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의 요리사 237화 외전 31화
한껏 차올랐던 밤의 끝자락에 새벽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뜨는 해와 지는 달이 같은 하늘에 공존하는 시간.
마지막 잔을 입에 털어 넣은 단혜림은 끌러두었던 검을 챙겨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이 조금 과했던 것 같군. 먼저 일어나겠네.”
심심한 말로 그녀를 배웅한 소년은 아직 반쯤 차 있는 자신의 잔을 바라보고는 그것을 입가로 가져갔다.
남은 사람은 둘뿐이었다. 태감과 소년. 청년과 노인. 상관과 부하.
상관을 모시는 부하로서 태감과 마주 앉은 소년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관계를 정의하는 무수한 말 중 소년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상관과 부하의 관계였다.
소년이 후궁의 밑바닥을 기던 시절부터 왕이 된 지금까지도. 소년은 그에게 맹세했던 충성을 단 한 번도 의심해본 적 없었다.
설령 그가 사례 태감이 아니게 되고 자신이 후궁 밑바닥의 노비가 아니게 되더라도. 그 관계가 변하리라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소년은 충성을 맹세한 심복이 아닌 미숙한 젊은이에게 충고하는 노인으로서 그를 대하기로 마음먹었다.
태감이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오랜만에 그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사례 태감이 아니라. 동창 제독이 아니라. 자신의 상관이 아니라.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청년의 얼굴. 진오운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초조함과 갈등에 얼룩진 그 얼굴은 너무나 젊고 풋풋하고 싱그러웠기에, 소년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고민이 많으신가 봅니다.”
소년의 기색이 변한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골몰하던 태감은 소년의 말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그를 위해 소년이 말문을 열었다.
“어렵겠지요. 이부상서를 직접 치기에는.”
태감은 간신히 입을 열 수 있었다.
“그래. 이부상서는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할 사람이 아니지. 만약 그가 실수를 우연이라 치부하여 흘려넘기는 이였다면 그리 오래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분명 대비책을 세워뒀을 것이야. 약점을 잡았다 하여 섣부르게 그의 목을 치려 한다면 되려 역공을 당할지도 몰라.”
“하지만 이대로 넘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적의 목이 훤히 드러나 있는데, 뽑은 칼을 도로 집어넣을 수는 없지요.”
태감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의 말에 긍정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직 확신이 없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그냥 넘길 수 없는 기회야. 제국의 고질적인 문제점 하나를 척결할 기회.”
“동정호의 암시장 말이군요.”
“동정호의 암시장은 긴 시간 관리들과 유착관계를 쌓아왔다. 그렇기에 지금껏 황실은 알면서도 암시장의 존재를 묵인해 왔지. 만약 칼을 뽑아 든다면 암시장과 연관된 모든 관리가 들불처럼 일어날 것이 뻔하니까. 설령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황실로서는 막대한 출혈을 감수해야만 할 테니 그동안은 손을 쓸 수 없었지.”
하지만 마침내 기회가 왔다.
이부상서의 이름을 빌려 부패에 찌든 관리들을 찍어누를 기회가.
고개를 쳐든 태감의 눈동자 속에선 서슬 퍼런 불꽃이 타올랐다.
“이부상서는 합리적인 사람이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적과도 손을 잡을 수 있는 인물이지.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지워주겠다고 약조한다면 그는 우리에게 협력할 거다.”
“남는 장사겠군요. 비록 이부상서의 목을 치지는 못할지라도, 제국의 경제를 좀먹던 암시장을 뿌리 뽑고 뇌물에 찌든 탐관오리의 목을 걸 수 있다면. 충분히 남는 장사입니다.”
제국의 경제는 한층 건전해질 것이고, 공백이 생긴 자리에 황제 폐하의 사람들을 심어 넣는다면 폐하의 지지기반은 한층 단단해지겠지요.
달콤한 말들을 늘어놓은 후, 소년은 짙은 한숨과 함께 태감을 바라보았다.
