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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관의 요리사-234화 (235/314)

환관의 요리사 234화 외전 28화

마셔야 할 술은 너무나도 많았다.

코밑에 대면 꽃다발을 끌어안은 듯 향기롭고, 혀 위에선 꿀처럼 달콤하며, 목으로 넘길 땐 끓인 쇳물을 들이킨 것처럼 뜨거운.

다가올 내일 아침의 영원한 숙적이며 떠나가는 오늘 밤의 영원한 친구인, 술은 끝도 없이 제공되었다.

그리고 돼지들은. 정확한 표현으로는 소년이 초청한 마을 예봉의 유지들은 오늘 밤을 위하여 기꺼운 마음으로 내일 아침을 담보로 내어주었다.

술은 넘치도록 있었고, 안주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려져 있었으며, 상에 둘러앉은 이들은 모두 같은 마을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었다.

연회장으로 돌아온 소년은 술에 절어 드러누운 돼지들을 보며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그 실소와 함께 그들의 추태를 비웃지는 못했다. 아직 보는 눈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회석의 말석. 자신을 반양이라 소개했던 도사는 홀로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자작 중이신가.”

“오셨습니까. 대인.”

“흘흘, 이 늙은이가 너무 늦었구려.”

도사께서 홀로 자작하고 계신 줄도 모르고.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은 소년은 상에서 병을 하나 골라 도사에게 내밀었다.

잠시 소년을 바라보던 도사가 공손히 잔을 받쳐 들었다.

잔을 가득 채우는 것은 맑은 액체였다. 무색무취. 그리고 무미한.

술기운에 달아오른 목을 식혀주는 청량함을 가진 것.

잔에서 입을 뗀 도사는 의아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대인?”

“젊음이 좋다고 말술을 마시면 쓰나. 한숨 쉬어갈 줄도 알아야지.”

소년이 도사의 잔에 따른 것은 술이 아닌 차가운 한잔의 물이었다.

가만히 잔을 바라보던 도사는 시원한 동작으로 잔을 비우고는 고개를 숙였다.

“마침 찬물 한 모금이 간절하던 참이었습니다. 대인,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내 괜히 오지랖을 부렸던 것 같구려. 도사께선 아직 술이 부족하신 것 같으이.”

“아닙니다. 대인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분에 넘치는 대접이라. 진정 그러한가?”

난 오히려 제대로 대접을 하지 못한 것만 같아 마음이 편치 않네.

소년의 어조는 사근사근했고, 부드러웠으며. 유혹적이었다.

소년의 말을 경청하던 도사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내뱉어야 할 말들은 많았다. 충분한 도덕성과 예의를 함양한 어른으로서 당연히 말해야 할 겸양의 표현들.

그런 말들은 혀끝에서 응어리졌지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는 않았다.

겸손의 미덕을 발휘할 만한 자리가 아니었음을 도사는 알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소년의 의견을 수용할 용의가 있음을 피력했다.

소년은 입가에 가늘게 휜 미소를 걸고는 제안을 꺼냈다.

“마침 아껴놓은 술이 있네만.”

자리를 좀 옮기지 않겠나.

제안과 함께 소년은 바닥에 널브러진 이들을 슬쩍 바라보았다.

소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린 도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은 취객들의 거나한 코골이와 잠꼬대를 피해 자리를 벗어났다.

늦은 밤이었으나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에 오들오들 떨어야 하는 혹한의 밤은 아니었다.

계절은 초여름으로 넘어가려 문고리를 쥔 늦봄이었고 기온은 온화했다.

야외에서 술잔을 나누기에 좋은 날이었다.

중천에 뜬 달을 벗 삼아 별밤을 잔에 담아 마시면 퍽 운치가 있으리라.

하지만 소년이 젊은 도사를 안내한 곳은 저택 외각에 마련된 별채의 응접실이었다.

“술을 마신다면 정원의 정자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걸세. 차오른 달 아래서 다디단 술 한잔. 이만한 풍류가 또 어디 있겠나.”

굳이 좁고, 답답하고, 꽉 막힌 응접실을 선택할 이유는 무엇이겠나?

소년은 짓궂은 농담을 던지듯 느물거리는 태도로 도사에게 질문했다.

도사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탁 트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광대한 밤하늘에 펼쳐진 별의 융단을 올려다볼 수 있다는 장점 외에 야외는 아주 사소한 단점이 있지요.”

바로 기밀성이 부족하다는 것.

그리고 대인께서 굳이 단 한 가지 장점을 제외하면 단점투성이인 이 응접실을 선택하신 것은, 그 한 가지 장점이 필요하기 때문이겠지요.

도사의 대답에 소년은 전도유망한 젊은이를 시험하는 노인의 태도로 되물었다.

“그래. 이곳이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남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굳이 이 장소를 골라 자네를 초청한 이유는 무엇이겠나?”

“그 전에, 먼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도사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소년에게 물었다.

“이미, 알고 오신 것이지요?”

젊은 도사의 목소리에는 불안감에 젖은 확신이 배어 있었다.

잠시 말을 멈춘 소년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는 확답해 주었다.

“그렇네.”

