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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38화 (239/314)

환관의 요리사 238화 외전 32화

물안개에 젖은 새벽의 숲은 지난 밤의 여운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둥지에서 고개 든 새도 함부로 부리를 열지 않고 풀잎에 몸을 누인 날벌레도 날개를 펴지 않았기에 안개에 잠긴 숲은 적막한 정적 속에서 꿈꾸고 있었다.

숲에 사는 모두가 사려 깊은 침묵으로 숲의 숙면을 존중하고 있었지만, 한 무리의 불손한 외지인들은 작은 날벌레 한 마리도 어기지 않는 숲의 불문율을 방자한 태도로 무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란스럽게 떠들었고, 이슬 머금은 풀잎을 헤집고 돌아다녔으며, 매캐한 연기를 한껏 피워 올리기까지 했다.

그 매캐한 연기에 질린 숲의 주민들은 혼비백산하여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선주민에 대한 일말의 배려심도 느껴지지 않는 무도한 퇴거 요청이었으나 숲의 중앙을 차지한 불한당들은 부끄러움도 없는지 피어오르는 연기에 자신들의 전리품을 걸어놓고는 노래를 부르며 시시덕거렸다.

“안개가 끼어서 그런지 연기가 높이 올라가지 않는군. 훈제하기엔 좋은 날이야.”

불씨를 뒤적거리던 부지깽이를 땅에 꽂은 채 허리를 편 소년은 이마에 송골송골 솟은 땀을 훔치고는 피워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젖은 나무를 땔감 삼아 피운 불에서 피어오른 연기는 숲의 안개에 짓눌린 채 허공에 고여 있었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소년은 쇠로 만든 튼튼한 지지대를 모닥불 가장자리에 세우고는 그 위에 걸대를 올렸다.

두어 번 지지대를 흔들어본 다음, 지지대가 단단히 박혔음을 확인한 소년은 그루터기로 다가갔다.

그루터기에는 손질하여 소금에 절여둔 고기가 널려 있었다.

살집 좋은 돼지의 어깨살. 오동통한 오리 다리와 가슴살. 기름기 없이 빨간 소고기 안심. 두툼한 양의 넓적다리.

소년은 그것들을 갈고리로 꿰어 걸대에 걸었다.

고기가 큰 것은 걸대의 가운데에, 작은 것은 걸대의 가장자리로.

배치를 끝낸 소년은 아름드리나무의 뿌리에 기대앉아 조잘거리던 아이들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새들을 대신해 숲에 활기를 불어넣던 아이들은 익숙한 동작으로 일어서서는 군말 없이 수풀을 헤치고 숲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던 단혜림은 의아한 표정으로 소년에게 질문했다.

“무언가를 시키셨나?”

“예. 죽은 나무껍질을 좀 구해오라고 보냈습니다. 연기를 가두어야 하거든요.”

“연기를? 아아, 모닥불 주위에 두르기 위해서. 그렇다면 미리 구해놓지 않고, 어째서 지금 보낸 것인가?

“너무 일찍 연기를 가두어 버리면 고기에 그을음이 끼지요. 어느 정도 고기 겉 부분이 굳고 나서 연기를 가두어야 좋은 훈제가 됩니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괜찮을 것 같더군요.

모호한 말과 함께 소년은 검지 끝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사방을 둘러본 후 소년의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본 단혜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어느새 높이 떠오른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그렇군. 해가 떴군.”

“안개가 짙기는 하지만 해가 떠 있으면 길을 잃지는 않을 겁니다.”

설령 안개가 낀 새벽이 아니라 별빛 한점 들지 않는 캄캄한 한밤중이더라도 동창의 훈련을 받은 아이들이 길을 잃는 일은 없겠지만.

소년은 나이만큼 부쩍 커진 노파심에 넌더리가 난다는 듯 거친 동작으로 기지개를 켰다.

세월의 모래알이 떨어질 때마다 낡고 마모된 노인의 심장과는 다르게, 때 묻지 않은 젊은이의 어깨는 놀라울 만큼 부드럽게 움직였다.

