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관의 요리사-235화 (236/314)

환관의 요리사 235화 외전 29화

“적당히 어루만지기만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멍석에 둘둘 말아온 길쭉한 선물을 받아든 태감의 첫마디는 맥빠지는 것이었다.

포장해 온 선물을 끌러 펼쳐 보인 소년은 측은함과 연민에 젖은 태감의 얼굴을 보고는 입술을 비죽였다.

“이 정도면 적당히, 사정 봐줘서 어루만져 준 거지요. 숨이 붙어 있지 않습니까.”

일단 숨은 붙어 있고, 말할 혀도 멀쩡하고, 혹시나 해 오른팔도 부러뜨리지 않고 놔뒀으니, 이만하면 됐지요?

이 이상 뭘 바라냐는 듯한 소년의 대답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돌아본 태감은 실소를 흘렸다.

“만약 이 친구가 왼손잡이였다면?”

“아, 그 경우를 생각 못 했군요.”

아직 젊은 친구이니 오른손으로 쓰는 법도 금방 익힐 겁니다. 원래 젊을 때는 뭐든지 금방 배우지 않습니까?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의 소년을 보며 태감은 말꼬리를 잡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뭐, 도주의 위험을 차단하기 위해 정강이뼈를 부러뜨린 건 그렇다 치고, 빗장뼈는 왜 부러뜨렸느냐?”

“아, 모르십니까? 사람은 빗장뼈가 부러지면 어깨를 못 움직입니다. 어깨 근육이 붙은 부위라서. 그리고 부러뜨리기도 쉽지요.”

“호오, 인체 구조에 대해 아주 해박하구나?”

“뭐, 젊은 시절 공부할 기회가 좀 많았지요.”

소싯적엔 좀. 질 나쁜 친구들과 어울릴 일이 많아서.

말끝을 흐린 소년은 요란하게 헛기침을 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태감은 흥미진진했을 소년의 무용담에 퍽 호기심을 느꼈지만, 그것을 듣는 것은 훗날의 즐거움으로 미루기로 했다.

유쾌하게 웃고 떠들며 과거를 추억하기엔 쌓인 일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태감은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 중 선결되어야 할 것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을 굽어보는 태감의 시선에 흠칫 놀란 반양은 사시나무 떨듯 떨면서도 입술을 깨물었다.

마치 목을 내놓을지언정 비밀을 누설할 수는 없다고 주장하는 듯한 그 기개 있는 태도에 감탄한 태감이 소년에게 말했다.

“이 친구 제법 입이 무거워 보이는구나. 열려면 보통 일이 아니겠는걸.”

“뭐, 사람 입 여는 거야 저희 전문이지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창의 기술자들에게 극진히 접대를 받으면 감격해서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음산하게 키득거리던 소년은 쪼그려 앉아 반양과 눈을 마주쳤다.

검버섯 핀 추레한 거죽을 벗어던진 소년의 외모는 사람 애간장을 끓게 할 만큼 사랑스러웠지만, 그를 올려다보는 반양의 눈에선 조금 전 흉물스러운 노인으로 분장했던 모습보다 지금이 더 끔찍하고 추악하게만 보였다.

마치 인두겁을 뒤집어쓴 괴물과도 같이, 닳고 닳은 노인의 눈을 가진 사내아이는 담백한 어조로 소름 끼치는 말들을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만, 사정상 곱게 돌려 보내주기는 어려울 것 같으이, 젊은 친구.”

참 안타까운 일이지, 사람은 왜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를 가지고 태어나서, 이렇게 일을 번거롭게 하는지.

거기에 좀 없다고 해도 죽는 것도 아니지. 자네 사람이 얼마나 튼튼한지 아나?

음습한 말들을 중얼거리며 소년은 검지 끝으로 반양을 톡톡 건드렸다.

손톱, 손가락, 손목. 점점 위로 올라가서는 코를 짚고, 귀를 건드리고, 마지막으로 눈을 가리킨다.

“말할 땐 혀만 있으면 되지. 그렇지?”