현실적인 방안이 제시되지 않은 희망적인 미래는 한 여름밤의 백일몽과 다를 바 없었다.
잠시 주저하던 태감은 눈을 감고는 말을 꺼내놓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부상서와 교섭할 사람이 필요하겠지.”
“폐하께서는, 안 되겠지요.”
“안 된다. 폐하께서는, 폐하께서 직접 나서시는 것은.”
“백성들 보기에 좋지 않지요?”
존귀한 용의 피를 이어받으신 제국의 지배자께서. 티끌 한 점 없이 고고하셔야 할 분께서 악인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황제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닌, 금룡께서 지상에 내리신 화신이며 대리자였기에.
소년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제 태감을 괴롭히던 고민의 원인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에게 해줘야 할 일 또한.
소년은 너무 명랑하게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게 내리깔고는 말했다.
“더러운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 말씀이시군요. 폐하께서 손대면 안 될 일들을 처리해야 할.”
그리고 보통 우리는, 그 일을 담당하는 사람을 동창 제독이라 부르지요.
태감은 길게 숨을 들이마신 다음, 차분하게 내쉰 후 긍정했다.
“그래. 동창 제독. 폐하께는 동창 제독이 필요해. 아니, 정확히는. 믿을 수 있는 동창 제독이 필요하지.”
“피를 나눈 혈육이며, 동창 제독의 의무를 다할 수 있을 만큼 지혜롭고 성실한, 황제 폐하께서 유일하게 믿고 신뢰할 수 있는 인물.”
있다면 오직 한 명뿐이겠지요.
소년은 태감을 바라보았다.
결단을 촉구하는 소년의 시선을 마주 본 태감은 작게, 하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는, 내가 필요할 것 같구나.”
“복직하시는 겁니까?”
“그래. 폐하께서 복직을 윤허하신다면.”
글쎄요. 폐하께선 아마 이렇게 말씀하시겠지요.
‘비록 전례에 없는 일이라고는 하나, 그대의 열정과 의욕을 높이 사 이번 한 번만 특별히 윤허하도록 하지.’
수염을 쓰다듬는 척하며 근엄한 목소리로 황제를 흉내 내는 소년을 보며 태감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폐하께선 옛날부터 참 솔직하지 못한 분이셨지. 아직 황자셨던 시절에도 그랬어. 좋으면 좋을수록 아닌 척, 못 이기는 척, 어쩔 수 없이 한다는 티를 내시곤 했지.”
“참, 생색내길 좋아하는 분이셨군요.”
제국에서 오직 단 두 명에게만 허락된 권리. 황제를 헐뜯고 흉볼 권리를 누리며 둘은 한참 동안 시시덕거렸다.
연륜에서 우러나온 기술로 황제를 골고루 씹으며 태감을 웃긴 소년은 태감의 웃음기가 멎을 때까지 잠시 기다린 후, 가만히 왼팔을 들어 턱을 괴고는 태감을 올려다보았다.
“그거 아십니까. 태감님과 제가 후궁에서 은퇴한 지 오늘이 딱 석 달째 되는 날입니다.”
“벌써 그리되었느냐?.”
“예, 시간 참 빠르지요. 석 달이라. 이만하면 되었지요.”
놀 만큼 놀고, 쉴 만큼 쉬었지요. 저 같은 늙은이도 좀이 쑤시는데, 젊고 창창하신 태감께선 오죽이나 갑갑하셨겠지요.
탁하고 흐려진 노인의 눈으로 태감을 바라보며, 소년은 그의 등을 떠밀었다.
“고생도 젊음의 특권 아니겠습니까. 아직 젊으실 때 실컷 누려두십시오.”
“혼자 누리기엔 아까운 특권이라, 조금 나누고 싶구나.”
“전 젊은 시절에 실컷 누렸습니다. 다른 사람 알아보십시오.”
“원래 일도 해본 사람이 더 잘하는 법이니, 고생도 해본 사람이 더 잘하지 않겠느냐?”