부드러운 것은 어깨뿐만이 아니었다. 굳은살 단단히 박인 손가락 마디마디. 그리고 손목은 범인의 관절이 움직일 수 있는 각도를 한참 벗어난 각도까지 꺾였고 한계까지 젖혀도 별다른 통증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사슴이나 영양을 연상시키는 가늘고 맵시 있게 뻗은 다리는 폭발적인 탄력을 가지고 있었고 어깨와 연결된 등 근육은 한껏 당긴 활시위처럼 팽팽했다.

젊은 몸. 젊은 피. 낡은 것은 오직 심장뿐이었다. 그리고 소년은 이제 심장의 묵은 때를 벗길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안온한 온기에 취해 오늘과 다름없을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시대가 돌아왔다.

일상의 무료함을 그리워해야 하는 나날.

소년은 자신이 현장으로 돌아왔음을 실감했다.

태감이 동창 제독으로 복직한 이상. 그의 충성 맹세가 꺾이지 않은 이상. 그는 다가올 피비린내 나는 시대를 준비해야만 했다.

온몸을 꺾고 비틀고 잡아당기며 풀어준 후, 소년은 걸치고 있던 윗옷을 벗어 던졌다.

그와 함께 단혜림이 검 자루를 쥐고 일어섰다.

“몸이 찌뿌둥한가?”

“예. 그간 잠만 자고 있어서 그런지 좀 녹슨 것 같은데.”

한 수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소년의 도발적인 언사에 단혜림은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괜찮겠나?”

“예,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현장을 떠난 지 몇 달 안 돼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둔해졌지 뭡니까.

주먹을 내지르고 허공에 발을 내지르는 소년의 동작은 날렵하면서도 매서웠다.

둔해졌다, 녹슬었다 따위의 단어와는 연이 없어 보이는 동작이었음에도 소년은 연신 자신의 태만함을 자책하며 투덜거렸다.

잠시 소년을 관찰하던 단혜림은 빙긋 웃으며 말했다.

“몸이 바뀐 이후 적응이 덜 된 게로군. 그간은 크게 몸 쓸 일이 없었으니.”

“예. 아무래도 용포가 거추장스럽다 보니, 크게 움직일 일이 없었지요.”

그런데도 이제 와 다시 몸을 만드는 것은.

말끝을 흐린 단혜림은 소년의 가슴팍을 들여다보았다.

왼쪽 가슴 아래쪽을 꿰뚫은 것. 그리고 몸을 사선으로 가른 것.

창백하리만치 새하얀 어린아이의 몸엔 끔찍한 흉터가 두 개나 새겨져 있었다.

두 개 다 소년을 생사의 기로에 서게 할 만큼 큰 것이었으며, 두 개 다 그녀와 관련이 있는 것이었다.

단혜림이 검을 뽑아 들었다.

“태감께서 동창 제독으로 복직하셨으니, 전하께서도 복직하시는 건가?”

“바늘 가니 실도 가야지요. 제가 아니면 누가 모시겠습니까.”

“굳이 현장으로 복귀할 필요는 없을 텐데.”

“태생이 무식한 놈이라 책상 앞에 앉아 있지를 못합니다. 붓 들고 씨름하느니 칼 들고 씨름하는 게 속 편하지요.”

너스레를 떨며 단혜림과 마주 선 소년은 자신의 칼을 꺼내 들었다.

요사스러울 만큼 붉게 빛나는 비수와 둔중한 회색빛으로 빛나는 비수.

혈옥비수와 유성락. 환관 오운의 상징과도 같은 두 자루의 비수를 마주한 단혜림이 검을 곧게 세운다.

자루를 양손으로 쥐고 검날을 오른쪽 어깨너머로 넘긴, 사선 베기의 자세.

단지 자세를 취한 것뿐인데도 하늘이 무너져 쏟아지는 듯한 중압감이 소년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뒷덜미를 적신 식은땀이 등허리를 타고 흘러내린다.

마른침을 삼키며 자세를 잡은 소년은 이내 익숙한 자세에서 느껴지는 불편함과 어색함에 혀를 찼다.

그가 배운 무술은 한때 천하제일이라 불렸던 무인, 독각투신의 것이었다. 다리 하나를 잃어 의족을 대고 싸워 천하를 거머쥔 이의.