신부 보내기라. 참 고약한 이야기야. 그렇지 않은가?

담백한 어조로 긍정하는 소년을 바라보는 도사의 눈은 실핏줄이 솟아 있었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침묵하던 도사는 고개를 떨구고는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도대체.”

“‘어떻게’라고 묻겠나. 아니면 ‘왜’라고 묻겠나.”

원하는 대답을 해주겠다며 제시된 선택지.

혼란과 불안에 차 있던 도사는 아직 확신할 수 없다는 듯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것을 알게 되신 겁니까.”

“왜일 것 같나?”

젊은 도사는 화가 와락 치밀어 오른 듯 소년을 노려보았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은 아무리 호의적으로 해석해 보아도 조롱 이상의 의미가 있을 리 없었고, 그것은 아직 세월의 때가 덜 묻은 젊은이가 참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 풋풋한 혈기를 얼굴에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도사는 턱 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분기를 억누른 채 골몰하기 시작했다.

소년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한 채 고개 숙인 도사를 바라보았다.

‘침착하군. 조금만 건드려주면 왈칵 덤벼들 줄 알았는데.’

젊은 도사의 놀라운 자제력에 감탄한 소년은 방식을 달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말귀를 알아먹는 상대였다. 굳이 충동질하여 격한 반응을 끌어내지 않아도, 충분히 그럴싸한 답을 얻어낼 수 있는.

간교한 미소가 떠오른 입가를 손으로 가린 채 소년은 젊은 도사가 답을 얻을 수 있도록 화두를 던져주었다.

“생각해 보게. 다 늙어빠져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상인이, 이제 와 작은 마을에서 남모르게 일어나는 인신매매 사건에 연루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일 것 같나.”

그 부도덕함을 꾸짖고 싶어서일 것 같나?

인륜에 어긋난 그 추악한 죄를 도저히 보고 넘길 수가 없어서, 존엄한 인간의 권리를 짓밟아 훼손하고 이득을 취하는 그대들을 용서할 수가 없기에.

자네는 진정 그리 생각하나?

말을 끝마친 소년은 작게 키득거리고는 젊은 도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언성을 높이지도, 표정을 일그러뜨리지도 않는 부드러운 재촉이었으나 젊은 도사는 목이 졸린 사람인 양 창백한 얼굴로 진땀을 흘렸다.

사람을 의심하는 눈이었다. 호의를 믿지 못하는, 대가 없는 선의보다 악의에 찬 보복에 더 익숙한.

떳떳하지 못한 업종에 몸담은 이들의 눈.

섣불리 발을 내딛지 못하는 젊은 도사, 반양을 향해 소년은 내민 손으로 작은 신호를 보냈다.

간단한 동작이었다. 검지와 엄지를 붙여 원을 만드는,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그 손동작.

그것이 뜻하는 의미는 너무나 명백했기에 반양은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돈이로군요.”

“다릿심이 빠져 지팡이 없인 걷지도 못하고, 이빨이 빠져 죽만 겨우 넘길지라도. 상인은 죽을 때까지 상인 아니겠나.”

“그렇다면 대인께서는, 저희와 손을 잡고 싶으신 겁니까?”

“손을 잡는다. 너무 거창한 표현이군.”

그냥, 한 다리 얹고 싶다 이 말일세.

소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고, 뒤를 이어 반양 또한 웃었다.

도사로서의 품격과 체면 따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경박한 웃음이었다.

* * *

“누구 생각인지는 몰라도, 참 고약한 생각을 했군.”

반양의 설명을 들은 소년은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사다난했던 세월을 보내며 무뎌진 노인의 심장으로도 쉬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야기였다.

소년에게 말하던 반양 또한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보다 더 짭짤한 일도 드물지요.”

“그렇겠지. 사람을 파는 장사 아닌가. 비단이 그에 비할까, 향료가 그에 비할까.”

사람장사. 그 입에 담기도 참혹한 범죄를 곱씹으면서도 소년은 일말의 안도감을 느꼈다.

인신공양이 아닌 인신매매라면, 그것은 동창의 일이 아닌 관군의 일이었다.

동창의 일이 아니라면, 굳이 죄 없는 이들의 피를 볼 일도 없을 것이다.

‘핏값은 돼지 놈들에게서 받는 거로 충분해.’

근수 넉넉해 보이는 놈들이니, 쥐어짜면 피와 기름이 얼마나 많이 나올까.

연회장이 있을 방향을 바라보며 눈을 희번덕거리던 소년은 눈앞에 아직 반양이 있음을 깨닫고는 표정을 풀었다.

그에게는 아직 들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보다 남는 장사도 찾기 힘들겠군.”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적은 투자비용으로 큰 수익을 올릴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요.”

“세상에 위험 없는 투자가 어디 있겠나.”

피식 웃음 지은 소년은 상 아래에 내려두었던 술병을 들어 올렸다.

검은색 호리병에 붉은 글씨로 적인 상산 봉밀주라는 글귀.

그것을 알아본 반양이 반색하며 물었다.

“아니, 상산의 봉밀주가 아닙니까.”

“사업 이야기에 술이 빠져서야 쓰나. 아, 혹시 부담스러우면 말하게. 차도 있으니.”