그 오묘한 논리에 말문이 막힌 소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태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태감은 천연덕스러운 웃음을 보여줄 뿐이었다. 참으로 정치가 다운 뻔뻔한 낯짝에 빈정이 상한 소년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냥 솔직하게 말씀하시지요. 이 늙은이가 필요하니 좀 도와달라고.”
“부탁하면 들어주겠느냐?”
“조건 들어보고 생각해 보지요. 아시다시피 좀 비싼 몸이라서.”
아직 뒷방 늙은이 노릇 하기엔 이른 모양이구만.
퉁명스럽게 쏘아붙이면서도 소년의 입꼬리는 위로 올라가 있었다.
* * *
새벽까지 이어진 몸값 협상에 지친 둘은 휘적거리며 안가에 마련된 주방을 찾아들었다.
협상이 아직 타결되지 않았기에 태감을 대하는 소년의 태도는 냉랭했다.
“거추장스럽게 서 있지 말고 저쪽에 앉아계십쇼.”
“흑흑, 이렇게 야멸찰 수가. 그간 우리가 쌓아온 신뢰와 우정은 다 어디 간 것이냐.”
“아직 모르셨나 본데, 지금이라도 알아두십쇼. 신뢰와 우정은 돈에서 나오는 겁니다.”
근로계약서 쓰면 그때부터 대접해 드리지요.
소년의 냉혹함에 우는 시늉을 하며 화로 앞에 앉은 태감은 서운하다는 표정으로 소년에게 물었다.
“아니, 제국에서 두 번째로 부유한 숙친왕 전하께서 이 가난한 동창 제독의 쌈짓돈까지 털어가야만 직성이 풀리시겠나?”
“왕이라 하여 무료봉사해야 할 의무는 없지요.”
“참, 왕부 살림이 빠듯할 일은 없겠군. 숙친왕 전하께서 이리도 건전한 경제관념을 가지신 걸 보면.”
“왕부의 예산이야 다 나랏돈 아닙니까. 제가 한 푼 보태면 그만큼 백성들의 부담이 줄지 않겠습니까?”
동창에서 나올 네 월급도 나랏돈인데.
구시렁거리는 태감을 무시한 채 소년은 아궁이에 솥을 걸고는 쌀독에서 쌀을 퍼 올렸다.
쏟아지는 쌀 알갱이를 본 태감은 쌀알이 유독 작다는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찹쌀인가?”
“예, 찹쌀입니다.”
“식감이 차지고 맛은 달고 부드러우며 소화를 돕는 효능이 있어 위가 약한 이들에게 좋지. 하지만 아침 식사로 먹는 찹쌀이라. 죽을 끓일 것이냐? 아니면 찰밥을 지을 것이냐?”
“닭 육수에 푹 퍼지도록 끓여 먹으면 맛이 좋지요. 하지만 오늘은 좋은 연잎이 들어와 닭고기를 넣고 찰밥을 지을 생각입니다.”
“닭고기를 넣고 연잎으로 감싸 지은 찰밥이라. 나미계(糯米鷄)로구나.”
사례 태감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시절. 일에 쫓겨 허덕일 때 주린 배를 채워주었던 간식의 이름을 곱씹어본 태감은 묘한 그리움을 느끼며 말했다.
“후궁에 있을 때는 자주 먹었지.”
“예, 태감께서 일하실 때면 자주 나미계며 하포반 같은 찰밥을 간식으로 만들었지요.”
상다리 부러지게 점심을 차려드려도 뒤돌아서면 배고프다 하시니.
태감과 함께 추억을 공유하면서도 소년은 바쁘게 찰밥에 채워 넣을 재료를 손질했다.
뼈를 발라낸 닭고기. 갓이 두툼한 표고버섯.
호기심이 들었지만, 태감은 아랫입술을 깨물고는 도마에서 시선을 돌렸다.
나미계와 같은 싸서 먹는 음식들은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지를 기대하며 껍질을 벗기는 것 자체가 기쁨 아니었던가.