다리가 불편했던 당시의 소년에겐 제 옷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것이었지만.

“이거, 독각투는 못 써먹겠군요.”

“다리가 고쳐지니 이런 문제도 생기는군. 하지만 기쁜 문제 아닌가.”

“칼날을 앞에 두고 있으니 기쁨보다는 낭패스러움이 더 큽니다만.”

어쩌겠습니까. 변명이 칼을 막아주지는 않으니.

소년은 몸을 사선으로 둔 체 칼을 겨누었다.

온갖 무술에 익숙한 단혜림에게도 낯선 독특한 자세, 하지만 대단히 실전적이라는 것만큼은 굳이 경험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주먹을 짧게 끊어치는 동작. 그와 함께 상대의 급소를 노리는 칼날. 그러면서도 철저하게 안면과 상체의 급소를 지키는 자세.

단혜림의 입가에 길게 찢어지는 사나운 미소가 걸린다.

“무척 효율적인 무술이로군. 혹시 이름을 들을 수 있겠나?”

“아마 들어도 모르실 겁니다. 서방의 무술이라.”

크라브 마가(Krav Maga)라고 합니다. 얼치기로 배운 거라 변변치 않습니다만.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소년의 칼날이 단혜림을 향해 쇄도했다.

* * *

“꼴이 그게 뭐냐.”

“운동을 좀 격하게 했습니다.”

멀건 얼굴로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본 태감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온몸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꾀죄죄한 꼴로 돌아온 소년의 모습은 개구진 골목대장이라기보다는 험난한 전쟁터를 피해 도망쳐 온 피난민에 가까웠다.

조금 격한 운동을 한 것 치고는 대단히 안쓰러운 모습에 말문이 막힌 태감은 소년의 옆에선 단혜림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이해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인의 입가엔 대단히 아름답고 우아한, 그리고 만족에 찬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그러는 태감께서도 꼴이 말이 아니군요.”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서 붓을 놀리니 온몸이 쑤시는구나. 어깨는 삐걱거리고, 눈은 뻑뻑하고, 허리는 부러질 것 같고. 손가락도 뻐근하고.”

“위장도 텅 비었겠지요?”

“물론이지. 근사한 위문품이 없다면 몹시 섭섭할 것 같구나.”

소년은 대답 대신 뒤쪽을 가리켰다.

소년의 손끝이 가리킨 방향에는 어깨에 장대를 짊어진 아이들이 있었다.

태감의 시선은 아이들이 아닌 아이들의 어깨에 걸쳐진 장대로 향했다.

장대에는 갈고리에 꿰어진 훈제육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향초를 입은 푸짐한 돼지 어깨살. 불그스름한 오리고기. 얇게 저며 입에 넣으면 혀 위에서 살살 녹아내릴 소고기.

그리고 기름기 줄줄 흘러내릴 것만 같은 양의 넓적다리.

소년은 마치 진귀한 보물을 헌상하는 듯 과장된 태도로 그것들을 가리켰다.

“골라보시지요.”

“다는 안 되겠지?”

“길 위에서 흐르는 구름을 올려다보며 풀밭에 앉아 즐기는 별미가 싫으시다면, 여기서 다 먹어치우는 것 또한 방법이겠지요.”

“우자(愚者)는 당장 주린 배를 채우기에 급급하여 겨울을 나지 못하고, 지자(知者)는 겨울을 대비하다 가을을 넘기지 못하는 법. 우자는 아니나 지자라 할 수도 없는 일개 범부로선 도저히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없겠군.”

그러니 좀 도와주지 않겠나?

태감의 부탁에 소년은 신중하게 장대에 걸린 훈제육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소년이 집어 든 것은 노릇하게 훈제된 오리 가슴살이었다.

기름진 껍질은 노르스름했고 살점은 은은한 붉은빛이 감도는 짙은 갈색이었다.

