럼 멍하니 거리를 바라보던 소년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어 정신을 환기시키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이거 화방이 이렇게 늘어선 걸 보니 가슴이 들뜨는군요. 가는 길에 기념품 삼아 붓이라도 한 필 사 가야겠습니다. 오랜만에 그림도 그릴 겸.”
“그림에도 조예가 있는 줄은 몰랐구나.”
“원래 미적 감각이 없으면 요리사 해 먹기 힘들지요. 자랑은 아닙니다만 난은 제법 그럴듯하게 칩니다. 산수화도 그릴 줄 알고…….”
말을 멈추고 태감을 빤히 바라보던 소년은 피식 코웃음 쳤다.
“미인도를 그릴 줄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 됐습니다. 비싸게 팔릴 텐데.”
“솜씨가 얼치기라도 그릴 대상이 좋으니 그럴듯할 테지. 나중에 한번 시간을 내주마.”
그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온갖 재주를 부릴 줄 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림이라니. 난초를 친다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던 태감은 이목을 끌지 않도록 숨죽여 키득거리며 소년과 필방 앞에 멈춰 섰다.
쥐 수염으로 만든 가느다란 서수필, 족제비 털로 만드는 황모필. 양모로 만드는 양모필, 소털로 만드는 우모필로 시작하여 호랑이 털로 만든 것, 곰 털로 만든 것, 표범 꼬리털로만 만든 것, 진열대는 그야말로 온갖 짐승 털의 전시장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태감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닭의 솜털로만 만든 계모필이었다.
“계모필? 닭털로 만든 붓이라니. 나도 붓은 꽤 안다고 자부했지만, 닭털로도 붓을 만드는 줄은 처음 알았다.”
“서예용 붓만 만지는 문인들은 잘 모르지만, 계모필은 색을 칠하는 채색필로 많이들 씁니다. 먹물 흡수력이 좋고 탄력이 있어 복원력이 훌륭하지요.”
깊고도 방대한 붓의 세계에 혀를 내두른 태감은 계모필과 함께 붓 몇 자루를 집어 들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 들린 붓을 빤히 바라보던 소년은 엄숙하게, 모범적인 공직자다운 태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권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사적인 일보다는 공무를 우선시하고 싶군요.”
“얄미울 만큼 올바른 답이구나. 붓 고를 시간은 차고 넘치지만, 공무는 늘 촌각을 다투지.”
이제 일을 할 시간이군.
태감의 말에 소년은 풀어졌던 긴장이 단숨에 목을 옥죄는 것을 느꼈다.
태감은 품에 넣어두었던 가면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아직 그것을 얼굴로 가져가지는 않았지만, 태감은 이미 동창 제독이었다.
“가자꾸나.”
태감의 한마디에 일행은 반문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청동으로 주조한 팔선상이 근사하게 전시된 화랑과 붓 한 자루에 거적 한 장 깔고 호객행위를 하는 대필가. 옥을 갈아 만든 안료로 그린 그림을 보았다.
떠들어대는 호사가. 그리고 호주머니 가벼운 화가들이 대낮부터 한잔 걸치고 있는 주점.
거리는 화려함과 초라함, 부유함과 빈곤함이 무질서하게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태감은 일행을 거리의 가장 끝으로 이끌었다.
볕이 잘 들지 않는 듯 거리의 끝자락은 그늘져 있었고 습습했다.
여기서부터는 화랑 거리가 아니라 화가들의 주거 구역인 듯 늘어선 건물은 대부분 가옥이었다. 대단히 허름하여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분명 집을 수리할 못은 구해도 못 박을 망치는 구하기 어려운 빈궁한 처지의 화가들이 모여 사는 곳이리라.
소년은 멈춰선 태감의 옆으로 다가와서는 질문했다.
“태감님. 이곳이 목적지가 맞습니까?”
“그래. 여기다.”
“흐음, 매우 비밀스럽고 수상해 보이는 곳이군요.”
“네가 봐도 그렇지?”
소년은 잠시 자신의 의도가 태감에게 분명하게 전해진 것이 맞는지를 의심했다.
이 화가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붓 든 한량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 무슨 대단한 비밀이 있단 말인가.
소년은 고민하는 대신 간편한 답을 얻을 방법을 선택했다.
소년은 태감에게 질문했다.
“이곳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까?”
“알면서 따라온 것 아니었느냐?”
“뭐 알려주셨어야지요.”
“이런, 난 네가 알고 있는 줄 알고 설명하지 않은 거였는데.”
내가 이곳에 암시장의 연락책이 있다는 말을 정녕 안 했단 말이냐?
심각한 어조로 중얼거리는 태감의 표정은 너무나 해맑고 발랄한 것이었기에, 소년은 대답 대신 주먹을 그러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