잠시 후면 찾아올 행복을 상상하며 태감은 눈을 감았다.
하지만 태감은 곧 낭패감을 느꼈다.
시각을 포기했기에 더욱 날카로워진 코와 귀가 열성적으로 도마 위의 상황을 중계했기 때문이었다.
기름에 지지는 소리. 주걱이 솥 바닥을 긁는 소리. 풍로가 아궁이에 바람을 불어넣는 소리. 귓속을 파고드는 온갖 소리와.
닭고기기가 기름에 익는 그 고소한 향기. 솥 테두리를 타고 미끄러진 간장이 졸아드는 그 강렬한 짭조름함. 그리고 부드럽게 하기 위해 더운 김을 쐰 연잎의 은은한 향기.
코를 간지럽히는 자극적인 향기는 태감의 인내력을 시험하듯 춤을 추고 노래하며 그의 감각기관을 농락했다.
아아, 과연 어떤 재료로 속을 채웠을까.
닭고기와 표고버섯, 그리고. 밤처럼 고소하고 푸근한 연밥이 들어 있을까.
짭짤하고 매콤한 향장이나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새우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꿀을 발라 화덕에 구워낸 돼지고기나 소금에 절여 말린 죽순이 들어 있을지도.
도마 위에서 간헐적으로 칼질하는 소리가 울릴 때마다 태감은 몸을 떨었다.
기름방울 튀어 오르는 소리도 줄어들고 두툼한 칼날이 도마를 두드리던 소리도 마침내 멎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을 때 태감은 기다리던 때가 왔음을 깨달았다.
연잎을 싸는 소리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연잎을 싸 찜통으로 가져간 다음에는-
“태감님, 눈뜨시지요.”
나미계 다 됐습니다.
소년의 말에 눈을 부릅뜬 태감은 충혈된 눈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접시를 노려보았다.
정중하게 노끈으로 묶어둔 정사각형의 연잎 뭉치.
더운 숨을 토해낸 태감이 소년을 바라보았다.
“잘 먹으마.”
눈을 질끈 감은 채 땀을 뻘뻘 흘리던 태감의 꼴이 퍽 우스웠는지 소년의 목소리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태감은 자신이 겪었던 영원과도 같은 갈증을 소년에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그런 무의미한 일에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곱게 포장된 나미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손끝이 데지 않도록 주의하며 태감은 세심한 동작으로 연잎을 벗겨냈다.
먹음직스러운 향기가 담뿍 농축된 수증기가 확 피어오르고, 그 속으로 튼실한 속 재료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태감의 기대대로였다.
굵직하게 썬 닭고기. 두툼한 표고버섯. 윤기가 흐르는 연밥. 그리고.
태감은 속 재료 한가운데에 파묻혀 있는 것을 보고는 탄성을 질렀다.
“노른자로구나. 달걀이라 하기엔 너무 크고, 오리알인가?”
“예. 소금에 절인 오리알 노른자를 속에 넣었습니다.”
태감은 조심스럽게 젓가락을 놀려 노른자 주변의 재료들을 걷어냈다.
닭고기와 표고버섯에 파묻혀 있던 오리알 노른자는 우아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퍽퍽하게 익은 탁한 노란색이 아니었다. 쫀득하면서도 혀 위에서 살살 녹을 것만 같은, 반숙으로 익은 노른자의 농밀한 황금색은 지평선에서 막 떠오른 태양과도 같았다.
마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카만 심해에서 진주를 찾아낸 것처럼.
태감은 가슴 깊은 곳에서 벅차오르는 희열과 함께 희망이 샘솟는 것을 느꼈다.
마치 내일은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낙관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불안에 질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이의 등을 떠밀어주는 막연한 행복.
동창 제독이라는 부담에 짓눌려 있던 고개를 들어 올려, 태감은 소년과 눈을 마주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신소리 말고, 드시기나 하십쇼. 식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