다른 건 전부 쓸모가 없단 말이야.

하지만.

마지막 순간 여지를 남기는 소년의 말에 반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소년은 그 작은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가늘게 휜 미소를 입에건 소년은 오직 그에게만 특별히 기회를 준다는 것처럼 달콤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고분고분 말을 잘 들어주면, 사정을 좀 봐줄 수도 있지.”

“자백하란 말입니까?”

“뭐든 최초가 중요한 거야. 자백도, 배신도. 두 번째는 안 되지. 특별한 건 최초의 한 명뿐이거든.”

그래야 우리도 자넬 용서할 명분이 서지 않겠나.

가장 먼저 자신의 죄를 반성하고 자수한 사람. 그 정도 특별함은 있어야 존귀하신 황제 폐하께서 그대를 굽어살피시겠지.

다시 말하지만, 기회는 최초의 한 명뿐이야.

반양은 홀린 듯 소년의 말을 곱씹었다.

“기회는, 최초의.”

“한 명. 처음으로 잡힌 자네뿐이지. 하지만 두 명째부터는 용서도 참작도 없어. 자네도 동창의 이름 정도는 들어 보았겠지?”

소년의 나긋나긋한 말이 귓바퀴에 맴돌 때마다 반양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몸서리쳤다.

그것은 단순히 동창의 이름값에 담겨 있는 짙은 피비린내에 대한 공포 때문은 아니었다.

동창의 악명을 구성하는 무수한 소문. 그중 가장 끔찍한 것. 그것을 깨달은 소년은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동창은, 죄인에게만 손을 뻗지 않지.”

자네. 가족이 있었군.

소년의 말이 떨어지자 반양은 단말마와 같은 신음을 토해냈다.

마치 폐부의 공기를 쥐어 짜낸 듯한, 심장을 틀어쥔 듯한 억눌린 비명.

그의 공포를 이해한 소년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꾸며내어 얼굴에 걸었다.

“가족이 있는 사람이 이렇게 험한 일에 몸담으면 쓰나.”

아니, 오히려 가족이 있기에 험한 일에 몸담을 수밖에 없었던 건가.

혀를 찬 소년은 뼈마디가 부러져 움직이지 못하는 그의 옆에 주저앉았다.

부양할 가족. 병든 노모, 참새 떼처럼 자신만 바라보는 동생들.

가장 노릇 하기 팍팍했을 테지.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 누가 있을까.

하지만.

“이번이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 누가 알겠나. 과거를 청산하고 떳떳한 몸으로 사랑하는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

사정이 있다 하여 모두가 죄를 범하는 것은 아니다. 죄를 저질렀다면 그에 합당한 대가 또한 있어야겠지.

서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면서도 소년은 부드럽고 다정한 어조로 희망적인 미래를 이야기했다.

빗장뼈가 부러져 고개를 들어 올릴 수 없었던 반양은 소년의 눈을 볼 수 없었다.

잠시 후, 이야기를 끝마친 소년은 바지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시간을 줄 테니, 곰곰이 생각해 보게.”

‘부디 현명한 선택 기대하지’, 혹은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해 보게’와 같은 마지막 한마디를 소년은 남기지 않았다.

그저 건조한 제안을 남긴 채 소년은 태감과 함께 방을 나섰고, 어둠 속에서 반양은 홀로 남았다.

그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과연 속으로 지난날을 후회하고 있을지 소년은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원래 늘씬하게 주물러주려고 했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군요.”

“은퇴하고 나서 혀가 무뎌지진 않았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더 날카로워진 것 같더구나.”

“연륜이 어디 가겠습니까.”

태감은 잠시 지친 늙은이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둘은 의식적으로 반양의 처우에 관한, 그리고 동창에 관한 일을 거론하지 않으려 하며 시시콜콜한 한담을 나누었다.

비록 동정호만은 못하지만, 물안개 낀 예봉의 호수도 풍광이 그럴듯하다느니, 예봉의 호수에선 비늘 달린 생선보다 비늘 없는 장어 같은 생선이 더 맛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하지만 그 한가로운 잡담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태감님.”