자네도 적지 않게 마시지 않았나. 무리할 것 없네.

소년의 배려에 반양은 화들짝 놀라 손사래 쳤다. 그러고는 다급한 동작으로 목에 걸어두었던 작은 목걸이를 꺼내 소년에게 보여주었다.

은은한 녹색이 도는 진주알이 박힌 목걸이. 후궁에서 환관 노릇을 한 소년에게는 익숙한 물건이었다.

“피독주 아닌가. 이 친구,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 사람 간이 아무리 튼튼해도 그 많은 술을 비우고 멀쩡할 수가 없는데.”

몸에 지니면 백독이 침범치 못하고 입에 물면 천독을 해독한다는 기물.

피독주를 지니고 있으니 술을 물처럼 들이킬 수 있었던 게로군. 취하지도 않는 술을 들이켜느라 고생 많았네.

소년의 말에 반양은 기대감을 한껏 드러낸 얼굴로 잔을 받았다.

“다른 술이라면 몰라도, 상산의 봉밀주만큼은 그냥 지나칠 수 없지요.”

“아무렴, 취하지 않는 술이 어디 술인가. 그냥 들척지근하고 쌉쌀한 물일 뿐이지. 마음껏 들게.”

비로소 반양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의 표정에 긴장과 의심이 사그라들고 그 빈자리에 안도감이 차올랐을 때쯤, 소년은 은근한 어조로 그가 설명했던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곡우제 같은 행사가 있을 때마다 처녀들을 제물로 바치는 척 빼돌려 노예로 판단 말이지. 허 참, 순박한 이들은 금룡께서 노하신다니 숨죽일 테고, 알 만한 이들은 돈으로 입을 막아 끌어들인다. 참 멋들어지게 짠 계획이군. 자네 같은 이들이 한둘이 아닐 테지?”

“저도 명령받은 대로 움직일 뿐이라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그렇겠지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면서도 소년은 침음을 삼켰다.

현장에서 일하는 이가 윗선의 사정을 자세히 모른다는 것은 그 조직이 점조직 형태로 운영된다는 뜻이었다.

만약 필요하다면 언제든 꼬리를 자를 수 있도록.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긁적인 소년은 눈이 살짝 풀리기 시작한 반양을 보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 만약 호수가 범람하면 어떻게 하나? 제물로 처녀를 내놓았는데도 호수가 범람하면 마을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을 텐데?”

“그럴 때는 제물이 부족해 금룡께서 노하셨다 하고 엄포를 놓고, 다음부턴 제물을 두 배로 내놓으라 하지요.”

“허허, 기가 막히는군.”

그 놀라운 상재에 감탄한 소년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몇 마디를 더 물었다.

거듭된 질문에 의아함을 느낄 법도 하건만 술기운이 오른 반양은 흔쾌히 답해주었다.

“그래서, 그렇게 제물로 받은 처녀들은 동정호로 보낸다.?”

“예. 약을 먹여 재운 다음 몰래 마차에 실어 보내지요.”

“목적지는 동정호에서 열리는 암시장이겠군? 처녀들은 그곳에서 거래되는 건가?”

“특출난 상품은 암시장의 경매에 넘겨지기도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대부분은 그대로 해외로 빼돌릴 겁니다.”

“허어, 그렇군. 대답해 주어서 고맙네.”

그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겠네만.

질문을 준비하며 소년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추레하게 늙은 노인네가 지팡이도 짚지 않고 일어나는 모습에 술잔을 기울이던 반양의 시선이 소년에게로 향했다.

“대인?”

“자네 혹시, 염사방주 금학이라고 아는가?”

“대인께서 경사 지부 전 지부장님을 어찌……. 케흑!”

반양은 말을 완성 시키지 못하고 숨을 토해내야 했다.

삭정이처럼 메마른 손이 그의 목을 틀어쥐었기 때문이었다.

마디가 굵어지고 뒤틀린, 소년의 신체 중 유일하게 분장이 필요 없었던 부위.

그 억센 손아귀가 목을 틀어쥐자 반양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대…… 대인?”

“양해하시게.”

자네 말을 신뢰하지 못하는 건 아니네만, 그래도 검증은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반양은 소년의 담담한 목소리에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말을 검증할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해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소년은 친절하게도 그 방법을 귀띔해 주었다.

“별건 아니고, 그냥 두 가지 대상을 두고 둘이 얼마나 유사한지 비교해 보는 것뿐이라네. 첫 번째는 술을 잔뜩 먹여 취한 상태로 들은 대답. 두 번째는.”

지지고 볶아서 강제로 쥐어 짜낸 대답.

상냥한 웃음으로 반양을 안심시키며 소년은 손을 들어 그의 빗장뼈에 얹었다.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시야 너머로 반양은 그의 짤막한 엄지손가락이 자신의 빗장뼈를 누르는 것을 보았다.

“우선은, 도망치지 못하도록 뼈를 조금 부러뜨릴 건데, 혀 깨물지 않게 조심하게나.”

잠시 후, 과자가 부스러지는 듯한 가벼운 울림과 함께 젊은 사내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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