“오리 가슴살을 잘게 썰어 볶음밥을 만들면 어떨까 합니다. 자고로 오리 기름은 짐승에서 나는 기름 중 으뜸이라 하지 않습니까? 달고 향기롭기로는 거위 기름과 닭기름을 능가하고, 고소하고 입에 착 감기기로는 돼지기름을 저리 가라 한다지요. 거기다 몸을 보호하고 피부를 윤택하게 하며 혈액순환을 이롭게 하니 예로부터 약으로도 즐겨 써왔지요. 이 오리 기름으로 밥을 볶으면…….”

달착지근한 오리 기름이 알알이 배어든 밥알, 쫀득하고 기름진 껍질과 탄력 있고 육향 진한 살점. 거기에 은근하게 배어든 훈연향.

마늘을 듬뿍 넣고 볶아 알싸한 마늘향을 더해주고 간장을 슬쩍 뿌려 간을 맞춰준 다음, 마지막으로 송송 썬 쪽파를 듬뿍 올려 먹으면 훌륭하겠지요.

설명하던 도중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볼에 고인 군침을 삼키고는 태감을 바라보았다.

“아니면 마늘을 편으로 썰어 바삭하게 튀겨 고명으로 곁들이면 또 색다르지요. 그 바삭바삭한 식감의 변주곡이 더해진 볶음밥은 한층 풍성하고 풍요로울 겁니다. 입과 코뿐만이 아니라 귀까지도 즐겁겠지요.”

감미로운 말이었다.

말뿐으로 끝나지 않고 즉시 실행으로 옮겨진다면 더더욱 더 감미로우리라.

하지만 소년은 주방으로 뛰쳐들어가는 대신 팔짱을 끼고는 삐딱한 자세로 태감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숙제를 검사하는 가정교사 같은 소년의 깐깐한 태도에 태감은 앓는 소리를 내었다.

“제가 인색한 사람은 아니고, 세간의 평가도 그러하리라 믿습니다만…….”

“밥상을 차리기 전 밥상을 차릴만한 노동이 있었는지를 묻는 것은 인색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요구겠지.”

“그래서, 밥값은 하셨습니까?”

“했다.”

황제 폐하께서 임시로 허락하신 동창 제독의 권한으로 제국법, 민법, 관습법에 의거하여 죄인들에게 적법한 처벌을 시행하였다.

밤새도록 법전을 뒤지느라 초췌해진 태감을 바라본 소년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질문했다.

“주모자 한 명만 처벌한 겁니까? 아니면 옆의 떨거지 돼지 놈들까지?”

“관계자 전원.”

“처벌은?”

태감은 대답하는 대신 엄지로 목을 긋는 동작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고개를 끄덕인 소년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등의 개소리로 유감을 표하는 대신 담백한 말로 태감의 노고를 위로했다.

짧게 하품한 태감은 졸린 눈을 비비고는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그럼 이제 밥값을 했으니 밥 좀 다오. 뱃가죽이 등허리에 붙을 것 같구나.”

“그런 말 하는 사람치고 허리 치수가 한 아름 넘지 않는 이를 본 적이 없었지만, 태감님만큼은 예외라 할 수밖에 없겠군요.”

그러고 보니, 비룡응은 아직 도착 안 했습니까? 어젯밤에 날려 보냈으니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텐데.

소년이 묻자 피로한 눈꺼풀을 들어 올린 태감은 무거운 숨을 토해내고는 말했다.

“도착했다.”

“폐하게 서신이 왔습니까?”

“서신은 오지 않았지만, 다른 게 왔더구나.”

태감은 느릿한 동작으로 품 안에 손을 넣었다.

태감이 아직 그것을 꺼내 들지는 않았지만, 소년은 황제께서 무엇을 보냈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존귀하신 대제국의 지배자. 황제 폐하께선 태감께 가장 필요한 것을 보내셨으리라.

그리고 태감의 희고 가는 손가락이 품 안을 빠져나온 순간 소년은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음을 깨달았다.

흑단으로 만든 가면이었다. 끈으로 고정하지 않아도 저절로 얼굴에 달라붙는. 얼굴의 절반을 가리는 가면이었다.

태감에게도, 소년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그것.

그것을 받아든 소년은 한차례 지긋이 바라보고는 태감에게 넘겨주었다.

“동창 제독으로 복직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제, 동정호로 가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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