피로에 찌든 늙은이가 동창의 제독에게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잠시 말을 멈춘 태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였다.

“그 친구는 어쩌실 겁니까.”

“자백한다면? 자백하지 않는다면? 어떤 경우를 묻는 것이냐.”

“자백하지 않는다면 그야 주리를 틀어 곡소리를 짜내야 하겠지요. 하지만 순순히 자백한다면.”

“네 약속은 지킬 수 없을 것 같구나.”

소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흐릿한 웃음을 지었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태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순순히 자백한다면, 그 점은 참작하여 형을 집행하라 일러두마.”

소년은 반문하지 않았다.

소년은 다섯 걸음을 더 걸어가 멈추었고, 조금 늦게 태감 또한 그의 뒤에 멈춰 섰다.

소년은 등 뒤에서 조용히 기다리는 태감을 돌아보고는 쓰디쓴 숨을 내쉬었다.

“결국, 경사에서 매듭짓지 못한 일이, 이렇게 돌아오는군요.”

“그렇구나. 이부상서와 매듭짓지 못한 일이, 이렇게 다시 얽히게 될 줄이야.”

“참 지긋지긋한 인연입니다그려.”

“폐하의 정적이니, 평생 얽힐 수밖에 없는 인연이지. 아마 그쪽도 우리만큼이나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게다.”

진저리를 내며 이부상서에 대한 지저분한 욕설을 내뱉으려던 소년은 황급히 입을 다물어야 했다.

복도의 끝자락에서 장소와 이삼의 얼굴과 함께 칼을 비껴찬 단혜림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소년은 어색한 표정으로 태감을 올려다보았다.

“태감님, 못들은 걸로 해주십쇼.”

“글쎄다. 배가 출출해서 그런지 자꾸만 입도 가벼워지는 것 같은데, 큰일이구나.”

“하여간 물에 빠져도 주둥이만 동동 뜰 인간 같으니.”

밉살스럽다는 듯 이를 갈던 소년은 지척까지 다가온 단혜림을 보며 다급히 태감의 제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 * *

늦은 밤에 먹기엔 조금 과하게 기름지고 무겁기는 하지만, 아이들과의 약속, 그리고 태감과의 밀약을 지키기 위해 소년은 야식으로 탕수육과 짬짜면을 올린다는 과감한 결정을 내리고야 말았다.

“허어, 짬짜면이라? 참으로 비합리적인 음식이로구나. 두 그릇 중 어느 것 하나를 고를 수 없다면 둘 다 시켜 먹으면 될 것을, 굳이 한 그릇 분량의 면을 나눠 요리사의 수고를 늘릴 필요가 있느냐?”

“세상 모든 사람이 태감님 같았다면 요식업계 관계자들에게 더없는 홍복이겠지만, 애석하게도 보통 사람들은 태감님과 같은 축복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태감을 보며 코웃음 친 소년은 기름 솥에 불을 올리고는 볕이 들지 않는 서늘한 곳에 두었던 항아리를 가져와 도마 위에 올렸다.

항아리 안에는 한입 크기로 토막 친 돼지갈비가 그득하게 차 있었다.

“허어, 갈비로구나.”

“발라먹기는 좀 불편해도, 맛은 으뜸이지요.”

“그래, 등심이나 안심이 아무리 맛있다 한들 뼈의 진한 맛이 배어 나온 갈비에 비할까.”

네가 전에 해줬던 그 탕수육도 돼지갈비로 만든 것이었지?

태감의 말에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계셨습니까?”

“그걸 어찌 잊겠느냐. 아직도 혀끝에 그 맛이 선명하거늘. 흑초의 그윽한 풍미, 매자나무 열매의 아릿한 신맛. 그리고 그 새카만 소금에서 우러나온 원초적인 대지의 향기. 그 소금의 이름이 분명 칼라 나마크(Kala Namak)라 했었지?”

소년은 감격스럽다는 표정으로 태감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어린 감격은 이내 진한 아쉬움으로 변해 입가에 번졌다.

씁쓸한 웃음을 머금은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언제 또 한 번 해드리곤 싶은데, 재료 수급이 안 돼서…….”

“역시, 황궁에 있을 때가 좋았지?”

“그땐 좋았지요. 손만 뻗으면 세상 모든 재료가 다 손에 잡혔으니. 뭐, 지금 처지가 딱히 궁하다는 건 아닙니다만.”

역시 윗자리에 올라앉으니 옛날처럼 나랏돈 펑펑 쓰기가 민망하더군요.

소년은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단지에 재워둔 고기를 꺼내 전분 반죽을 입혔다.

“그래도 이번 당초도 저번 것에 못지않을 겁니다.”

“확실히, 향기가 아주 달구나. 상큼하면서도 부드럽고, 은근하게 코끝을 간질이는 것이, 진피인가?”

태감은 솥에서 부르르 끓어오르는 당초를 향해 코를 벌름거렸다.

코끝에 졸아붙는 달착지근한 단내 속에 은은하게 배어든 향기로운 귤 향기. 오래 묵은 진피를 사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여기에 바싹하게 튀겨진 돼지갈비를 찍어 먹는다면 입안에 산뜻한 귤 향이 가득 차오를 테지.

황홀경에 빠진 태감을 보며 소년은 작은 숟가락으로 당초를 떠올렸다.

“진정 그것뿐입니까?”

“글쎄, 직접 혀로 느껴 보기 전까지는 모르겠구나.”

“그럼 한번 시험해 보시지요.”

태감은 소년의 도전을 회피하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새벽의 나른함에 취해 둔해진 혀를 일깨운 다음, 태감은 혀를 데지 않도록 세심하게 숨을 불어 식힌 당초를 입에 넣었다.

가장 먼저 혀 위에서 만개한 것은 무르익은 과실의 풍성한 향기였다.

가장 질 좋은 귤껍질만을 채취해 햇볕에 말리고 소금에 절여 숙성시킨 최상품의 진피.

나무에 열려 있던 시절에서 그대로 멈춰 선 것만 같은, 입안을 가득 적시는 신선한 상큼함.

선명한 주황색으로 익은 귤을 한가득 입에 담은 듯한 풍미.

하지만 그 짙은 향기의 끝자락에서 연상되는 것은 과즙이 뚝뚝 떨어지는 새콤달콤한 귤이 아닌 흰 꽃 한 송이었다.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태감은 자신의 혀끝에 녹아든 잔향을 곱씹었다.

경사에선 보기 드문 꽃이었다.

오월쯤에 막 꽃송이가 벌어지는, 다섯 장의 꽃잎과 노란 꽃술을 가진, 흐드러지게 피면 멀리서도 그 향기에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게 되는.

상념에서 벗어난 태감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귤꿀이구나. 귤꽃에서 딴 꿀로 당초에 향을 더했어.”

“허, 이것까지 알아맞히실 줄은 몰랐는데. 역시 대단하십니다.”

진피와 함께 써서 알아채지 못할 줄 알았는데.

태감의 예리함에 혀를 내두른 소년은 이내 씨익 웃고는 태감이 감탄한 당초 위로 바삭바삭하게 튀겨진 갈비들을 쏟아 넣어 재빨리 볶아낸 다음 그릇에 쌓아 올렸다.

거의 쟁반만 한 접시에 산더미처럼 쌓인 탕수육의 산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복욕과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킨 만큼 장엄함 그 자체였다.

“자, 먼저 드시고 계십시오. 사람들 불러올 테니.”

“아니, 나 혼자 먹을 것 아니었느냐? 일 인분인 줄 알았는데.”

“그러니 먼저 들고 계시라 한 겁니다.”

소년의 담담한 대답에 태감은 진심이냐는 표정으로 소년을 돌아보았다.

불신에 찬 태감을 보며 실소를 흘린 소년은 식기 전에 먹으라며 태감을 재촉했다.

“앞으로 뒤처리하시느라 한동안 밤잠도 못 주무실 텐데, 든든히 드셔두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